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없는 새벽 산길을 혼자 걷는 상상을 해보자. 아니면 해가 뉘엇뉘엇 지는 풍경이 무심히 펼쳐지는 홍대앞이나 서촌의 골목 또는 이면도로도 좋다. 이 그림들이 내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펼쳐지는 건 상상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 시간에 그 길을 걸어본 적이 있어서다. 그렇다. 나도 산책을 좋아한다.

'나도' 라고 쓴 이유는 동서고금의 수많은 인간들이 산책을 좋아한다고 이미 고백을 했기 때문이다. 니체는 어지간히 걷는 것을 좋아했는지  “심오한 영감, 그 모든 것을 길 위에서 떠올린다”라고 했고 칸트는 매일 마을길을 산책했는데 그 시간이 늘 일정해서 마을 사람들이 그를 보고 시계를 맞췄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그러나 칸트처럼 강박적으로 일정한 시간에 산책을 하는 건 미친 짓이다. 왜냐하면 산책의 진정한 묘미는 '목적이 없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은 어디어디까지 걸어봐야지' 하는 정도의 마음을 먹을 수는 있다. 그러나 목적지가 너무 분명하거나 몇 시까지 어디를 꼭 갔다와야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걸 산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아마 이번에 [산책 안에 담은 것들]이라는 산문집을 낸 이원 시인도 나와 비슷한 심정일 것이다. 


새벽에 깨어 홀로 걷는 것을 좋아한다는 이원 시인. 그녀는 왜 산책을 좋아하는 것일까. 내 생각엔 산책은 '걸으면서 하는 독서'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또는 걸으면서 하는 '비움'일 수도 있겠다. 산책하는 사람의 발걸음은 가볍고 허허롭다. 두 다리는 길을 걷고 있지만 마음은 머릿속에 있는 상념들 사이를 거닐고 있다. 그 상념들은 도서관에서 마주쳤던 책들이기도 하고 극장에서 보았던 수천 편의 영화이기도 하고 자신이 그동안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원 시인이 걷는 길은 그곳이 절두산 성지든 홍대앞이든 결국은 시인의 마음 속 길에 다름 아니다.

어떤 때는 울 일이 있어 9Kg의 몸무게가 빠지도록 몇 달을 계속 울기도 했던 시인은 결국 또 다시 힘을 낸 자신의 두 다리 위에 몸을 실어 산책길에 나선다. 그녀에게 '산책은 한가로운 시간인 동시에 뜨겁고 깊은 시간' 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는 곳이 달라질때마다 어떤 날은 경복궁역 2번출구로 나와 이상이 살았던 집터 앞에 무한정 서서 "예술가의 흔적을 찾아 골목을 찾게 만드는 힘, 문화는 다름 아닌 그것이다'라고 중얼거리기도 하고 어떤 날은 은평구에 있는 진관사 입구까지 걸어가 합장을 하기도 한다. 그녀가 그동안 걸어다닌 홍대, 한강, 명동, 시장, 골목, 동네, 갤러리는 물론 멀리 파리의 골목에 가서도 그녀는 어떤 특별한 것을 하지 않는다. 그저 걸음으로써 마음에 빈 공간을 만들 뿐이다. 


이 산문집은 한 번에 휘리릭 읽히는 책이 아니다. 어떤 때는 시인다운 아름다운 문체로 이루어진 깊은 잠언을 들려주기도 하고 어떤 때는 수다스러운 누나처럼 우리가 가보지 못한 길의 비밀들을 알려주기도 하는 이원의 산문들. 그러니 이 책을 한 번에 휘리릭 읽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거니와 저자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우리가 하루에 한 번씩 짧은 산책을 하듯 이 책도 한 챕터씩, 또는 몇 장씩 아껴가며 읽는 것은 어떨까. 나는 이번주 토요일에 저자와 함께 이 책을 들고 홍대와 절두산 주변을 산책할 것이다. 아내가 일하는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라 나도 운 좋게 그 행사에 초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모두 같은 책을 들고 시인과 함께 조근조근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산책이라니. 벌써부터 토요일 아침이 기다려진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쓴 '우리동네'에 대한 짧은 글을 여기에 옮겨본다. 

우리 동네가 된다는 것. 슬리퍼를 신고 트레이닝복을 입고 헝클어진 머리로 어슬렁거리는 동선이 생긴다는 것. 잘 모르는 가게 주인과도 "안녕하세요" 인사를 나눌 수 있다는 것. 뒷골목에 있는 오래된 빵집과 오래된 떡집을 비교할 수 있다는 것. 가장 맛있는 떡과 빵을 고를 수 있다는 것. 지도에 생겨나고 사라지는 곳을 표시할 수 있다는 것. 길을 자꾸자꾸 발견하게 된다는 것. 알게 되는 골목만큼 잠시 멈춤, 즉 간단(間斷)의 시간도 늘어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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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 손이 안 가는 작가나 책이 있다. 이 책이 그랬고 이 작가가 그랬다. 예전에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에서 소설가 김훈이 추천한 50권 중 이 책이 들어 있었던 것 같다. 그때 느낌은 '김훈은 후배 작가들의 책도 참 많이 찾아 읽는구나' 정도였다. 그러면서 책 제목을 메모까지 해놨었는데 왜 정작 찾아 읽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이름이나 그 작가가 지닌 분위기가 지나치게 ‘운동권스럽지 않나’ 하는 얼토당토하지 않은 생각을  혼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공선옥은 왠지 뭔가 진지할 것 같고 거룩할 것 같고 게다가 작가의 고향이 전라남도이니 왠지 묵직한 주제의식이나 치열한 의무감을 가졌을 것만 같고…그래서 자꾸 다음에 다음에 하고 미뤘던 것 같다. 그 후에도 서점에서 만났을 때 수채화로 그려진 표지가 너무 ‘나이브’해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아, 이 정도면 병이다). 


