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레미파솔라시도’ 여덟 개 계명밖에 없는데 어떻게 늘 새로운 노래들이 쏟아져 나올까, 가끔 생각합니다. 신기한 일이죠?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TV를 틀면 만날 그 얘기가 그 얘기일 거 같은 ‘사랑 타령’이나 '출생의 비밀'도 늘 새로운 이야기를 장착하고 새롭게 시청자들을 다시 찾아옵니다. 그리스 신화나 서부개척시대 이야기, 이솝 이야기 등 옛날 얘기들은 ‘스타워즈’나 ‘해리포터’ 시리즈 등으로 허구헌날 우려먹어도 마르지 않는 이야기의 샘인 모양입니다. 알란 파커 감독의 데뷔작인 [벅시 멜론]은 갱영화의 등장인물들을 모두 어린이로 바꿨던  작품이었죠. 히트 뮤지컬 ‘넌센스'의 남자 버전인  '넌센스 A-Men’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성들이 나오는 오리지널 버전 공연장 관객 중 누군가가 즉석으로 제안했다는 이 남자 버전은 수녀 역할을 모두 남자로 바꿨을 뿐인데도 관객들에게 한층 더 높은 웃음을 선사하며 빅히트를 하는 효자상품이 됐죠. 


여기 등장인물들의 역할을 살짝 바꾼 광고가 하나 있습니다. 그동안 재미있는 극과장 광고를 많이 선보였던 콘돔 회사 트로잔의 광고입니다. 데이트를 앞두고 설레는 주인공. 그런데 데이트를 나가는 사람은 아이가 아니고 나이 지긋한 아빠입니다. 아마도 그동안 부인 없이 혼자서 아이들을 키운 것 같습니다. 거울 앞에서 그를 북돋아주는 사람은 그의 딸입니다. 아들은 현관까지 따라 나와 데이트를 응원하구요. 데이트 횟수를 묻는 아들에게 “우린 그저 친구 사이일 뿐"이라고 강조하는 아빠. 그러나 아들은 다 안다는 표정으로 아빠에게 슬쩍 콘돔을 챙겨주죠. 저절로 웃음이 나오는 흐뭇한 장면입니다. 


이 CM을 보고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새로운 이야기라는 게 꼭 ‘맨땅에 헤딩’을 해야만 나오는 게 아니구나, 하구요.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안정효의 소설 [하얀전쟁]을 보면 월남에서 무료함에 지쳐가던 국군병사들이 정훈영화를 거꾸로 돌려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꾸로 걸어가는 군인들, 거꾸로 달려가는 자동차들...뻔하고 재미없던 보도장면들이 단지 필름을 거꾸로 돌렸다는 이유만으로 박장대소할 코미디로 변한 거죠. '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즐겁다'라는 전유성의 책도 있었구요. 이렇게 인물 배치도나 시간만 바꿔도 단박에 새로워지는 게 세상사인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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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 출판기념회에 다녀왔던 아내가 전해준 전미옥 대표의 [스토리 라이팅]을 오며가며 71페이지까지 읽었습니다. 요즘은 눈만 뜨면 여기저기서 '스토리텔링'에 대한 얘기들이 넘쳐나고 있지만 정작 스토리텔링 또는 스토리 라이팅이 뭐냐고 물으면 얼른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을 겁니다. '차별화된 비즈니스 글쓰기의 첫걸음'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에 막연한 두려움이나 답답함을 가진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이 됩니다.


어떻게 하면 스토리가 있는 글로 엮어 원하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가부터 시작해 자신의 글에 맞는 스토리를 찾는 법, 남의 스토리를 내 글로 끌어오는 법, 메모하는 법, 풍부하게 예시를 드는 법 등 우리가 일하면서 또는 살아가면서 그때그때 필요로 하는 글쓰기의 방법론들을 다채롭게 다루고 있습니다.전미옥 대표가 워낙 강의도 잘 하고 글도 쉽게 쓰는 분이라 그런지 책이 참 잘 읽히네요. 



나에 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할 수 있으려면 자기 스스로 즐겁게 살아야 한다. 자기 일상이 즐겁지 않은데 이야기가 재미있을 리 없다. 자신을 우스갯소리의 소재로 삼는 사람은 유연하고 개방적인 내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내가 재미있게 말하는 재능이 없다거나 잘되지 않는다면 나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나는 어떤  사람이 은근하게 나에 대한 공격을 할 때, 버럭 화부터 내지 않을 여유와 유연함이 있는가?’ 




