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가서 엉엉 울어버리고싶은 봄날입니다. 까짓거, 시나 한 편 읽읍시다.

 

선운사 동백꽃

                        김용택

 

여자에게 버림받고
살얼음 낀 선운사 도랑물을
맨발로 건너며
발이 아리는 시린 물에
이 악물고
그까짓 사랑 때문에
그까짓 여자 때문에
다시는 울지 말자
다시는 울지 말자
눈물을 감추다가
동백꽃 붉게 터지는
선운사 뒤안에 가서
엉엉 울었다.

 

 

 섬마을에서 살면 이런 감성이 나오나요? 그나저나 김용택 선생, 참 징하게 멋있죠?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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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숀펜이 나오는 영화 [아버지를 위한 노래]를 보러 인사동에 나갔다가 내친 김에 서촌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한창민 사진전]에 갔었습니다. 전에 페북에선가 이 포스터를 보고 감탄했던 기억은 나는데 이렇게 불현듯 사진전까지 보러 오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마침 사진전 마지막 날이라 화랑에는 작가와 작가의 친구분들이 바닥에 앉아 간단하게 술잔을 나누고 계시더군요.

전시된 사진들은 놀라웠습니다. 포스터에 실린 <브레송에 헌정>이란 작품도 좋았고 <도촬_길거리 쵤영>이나 <우회 혹은 배려>같은 작품들은 똑같은 사물이나 현상도 보는 사람의 시선과 통찰에 따라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작품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모든 작품들이 아이폰으로 촬영된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우리가 늘 가지고 다니는 바로 그 스마트폰 말이죠.ㅠㅜ


저도 요즘 카메라를 배우기 시작한 참이라 그 충격의 강도가 남달랐습니다. 사실 우리가 매일 무심코 지나치는 길거리, 학교, 직장, 공원 어디에도 이야기는 널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때마다 카메라가 없죠. 그래서 우리는 사진작가의 사진을 보면서 “이 사람은 어떻게 이런 사진을 찍었을까?” 하다가도 “에이, 운이 좋아서 저런 소재와 마주쳤겠지” 라고 생각하고 싶어지는 모양입니다. 그래야 사진가들은 특별한 사람들이고 나와는 뭔가 다른 사람이란 논리가 성립되면서 비로소 마음이 편해지니까요.

그런데 아이폰 카메라가 DSLR을 비웃기 시작한 겁니다. 아니, 새로운 생각이 고정관념을 비웃기 시작한 거라고 해야 더 정확하겠죠. 한창민은 아이폰 카메라를 들고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기도발이 잘 먹히는 계룡산 소백산처럼 이름난 산들은 많지만(정말 거기 가서 기도하면 하나님 부처님과 접속이 잘 되긴 할까요?) ‘사진발’이 잘 먹히는 장소가 따로 있는 건 아니다”라고.
 
한창민 작가는 이미 SNS에서 유명인사라고 하더군요.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을 통해 많은 사진을 올리고 그 사진을 새롭게 해석하거나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도록 부지런히 텍스트를 제시하는 사람인 모양입니다. 이번 전시회도 지난 일 년간 스마트폰으로 찍어 SNS에 올렸던 사진 3500여 장 중 64장을 골라 인화했다고 합니다. 뭔가 꾸준히 하는 사람은 역시 다르죠? 전시된 작품들 중 이미 팔렸음을 표시한 작품들이 많더군요.

 

저도 내일은 카메라를 들고 오늘 산책 나갔던 곳을 다시 한 번 나가봐야겠습니다. 찍고 싶은 장면들을 아이폰으로 대충 찍었지만 DSLR카메라로 다시 한 번 들여다봐야겠습니다. 아직은 노출도 셔터속도도 잘 모르지만 이제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건 알게 되었으니까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 아이디어가  모든 것을 결정하죠.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으니, 아마 내일도 변함없이 그럴 겁니다.

  

역시 작가의 시선이 중요하다는 걸 다시 느끼게 해주는 사진이죠? 

 이 작가가 찍기 전에도 누군가가 이걸 먼저 찍었을 텐데.

 핸드폰으로 찍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고 강렬합니다.

 이 꽉 찬 구도!

 이 사진도 전 충격적이었습니다.

 이런 사진 찍다가 뺨 맞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람은 못 찍겠죠. ^^

작가님과 작가의 친구분들. 구도는 어느 정도 제 의도대로 됐는데 촛점도 안 맞고 노출도 형편없는, 바보같은 제 사진 하나 덧붙입니다. ㅜㅠ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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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공부하고 있는 사진 수업 때문에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는데, 예전에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영화일기를 썼던 기억이 나서 다시 찾아보았습니다. 2005년 3월 20일에 올렸으니 8년 전에 쓴 글이로군요.

