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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6.12 내 마음의 고향 - 그리운 진양서점 2
  2. 2012.05.04 지리산 일기 1 1
  3. 2012.05.03 제가 [지리산]을 집어든 까닭은

 

 

한 시간을 넘게 서가 앞에서 서성이던 앳띤 고교생은 결국 ‘엠마누엘부인 시리즈 특집’ 이란 기사가 실린 [월간 스크린]을 내밀며 ‘누나, 이것 좀 싸주세요’ 라고 은밀하게 말했다.
 
막 사춘기에 들어섰던 나는 소문만 무성하던 그 영화 '엠마누엘 부인'의 스틸 컷 몇 장이 실린 잡지 표지에 이미 정신이 혼미해져 있었던 것이다. 서점 주인 누나는 알았다는 듯 씽끗 웃으며 코팅 포장지와 스카치테이프로 정성껏 책을 싸주었다. 그게 재희 누나와의 두 번째 만남이었던 것 같다.
 

1982년 겨울, 그때 나는 고등학교 일학년이었다. 당시 내가 살던 시커먼 동네 구파발엔 서점이 딱 한 군데 있었는데 그게 바로 전철역 앞의 [진양서점]이었다. 기자촌 입구 쪽에 있는 헌책방 하나를 제외하면 도대체 책을 살 수 있는 곳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여기밖에 없었던 것이다.
 
누구나 마찬가지였겠지만 언제나 용돈이 풍족하지 못했던 나는 그 후로도 가끔 서점에 들러 한 시간이 넘도록 이 책 저 책을 집적거리다가 그냥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서너 번을 들러 야 겨우 소설책 한 권을 사는 게 고작이었는데, 어느 날 주인 누나가 한숨을 쉬며 차 한 잔을 타더니 난로가에 앉으라고 했다. 이젠 올 때마다 책을 안 사도 괜찮으니 언제든지 놀러 오라는 얘기였다.
 

누나의 이름은 재희였다. 서재희. 서른이 넘은 노처녀였으며 신춘문예 6수생. 그닥 예쁘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을 가진 선량하고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참새가 방앗간 들르듯 매일 서점에 가서 놀았다. 책 얘기를 많이 했고 광주사태, 김대중, 계훈제, 전두환, 장영자 사건 등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했다.
 
 

“언니, 용이 아제가 죽었어. 흑흑…”
 
당시에 박경리의 <토지>를 열심히 읽던 동네 누나가 책방 문을 열고 들어오며 애석해 하던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진양서점엔 나 말고도 단골손님이 많았다. 당연히 우리들은 쉽게 친구가 되었고 저녁이면 사랑방처럼 난로가에 둘러앉아 이런 저런 책 얘길 나누었다.
 
 
이외수의 <들개>, <훈장>, <장수하늘소>, 한수산의 <부초>, <해빙기의 아침>, 윤흥길의 <장마>,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 <내 마음의 풍차>, 김성동의 <만다라>, <기차길옆 오막살이>, 김홍신의 <난장판>, <인간시장>, 함석헌의 <씨알의 노래>, 황석영의 <객지>, <장길산>, <죽음을 넘어, 시대의 아픔을 넘어>, 김주영의 <객주>, <아들의 겨울>,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김지하의 <오적>, 최인훈의 <광장>, <회색인>, 이병주의 <지리산>, <행복어 사전>…
 
춘천 거지로 유명했던 이외수, 여자보다 더 여성적인 문체를 만들어내던 한수산, 술과 여자가 없으면 글을 쓰지 못한다던 이병주, 읽다 보면 정부 발표보다 훨씬 더 많은 광주 희생자의 숫자가 까발려짐으로써 당국의 미움을 샀던 황석영, 김지하와 박경리의 거룩한 관계 등 우리는 서로 앞다투어 읽은 책들과 그 주변에 얽힌 뒷얘기들을 나누었고 또 읽고 싶은 책들에 대해 듣고 말하고 감탄했다. 
 
