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밤에 CGV압구정에서 [우리도 사랑일까]를 봤습니다. 이 영화, 좋던데요? 언뜻 줄거리만 놓고 보면 어느 바람난 여자의 ‘내 마음 나도 몰라’ 고민담 같은 시시한 이야기일 수도 있었는데 거기에 좋은 연기와 내공 깊은 연출이 더해지니 마치 잘 만들어진 명품 가구처럼 아주 탄탄하면서도 반질반질한 작품이 되었습니다. 



마고라는 프리랜스 작가는 취재 차 어느 도시를 여행하다가 대니얼이라는 남자를 만납니다. 뭐, 여행 갔다가 누군가를 만나는 건 참 흔한 설정이기도 하지요. 실생활에선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이지만. (윤대녕의 소설들을 읽다 보면 혼자 여행을 떠나고픈 충동에 시달립니다. 그런데 막상 가보면 소설 속에서처럼 서늘한 인상을 한 여자가 혼자 선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거나 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음, 얘기가 옆으로 샜군요) 


그런데 알고 보니 대니얼은 마고와 한 동네에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바로 맞은편 집에. 여기까지는 [사랑과 전쟁]의 도입부와 다름이 없습니다. 

문제는 이 영화엔 ‘악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고의 남편 루는 집에서 요리책을 집필 중인 닭요리 연구가입니다. 루는 마고를 지극히 사랑할 뿐 아니라 마음이 넓은데다 유머감각도 뛰어난 남자입니다. 마고도 이 남자를 무척 사랑합니다. 마고는 알코올중독으로 고생하는 시누이를 비롯한 시댁 식구들과도 두루두루 사이가 좋습니다. 

그럼 새로 나타난 대니얼이 나쁜놈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특이하게도 관광지에서 인력거를 끌며 돈을 벌고 취미생활로 몰래 그림을 그리는 대니얼은 마고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만 대뜸 같이 자자거나 같이 살자거나 하며 보채지 않습니다. 인력거꾼이면서도 지적인 면모를 풍기는 대니얼은 심지어 마고와 루의 결혼기념일에 극장까지 공짜로 인력거를 태워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기껏 한다는 소리가 “30년 후에 등대 밑에서 만나 키스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냐”며 2040년 8월 5일 2시에 둘이 만날 것을 약속하자고 합니다. 


만약 그 약속이 지켜졌다면 또 하나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생겨났겠죠. 그러나 마고는 대니얼이 자신을 떠나던 그 날 새벽에 사랑하는 남편 루에게 어렵게어렵게 고백을 하고 맙니다. 당신을 너무너무 사랑하지만, 그리고 당신에게 너무나 미안하지만, 난 아무래도 새 남자 루에게 가야겠다고. 

가슴 아픈 장면입니다. 인생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다는 걸 잘 알면서도 매번 이런 장면을 볼 때마다 한숨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고백 장면은 마고를 배제하고 루만 계속 핸드헬드로 프레임 안에 머물게 함으로써 독특한 미학적 성취까지 이루어 냅니다. 그러니까 가슴 아프면서도 감독의 재치가 돋보이는 장면이기도 한 거죠. 


이런 저런 정황으로 봐서 이 영화의 감독 사라 폴리 역시 천재인 거 같습니다. 배우 겸 감독인 그녀는 작년인가 극장에서 개봉했던 귀엽고도 발칙한 영화 [스플라이스]의 여주인공이기도 했습니다.(인디 SF영화 좋아하시는 분들께 강추) 그리고 영화를 보는 내내 감탄했던 것이 이 영화에서는 그 어떤 소재가 나오더라도 이내 자연스러워진다는 것입니다. 인력거, 닭고기 요리책, 수영장 물속에서 오줌 싸기, 여자들의 음모가 그대로 드러나는 샤워장 씬, 놀이기구, 쓰리썸까지... 