그러다가 얼마 전 이비인후과 갔다가 들른 강남역 알라딘에서 이 책을 다시 보고는 ‘책값도 삼천 원밖에 안 하는데 어디 사볼까’라는 생각이 들어 집어들었다. 그러나 웬걸, 책을 읽기 막상 시작하자마자 너무 재미있어서 출퇴근길과 휴일 지방 여행 가는 버스 안에서 이틀만에 다 읽어버렸다. 쓸 데 없는 선입견이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 알려주는 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는 1980년대 광주 언저리에 살던 파릇파릇한 청춘들의 이야기인데 주인공은 해금이라는 여자애다. 해금이 위로는 언니가 셋 있는데 그 이름이 순금이 정금이 영금이다. 할아버지가 비단금(錦) 자를 정해놓고 이래저래 한자를 한 개씩 돌려 이름을 짓다가 네 번째도 또 딸입니다,라는 아들의 소릴 듣고는 “니무랄, 암거나 허라고 혀’라고 화를 내는 바람에 ‘혀금이'가 될 뻔 했는데 그나마 애 아버지가 바다 해(海)자를 쓰는 바람에 해금이가 되었고 그 다음에 태어난 막내딸은 드디어 '비단 금'자를 벗어나 영미가 되는 바람에 해금이만 가장 억울하게 되었다는 조금 웃기는 사연이다. 해금이는 예쁘지도 공부를 썩 잘하지도 않지만 속이 깊고 착한 아이였다. 이 이야기는 해금이와 그의 친구인 경애, 승희, 정신이, 수경이, 그리고 4.19기념일에 도청 앞에서 우연히 만나 음악실에 가는 바람에 평생 친구가 된 남자애들 승규, 진만이, 태용이, 만영이 들의 ‘청춘스케치’인 것이다. 

어디서나 스무 살 무렵의 이야기에는 늘 피끓는 우정과 연애가 있고 꿈이 아직 뭔지도 모르면서 내지르는 무모한 도전과 좌절, 그리고 희망이 있지만 이들이 있던 곳은 80년대 광주였으니 그 남다르고 슬프고 웃기고 아스라한 사연들이야 오죽하랴. 작가는 하나하나 애정이 가는 친구들의 사연에다 그 가족들의 이야기까지 얹고 정겨운 전라도 사투리와 쌍욕까지 곳곳에 뿌려서 다 읽고 나면 들큰하면서도 아주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아니, 만들어냈다기보다는 들려줬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혹시 작가 친구들의 실제 얘기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책을 다 읽고 난 지금도 그들이 방금까지 살았던 것마냥 생생하게 느껴지니 말이다.

모두 평범하고 예쁜 아이들이었다. 자기들이 얼마나 예쁜 나이인지 모르는. 그러다가 광주항쟁 때 날아온 유탄에 경애가 맞아 죽고 이에 충격을 받은 수경이가 자살을 하고 집안꼴이 마음에 안 들어 밖으로 나돌던 승희는 성질 급하게 스무 살에 애를 낳는다. 승희를 좋아했던 진만이는 화를 내고 승희를 진짜로 좋아했던 만영이는 승희의 아이를 거둔다. 세상을 바로잡고 싶었던 정신이는 대학을 그만 두고 공장에 위장취업을 했고 서울대학을 다니며 힉생운동을 하던 승규는 남산으로 끌려가 죽도록 맞은 뒤 군대로 끌려갔다가 자살을 한다. 자살을 할 애가 절대로 아닌데. 그 중간에 해금이도 '나타나기만 하면 세상이 환해지는’ 이환과의 첫사랑을 경험하고. 

스무 살이라는 나이는 눈부시도록 아름답지만 또한 얼마나 불안정하고 가뭇없던가. 살아남은 아이들끼리 모여 비명에 간 친구 승규의 장례를 치루는 장면이 마지막이간 하지만 이상하게 슬프지 않다. 그들이 방금 아주 힘든 인생의 쓴맛을  봤다지만 그래도 여전히 '꽃향기만으로도 가슴이 설레는' 마음으로 남은 인생을 뚜벅뚜벅 살아갈 것이라는 믿음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 앞부분에 발췌해 놓은 시 <내가 가장 예뻤을 때>의 일부분은 이 소설 제목의 연유를 밝히는 것과 동시에 해금이를 비롯한 주인공들에게 대한 작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다시 한 번 고백하는 것으로 읽힌다. 언제 기회가 되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보기 바란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당신이 가장 예뻤던 때는 언제였던가.그 때 당신 곁에는 누가 있었던가.  


(……)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주위 사람들이 숱하게 죽었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도 없는 섬에서 
나는 멋을 부릴 기회를 잃어버렸다 

(……)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너무 불행했고 
나는 너무 안절부절 
나는 더없이 외로웠다 


_이바라기 노리코,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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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의7일]을 읽으면서 맨 처음 드는 생각은 '뭐 이런 우수한 소설가가 다 있나' 였다. 개성 강한 캐릭터가 떡하니 받쳐주니 웬만한 일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고 플롯이 좋으니 극의 흐름에 치우침이 없다. 게다가 적당한 교양과 블랙 유머까지 골고루 갖추고 있다. 이 정도면 정말 장인의 경지 아닌가. 이사카 코타로는 '사신 치바'라는 쿨한 캐릭터를 단편집에서 탄생시킨 뒤 8년 만에 장편으로 그 폭을 넓힘으로써 자신의 소설이 '엔터테인먼트'로서 모자람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치바는 정해진 대상을 일주일 동안 관찰한 뒤 그가 죽어 저승으로 가야 하는지 아니면 보류할 것인지 결정하는 사신이다. 즉, 저승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이나 보험조사원 같은 신분인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만난 조사 대상 야마노베는 젊어서 데뷰하고 TV에도 자주 출연하는 소설가인데 일 년 전 이웃에 사는 사이코패스에게 딸을 살해당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들 부부를 비웃기라도 하듯 살해용의자는 무혐의로 풀려나게 되고 이에 격분한 야마노베 부부는 개인적인 복수를 결심하게 된다. 당연히 인간에 대해서는 중립적일 수밖에 없는 치바지만 이번엔 그들의 삶에 개입해서 함께 움직이기로 한다. 물론 복수를 도와주거나 하는 건 아니다. 다만 치바는 다른 사신들이 이승에 와서 일주일 중 딱 하루만 일하고 나머지 엿새를 빈둥대는 걸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축이라 '나라도 일을 열심히 하자'는 취지에서 그러는 것이다. 

