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라는 제목은

우리를 향한 엄중한 경고인지도 모릅니다

 

 

 

네이버에 이 영화의 제목을 치면 엉뚱하게도 ‘19이 뜨며 주민번호를 입력하라고 나옵니다. 아마 제목에서 풍기는 성인스러운느낌 때문인가 봅니다. 그러나 영화의 제목은 최초의 토키 영화 [재즈 싱어]에서 여가수의 노래에 환호하는 관객들을 보고 무대 사회자가 지금까지 본 건 아무 것도 아니고 다음 무대가 더 죽이니 기대하시라라는 뜻으로 한 말이랍니다.

 

이 작품은 [히로시마 내사랑] 등 영화사에 길이 남을 작품들을 만든 알랭 레네 감독의 신작입니다. 이 분은 무려 아흔 살이 넘었다는데 아직도 이렇게 영화를 만들고 있으니 참 대단한 노익장이죠?

 

 

영화는 많은 사람들이 차례로 “***씨입니까? 앙뜨완 감독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고인의 유언대로 귀하를 * *일 저녁 고인의 저택으로 초대하는 바입니다…”라는 똑같은 내용의 부고전화를 받는 장면으로 흥미롭게 시작합니다.

 

앙뜨완의 유언대로 배우들은 산꼭대기에 있는 저택으로 찾아오죠. 이 장면은 예전 헐리우드의 고전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나 [바람에 쓰여진 편지]처럼 아주 고풍스럽고도 우아한 느낌으로 표현됩니다. 여기 모인 배우들은 모두 과거에 앙뜨완의 영화나 연극에 출연한 적이 있는 주연급들입니다. 며칠 전 사냥총으로 자살해 이미 화장까지 마쳤다는 감독 겸 극작가 앙뜨완은 죽기 전 오늘 모일 사람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영상으로 미리 찍어놨습니다. 최근 한 극단으로부터 자신의 옛날 작품 '에우리디스' 리허설 영상을 받았는데 과연 이 극단에게 공연을 허락해도 되는지 당신들이 한 번 보고 판단해달라는 거죠.

 

리허설 영상에서는 아주 현대적이고 아방가르드적인 느낌의 무대를 배경으로 젊은 배우들이 '에우리디스'를 연기합니다. 그런데 불이 꺼진 거실에서 이 영상을 보던 배우들은 어느 순간부터 젊은 배우들의 대사를 함께 치고 들어갑니다. 자신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작품들이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것이죠. 이 장면은 참으로 멋집니다. 가만히 소파에 앉아 입술을 달싹거리던 배우들은 어느새 필름 속의 주인공으로 변하고 자연스럽게 같은 시대에 공연을 했던 배우들과 짝을 이뤄 연극 속의 연인이 됩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영화의 신비로움은 여기까지입니다. 전 영화를 보기 전 이동진 기자의 [언제나 영화처럼]에서 읽은 리뷰 때문에(너무나 훌륭한 작품입니다, 걸작입니다) 많은 기대를 하고 갔었지만, 이 장면 이후 반복되는 영상과 연극의 교차편집, 나아가 연극과 영화, 인생에 대한 본질적 외연 확대 등이 너무 뻔해서 그만 흥미를 잃고 말았습니다.

 

그렇다고 만듦새가 허술하다거나 연기의 질이 떨어지거나 하는 건 절대로 아닙니다. 다만 계속 반복되는 형식 실험이 좀 지겹다고나 할까요?

 

 

상영관도 별로 없고 해서 피곤을 무릅쓰고 밤 930분 영화를 억지로 보고  11시가 넘어 집으로 돌아와 TV를 켰더니 박근혜 후보의 대선후보 TV 단독토론이 방송되고 있더군요. 국민면접관 정진홍 중앙일보 논설위원이 아니, 화 안 나세요? 평소에 화를 어떻게 참으세요?”라는 아부성 질문을 던지지 제가 그 동안 참 별별 소릴 다 듣고 살았는데자꾸 듣다 보니까 내공이 쌓이더라구요그때마다 책을 읽었습니다. 명심보감, 정관정요뭐 이런 거근데 나중에 그게 다 제 게 되더라구요같은 차마 맨정신으론 하기 힘든 자화자찬을 듣고 있자니 그만 TV를 벽에서 떼어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마 만약에, 절대 그러면 안 되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박후보가 12 19일에 우리나라 대통령이 된다면, 우린 그때부터 참으로 기가 막힌 말과 믿을 수 없는 장면들을 끊임없이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굳이 그날 밤 이 영화를 찾아본 게 저 자신에게 보내는 무의식의 경고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선후보 'TV단독토론'이란 말이 웃긴다고? 아이고, 아직 멀었군. 당신은  아직 아무 것도 보지 못한 거야!”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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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일이지만 가끔 마주치게 되는 광고 동료 중에 큰일이야. 나 요즘 TV 연속극 뭐 하는지 하나도 몰라.”라는 말을 자랑처럼 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자긴 요즘 TV를 너무 안 봐서 도대체 어떤 드라마가 유행하는지, 어떤 쇼 프로의 어떤 캐릭터가 인기를 끄는지 잘 모르고 한참 화제가 된 다음에야 뒤늦게 인터넷으로 겨우 확인을 한다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만난 후배도 그랬습니다. 자긴 요즘 드라마 신의마의를 구분하지 못하고 천만 관객이 들었다는 광해도 시간이 없어 못 봤으며 넝쿨째 굴러온 당신이 아직도 방영되고 있는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게 자랑인가요? 그렇습니다. 알고 보면 지독한 자기 자랑입니다. ‘난 세속의 일엔 별 관심이 없이 고고하게 살고 있어라고 말하고 싶은, (그러면서 집에 가서는 일본드라마에 심취해있는) 고달픈 내면의 투영인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고등학생이 와서 , 난 요즘 교과서에 무슨 내용이 들어있는지 하나도 몰라요. 시험범위는 왜 맨날 그렇게 자주 바뀌는지. 헷갈려. 하하.”라고 한다면 과연 무슨 생각이 들까요? 아마 정신줄 놓고 사는 싹수가 노란 인생이라고 혀를 차게 될 것입니다. 광고인들에게 TV, 인터넷과 신문과 잡지 같은 각종 매체는 매일매일이 교과서이고 참고서입니다. ‘좋아, 싫어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많은 걸 다 챙겨 봐야 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적어도 안 본다고 자랑질은 하지 말라는 것이죠.

