연극도 아니다. 그렇다고 뮤지컬도 아니다. 무대 위에 이러저러한 소도구들이 보이고 연기자들이 손가락으로 연기를 시작하면 한 사람이 그걸 진지하게 ENG카메라로 찍고 나머지 사람들은 부지런히 다음 장면에 등장할 소도구들을 준비한다. 카메라에 찍힌 장면들은 무대 위에 있는 대형 스크린에 영화처럼, 뮤직비디오처럼 실시간 투사된다.  


지젤이라는 여자가 어느 기치역 벤치에 앉아 있다(그녀는 레고인형으로 표현된다). 우선 어렸을 적 13초 간 만났던 첫사랑의 남자부터 회상해 본다. 뒤이어 또 다른 남자 이야기도 있다. 이 이야기는 지젤이라는 여성이 평생 사랑하고 떠나보내고 잊어야 했던 다섯 명의 남자들을 찾아나서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 모든 이야기가 연기자의 얼굴과 몸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표현된다. 손가락은 마치 벗은 몸처럼 느껴지고 두 손가락이 엉킬 땐 매우 에로틱하기까지 하다. 손톱을 기른 손가락은 그대로 피겨스케이트 선수가 된다. 손가락이라는 기관이 얼마나 섬세한 존재인지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놀라운 건 손가락 연기만이 아니다. 카메라 웍도 장난이 아니다. ‘접사’라는 방식이 이렇게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는지 정말 몰랐다. 아주 작은 소도구들, 물 속에서 퍼지는 잉크, 책상 위의 비닐이나 모래 등이 접사를 통해 순식간에 거대한 회오리와 바다, 해변, 기억 속의 마을 등으로 변한다. 그리고 탁월한 음향효과는 물론 한 곡 한 곡 들을 때마다 감탄하게 만드는 끝내주는 선곡이 관객들의 눈과 귀를 황홀경에 빠트린다.  아울러 감독이 직접 듣고 낙점했다는 유지태의 사려 깊고 귀족적인 나레이션도 정말 멋지다.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식탁해서 시작된 이 ‘손가락 공연’은 친구들의 수 많은 아아디어와 공감각적인 장치들이 더해져 이젠 가는 곳마다 전 세계인들을 놀래키는 공연이 되었다. '키스 앤 크라이'라는 제목은 피겨 스케이팅 선수가 연기를 끝내고 심사위원들이 매긴 점수를 기다리는 공간을 뜻한다. 인생의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곳은 사랑과도 많이 닮은 것 같아서 이 작품 제목으로 정했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동물원]이라는 범상치 않은 소설집을 냈던 작가 토마 귄지그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토토의 천국]과 [제 8요일]의 자코 반 도마엘이 감독이다. 그의 부인은 안무 담당자. 아마 맨 처음 이 아이디어를 낸 사람일 것이다. 손가락으로 하는 장난 같은 공연인데 열 명이 넘는 어른들이 아주 진지하게 움직이는 모습들도 이상한 감동을 준다. 공연을 보면서 저 아이디어 중 어느 하나만 베껴서 CF에 써먹어도 대박일 것이다, 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직접 베끼면 안 되겠지만. 거기서 영감을 얻어 창조적으로 변형을 해야겠지만. 아, 안다 알아. 그냥 너무 멋진 장면이나 장치들이 많아서 하는 소리지. 최근에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라는 시집을 읽었다. 크리에이터들은 이 공연을 보고나면 정말 몇 주일은 안 먹어도 배가 부를 것이다. 아니, 배가 고파질 것이다. 아니, 목이 마를 것이다. 그러니 이 공연을 꼭 봐라. 아니, 보지 마라. 아니, 당신 마음대로 해라.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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