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알아야 할 민주주의 사용법'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6.04.03 외부자의 시선으로 헬조선에 전하는 따뜻한 충고 - [미래시민의 조건]



[프리즌 브레이크]의 스코필드를 석호필이라고 부르고 가수이자 제작자인 토니 안을 '토 사장'이라 부르듯이 우리는 로버트 파우저 교수를 '파 교수님’이라 부른다. 이미 트위터의 유명인사이고 여러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는 지식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솔직히 그가 이렇게 역사에 관한 정확한 지식과 민주사회에 대한 논리정연한 생각을 두루 갖추고 있을 줄은 몰랐다. 


로버트 파우저 교수의 신작 에세이 [미래시민의 조건]은 3개 국어 이상을 구사하는 언어학자이자 교육자인 실천적 지식인 파 교수가 헬조선에 보내는 따뜻한 충고다. 일본어를 전공하던 학생이었던 로버트 파우저는 1982년 한국과 첫 인연을 맺은 후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13년을 지내며 교토대와 서울대 등에서 영어와 일본어, 한국어를 번갈아 가르쳤다. ‘한국인의 따뜻한 정과 라틴적 감수성’에 매료되어 어느덧 이 나라를 사랑하게 되었던 그는 오랜만에 다시 돌아와 변해버린 한국에 놀란다. 그가 처음 봤던 활기차고 역동적인적인 대한민국은 어디 가고 ‘헬조선’이라는 자조적인 단어가 날아다니는 체념의 나라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꼭 세월호 참사 같은 비극적인 사건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서촌에 한옥을 사서 다시 짓고 지역 공동체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 어울리기도 하던 그는 어느날 문득 서울대를 그만두고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떠나면 더 잘 보인다고 했던가. 29년만에 고향에 돌아가 한국생활을 반추하던 파우저 교수는 대한민국의 모든 문제는 '민주주의'로 귀결된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의 부제가 '한국인이 알아야 할 민주주의 사용법'이다. 

대한민국은 [이코노미스트] 민주주의 지수도 높게 나왔고 GDP도 2만달러에 달하는, 심지어 '2050클럽'에 속하는 선진국이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나라에 대한 불신과 불만으로 가득차 있는 이해할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가장 큰 원인은 사회 시스템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공동체보다는 개인의 안위를 우선으로 여기는 '각자도생'의 생활방식이  온 나라에 팽배하게 되었다. 파우저 교수는 시스템 불안의 원인으로 혈연, 지연과 같은 '사회적 자본'에 집중하는 한국인들의 특성이 주목한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일단 스펙을 많이 쌓고 이용할 수 있는 연줄은 다 걸어서 스스로 안전망을 만들어 놓아야 마음이 놓이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파우저가 어떻게 서울대 교수가 된 것은 매우 예외적인 상황들의 작용이었다. 로버트 파우저는 한국 학계에서 그리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뭘 시켜준다고 해서 금방 크게 자라 세력화 될 염려가 없는 인물인 것이다. 더구나 그가 '첫 외국인 국어교육학과 교수'가 되면 대외적으로 서울대 이미지도 올라갈 수 있다. 꿩먹고 알먹고인 것이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파우저 교수가 우리 사회를 더 사심(?) 없이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고. 


그런데 왜 '민주주의'인가. 파우저 교수는 언어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사람이다. 언어는 단지 말이나 글에 그치는 게 아니라 어느 한 지역의 역사와 문화, 생활방식 등을 그대로 담고 있다. 따라서 언어에 능하면 그만큼 통찰력도 늘어나는 것이다. 오죽하면 그는 모국어 하나만 하면 흑백의 세상을 사는 것이고 두 가지 언어를 구사하면 컬러 세상을, 세 개 이상의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면 3D 세상을 사는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이는 그가 수평적이면서도 객관적으로 한국사회를 관찰하고 분석하는 데 큰 덕목으로 작용했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일본이나 미국이 나쁘고 한국은 무조건 좋다, 는 식의 단순무식한 사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지금 우리가 처한 문제들을 다각도로 살펴보고 사라진 활력을 다시 찾기 위해서는 시스템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데 이는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을까. 파우저 교수는 책의 첫머리부터 '시민'에 대해 이야기 한다. 중요한 모든 것들이 '성숙한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애초부터 한국어로 씌여졌는데 가만히 읽다보면 로버트 파우저 교수가 얼마나 글을 잘 쓰는 사람인지 알게 된다. 시민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훓어보는 세계사와 근대사는 마치 중고등학교 교과서처럼 짧으면서도 요점적이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중간중간부분은 인간적인 체취가 넘친다. 맨 뒤쪽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글도 있는데 막상 그의 생애와 관심사에 관해 우리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는 것 같아 놀라웠다.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지만, 미래가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비전은 얘기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비전을 현실화하기 위해서 현황을 보고 제시한 비전과 비교하며 앞으로 나아갈 길을 논의할 수도 있다. 미래 비전은 사실 또는 진리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희망이며, 따라서 이 책은 미래에 대한 희망 이야기인 셈이다.



파우저 교수는 책을 통해 우리를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대신에 어떻게 하면 '헬조선'의 망령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의 단초들을 던져준다. 지금처럼 각자 스펙을 쌓아 남들을 짓밟고 올라가서는 희망을 찾을 수 없다. 갑자기 메시아가 나타날 리도 없다. 각자의 올바른 생각과 참여를 통해 시민의식을 깨우는 것만이 방법이다.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는 토대를 만들고 좀 더 발전적인 공동체 건설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파우저 교수는 이를 '국민'의 사고에서 공동체 주인으로서 책임 있는 '시민'으로서의 의식 전환이 필요하다,는 문장으로 역설한다. 


 '국민은 투표할 때만 주인이고, 선거가 끝나면 노예가 된다'라는 장 자끄 루소의 말이 있다. 곧 지방선거가 다가온다.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이 시기에 로버트 파우저 교수 같은 지식인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얇은 책이지만 우리에게 던지는 무게는 만만치가 않다. 일독을 권한다. 특히 젊은 사람들이 이 책을 많이 읽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으면 좋겠다.








Posted by 망망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