섹스의 가능성이 완벽하게 배제된 멜러 드라마가 존재할 수 있을까.
여기 그런 영화 한편이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25번째 감독 작품, 밀리언달러 베이비.
왕년에 컷맨(링의 응급치료 트레이너)으로 이름을 날리다 지금은 허름한 체육관을 운영하는 트레이너 프랭키에게 매기라는 서른 한살 짜리 여자애가 권투를 하고싶다며 찾아온다. 그녀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열세살부터 지금까지 웨이트리스를 하고있는 순 깡촌년이다. 여자 선수는 키우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는 프랭키는 일언지하에 그녀의 제의를 거절한다. 하지만 매일 식당 일을 마치고 나면 어김없이 체육관에 찾아오는 그녀의 열의까지 막을 도리는 없다. 왕년의 복서이자 지금은 체육관의 잡일을 맡아 하고 있는 스크랩(모건 프리먼)은 밤늦게까지 혼자서 무턱대고 샌드백을 두드리는 그녀를 보다못해 조금씩 기본기를 가르쳐 준다. 그리고 그녀의 생일날 ‘펀치볼’ 사건을 계기로 프랭키는 드디어 그녀의 트레이너가 되기로 결심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누구인가. 우리가 어렸을 적 KBS나 MBC 주말의 명화 같은 데서 엔리오 모리코네의 노르스름한 음악이 흘러나오면 홀연히 망토를 뒤집어쓰고 나타나 시가를 입에 문 채 인상을 구기고 총질을 해대던 ‘황야의 건맨’ 아니던가. 그러나 가는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수십년의 세월은 어느덧 그를 75세의 할아버지로 만들어 놓았다. 비교적 최근작인 ‘메디슨카운티의 다리’에서는 너무 늙어보여 과연 메릴 스트립 앞에서 제대로 발기나 할 수 있을까, 하고 관객을 민망하게 만들었던 그가 이번 영화에서는 정말 눈이 움푹 파이고 깡마른 노인 피부 그대로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늙은 건 배우로서의 육체일 뿐 감독으로서의 역량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깊게 단련되어 이제는 찬란한 장인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깨닫게 된다. 이번 아카데미가 억만장자 하워드 휴즈 대신 백만달러 짜리 소녀 매기의 손을 들어준 것은 어쩌면 헐리우드에 ‘클린트 월드’ 같은 저력이 아직 존재하고 있음을 과시하려는 의도였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외롭다. 프랭키는 매주 편지를 써도 받지 않고 돌려보내는 냉정한 딸이 하나 있고, 매기는 어렵게 번 돈으로 집을 사줘도 고마워하기는커녕 ‘차라리 돈으로 줄 것이지 왜 시키지 않은 일을 하냐’고 화를 내는 엄마를 비롯해 몹쓸 싸가지로 똘똘 뭉친 형제자매가 있다. 가족 중 유일하게 인간같았던 아버지는 일찍 죽어버렸다. 프랭키는 애써 키워 놓은 선수들은 돈을 좇아 떠나버리기 일쑤고, 23년간 매주 빼놓지 않고 가는 성당의 신부에게나 오랜 동료인 스크랩에게도 자신의 마음을 반쯤 밖에 열지 못한다.

‘피붙이’는 있어도 ‘마음붙이’가 없는 두 사람은 서로 권투라는 매개체를 통해 드디어 ‘아버지와 딸’ 이 된다. 그리고 프랭키의 노련한 지도와 매기의 지칠 줄 모르는 노력은 두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다. 둔한 몸짓으로 샌드백을 두드리던 그녀는 프랭키와 스크랩에게서 ‘서고 걷는 법부터’ 다시 배우기 시작하더니 결국 일년 반만에 한마리 날렵한 맹수로 새롭게 태어난다. 영화 속 권투 경기 장면들은 너무나 박진감 넘쳐서 ‘저것이 진정 여자들의 주먹이란 말인가’ 경악하게 되고 힐러리 스웽크의 코뼈가 부러지는 씬에서는 나도 모르게 객석에 앉아 내 코가 멀쩡한지 몇번이나 감싸쥐어야 할 지경이었다. 흔히 ‘배우들은 운 좋게 재능과 인물을 타고나 일이 없을 땐 섹스 스캔들이나 일으키고 약물이나 해대는 존재’라고 헐뜯는 사람이 있는데 난 절대로 그런 선입관에 동의할 수 없다. 이 영화로 두번째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가져간 힐러리 스웽크는 뛰어난 연기력을 갖춘 것은 물론 석달 동안 일주일에 6일씩 두시간의 권투 연습과 두시간의 웨이트 트레이닝을 반복했고, 계란 흰자를 꾸역 꾸역 먹어가며 6Kg의 근육을 만들었다고 한다. 신은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졌더라도 노력하지 않는 존재에겐 좀처럼 운을 허락하지 않는 냉정한 양반인 것이다.