그리고 단순한 애정사에서 비껴나 개개인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슬기롭고도 우스꽝스러운 시선들이 있습니다. “비행기를 놓치는 건 두렵지 않아요. 비행기를 놓칠까 봐 걱정하게 되는 게 두렵지.”라는 마고의 통찰력 있는 대사도 좋지만 환희와 쓸쓸함이 교차하는 놀이공원 장면에서 촌스럽게 흐르던 ‘Video kill the radio star’라는 노래는 또 얼마나 잘 어울리던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정다운 노래들, 그리고 루가 편집자와 전화통화할 때 마고가 루의 입안에 자기 손가락들을 넣고 마구 휘저으며 장난치는 장면은 참으로 사랑스럽죠. 헤어지기로 한 뒤 샤워를 권하고 늘 해왔듯이 샤워하는 마고의 머리 위로 찬물 한 바가지를 부어 놀래킨 뒤 기다렸다가 “나중에 나이 들어서 추억거리로 얘기해 주려고 매일 이렇게 했었다”라고 털어놓는 루의 말을 들을 땐 참 마음이 찡해지기까지 합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이 영화의 제목은 아무래도 ‘우리도 사랑일까’ 보다는 ‘이것도 사랑일까’가 더 어울리지 않나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는데 원제는 ‘Take this waltz’, 레오나드 코헨의 노래더군요. 영화 마지막쯤에 이 노래가 흐르면서 마고와 대니얼의 새로운 나날들이 함축적으로 전개되는데 매우 아름답고도 파격적입니다. 

아, 그리고 여주인공 미셸 윌리엄스가 참 아름답습니다. 몸매도 훌륭하고 연기도 정말 섬세하게 잘 하구요. 인터넷으로 기사를 찾아봤더니 우리나라에선 9월 27일에 개봉했던데 벌써 이번 주에 대부분 막을 내리는 모양입니다. 아깝지만 나중에 IP TV로라도 꼭 한 번 찾아서 보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망망디
,

 

흔히 요즘은 스토리텔링의 시대라고들 하죠. 스토리텔링, 스토리텔링, 참 말은 많은데 과연 그게 뭘까요? 저도 지난 몇 달 대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면서 그토록 강조했던 스토리텔링이지만 막상 현업에서 필요해질 때면 또 막연해지기만 합니다.

 

얼마 전 어느 상가에서 같은 조문객으로 만났던 후배는 모 휴대폰 회사 디자인팀에 있는데, 그녀도 요즘 스토리텔링의 중요성 때문에 매번 고심하고 있으며, 급기야 그 회사에서는 스토리텔러라는 직책의 사원을 별도로 모집할까라는 생각까지 하고 있다더군요.

 

그런데 며칠 전 신문에서 본 펠릭스 곤살레스토레스의 이야기가 저를 잡아당겼습니다. 39살에 숨진 쿠바 출신의 미국 작가 곤살레스토레스는 1991년에 사랑하는 동성 연인 로스 레이콕을 잃었는데, 흐트러진 텅 빈 침대를 찍은 대형 사진 [무제]와 설치작품인 [무제-완벽한 연인들]에서 연인을 잃은 그의 상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 쌍의 동일한 원형 시계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한날 한시에 같은 회사 제품의 건전지를 넣고 같이 시간을 맞추고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기계적인 결함이나 우연, 건전지의 성능 등에 의해 어느 한 쪽이 결국 먼저 멈추게 됩니다. 그리고 한쪽 시계가 멈추면서부터 이 작품의 의미는 비로소 시작됩니다. 컨셉이 더욱 분명해 지는 거죠. 작가는 잔인하게도 이 작품에 완벽한 연인들이란 제목을 달았습니다.

 

어떻습니까. 주저리주저리 설명하는 대신 평범한 벽시계와 건전지만으로도 단숨에 인생의 슬픔과 아이러니를 함축적으로 표현해 내는 것. 이런 게 바로 스토리텔링 아닐까요.

 

 

 

'길위의 생각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책 알리바이  (0) 2013.01.15
이기적인 사람이 됩시다!  (0) 2012.10.25
아침 시 한 편  (0) 2012.04.17
가정식백반  (0) 2012.03.28
우리 시대의 소중한 싸움 닭, 진중권  (0) 2012.02.28
Posted by 망망디
,

 

일요일에 시집을 한 권 샀습니다. 이정록의 [의자].

 

더딘 사랑

 

돌부처는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모래무덤이 된다

눈 깜짝할 사이도 없다

 

그대여

모든 게 순간이었다고 말하지 말라

달은 윙크 한 번 하는데 한 달이나 걸린다

 

'짧은 글 짧은 여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심심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  (2) 2013.04.11
선운사 동백꽃  (0) 2013.03.18
월조회의 추억  (0) 2013.02.03
멀리 보고 살자구요  (2) 2012.03.26
행복  (0) 2012.03.23
Posted by 망망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