좋은 책이 그렇듯 이 책도 이렇게 실용적인 면을 넘어 본질적이고 인문학적인 통찰들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두고두고 수첩 펼치듯 자주 꺼내 읽으면 더 좋은 책일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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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옆 동물원]에서 춘희로 나왔던 심은하의 직업이 결혼식 촬영기사였죠. 주말이면 정말 바쁜 결혼식 촬영기사. 결혼식은 두 사람에게 거의 단 한 번뿐인 행사고 또 단숨에 지나가기 때문에 혹시라도 잘못 찍게 되면 두고두고 욕을 먹는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결혼식 비디오라는 게 집들이날 당사자들에게나 재밌지 다른 손님들까지 박장대소하며 같이 볼 영화는 아니지요(그래서 저희 부부는 결혼식 비디오를 아예 찍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결혼식 비디오만으로 훌륭한 영화를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다큐멘터리 감독 덕 블록(Doug BLOCK)입니다.


뉴욕에서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살아가던 덕 블록은 ‘아르바이트’로 이십 년 간 결혼식 비디오를 촬영했답니다. 수입이 꽤 짭짤하고 안정된 생활이었던 모양이지요. 그런다가 어느날 자기가 비디오를 찍어준 그 사람들은 결혼식 이후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평범했던 결혼식 비디오들이 감독의 신선한 발상에 의해 새로운 영화로 탄생하는 순간이었죠. 무려 112쌍의 결혼식 고객 중 9쌍이 그에게 인터뷰 허락을 전해왔습니다. 감독은 그들을 다시 만나 결혼식 이후 각자의 스토리들을 추적합니다. 그것은 사랑의 시작과 진행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고 인생에 대한 우문현답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의 특별한 순간을 들여다보는 손쉬운 방법이기도 합니다. 다큐 감독이라 그런지 예전에 찍어놓은 결혼식 비디오도 범상치가 않습니다. 더구나 십여 년 후에 만나 그들을 인터뷰한 필름은 놀랍기까지 합니다. 인터뷰어의 통찰력에 따라 인터뷰이들의 대답의 깊이가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실감할 수 있죠. 

젊었던 신랑 신부가 아이들을 낳고 자신의 커리어를 착실하게 쌓아간 이야기를 듣는 것은 흐뭇한 일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던 ‘아이'들이 ‘어른'으로 성장해 간 모험담이니까요. 그런데 더 대단한 것은 그렇게 희망에 부풀어 함께 시작했던 사람들 중 누군가는 결국 이혼을 하게 되는데, 그 과정까지 가감없이 털어놓는 장면들이 있다는 것이죠. 이건 감독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영화에는 레즈비언 커플도 나오고 우리나라 여성도 나옵니다. ‘윤희’라는 이름의 이 여성은 바이올린을 전공했던 재원이었는데 어느날 비행기 옆자리에서 “혹시 그 바이올린 케이스로 총기류를 운반하는 거 아니냐?"고 농담을 하던 남자와 사랑에 빠져 미국에 정착하게 된 사연이었습니다. 딸이 한국으로 돌아와 자리를 잡을 줄 알았던 그녀의 부모님들은 미국에서 찍힌 결혼식 비디오에서 매우 찹찹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오랜 세월이 지나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신하게 되죠. 


일부러 그렇게 고른 것은 아닐텐데 인터뷰이들이 거의 다 평범하면서도 지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말도 조리있게 잘들 합니다. 여유있고 유머도 풍부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천생연분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천생연분은이란 없다.” 참 열려있는 생각이죠. 이건 '첫 번째 결혼’에 출연한 ‘수와 스티브 커플’에서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들의 시작은 어이없게도 부킹클럽이었지만 지금까지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하며 잘 살고 있으니까요. 





“모두가 두 사람을 축하해 주기 위해 있는 날, 나는 그 장면들을 잡으려 거기 있었다”라는 감독의 말이 아니라도 이 영화엔 설레는 첫출발의 순간들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 행복을 지키기 위해 평범한 사람들이 얼마나 애쓰고 살아가는지가 진실되게 담겨 있습니다. 아이디어란 이런 것이지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들에서도 남과 다른 시각으로 새로운 의미를 뽑아내는 것. 그래서 덕 블록 감독을 다시 한 번 칭찬하고 싶어집니다. 저는 평소 다큐를 좋아하는 아내 덕분에 이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참 행운이었죠. 다른 분들과도 이 행운을 나누고 싶습니다. 지금 www.eidf.org/kr 에 들어가시면 공짜로 영화를 관람할 수 있습니다. 아마 이번 주까지만 상영하는 것 같습니다.이런 영화는 때를 놓치면 나중에 DVD나 ‘어둠의 경로’로도 찾기가 매우 힘드니 지금 시간을 내서 꼭 보시기 바랍니다. 러닝타임은 95분 6초. 올해 ‘EIDF 2014’ 시청자·관객상을 수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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