연전 연승. 맞붙는 선수마다 1회 KO로 때려눕히길 거듭해 더 이상 상대 선수가 나서질 않는 경지에 오른 매기에게 오랜만에 런던에서의 시합 제의가 들어온다. 도약의 기회다. 틈만 나면 ‘늘 자신부터 스스로 돌봐야 한다’고 귀가 따갑도록 읇어대는 프랭키는 시합 직전 그녀에게 ‘100% 올 실크’로 제작된 화려한 선수 가운을 입혀 준다. 그 가운의 등판엔 매기 핏제랄드라는 그녀 이름 대신 ‘무쿠슈라’라는 정체불명의 단어가 새겨져 있다. 매기는 이 경기에서도 화끈하게 승리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무쿠슈라라는 이름으로 기억되고 마침내 대전료 100만달러 짜리 세계 타이틀 도전자가 되어 라스베거스 특설링에 오르게 된다.

여기까지가 매기 권투인생의 정점이다. 매기는 반칙을 일삼아 인기를 끌던 사나운 챔피언년과 맞서 싸우다 뒤통수를 얻어맞고 넘어져 전신마비가 된다. ‘늘 자신부터 스스로 돌봐야 한다’는 프랭크의 충고를 단 한번 어긴 죄로 천국에서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 움직일 수 있는 건 오직 얼굴 뿐이다. 프랭키는 모든 일을 작파하고 성심성의껏 그녀를 돌보지만 그녀의 몸은 욕창이 나서 점점 썩어 들어간다. 오직 그녀의 돈만을 노리고 나타나 장례식까지 운운하며 서류에 싸인을 요구하던(입에 펜을 물려주며!) 가족들을 쫒아보낸 매기는 프랭크에게 자신을 죽여줄 것을 부탁하지만 거절당하자 혀를 깨물고 자살을 시도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장르 영화의 관습을 충실히 따라가면서도 절묘한 복선들을 곳곳에 치밀하게 깔아놓고 관객의 마음을 찢어발기다가 어느 지점에서 완만했던 서사 구조를 일시에 뒤집어 대단한 감동과 신선함을 선사한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프랭크와 티격 태격 유머러스하면서도 심금을 울리는 대사들을 주고받는 것은 물론 영화 전체의 나레이션까지 맡아 인생의 지혜를 끊임없이 들려주던 스크랩이라는 인물은 원작에 없었다는 점이다. 즉 70세에 ‘불타는 링’을 쓴 원작자 F.X 툴이 이 영화의 뼈와 근육을 만들어 놓았다면 감독인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각색자 폴 해기스는 영화에 살과 체온을 불어넣은 것이다.

권투 영화이면서도 멜러 영화이고, 장르 영화이면서도 파격적 주제를 담고 있는 <밀리언달러 베이비>는 결론적으로 ‘소통’에 관한 영화다.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할 것처럼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프랭키는 매기와 완벽하게 소통하는 순간, 번민을 넘어 중대한 결심을 한다. 매기의 청을 들어주기로 한 것이다. 그 옛날 다리를 절던 개를 안락사 시킨 뒤 삽을 들고 나타났던 매기의 아버지처럼.

프랭크는 밤에 주사기를 들고 병원에 나타나 매기에게 단호하게 말한다. “지금부터 네 산소 호흡기를 떼주겠다. 약물을 함께 주사할테니 편안하게 잠들거라… 그리고 무쿠슈라는 겔릭어로 ‘나의 혈육’이라는 뜻이었다.” 마지막으로 프랭키를 바라보는 매기의 눈에서 고마움과 감격의 눈물이 흐른다. 매기에게 트레이너이자 아버지로서의 마지막 주문을 마친 프랭키는 꾸부정한 뒷모습으로 어두운 병원 복도를 빠져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난다. 어쩌면 그가 병상에서 읽어주던 예이츠의 시 <이니스프리의 호수섬> 에 나오는 오두막을 진짜 찾아나서기라도 한 것처럼.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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