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를 들어, 몇 년 간 죽어라 땅굴을 파서 겨우 탈옥을 하게 된 죄수들이 알고 보니 얼마 후 있을 광복절 특사로 풀려나게 되어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다시 반대편으로 땅굴을 파서 감옥으로 돌아가야 한다. 탈옥이 아니라 '귀옥'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아이러니가 시작되는 것이다. 거의 이십 년 전 김상진 감독이 설경구 차승원 등과 함께 만든 작품 [광복절 특사]가 바로 그런 얘기였다. 이렇게 설정이 독특하거나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스토리 라인이 선명한 영화를 '하이 컨셉 영화'라고 부른다. 이병헌 감독의 흥행작 [극한직업]은 잠복근무를 위해 마약반 형사들이 치킨집을 인수했는데 예상 밖으로 치킨 장사가 너무 잘 되는 바람에 곤란에 빠지는 상황을 컨셉으로 한 작품이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상황이 자연스러운 웃음의 포인트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군더더기 없이 찰진 속사포 대사들이 류승룡이나 이하늬, 진선규처럼 요즘 펄펄 나는 배우들의 입을 통해 관객들을 들었다 놨다 한다. 특히 류승룡은 [내 아내의 모든 것]이나 [7급 공무원]에서 보여줬던 기가 막힌 대사 타이밍 감각을 다시 한 번 유감없이 보여줬고 [범죄도시] 이후 명품 조연으로 떠오른 진선규의 연기는 이제 명불허전이 되었다. 물론 중간에 '수원왕갈비통닭' 프랜차이즈를 둘러 싼 씬에서 등장하는 익숙하면서도 무리한 설정들은 갑지기 영화를 지루하게 만들기도 하고 전체적으로 너무 긴 러닝타임 때문에 감독의 뚝심 부족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어쨌든 끝까지 딴 욕심 부리지 않고 코미디로 끌고 간 점만은 높이 평가하고 싶다. 마지막 류승룡 신하균의 보트 결투씬에서 치킨집 사장이 왜 범죄현장에서 설치냐는 악당의 힐난에 "니가 소상공인들을 몰라서 그러나 본데, 우린 다 목숨 걸고 해!" 같은 류승룡의 대사는 이 영화 시나리오 작가인 문충일의 내공이 엄청나다는 걸 다시금 보여준다. 내 취향의 영화는 아니지만 어쨌든 당대에 흥행하는 영화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인데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몇 겹의 흥행요소를 다 가지고 있는 셈이다.
아내와 나는 이 영화를 종로3가 피카디리극장에서 보았는데 극장은 넓고 쾌적했으나 날이 추운 관계로 평소 파고다공원 등에 계실 법한 노인분들이 거의 다 로비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게 좀 안쓰러웠고 특히 우리 옆자리에 앉은 초로의 불륜커플(대화내용이 전혀 부부의 그것이 아니었음)은 오십대 후반의 여자분이 영화를 보면서 어찌나 크게 떠드시는지 거의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결국은 우리 부부가 비어있는 앞자리로 옮겼는데도 여자분의 감탄사와 코멘터리가 러닝타임 내내 끊임없이 들려왔다. 여자분은 영화 장면장면마다 감탄사를 넣고 깜짝 놀라고 하는 걸로 남자분에게 어필하려는 것 같았고 남자분의 리액션도 그에 못지 않았다. 만장하신 전국의 불륜남녀 여러분, 그런 거 하시려거든 다음부터는 제발 극장으로 오시지 말고 가까운 비디오방이나 모텔방에 가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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