사신 치바가 일을 하는 동안 그 주변은 늘 비가 온다는 설정이다. 업무를 위해 사람들 앞에서 인간인 척하는 사신들은 사실 아프지도 않고 배가 고프거나 졸립지도 않다. 그런데 자신이 사신이라는 걸 밝히면 여러 가지 골치 아픈 일이 생기므로 적당히 배고픈 척, 졸린 척을 하는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스멀스멀 재미가 피어난다. 더구나 치바는 교통체증을 싫어하고 음악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특이한 취향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음악을 들으려 노력하고 실제로 인간이 만든 것 중 음악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인간들을 도와주는 경우에도 사실은 큰 뜻이 있는 게 아니라 '일을 빨리 해결하고 음악을 듣고 싶어서'인 것이다. 인간의 말을 잘 이해하지만 때로는 '데스크'가 편집장인지 책상인지 헷갈리는 치바. 그는 결국 저수지에서 야마노베 부부를 끝까지 돕게 되지만 자신은 한 일이 없고 '그건 부력이 한 일'이라고 눙을 친다(그래서 이 책의 원제도 '死神の浮力'이다). 치바의 이런 시종일관 엉뚱하면서도 쿨한 태도는 딸이 살해당한 뒤 웃을 일이 전혀 없었던 작가 부부에게 의외의 웃음을 선물하는 포인트가 된다.  


나는 이상하게도 이사카 코타로라는 작가와 인연이 잘 이어지지 않았는데 그건 [집오리와 야생오리의 코인로커]라는 소설 때문이었다. 공교롭게도 이 소설은 읽으려고 하면 무슨 일이 생겨서 그냥 책장을 덮게 되고 그 다음에 수십 페이지 읽었는데 또 무슨 이유에서인지 잘 읽히지 않아서 집어던지고 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확실히 책도 인연이란 게 있다. 그래서 오랫동안 이 작가의 책을 읽는 걸 포기(?)하고 있었는데 얼마 전 페이스북에서 이원흥CD라는 분이 '최인아책방'에 추천도서들을 제시할 때 좋은 책이라고 강력하게 권하는 글을 읽고 사서 읽게 된 것이다. 물론 이제 나도 이사카 코타로의 팬이 되었으므로 [명랑한 갱이 지구를 움직인다]나 [중력 삐에로], [마왕] 같은 소설들을 계속 사서 읽을 것이다. 

살인사건이 있고, 죽음을 앞둔 작가가 있고 그를 데려가야 하는 사신이 있는 드라마 같은 이야기다. 거기에 싸이코패스에 대한 진지한 탐구와 함께 그로 인해 역설적으로 도드라지는 '인간의 길'도 따뜻한 국물처럼 담겨져 있다. 어떤가. 한 번 연휴에 한 번 읽어볼 만 하지 않은가. 물론 우리나라 소설 중에도 비슷한 소설이 있다. 정세랑의 [보건교사 안은영]이다. 그 책도 이사카 코타로 작품 못지 않게 재미 있다. 양심을 걸고 둘 다 강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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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에도 추리소설이 있다는 걸 몰랐다. 그런데 우연히 어떤 블로그에 들어갔다가 찬호께이라는 직가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의 작품 [13.67]이라는 책에 대해 알게 되었다. 한 마디로 매우 뛰어난 추리소설이라는 것이다.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휴대폰에 제목과 작가 이름을 메모해 놨다가 서점에 가게 된 어느날 드디어 사서 읽게 되었다. 한창 일이 바쁜 때라서 일과시간엔 읽지 못하고 자기 직전이나 출퇴근하는 전철에서 주로 읽었는데 내용이 흥미진진해서 그런지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며칠 만에 다 읽어버렸다. 

이 소설은 탁월한 추리력과 기억력을 가진 관전둬라는 홍콩 경찰이 사건을 해결해가는 여섯 개의 이야기다. 첫 번째 이야기인 <흑과 백 사이의 진실>은 놀랍게도 혼수상태에 빠져 병원에 누워있는 관전둬가 등장한다. 관전둬의 후배인 뤄샤오밍 독찰은 ‘Yes’또는 ‘No’만 할 수 있는 그의 두뇌 반응을 이용해서 살인사건의 진범을 밝혀낸다. 처음부터 독자의 예상을 벗어나는 전개다. 그게 2013년의 일이고 그 다음 작품부터 시간을 거슬러 점점 젊어지는 관전둬의 활약성이 펼쳐지는데 맨 마지막 작품인 <빌려온 시간>에서는 이제 막 경찰이 된 관전둬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게 1967년이다. 즉 이 책의 제목 ‘ 13.67’은 은 2013년과 1967년에서 따온 것이다. 책을 다 읽고나서 생각해보니 시간을 거꾸로 흐르게 한 것은 독자들의 흥미를 돋구는 것은 물론 주인공의 숨은 사연이나 캐릭터의 입체성을 구축하는 데에도 매우 효과적인 장치였다고 생각된다. 작가인 찬호께이는 홍콩에서 태어난 공학도였는데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하면서 취미로 추리소설을 쓰다가 작가가 된 케이스다. 그러나 취미로 시작했다고 하기엔 믿기 힘들 정도로 완벽한 필력을 자랑한다.  

