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자? 아유, 이름도 참 예쁘네!”


돌아가신 저희 어머니가 혜자를 보자마자 처음 하신 말씀입니다. 사실 혜자라는 이름이 뭐 그리 예쁘겠습니까. 그러나 제가 ‘혜자'보다 더 예쁜 이름을 가진 여러 여성들과 사귈 때는  정작 그녀들의 발꿈치초차 구경해 본 적이 없는 어머니로서는 막내아들놈이 처음 데려온 여자의 이름이 어떻든 얼굴이 어떻든 그저 죄다 예쁠 수 밖에요. 더구나 혜자가 나온 고등학교가 호수돈여고라는 사실을 안 다음에 그 애정은 확고부동한 자부심으로 변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월남하시기 전 개성에서 호수돈여고를 다니신 걸 최대의 자랑이자 추억으로 생각하시는 분이었는데 나중에 그 학교가 혜자가 살던 대전으로 내려왔거든요. 

어머니는 제가 마흔 살이 넘으며서부터  ‘저러다 저 놈이 평생 결혼을 안 하고 살면 어떡하나...’ 하고 늘 걱정을 하다 가신 분이었습니다. 사실 저도 결혼을 안 하고 살 생각이 컸구요. 이상하게 저는 처음부터 혼자 사는 게 싫거나 귀찮지 않았고 또 왠지 결혼이라는 제도가 저랑 안 맞는 느낌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잠깐씩 좋아하던 여자들도 늘 저랑 결혼까지 할 생각은 없는듯 보였구요. 그러다가 한참 후에 혜자라는 여자친구를 만나 미친 척하고 냅다 살림부터 차렸는데, 하루는 어머니께서 부르시더니 “너희들, 그러지 말고 결혼식을 올리는 게 어떠니?”라고 조심스럽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이듬해 5월에 결혼식을 올리고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어머니는 그 결혼식을 못 보시고 말았죠. 그 해가 가기 전 크리스마스 즈음에 너무나 갑자기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안타깝습니다. 지금 살아계신다면 당신의 며느리인 혜자가 이름 말고도 이쁜 게 얼마나 많은 아이인지 아시고 정말 기뻐하셨을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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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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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오늘 혼자 저녁을 먹을 기회가 생겼다. 회사 근처 음식점에 가서 오징어불고기백반을 먹으리라 결심한 나는 아침에 건성으로 읽다 휙 던져버렸던 신문 중 한 장을 꺼내 접어들고 음식점으로 갔다. 경향신문 박찬일 셰프의 칼럼을 읽었다. 


우리는 라면에 나트륨 함량에 벌벌 떨며 싱겁게 먹어야 한다고 난리를 치지만 정작 라면에 곁들여 먹는 김치나 단무지의 짠맛에 대해선 관대하다. 전체를 보지 못하고 보기 편한 일부분만 보는 인간의 속성 때문이다. 오늘 박찬일 셰프의 칼럼 제목은 ‘소금이 뭔 죄야’다. 아기들 분유의 소금 함유량을 다룬 국정감사 얘기로 시작한 이 글은 우리의 상식 속 빈곳을 강타한다. 원리는 너무 간단하다. ‘간을 본다’ 라는 표현은 모든 복잡한 요리기술을 한 마디로 대변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정도로 소금의 중요성을 잘 전달해주는 말이다. 즉, 우리는 소금을 안 먹고 살 수 없다. 아주 싱겁게 먹는다는 것은 맛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밥이나 국물을 아무리 싱겁게 먹어도 과식을 하거나 반찬을 많이 먹으면 결국 그게 그거, 말짱 도루묵이다. 소금만 죄악시 할 일이 아니다. 