당시에 한 문학월간지에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막 연재를 시작했었는데 경상도 억양이 심한 재희 누나는 이 소설에서 쏟아지듯 펼쳐지는 전라도 사투리들을 그렇게 재밌어 했다.

염상진의 아내 죽산댁이 주재소로 끌려가 빨치산인 남편에게서 연락이 오면 신고하란 말을 듣고 ‘고로코럼은 못하지라!’’ 라고 하는 대사를 억지로 흉내 내는 걸 보고 우리들은 박수를 치며 웃었다.
 
(난 염상구의 쫀득쫀득한 전라도 사투리들 - ‘서울말 고것이 워디 붕알 단 남자덜이 헐 말입디여? 밑구녕 째진 것덜이나 헐 말이제. 밥 먹었니이? 잘 잤니이? 고 간사시럽고 방정맞고 촐싹거리는 말이 워디가 좋다고 배우것습디여?’ - 이 단연 좋았다)
 
 
아직 이명박이 현대건설 사장이었고 정광태가 <독도는 우리땅>이란 노래를 부를 때였다. 어둡고 돈은 없었지만 또한 좋은 시절이었다. 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매일 술을 마시고 매일 담배를 피웠으며 연애를 했고 또 군대도 갔다. 이제는 그때 나를 가르치던 선생님들 보다 나이가 많아졌다. 그리고 책은 거의 인터넷으로 산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과 대학 초반을 진양서점과 함께 보냈다.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은 지금 다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재희 누나는 잘 있을까.
 
빠알갛게 달아오르던 연탄난로에 모여있던 사람들. 어제는 무슨 책을 읽었으며 이번엔 또 무슨 책을 읽을까 얘기하던 사람들. 이젠 가물가물해져 추억의 책갈피도 되지 못한다. 그래도 가끔은 그립다. 토토가 어린 시절의 극장을 다시 찾아갔던 것처럼 나도 꼭 한 번 다시 가보고 싶은 곳. 진양서점. (2008.7.17)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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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일기 1

독서일기 2012. 5. 4. 11:15

 

 

이 소설은 1933년 추석날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박경리의 [토지]가 1897년 추석날 시작하던 것과 비슷하지요? 첫 장면은 제사를 지낸 규와 태가 다음날 지리산에 있는 할아버지 산소에 다녀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삼십 리라고 했던 무덤까지의 거리는 그 두 배가 넘는 길이었다는 게 밝혀지죠. 그건 할머니의 양반이수’라는 뻥이었다고 같이 가던 중부가 알려줍니다. 양반이수란 양반들이 짐꾼들 삯을 떼어먹으려고 거리를 줄여 말하던 수작을 일컫는 말이었죠. 규와 태는 결국 지리산에 있는 할아버지 묘에 참배를 하고 나오다가 제사 지낼 때 펴놨던 병풍과 똑같은 풍경을 목격하고 할아버지가 수십 년 전에 화공을 앞세우고 거기까지 와서 그 풍경을 병풍에 그대로 담게 한 까닭을 궁금해 합니다.

 

그런데 규와 같이 산소에 갔던 중부는 몇 년 뒤 가출을 해버립니다. 독립운동 하느라 집안 다 말아먹고 허송세월을 하고 있는 중부를 보다 못한 백부가 마름 자리라도 해보라고 말한 게 화근이 된 겁니다. 행방이 묘연한 중부는 지리산에 있는 ‘서동지’라는 사람을 찾아간 게 아닌가 하는 아련한 소문만 남깁니다.

 

규는 공부도 잘 하고 마음가짐도 바른 청년으로 자랍니다. 그리고 박태영이라는 엄청난 천재와 친구가 됩니다. 고리끼의 소설을 탐독했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불려간 사건을 계기로 박태영과 더 친해진 규는 돈 많은 지식인이자 자신을 ‘딜렛탕트’라고 자조하는 인물 하영근을 만나게 되고 그를 통해 중국의 노신이라는 작가에 대해서도 알게 되죠. 그리고 하영근의 딸 윤희에게 희미한 연정도 품게 됩니다. 일본인이지만 존경할 만한 인물인 하라다 교장과 영어선생인 쿠사마도 만나게 되는군요. 지금 고등학교 진학 공부를 위해 상주에 왔다가 여관집 딸인 야스꼬의 수학문제를 풀어주는 바람에 이 여자와도 나중에 뭔가 이루어질 분위기를 풍깁니다…지금 134페이지까지 읽었습니다.