그는 원래 현장에 나가지 않고 셜록 홈즈처럼 추리력만으로 범인을 찾아내는 ‘소파탐정소설’을 구상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원고가 너무 길어지는 바람에 원하는 공모전에 낼 수가 없게 되어버리자 아예 다른 이야기를 덧붙여 장편소설을 쓰기로 마음을 바꾸었다고 한다. 다행이다. 그의 열려있는 사고 덕분에 ‘관전둬’라는 멋진 경찰이 탄생하게 된 것이니까. 찬호께이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홍콩이라는 도시에 대한 애정과 어렸을 때부터 흠모했던 용감하고 정직한 경찰의 모습을 소설 속에 함께 녹여냈다. 원해 추리소설을 좋아했던 사람이라 그런지 촘촘한 트릭과 정교한 플롯들이 이야기 하나하나를 빛나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건이 해결된 후에도 완벽한 반전이 하나씩 등장해 독자들의 뒤통수를 친다. 놀라운 것은 그러면서도 사회파 추리소설적인 면모를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경찰 내부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과 이해관계에도 밝은 편이다. 마치 수십 년 동안 경찰에서 근무한 사람이 나와서 회고록을 쓴 게 아닐까싶을 정도로 사실성이 넘친다. 

홍콩 반환 이전과 이후 얘기가 공존하는 이 소설들은 점점 서구화되는 홍콩 사람들, 그리고 홍콩에 와서 점차 홍콩사람들처럼 변모하는 영국 사람들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홍콩이라는 작고 복잡한 도시에 대한 역사적인 인식은 ‘홍콩 느와르’라 불리는 많은 영화들을 통해서도 언뜻언뜻 비춰졌었는데 이 소설에서도 범죄조직을 소탕하는 이야기는 두기봉이나 오우삼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다가 사건의 피해자들과 그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로 들어가면 홍콩이라는 도시를 관통하는 어떤 슬픈 정서와 만나게 된다. 이런 식의 사회파 추리소설 속에 경찰 내부의 내막에 얽힌 이야기까지 고루 담는 걸 보면 작가의 역량이 참 대단하다 아니할 수가 없다. 

이 소설엔 유머가 거의 없다. 대신 정직하고 진지하고 어른스러운 주인공들의 면면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즉 잔재주 없이 선명한 사건과 캐릭터만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는 것이다. 고전소설의 틀 안에서도 얼마든지 현대성과 함께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찬호께이는 안정된 필력을 통해 증명해 내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타이페이 국제 도서전 대상을 수상했고 곧 영화로도 만들어질 예정이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영화로 만들어지면 이야기의 뼈대만 남고 디테일들은 새롭게 변할 것이다. 오랜만에 소설 읽는 재미를 만끽하게 해줬던 ‘웰메이드’ 추리소설이라 웬만하면 책으로 먼저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그의 데뷔작이자 '시마다 소지 추리소설상'을 받은 [기억나지 않음, 형사]도 찾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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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옆집 남자가 지나간다. 늘 비슷한 표정에 약간 수수한 옷차림을 한 평범한 남자다. 뭐 하는 사람일까. 애가 하나나 둘 정도 있는 것 같고 그냥 회사원이 듯 보인다. 술을 마시고 비틀거리거나 한밤중에 다투는 소릴 듣지 못한 걸 보니 가정 문제는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냥 소심하게 집과 회사를 왔다갔다 하고 주말이면 하루 종일 밀린 잠이나 쳐자는 전형적인 '대한민국의 아재'겠지 뭐.


그런데 만약 이 아저씨가 알고 보니 아마존을 안방 드나들듯 하는 '직구족'이고 해외와 국내를 가리지 않는 여행광에 고양이를 사랑하는 낭만파라면? 심지어 집에서 멸치육수를 만들어 때때로 국수도 삶아먹고 김치찌개도 끓여내는 요섹남에 SNS와 블로그로 젊은이들과도 자유자재로 소통하는 네티즌이라면? 솔직히 믿음이 가지 않는 소리다. 에이, 지가 무슨 차승원도 아니고. 옆집에 무슨 그런 수퍼맨이 살아?


 

이경수의 신작  에세이 <옆집남자가 사는 법>은 그런 수퍼맨이 옆집에 사는 것도 모자라 자기집에 살고 있다고 말하는 책이다. 그리고 실제로 자신이 그런 '수퍼맨스러운' 일들을 매일 수행하며 살고 있노라고 조심스럽게 고백하는 생활백서다. 말하자면 이건 이름조차 평범한 이경수라는 50대 초반의 대한민국 남자가 어떻게 평범한 아재에서 수퍼맨으로 거듭나게 되었는가를 알려주는 아주 특별한 이야기인 것이다. 


그런데 정말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이경수는 말한다. 품안의 아이들도 어느덧 다 컸고 평생을 따라다니던 생계 걱정도 어느 정도 수습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거울에 비친 스스로를 물끄러미 바라보니 나 자신은 어디 가고 텅빈 껍데기만 남은 듯 공허해지더라. 아, 그동안 나는 무얼 하며 살아왔던 것일까. 억울하다. 지금부터라도 나 자신을 위해 살 순 없을까. 


저자는 조금 엉뚱하게도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서 그 답을 찾았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는 수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 가장 애절한 러브 스토리를 가진 커플을 꼽는다면 단연 용이와 월선이일 것이다. 이어질 만하면 다른 여자가 끼어들고 맺어질 만하면 다른 사건이 끼어들어 끝내 부부의 연을 맺지 못했던 두 사람. 그러나 누구보다 뜨겁게 서로를 아끼고 사랑했던 두 남녀. 그런 월선이 암에 걸려 용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려 한다. 친엄마도 아닌 월선을 끔찍이 따르던 아들 홍이는 죽어가는 월선을 챙기라고 제 아비를 닥달하지만 산판에만 머물며 꿈쩍도 안 하던 용이는 월선이 위독하다는 말을 들은 뒤에도 한참 후에야 그녀를 찾아가 '츤데레 화법'으로 묻는다.


"니 여한이 없제?" 

"야. 없십니다."

"그라믄 됐다. 나도 여한이 없다."


