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사람들 중 ‘간서치의 책 이야기’라는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있다. 책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나도 한때 이 모임의 회원이었으나 그들의 엄청난 독서량과 진지하고 성실한 태도에 질려 활동은 안 하고 가끔 눈팅만 하고 지내는 신세다. 간서치는 옛날 조선시대에 살았던 이덕무처럼 책만 읽는 바보를 이르는 말이라고 들었다. 아무튼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기꺼이 이런 바보 소리를 들으면서도 틈만 나면 책속에 파묻혀 지내기를 꿈꾼다.

여기 세계 최고의 간서치라고 소문난 할아버지가 있다. 알베르토 망구엘이라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작가다. 일찌기 서점 점원으로 일할 때 눈이 먼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주었다는 전설적인 이력을 가지고 있는 이 작가는 [은유가 된 독자]라는 이번 저작에서도 책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쏟아내고 있다.

‘은유가 된 독자’라는 책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책의 중요한 주제 또는 아젠다는 독서에 대한 온갖 메타포, 즉 은유들이다. 흔히들 책은 앉아서 세상을 여행하는 것이고 여행은 걸어 다니면서 읽는 책이라 했다. 여기에 인생이 끼어든다. 인생은 여행이고 독서는 인생을 경험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삼담논법은 이렇게 해서 인생, 여행, 독서로 이루어진 ‘은유 삼종세트’로 완성된다.


망구엘은 기원전 7세기에 쓰여진 ‘길가메시 서사시’부터 구약성서, 아우구스티누스, 몽테뉴, 셰익스피어, 돈키호테, 플로베르, 톨스토이, 그리고 21세기의 전자책을 읽는 행위에 이르기까지 책을 쓰고 읽는다는 것의 역사와 의미에 대해 진정한 어른들만 낼 수 있는 경험과 지혜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물론 내가 '길가메시 서사시'를 읽었을 리가 만무하다. 구약성서나 아우구스티누스도 읽지 못했고 보바리 부인은 어렸을 때 삼중당문고로 겨우 읽었던 기억이 가물가물하고 오히려 플로베르가 법정에서 ‘마담 보바리는 바로 나다!’라고 외쳤다는 가십이 더 생생하다. 하지만 그러면 어떠랴. 독서의 대가가 이끄는 대로 한 발 한 발 따라 걸어가기만 해도 햄릿의 고뇌와 돈키호테의 야망, 안나 카레니나의 주체성, 오르한 파묵의 통찰 등을 차례대로 만날 수 있고 결국엔 여행자, 은둔자, 책벌레로 분류되는 독자의 지위를 삼위일체로 한꺼번에 다 경험할 수 있는데.


나는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가 단테의 [신곡] 첫 문장에서 따왔다는 걸 알베르토 망구엘의 이 책을 읽으며 처음 깨달았다. 페터 한트케가 독일 사람이 아니라 오스트리아 극작가라는 것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뭐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다. 다만 프롤로그에서 '우리 인간은 세상이 스토리로 구성되어 있다고 간주하는 유일한 종’이라 말하던 작가는 여행자가 됐든, 상아탑의 거주자든 아니면 책벌레든 우리는 모두 ‘독서하는 피조물’이며 단어를 섭취하고 단어로 이루어져 있으며 단어가 존재의 수단임을 잘 알고 있다는 결론을 전해준다. 우리가 책을 읽는 것은 거의 본능에 가까우며 생존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행위라는 소리다. 스마트폰에 둘러싸인 채 자신을 의심하면서도 꾸역꾸역 전철 안에서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에게 진정 위로가 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Posted by 망망디
,

행락객

길위의 생각들 2017. 10. 31. 11:22

어젯밤 숙소에서 뉴스를 보니 단풍철을 맞아 전국의 산마다 행락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행락이라는 말의 어감이 왠지 불량스럽고 낮춰보는 것 같아 사전을 찾아보니 ‘놀거나 즐기러 온 사람’이란 뜻이란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무릇 사람이란 노는 것보다는 열심히 일을 하거나 공부를 해야 한다고 배웠고 뭔가 즐기는 것은 쾌락(아, 여기에도 락이 들어가네)과 연결되어 괜히 떳떳치 못하다는 자기검열에 시달리며 살았던 모양이다.

순천에 내려온 김에 나도 행락객의 일원이 되기로 한다. 단풍이 이렇게 좋은데, 바람이 이렇게 시원한데 여기서 행락을 안 하면 뭘 한단 말인가. 단풍만큼이나 울긋불긋한 등산복을 입은 강천산 등산객들은 깔깔대고 웃으며 걷다가도 폭포가 나오면 멈춰서 사진을 찍었고 아름드리 세타콰이어가 나오면 얼른 가서 나무에 팔을 척 얹고 사진을 찍었다. 전망대엔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빼곡해서 오래 서 있을 수도 없었다.

즐거웠다. 단지 단풍과 계곡을 구경하기 워해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란히 걷고 있다니. 울긋불긋 유치찬란한 자연과 울긋불긋 찰칵찰칵 히히하하 유치찬란한 행락객들. 이래저래 좋은 날이다. 이런 날을 자양분 삼아 또 일주일을 버텨봐야지. 아, 서울이 싫다.


'길위의 생각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다  (0) 2017.12.03
불순한 인생  (0) 2017.11.22
다시 써 본 프로필  (0) 2017.10.30
의자에 대하여  (0) 2017.09.22
유쾌한 자발적 노동착취의 현장 - [은곡도마 체험교실]  (0) 2017.08.20
Posted by 망망디
,

데제과에게 빼빼로데이는 중요한 날이다.이 기념일은 기업측에서 유포한 게 아니라 소비자들 사이에서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날이라 더 자랑스러워 하는 자산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제 11월11일이 빼빼로데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혹시 한 번쯤 "11월 11일은 농업의 날입니다. 장애인의 날이기도 하구요. 롯데 빼빼로가 알려 드렸습니다" 같은 광고를 내보내면 어떨까. 새로 온에어된 빼빼로 광고를 오늘 아침에 보고 문득 든 생각이다. 물론 그 기업의 정서로는 매우 힘든 일이겠지만.


http://www.tvcf.co.kr/YCf/V.asp?Code=A000329257

Posted by 망망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