박찬일은 “이렇게 어떤 사안에는 뒤집어보면 다른 중요한 열쇠가 숨어 있는 경우가 흔하다”라고 쓴다. 맞는 말이다.  광고도 마찬가지다. 뒤집어 생각을 해보면 없던 통찰력이 생긴다… 이런, 또 광고 얘기다. 이것도 병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10092132185&code=990100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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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이나 영화는 전체에 대해 말하기보다 부분만 발췌해서 소개하는 효과적일 때가 있다. 황정은의 [百의 그림자] 그런 경우 아닐까. 소설 중간쯤 나오는 노래칠갑산 대한 부분이 그렇다


노래할까요.
무재 씨가 말했다.
은교 씨는 무슨 노래 좋아하나요.
나는 칠갑산을 좋아해요.
나는 그건 부를  없어요
칠갑산을 모르나요?
알지만 부를  없어요.
왜요.
콩밭,에서 목이 메서요.
목이 메나요?
콩밭 매는 아낙네는 베적삼이 젖도록 울고 있는 데다포기마다 눈물을 심으며 밭을 매고 있다고 하고새만 우는 산마루에 홀어머니를 두고 시집와 버렸다고 하고….
그렇군요.




어찌보면 연인끼리 하기엔 너무 싱거운 얘기를 진지하게 주고받는 사람이 우습기도 하지만 가만히 그럴까 하고 천천히 읽어나가다 보면 어떤 기이한 진정성이나 순결함이 느껴지는 [百의 그림자] 작가 황정은의 문체이고 작법인 것이다목이 멘다는 것은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 공감하여 마음이 움직인다는 뜻일 것이다. 

나는철거되기 전의 세운상가쯤으로 짐작되는 소설 공간과 등장인물들을 묘사하는 작가의 섬세하면서도 짐짓 무심한 척하는 시각에 매료되었고, 그런 배경이나 시간 묘사와는 달리 감각적인 구어체를 포기한 느릿느릿한 문어체로 진행되는 사람의 대화가 단연 소설의 백미라고 느꼈다.

나중에 무재는하얀 위에 구두 발자국이라는 노래를 불러달라는 은교의 청도 거절한다. 이것도새벽에 떠나는데 강아지만 같이 갔다고 하고, 발자국만 남았다고 하고해서 목이 멘다는 것이다. 구어체로 썼다면 말도 되게 싱거울 대화가 문어체라는 옷을 입자 뭔가 자신만의 개성과 조심성을 확보하는 느낌이다. 그러니 이건 내가 평소에 애써 피하려고만 들었던 문어체의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이상한 방법으로 일깨워주는 소설인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무재가 은교에게노래할까요라고 다시 묻는 장면으로 끝난다. 아마 그들은 어떤 노래 하나를 가지고 이건 목이 메네 메네 하고 싱거운 소리를 늘어놓으며 가만가만 둘만의 길을 걸어갔을 것이다. 나는 소설의 이런 결말이 좋았다. 다시 노래하는 사람 덕분에 나는 전자상가에서 일하던 아저씨도, 가끔 복권 돈을 꾸러 오던 유곤 씨도, 어느 갑자기 사라져버린 오무사의 할아버지도 이상 안부를 궁금해 하거나 걱정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 뒤를 따르던 그림자가 이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그들에게서 벗어나 조금 뒤에서 일어나 쫓아오더라도 이상 이상하지 않은 그림이 되었을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뭔가 좋은 소설을 읽었다는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소설을 읽고 나서 소설에 대해 무언가 쓰지 않으면 된다는 다급한 의무감 같은 느끼고 출판사에 연락을 취했다는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말미에 붙은 해설에 이런 글을 썼다.


소설을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도심 한복판에 사십 전자상가가 있다. 상가가 철거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곳을 터전 삼아 살아온 사람들의 삶의 내력이 하나씩 소개된다. 와중에 소설은 시스템의 비정함과 등장인물들의 선량함을 대조하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과연 만한 곳인지를 묻는다. 소설을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소설은 우선 은교와 무재의 사랑 이야기로 읽힌다. 그러나 사랑은 선량한 사람들의 선량함이 낳은 사랑이고 이제는 선량함을 지켜 나갈 희망이 사랑이기 때문에 소설은 윤리적인 사랑의 서사가 되었다. 소설을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소설은 사려 깊은 상징들과 잊을 없는 문장들이 만들어낸, 일곱 개의 () 장시(長時). 소설을 단어로 정리하면 이렇다. 고맙다. 소설이 나온 것이 그냥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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