눈물나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이경수는 바로 이 장면에서 보통 독자와는 사뭇 다른 걸 캐치해낸다. 난데없이 '여한'이라는 단어가 날아와 뇌리에 콱 박힌 것이다. 그래, 나도 생의 마지막을 맞을 때 누가 "니 여한이 없제?" 하고 물으면 "그래, 아무 여한도 없다"하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 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자면 자기가 먼저 미련 갖지 않도록 여한이 없이 즐기며 살아야 한다는 데까지 생각이 자동으로 미쳤다. 


행복을 위한 첫 번째 실천으로 그는 쇼핑에 나선다. '아마존 직구'를 통해 50인치 LED TV를 구입하기에 도전했던 것이다. 인터넷으로 각종 후기를 읽고 동호회에 가입하고 까다로운 해외 약관에 시달리는 것도 모자라 제품이 도착한 뒤 마지막 '로컬 변경'까지. 처음 직구에 성공한 저자는 신이 나서 'Made in Germany' 압력밥솥을 구입해 부인에게 선물한다. 당장 가장으로서 아빠로서의 주가가 올라간 것은 물론이다. 



이경수는 이런 식으로 '여한이 없이' 세상을 즐기는 방법을 자신만의 '7가지 행복 동사'를 통해 소개하고 있다.  '쇼핑하다', '키우다', '홀로 서다', '운동하다', '추억하다', '여행하다', '소통하다'가 바로 그것이다. 하나하나 살펴보면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하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사실 외출 하기 전에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쉬운 것부터 하면 된다. 고양이 키우기에 메말랐던 감성이 훌쩍 자라기도 하고, 빨래나 청소도 제대로 하면 없던 재미와 보람이 생길 수도 있다. 걷는 일도 누구나 하는 일이지만 '디테일'을 느끼며 걸으면 세상이 달라진다. 그리고 마음에 맞는 동성 친구들과의 정기적인 여행은 그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정신적 휴식과 풍요를 선물한다. 



10년 전 <마흔의 심리학>을 통해 대한민국 40대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건넸던 작가 이경수가 이번에도 특유의 쉽고 편안한 글로 50대 남자들을 위한 저작을 내놓았다. '50대에 해야 할 몇몇 가지' 같은 성공처세술 책에 지친 우리에겐 이런 된장국 같이 순하고도 밀도 높은 인생 안내서가 필요했다. 지금 서점에 가서 당장 아무 페이지나 펼쳐 보시라. 이 사람도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군,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얘기들이 우리의 가슴을 어루만져줄 테니. 



(마지막으로 저자의 가족들이 유럽 여행을 갔을 때의 한 단락을 인용하며 리뷰를 끝내고 싶다. 여행지에서의 여유와 즐거움이 흠뻑 묻어나는 흐뭇한 문장들이라 굳이 소개하고 싶어서 그런다)



캠핑장 중에는 수영장이 있는 곳도 많았다. 유난히 지치는 날은 돌아다니는 걸 그만두고 하루 종일 캠핑장에서 놀았다. 나무 그늘에 앉아 맥주를 홀짝이며 느긋하게 책을 읽고, 그것도 지겨우면 수영장으로 뛰어들었다. 스페인의 이름 모를 마을에 있는 캠핑장 수영장은 유난히 물이 깊었다. 수영장 일부 구역은 내 키를 훌쩍 넘었다. 처음엔 얕은 곳에서 놀다가 점점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아이들과 잠수한 뒤 숨을 누가 오래 참는지, 돌 하나를 빠뜨려놓고 누가 먼저 찾아오는지 내기를 하며 놀았다. 그곳 날씨는 살이 익을 듯 햇살이 뜨거웠지만 습기가 없어 그늘이나 물속에 들어가면 서늘했다. 아이들은 물속에서 입술이 새파래질 때까지 놀다가 밖으로 나와 뜨거운 햇빛에 몸을 데웠다. 그리고 또다시 물속으로 첨벙 뛰어들었다. 물속에서 눈을 뜨고 올려다 본 하늘이 파랗게 흔들리던 장면은 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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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낮잠에서 깨어난 나는 오디오를 켜 말로의 앨범을 틀어놓고 현관앞에 앉아 책꽂이에서 충동적으로 꺼내온 김훈의 <바다의 기별>을 펼쳐들었다. 책을 열자 여기저기 파란색 볼펜으로 쳐놓은 밑줄과 메모들이 보였다.

딸이 첫 월급을 받아 휴대폰을 사주고 용돈으로 15만 원을 주었을 때 김훈은 '노동과 임금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딸'을 쳐다보며  ‘그때 나는, 이 진부한 삶의 끝없는 순환에 안도하였다’라고 썼고 나는 그 귀퉁이에다 “좀 대견했다고 쓰면 어디가 덧나냐”라고 끼적이고 있었다. 김훈이 친구들과 술 마시는 자리에서 엉뚱하게 자신이 좋아하는 소방장비들의 기능과 작동방식에 대해 늘어놓다가 핀잔을 받는 장면에다가는 “데뷔작 <빗살무늬토기의 추억> 얘기는 왜 안 하냐”라고 또 시비를 걸고 있었다. 

‘70년대의 기라성 같은 청년작가 김승옥이 단편소설 <무진기행>을 발표했을 때, 아버지는 문인 친구들과 함께 우리 집에 모여서 술을 마셨다. 그들은 모두 김승옥이라는 벼락에 맞아서 넋이 빠진 상태였다…새벽에 아버지는 “이제 우린들 시대는 이미 갔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라는 문단을 읽으면서 문단에서 김승옥이라는 작가의 등장이 얼마나 대단한 사건이었는지를 새삼 느꼈고 그게 가능했던 매체 환경과 감수성을 부러워했다. 


그러다가 ‘1975년 2월 15일의 박경리’라는 글을 읽게 되었다.

