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빌 브라이슨 식의 유머를 구사한 글이 읽고 싶어졌다. 빌 브라이슨 식의 유머를 읽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빌 브라이슨이 쓴 글을 읽으면 된다. 며칠 전에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미국 산책]이라는 신간이 서점에 나왔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있지만 그걸 읽으려면 당장 서점까지 가야 하므로 그냥 집에 있는 책을 찾아서 읽기로 했다. 책꽂이를 찾아보니 [나를 부르는 숲]이 있었다.


그런데 320페이지에 내가 좋아하는 초록색 3M 테잎이 붙어있는 걸 보니 빌 브라이슨이 애팔래치아 트레일 종주를 끝내지 못한 것처럼 나도 이 책을 끝까지 완독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나를 부르는 숲]이라는 책이 나오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 빌 브라이슨의 친구 카츠가 등장하는 장면을 읽다가 이상한 문장들을 발견했다. 어떻게 이상하냐면…음. 매우 ‘좀스럽게’ 이상하다. 제정신인 사람들이라면 절대 나누지 않을 어색한 대화들이 들어있는 것이었다. 길게 설명하는 것보다 일단 이 책 88페이지에 있는 메리 앨런이란 여자와 빌 브라이슨의 대화를 인용해 보자.

 


“우리도 거기서 시작했어. 여기까지 13.44킬로미터밖에 안 돼.”
그녀는 마치 집요한 파리라도 흔들어 쫓아내려는 듯 머리를 강하게 흔들며 “22.7킬로미터가 맞아.”라고 말했다.
“아니야. 정말로 그건 13,44킬로미터밖에 안 돼.”


 

13.44킬로미터, 22.7킬로미터…황당한 수치들이다. 난 우리가 대화 중에 절대로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에 거액을 걸 용의가 있다. 이건 빌 브라이슨 식의 유머와도 거리가 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아마 미터법 표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 사람들은 킬로미터보다 마일을, 밀리리터보다 온스나 갤론을 많이 쓴다. 물론 그건 그들의 잘못이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미터법이 기준이 된 마당에 아직도 자기들에게 익숙한 단위를 멋대로 쓰는 건 엄연한 반칙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책에 나오는 대화까지 “13.44킬로미터” 식으로 번역하는 건 좀 오버가 아닐까? 내 짐작엔 이건 번역자인 홍은택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출판사가 정한 엄한 기준이 있거나 관련 법규를 지키려다 보니 일어난 해프닝일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짜장면을 짜장면이라 부르지 못하고 자장면이라 해야 했던 우리의 웃긴 과거가 떠올랐다. 뭐든지 억지로 하는 건 좀 이상해지기 마련이다. 이봐요, 빌. 당신이 원체 웃기기도 하지만 한국에 있는 당신 책에는 이렇게 당신이 의도하지 않았는데 웃긴 일도 좀 있다오. 듣고 있나요, 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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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보면 우리동네 사람들은 디지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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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들은 속수무책으로 떨어져내렸다. 그것들의 삶은 시간에 의하여 구획되지 않았다. 그것들의 시간 속에서는 태어남과 절정과 죽음과 죽어서 떨어져내리는 시간이 혼재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태어나자마자 절정을 이루고, 절정에서 죽고, 절정에서 떨어져내리는 것이어서 그것들의 시간은 삶이나 혹은 죽음 또는 추락 따위의 진부한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어떤 새로운, 절대의 시간이었다. 꽃잎 쏟아져내리는 벚나무 아래서 문명사는 엄숙할 리 없었다. 문명사는 개똥이었으며, 한바탕의 지루하고 시시껍적한 농담이었으며, 하찮은 실수였다. 잘못 쓰여진 연필 글자 한 자를 지우개로 뭉개듯, 저 지루한 농담의 기록 전체를 한 번에, 힘 안 들이고 쓱 지워버리고 싶은 내 갈급한 욕망을, 천지간에 멸렬하는 꽃잎들이 대신 이행해주고 있었다. 흩어져 멸렬하는 꽃잎과 더불어 농담처럼 지워버린 새 황무지 위에 관능은 불멸의 추억으로 빛나고 있었다.    

 

 밑줄을 긋는다는 것은 언젠가는 그 부분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이기에. 불현듯 김훈의 [풍경과 상처]를 열어 맨 처음 밑줄 그었던 문장들을 읽는다. 도대체 떨어지는 벚꽃들을 이토록 찬란하게 추모해도 되는 일인가. 아닌밤중에  마음속에서 벚꽃들이 지랄염병 흩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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