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저녁에 명동 씨네라이브러리에서 영화 [그린북]을 관람했다. 1960년대 초 피아노 천재 연주자인 '닥터 돈 셜리'가 허풍 세고 주막 센 이탈리아계 백인 '떠벌이' 토니를 운전기사 겸 로드 매니저로 고용해 미국 남부를 돌아다니며 연주 여행을 하면서 티격태격하는 버디 무비다. 지적이고 자존심 강한 흑인과 하층민 백인이라는 듀오는 기존 흑백 관계의 클리셰를 역전시킨다는 점에서 작품의 큰 차별점이지만 그렇다고 메시지 자체가 전복적이거나 문제 의식을 던지는 수준이 그리 높진 않다. 돈 셜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하는 데 비해 점점 셜리에게 교화되는 토니의 모습은 '정치적 올바름'에 따라 시나리오를 정교하게 짜맞춘 혐의조차 느껴진다(실제로 영화 개봉 후 돈 셜리의 가족들이 '거짓말로 가득 찬 영화'라고 비난했다는 기사를 어디선가 읽었다). 탁월하고 유머러스한 연출과 시나리오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흑백 갈등의 역사와 그 해결책을 '선의'라는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찾는 건 너무 순진무구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생각과도 겹친다.
다만 북미만 돌아도 충분히 존경받을 수 있는 실력과 명성을 갖춘 일급 흑인 연주자 셜리가 굳이 그린북(당시 남부를 여행하는 흑인들이 갈등없이 모텔이나 식당을 이용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정보를 편찬해 놓은 가이드북)을 들고 남부 구석구석을 고집스럽게 다니며 연주 여행을 감행하는 모습은 국회의원, 시장 선거 등에서 번번히 떨어지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았던 '바보 노무현'을 떠올리게 했다. 가끔 이렇게 엉뚱한 지점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나곤 한다. 오늘밤엔 문득 그가 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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