아직 김지하의 정신이 말짱하다 못해 푸른 대나무처럼 빛나고 있을 때였고 스물일곱 살의 청춘인 김훈이 신문기자로 발령 받은 지 얼마 안 되어  영등포 교도소에서 김지하와 백기완 등 정치범들의 출소를 기다리고 있을 때의 이야기다. 다들 교도소문이 언제 열릴지 알 수 없었으므로 자리를 뜨지 못하고 중국집에서 배달 온 식은 짬뽕국물을 마시며 교도소 안으로 전화를 걸어 “야, 풀어주려면 제발 지방판에 맞춰서 풀어주라. 지방 독자는 사람이 아니냐”라고 욕설을 퍼붓던, 그 스산하고 춥고도 지루한 풍경. 

그때 김훈은 교도소 정문 맞은편 야트막한 언덕에서 웬 허름한 여인네가 포대기로 아이를 업은 채 추위 속에 웅크리고, 저물어가는 교도소 정문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혹시 박경리가 아닐까 하고 다가가 훔쳐보니 김지하의 장모 박경리 선생이 맞았다. 대절한 택시를 옆에 세워놓고 태어난지 10개월 된 손자를 어르며 언제 나올지 모르는 김지하를 기다리고 있는 <토지>의 작가 박경리. 김훈은 운좋게도 혼자 박경리를 알아보았지만 그렇다고 기자들을 향해 “여기 박경리 왔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왠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용히 그녀를 지켜보기만 했다. 

밤 아홉 시께 옥문이 열리고 머리를 박박 깎은 김지하가 나타났다. 고은, 천승세, 조태일, 김광협 들이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고, 학생들이 김지하를 무등 태워서 캄캄한 교도소 앞 광장을 미친 듯이 달리며 고함을 질렀다. 김지하는 장모가 와있는지도 몰랐으므로 아무 생각도 겨를도 없이 그들의 지지자들이 마련한 승용차를 타고 교도소 앞을 떠났다. 

다른 기자들은 대부분 김지하의 승용차를 따라 명동성당으로 가버린 뒤 김훈은 김지하 출감 기사를 먼저 신문사에 전화로 송고하고 백기완이 나오기를 또 기다렸다. 밤 열한 시쯤 드디어 백기완이 나오게 되었는데 교도소측에 의하면 6년 전 백기완이 국민투표법 위반으로 벌금을 선고받은 전과가 있어서, 그 벌금 십만 원을 납부하지 않으면 석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즉석에서 모금이 시작되었으나 이미 사람들이 대부분 떠난 후라서  제대로 모금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새 교도소 정문 앞 광장에 내려온 박경리가 포대기 앞섶을 뒤적거리더니 만 원짜리 몇 장을 내놓고 대학생에게 이 돈을 보태라 말하고는 택시를 타고 사라졌다. 기자의 신분으로 모금에 참가할 수 없어 주머니 속에 있는 만 원짜리 몇 장을 만져보고만 있었던 김훈은 마지막이 이렇게 썼다.

그날 밤 나는 신문사로 돌아가 마지막 기사를 작성했다. 나는 박경리에 관해서는 한 줄도 쓰지 않았다. 나는 다만 백기완의 출소 모습만을 추가로 썼다. 나는 박경리에 관하여 쓸 수가 없었다. 나는 어쩐지 그것이 말해서는 안 될 일인 것만 같았다. 새벽 두 시께 집으로 돌아와 잠자다 일어난 아내에게 그날의 박경리에 대해 말해주었다. 아내는 울었다. 울면서 “아기가 추웠겠네요”라고 말했다. 춥고 또 추운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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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함정임은 예전에 경향신문의 칼럼에서 "성인 남성의 세계로 진입하는 과정에 쓰기의 표현 욕망과 지면(紙面)의 인정 욕구를 충족시킨 매력적인 직종이 존재했다. 바로 신문 기자였다." 라고 하면서 "일찍이 그것을 터득한 기자 출신 작가가 20세기의 헤밍웨이, 카뮈, 김훈이고, 오늘의 장강명이다." 라고 쓴 적이 있다.


과연 장강명을 헤밍웨이나 카뮈에까지 견줄 수 있을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가 요즘 가장 '핫한' 작가 중 하나라는 데는 별 이견이 없을 듯하다. 한겨레문학상 발표 즈음에서 심사위원 중 누군가가 '이제 장강명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라는 말을 했다는데 데뷔작인 [표백]을 읽을 때만 해도 그 말에 크게 동의하진 않았다. 그런데 한참 뒤에 강남구청역에 있는 '아름다운 가게'에서 우연히 [뤼미에르 피플]이라는 단편집을 말도 안 되는 싼 가격에 샀다. 누군가 사서 한 페이지도 읽지 않고 되판 게 분명한 그 '헌책'엔 미카엘 엔데의 단편집이나 토마 귄지그의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동물원]에 나올 법한 - 이책을 내게 빌려 준 진희 누나, 아직 내가 잘 가지고 있다오. 언제 돌려주러 꼭 갈게 - 재미있고 낯선 단편들이 그득했다. 그리고 근 일 년 새 <한국이 싫어서>, <댓글부대>,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열광금지 에바로드> 등 그의 소설들을 몇 권 더 읽었다. 