 

 

정치나 선거도 마찬가지입니다. ‘난 정치에 관심이 없어.’라고 하는 사람들을 만나보면 일단 정치 얘기가 나올 때마다 정신 산란하고 골치 아프다고 고개부터 내젓습니다. 자긴 박근혜와 문재인과 안철수가 하는 얘기가 다 거기서 거기고 다 똑 같은 거 같다고도 합니다. 어떻게 박근혜와 문재인과 안철수가 똑 같을까요? 그러면서 자세한 건 모른다고 단서를 답니다. 자기 일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비겁하고 쪼잔한 직무유기입니다.

 

유권자라면 당연히 공부를 해야 합니다. ‘공부해서 남 주나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잖아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공부를 하고 열심히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정치인을 뽑는 건 자기와 자기 주변인들의 미래에 매우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죠.

 

민주주의라는 이 허점 많은 제도 아래 살고 있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정치 행위는 몇 년에 한 번 하는 투표뿐입니다. 그래서 우린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투표는 나의 미래를 이롭게 하는 이기적인행위입니다. 그런데 나라의 미래를 망치고 자신들의 욕심 채우기 급급한 나쁜 정치인들일수록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유권자들을 몹시 사랑합니다. 오죽하면 말 많으면 빨갱이라고 몰아붙이던 우리나라입니다. 우리가 후보자들을 보고 그 놈이 그 놈이라고 자포자기하는 순간, 그 놈도 그 놈이 되고 그 놈이 아닌 놈도 그 놈이 됩니다. 가치체계가 뒤죽박죽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누구 입이 찢어질까요? 뒤가 구리고 비전이 불분명한 정치인이 가장 반길 상황입니다. 그리고 유권자에겐 판단 근거가 없어지니 모든 게 허무한 일 대 일상황이 됩니다. (로또 1등의 당첨 확률은 1/8,145,060이지만 되느냐 안 되냐만 놓고 보면 1/2 확률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코미디언이자 배우이자 영화감독인 기타노 다케시는 민주주의는 졸라 불완전한 체제야. 제대로 하려면 대학생에겐 두 표씩 주고 아줌마들은 두세 집 묶어서 한 표씩 줘야 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웃자고 한 말이지만 투표의 맹점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기도 합니다. 투표라는 게 옛날 아테네에서처럼 단란한 가정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선량한 아빠에게만 주어지는 권리라면 얼마나 쉬울까요? 그러나 단란한 가정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선량한 아빠에게 한 표가 주어진다면 오늘 또 누구를 속여먹을까궁리하는 사기꾼에게도, ‘은행이나 털어 외국에 가서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몽상가에게도 한 표가 주어지는 게 국민투표의 룰인 것입니다. 진정 자기의 미래를 위해 일할 사람을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도 한 표, 난 아무 것도 모르겠고 그 놈이 그 놈 같으니 아무나 찍을래, 라고 하는 이에게도 한 표입니다.

 

 

TV뉴스에서 정치 얘기 나온다고 고개 돌리지 마십시오. 인터넷에서 연예인이나 요리법 모아놓은 파워 블로거만 찾아 다니지 마십시오. 정치에 관심을 갖는 건 우리의 미래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나의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선거에서 이긴 사람이 5년 동안 우리의 월급과 집값과 세금은 물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귀찮더라도 우리 일에 관심을 가집시다. 괜히 고상한 척 허무한 척 말고, 좀 이기적인 사람이 됩시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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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는 '나만이 절대적인 진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자각에서 출발합니다. 우리들 중 누구도 정답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데서부터 대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가 잠정적으로 정답이라고,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상대방과 대화를 나누면서 언제든지 수정 가능한 것이어야 합니다. 상대방과 나누는 대화에 의해 내가 가진 정보의 양이 늘어나다 보면 분명히 어느 지점에선가 내 생각을 바꿔야 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대화'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이므로써 내 생각을 발전시켜 나가는 재미있는 작업입니다.

(김두식의 [헌법의 풍경]이라는 책을 읽다가요. 메모를 하고싶은 구절이 생겨서 오랫만에 만년필로 베끼고 나중에 제목을 달았더니 글씨들이 손에 닿아 번지고 난리네요.^^)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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