 


어렸을 적 이병주의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읽고 가슴이 두근두근했던 기억이 새삼 기억납니다. 중편소설인데도 스케일이 크고 꿈을 꾸는듯한 낭만적인 필치가 어지간히 인상 깊었던 모양입니다. 더구나 이게 데뷔 소설이라니요. 그리고 그 뒤 고등학교 2학년 때 [행복어사전]을 읽으면서 얼마나 즐거웠던지. 지금 다시 읽으면 좀 구시대적일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이병주를 읽으니, 옛 친구를 다시 만난 느낌이랄까. 즐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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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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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겐 이상한 버릇이 있습니다. 뭔가 일을 시작하면 좀처럼 다른 걸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하루 종일 일만 하는 워커홀릭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일을 하는 시간은 아주 짧습니다. 아이디어를 내는 직업일수록 더 그렇지요. 그 나머지 시간은 대부분 “어떡하지”, ”일을 해야 하는데”, “아이디어를 내야 하는데…”하고 근심 걱정으로 보내는 시간이 전부입니다. 이건 일의 성과와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그냥 제가 새가슴이라 그런 겁니다.

일을 회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술을 마시는 겁니다. 일단 마시기 시작하면 취해서 몸도 마음도 늘어지기 때문에 뭐든 포기가 빠르죠.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는 데’는 술만한 게 없습니다. 그런데 일이 싫다고 늘 술만 마실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다보면 일도 지지부진하면서 다른 것도 전혀 즐기지 못하는 오갈 데 없이 한심한 상태가 도래합니다.

이래저래 전 몇 달 간 전혀 책을 읽지 못했습니다. 영화도 죄다 놓쳐서 [건축학개론], [어벤저스], [은교] 등 못 본 영화가 지천으로 널렸습니다. 더구나 요즘은 SNS나 블로그에도 글을 잘 올리지 못합니다. 일도 성에 차게 못하면서 다른 걸 한다는 게 맘에 내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컴퓨터 프로그래머인데 프로그램은 별로로 짜면서 취미로 멋진 탁자를 만들었다고 칩시다. 저는 이렇게 반문할 것입니다.

 “그럼 넌 목공을 하지 왜 프로그래머를 하고 있는 거야?”

 

마음에 공황 상태를 메우기 위해서는 ‘잘 읽히는 책’이 필요했습니다. 물론 [지리산]은 쉬운 책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책은 이병주라는 한 시대의 천재가 목숨을 걸고 쓴 대하장편소설입니다. 요즘처럼 인문학과 실용서만 주로 읽던 제겐 [지리산]처럼 유장하고 압도적인 스토리텔링이 있는 소설이 필요했습니다. 더구나 이 책은 전에 제가 어렸을 때 줄까지 쳐가며 읽었던 소설인데, 지금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는 엄청난 장점(!)이 있습니다.

새로운 문물이 쏟아지던 격동의 세월을 거스르며 살다 죽어간 한반도의 젊은이들의 이야기인 이 소설은 TV드라마로도 각색되어 방영된 적도 있지요. 생각해보면 [태백산맥]이나 [토지]에 비해 너무 일찍 완간된 불행한 소설이기도 합니다. [관부연락선]이랑 이어 읽은 기억이 나서 그것부터 읽을까 하다가 일단 책장에서 눈에 띄길래 이 책부터 집어들었습니다. 앞으로 매일 조금씩이라도 읽고 티블로그에 독서일기를 연재할 생각입니다. 이미 끝까지 읽은 독자들이 수두룩한데, 이런 식의 독서일기가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기도 하지만, 쥐가 자라나는 이빨을 시멘트 바닥에 갉아내는 기분으로 그냥 미련하게 한 번 진행해 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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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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