그의 소설은 어떤 것은 기획기사 같았고 어떤 것은 르포 같았으며 또 어떤 것은 새로운 문체를 시도하는 예술가의 작품처럼 보였다. 한 가지 공통점은 모두 잘 읽히고 나름대로 재미 있다는 사실이었다. 부지런한 작가라는 신문기자나 평론가들의 평 또한 또 하나의 공통점이 될 정도로 그는 열심히 쓰고, 쓴 날짜와 글의 양을 엑셀에 기록하고 그 성실성을 연료로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굵직굵직한 공모전들을 좇아다니며 상금을 획득했다. 소설가라는 지위를 폼 잡는 엔터테이너나 고뇌하는 예술가가 아니라 철저한 생활인으로 포지셔닝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노력이요 결과였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에세이집을 냈다. 제목은 <5년 만에 신혼여행>. 지금의 아내와 결혼해서 5년 만에 신혼여행을 갔다 온 3박5일간의 기록이다. 제목만 들으면 뒤늦게 신혼여행을 갔다 온 어느 커플의 알콩달콩 여행기일 것 같지만 장강명이 그렇게 알록달록하기만한  글을 쓸 리가 없다. 물론 소재가 신혼여행이니 어떻게 아내를 만나고 연애했는지에 대한 시시콜콜한 얘기가 빠질 수 없다. 책의 앞부분에 나오는 결혼 전의 에피소드들, 작가가 되기 전의 고군분투들이 재밌다. 그리고 여행을 준비하는 동안 틈틈이 펼쳐지는 결혼식에 대한,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과 화해에 대한, 직장생활과 꿈에 대한 작가의 가치관들이 드러나는 대목들이 흥미롭다. 역시 장강명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다. 



장강명은 실용주의자다.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는 본론으로 바로 들어간다. 에둘러 가느라 글의 양을 늘리거나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주장을 기술한 부분들은 직접 옆에서 귀로 듣는 것처럼 명료하고 통쾌하다. 그런데 정작 여행지에 가서 관광을 하고 음식을 사 먹고 한 부분은 별 재미가 없다. 아마도 여행지가 긴장감이나 새로움이라고는 전혀 없는 보라카이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원래 계획했던 터키 이스탄불이나 일본 대신 거길 가고 싶어서 간 건 아니었다. 가난한 부부의 형편에 맞게(또는 늘 비용 대비 효용으로 고르던 그 커플의 버릇대로) 고르다 보니 거기가 된 것일 뿐. 두 사람이 어찌나 싸구려 상술과 바가지 요금에 시달렸던지 마지막엔 둘 다 "이 놈의 보라카이..." 하며 이를 간다. 그러나 상관 없다. 우리는 보라카이라는 나른한 관광지 덕분에 소설가 장강명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고 또 어떤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지, 앞으로 어떤 글을 쓸지 대충 알게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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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의 [아Q정전]은 ‘아Q'라는 이름도 불분명한 개망나니를 내세워 근대 제국주의 앞에서 쩔쩔매는 중국인들의 내적 모순을 그린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고등학교 때 이 작품을 읽었지만 무슨 내용인지 잘 몰랐다. 그냥 남들이 대단한 작품이라고 하니까 의무적으로 읽은 것이다. 그래서 대학교 1학년 때 어쩌다 친구와 이 작품 얘기를 하다가 “야, 근데 아Q 그 새끼는 착하지도 않잖아. 뭐가 불쌍해.” “아유, 그러게. 아Q는 잘 죽은 거야.” 같은 소리를 서로 주고받은 기억이 난다. 

김애란의 단편집 [비행운] 중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라는 작품을 읽으면서 [아Q 정전]이 생각났다. 택시 기사인 용대는 어렸을 때부터 주변의 멸시와 홀대를 받고 살아온 인물이다. 어느 집안에나 꼭 한 명씩은 존재하는 천덕꾸러기. 그런데 그 이유는 다 용대 자신의 처신 때문이다. 자기 형이 두부공장 하다가 말아먹고 도망 다닐 때 형을 좀 찾아봐 달라는 형수에게 용대는 오토바이 기름값을 달라고 했다가 욕을 먹었다. 누가 취직을 시켜줘도 진득하게 붙어있질 못하고 때려치우는 게 다반사인 성격이고 하다못해 형수가 밭애서 고추를 따고 있을 때도 종일 툇마루에서 기타를 치고 놀던 인사였다.

그런 인간이 기사식당에서 일하던 조선족 여자 명화에게 반했다. 어렵게어렵게 같이 외식을 하고 프로포즈를 하고 결국 결혼까지 했다. 언제가 중국에 함께 가자고 했다. 그러나 명화는 암에 걸려 죽어버렸다. 용대는 명화가 죽은 후에도 쉬는 시간이면 괜히 중국어 회화 테이프를 틀어놓고 택시 안에서 따라한다. “워 더 쭈어웨이 짜이날?” ‘제 자리는 어디 입니까.” 테이프에서 명화의 목소리가 들린다. “리 쩌리 위안 마?” “여기서 멉니까?” 


김태용의 영화 [만추]에서 탕웨이가 오지 않는 현빈을 기다리며 “It’s been a long time...”이라고 혼자 중얼거리던 장면이 떠오르는 엔딩이다. 아Q처럼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인간을 진지하게 탐구하고 심지어 그에게 애정까지 품는 것이 문학의 위대함이 아니겠느냐고 쓴 글을 얼마 전에 읽은 기억이 난다(박웅현의 책이었던가). 그렀다면 그 얘기는 김애란의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도 적용된다고 나는 믿는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만 읽을 만한 책은 아니다. 우리 주변엔 잘 쓰는 작가들이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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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후부터 허리가 아파서 침을 맞고 물리치료를 받고 난리를 치다가 퇴근시간에 교보문고에 목보호대를 사러 간김에 참지 못하고 책을 또 한 권 샀다. 곽재식의 작품집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다. 곽재식은 옴니버스 소설집에 실렸던 단편 <박시은 특급>을 읽고 홀딱 반했던  소설가다. 버스 안에서 읽은 그의 데뷔작 <달과 육백만 달러>도 재미있는데 그 다음에 실린 <최악의 레이싱>은 심하게 웃기고 착하고 재미있다. 마치 배명훈을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이다. 아껴놨다가 내일부터 한 편씩 천천히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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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스러운 하늘색 웃도리를 입은 서현진이 식탁에 앉아 입이 미어터지도록 밥을 밀어넣으면 그 위로 '엄마의 마음이 놓이는 장면'이라는 자막이 뜬다. 옆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이렇게 묻는다. "그렇게 맛있니?" 계속 숟가락에 묻은 밥알을 핧아 먹으며 "어...!"라고 대답하는 서현진. 카메라가 밑으로 내려가면 그녀가 먹는 밥의 정체가 보인다. 햇반이다. 그것도 미처 밥공기에 덜지 못하고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것 그대로 퍼먹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얘 엄마는 뭐하느라 굶고 들어온 딸년 밥 한 공기 못 해먹이고 햇반 뜯어먹는 걸 옆에서 쳐다보며 마음이 놓인다고 하시는 걸까. 


