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친이 점심 때 건대입구역에서 비즈니스 미팅이 있다는 말을 듣고 쭐레쭐레 쫓아가 롯데백화점 푸드코트에서 그녀가 비즈니스를 하는 동안 옆에서 꾸역꾸역 점심을 얻어먹고 혼자 지하1층 반디앤루니스에 들른 나는, 느닷없이 이 땅의 문화 부흥에 미약한 힘이나마 보태야 한다는 일말의 책임감과 나의 페친인 류근 시인을 더욱 긍휼히 여겨야 한다는 갸륵한 마음이 두서없이 일어나 마침내 그의 시집을 찾아내고야 만 것이었다.

[상처척 체질]…”아 제목도 참 슬퍼…” 하다가 “아니지. 이런 건 류근 식으로 아 씨바 제목도 조낸 슬퍼…해야지” 라고 마음을 고쳐먹고 문제적 시집을 펼친 것이었다. 페이지마다 술냄새가 진동하는 이 퇴폐적인 시집은 뒤적뒤적할수록 읽을 만한 시들이 꽤 많이 나오지만 나는 특히 ‘유부남’이라는 야비한 시와 ‘가족의 힘’이란 뻔뻔한 시가 마음에 쏙 드는 것이었다. 일단 ‘가족의 힘’이라는 시를 소개한다.

 

 


가족의 힘

                          류근


애인에게 버림받고 돌아온 밤에
아내를 부둥켜안고 엉엉 운다 아내는 속 깊은 보호자답게
모든 걸 다 안다는 듯 등 두들기며 내 울음을 다 들어주고
세상에 좋은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세월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따뜻한 위로를 잊지 않는다
나는 더 용기를 내서 울고
아내는 술상까지 봐주며 내게 응원의 술잔을 건넨다
아 모처럼 화목한 풍경에 잔뜩 고무된 어린것들조차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노래와 율동을 아끼지 않고
나는 애인에게 버림받은 것이 다시 서러워
밤늦도록 울음에 겨워 술잔을 높이 드는 것이다
다시 새로운 연애에 대한 희망을 갖자고
술병을 세우며 굳게 다짐해보는 것이다

 

 

 

다들 류근 시인이 김광석의 노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의 가사를 쓴 사람이란 것은 아실 것이다. 이 시를 읽고 ‘유부남’이라는 시의 내용까지 궁금해진 분들은 나처럼 돈을 내고 이 시집을 사시기 바란다. 물경 팔천 원밖에 안 한다. 그마저 비싸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알리딘 중고서점을 뒤져보는 것도 좋겠다. 류근의 시들이 야리야리하고 좀 슬프고 많이 웃기긴 하지만 연애편지에 인용하기에는 지나치게 궁상맞거나 자학적이라 다만 한 번 읽고 즉시 내다 판 놈들도 대략 많을 것이란 것이 나의 짐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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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사람들은 욕도 참 성의있게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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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GV강변에서 옴니버스 영화 [키스]를 관람했습니다. 2년 전에 만든 영화인데 우여곡절끝에 이제야 개봉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덟 편의 키스에 얽힌 이야기들로, 거의 하룻동안에 다 찍은 영화들이라고 합니다. 제작비도 적고 시간, 장소 등에 제약이 많은 인디영화였기 때문이겠죠. 

저는 북한의 핵발사로 인해 라디오 생방송 스튜디오에 갇힌 채 청취자들에게 유언처럼 서로의 오랜 사랑을 고백하게 되는 디제이와 PD의 이야기인 '행복한 오후 2시' 와 골목에서 친구 삥뜯던 반장을 혼내주던 여고생 이야기 '소녀시대', 그리고 키스방에서 일하는 키스 알바생에게 훈계를 당하는 고시생 시봉이 이야기인 '달인' 이 재밌었습니다. 

배우 김혜나 씨는 제 여친과 친분이 있는 사이인데, 마침 이 영화에 출연하는 열 아홉 명의 배우 중 열 한 명을 감독과 제작진에게 소개한 '캐스팅' 담당으로 오늘 와서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잠깐 인사를 하더군요. 아마 인간성이 좋거나 대인관계가 대단히 넓은 배우인 거 같습니다. 행사가 끝나고 저희와 잠깐 만나 대화를 나눴는데, 요즘은 이런저런 재능기부도 하고 EBS에서 무슨 낭독 프로그램도 맡아 한다고 하더군요. 저와 예전에 일로 잠깐 만날뻔했던 얘기를 했더니 당시 상황을 너무나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어서 놀랐습니다. 김혜나 씨는 앞으로 소셜테이너로서의 활약이 기대되는 영특한 배우입니다.

이 영화엔 제 페친인 연극배우 서민성 씨도 잠깐 나옵니다. 실력 있는 연극배우들과 홍대앞 인디밴드 멤버도 배우로 출연을 하는 꽤 흥미로운 프로젝트입니다. CGV강변에서 사흘간 상영을 하고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는데 앞으로 다른 극장에 더 걸리게 될지 아니면 IPTV등으로 옮기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고 합니다.  2년 전 부산국제영화제 발표 때는 전회 매진을 기록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었다던데 이렇게 상영관을 잡지 못하고 있다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나중에 케이블이나 IPTV로라도 한 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적은 예산으로 만들었지만 이야기나 연기는 결코 허술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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