나도 광고를 만드는 사람인데 남이 만들어놓은 광고를 헐뜯으려고 이런 글을 쓸 리가 없다. 더구나 이 광고는 아주 잘 만들어진 광고다. '마음이 놓이다, 햇반이 놓아다'라는 카피도 질투날 정도로 좋고 바스트샷 카메라를 압도하는 요즘 '대세' 서현진의 찰진 연기도 만점이다. 다만 그녀가 먹고 있는 밥이 문제다 햇반은 밥이 아니다. 카피처럼 '갓 짓은 밥맛'이긴 하지만 이건 알고보면 가짜다. 심지어 밥알도 진짜 밥알이 아니고 지어진 밥을 으깨어 다시 밥알 모양으로 만든 것이다. 내가 하려는 얘기는 밥이 중요하다는 얘기고, 마침 고은정의 <반찬이 필요 없는 밥 한 그릇>이라는 책이 내 앞에 펼쳐져 있으므로 그 책의 유용함에 대해 소개하려는 것이다.


고은정은 약선 식생활연구센터 소장 겸 우리장 아카데미 대표다. 지리산 뱀사골 근처 '맛있는 부엌'에서 제철음식학교를 운영하기도 하는 음식문화 운동가다. 한 마디로 요리 연구가가 아니라 음식 연구가인 것이다. 그래서 맛있는 음식보다는 우리 몸에 좋은 음식 얘기를 많이 하고 음식 밑에 깔려 있는 인문학적 통찰을 실생활에서 실천하려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맛이 없어도 몸에 좋으니 참고 먹으라는 막무가내식도 아니고 우리 음식이 무조건 좋다는 식의 국수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사람이 '밥'에 대한 책을 냈다. 냄비나 압력밥솥 또는 전기밥솥에 쌀 씻어서 안치면 저절로 되는 게 밥인데 뭘 새삼스럽게 책을 다 냈을까. 


밥은 쌀과 물과 불이 만들어내는 삼중주의 예술품이다. 하지만 재료가 너무 단순한 탓인지 오히려 맛있는 밥맛을 구현해내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 재료뿐만 아니라 조리법조차 단순하여 밥맛 내기의 어려움에 한몫 거든다.


 위의 글처럼 이 책은 재료 뿐 아니라 조리법초차 간단하여 밥맛 내기에 어려움이 있음을 바탕에 갈고 들어간다. 그러면서 제대로 '요리'된 밥 한 끼가 우리를 얼마나 행복하고 풍요하게 하는지를 역설한다.  


우리의 밥도 다양한 재료와 결합하면 더 맛있어진다. 철마다 나오는 싱싱한 채소나 감칠맛 고는 해물들을 쌀과 같이 넣고 밥을 해 먹거나 조금 더 기분을 내고 싶은 날엔 소고기나 돼지고기, 닭고를 넣고 같이 밥을 해 먹으면 밥도 요리가 된다. 흰쌀밥을 할 때 갖게 되는 반찬의 부담감을 밥 하나로 다 날릴 수 있으니 자꾸 밥을 해 먹고 싶어진다. 밥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아져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맛있는 밥을 집에서 해먹는 것. 거기엔 밖에서 아무리 비싼 요리를 사먹더라도 느낄 수 없는 특유의 기쁨과 충만함이 있다. 그리고 보온밥통에서 꺼내먹는 이름만 '더운밥'인 보온밥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신선함이 있다. 


바쁜 현대인들이 매끼 새로 밥을 해서 먹을 수 없게 된 지 이미 오래다.  그래서 전기를 이용해 보온을 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밥 짓는 수고를 힘들어하고 밥을 짓는 데 걸리는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 보온의 기능이 담긴 밥솥이 처음 들어왔을 때의 놀람과 기쁨을 잊지 못하지만 그건 정말 잠시였다. 수고를 덜고 시간을 벌었지만 밥맛을 놓쳤기 때문이다.



'밥은 먹고 다니냐?'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가 한 이 대사 한 마디가 이렇게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될지는 봉준호 감독을 비롯한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누구나 생래적으로 느끼는 삶의 본질을 건드린 대사라서 그렇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그만큼 우리에겐 한 끼니가 중요하다는 것이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밥심'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당장 김한길의 에세이 [아침은 얻어먹고 사십니까]나 김훈의 에세이 [밥벌이의 지겨움]을 들춰보시라. 이 책들은 제목에서부터 우리의 삶이란 밥에서 한 순간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나도 처음 자취생활을 시작할 때 밥하는 법이 적혀있는 요리책을 산 기억이 있다. 요즘 영화 <곡성> 때문에 뭣이 중한디? 라는 말이 유행이다. 나는 정말 중요한 건 밥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제목이 '반찬이 필요없는 밥 한 그릇'이다. 그렇다고 맨밥을 먹으라는 게 아니다. 쌀을 잘 고르고 재료의 성질을 잘 이해하면 누구나 가장 소박하면서도 알찬 한 끼를 영위할 수 있음을 가르쳐 주는 책이다. 책값이 만 원이다. 내가 가끔 가는 을지병원 뒤 평양면옥의 냉면 한 그릇 값인 만천 원보다 싸다. 지금 친구에게 냉면 한 그릇을 사주면 하루 고맙다는 소릴 듣겠지만 오늘 그 친구에게 이 책을 한 권 선물한다면 그는 아마 몇 년 동안 당신에게 고마워할 것이다. 너무나 간단하고도 중요한 행복의 방법을 선물해 주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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