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었을 때는 재법 선이 굵은 사회파 드라마를 연출했으나 요즘은 '살짝 막장성 드라마'로 외도를 함으로써 시청률의 달콤함을 맛본 모 PD에게 동료 PD가 장래가 촉망되는 어린 작가를 하나 소개해 줬다.
"야, 얘가 아주 골때려요. 제2의 임성한이라는 소릴 듣는다는 앤데, 사고가 아주 자유롭고 튀어."
호기심이 생긴 모 PD는 다음날 그녀를 방송국으로 불렀다. 마치 준비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 자신이 요즘 구상하고 있다는 작품에 대해 피처링을 시작하는 그녀.
"일단,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탄생해요. 그런데 대통령직을 시작하는 수락 연설문부터 그녀 대신 읽고 고쳐주는 여자가 있어요. 최 마담이라고. 그녀는 대통령이 어렸을 때부터 따르던 어떤 사이비 교주의 다섯번째 딸이에요. 어렸을 때부터의 인연으로 그녀는 대통령이 읽는 모든 연설문의 초고를 첨삭지도해요. 아, 인사에도 개입해요. 장관도 추천하고 고위 공직자도 자르고 그래요. 그리고 대통령 옷이나 핸드백도 죄다 이 여자가 챙겨줘요..."
잠깐, 그럼 대통령은 뭘 하지? 모 PD가 중간을 자르고 물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대통령은 그녀가 시키는대로 읽고 말하고 입고 오가며 대통령 코스프레를 하게 돼요. 그녀 역할이 좀 비는 거 같아서 제가 '유체이탈화법'을 하나 고안했어요. 자기 책임이 불거질 일이 생길 때마다 남의 일처럼 얘기하는 화법이에요. 그녀는 스스로는 얘길 잘 안 해요. 어쩌다 최 마담이 바빠서 첨삭지도를 놓치는 날엔
'우리의 핵심 목표는 올해 달성해야 할 것은 이것이다 하는 것을 정신만 차리고 나가면 우리의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걸 해낼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같은 앞뒤가 맞지 않는 문장이 튀어나와요. 이렇게 대본을 쓰면 욕을 먹겠지만 상관 없어요. 사람들은 욕하면서도 계속 이 드라마를 볼 테니까요. 그리고 아주 가끔씩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 같은 코엘류 식의 잠언을 하나씩 심어요. 여당은 살아남기 위해 이 사실들을 다 알면서도 모르는척 하죠. 야당은...에, 야당은 그냥 병신들이라 몰랐다고 할까요? 좀 리얼리티가 떨어지긴 하지만 뭐 꼭 틀린 말도 아닌 거 같고.
최 마담이 재단을 설립하면 하루만에 허가가 나와요. 자주 다니던 마사지센터 사장을 바지사장으로 앉혀도 다 돼요. 재벌들이 수백 억씩 거둬주니까. 아, 그리고 막판엔 CF감독도 하나 등장해요. 그 사람을 거치지 않고서는 대한민국 문화판에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데 그를 최 마담한테 소개한 남자는 전직 호빠 마담쯤으로 하는 건 어떨까요? 황당할수록 재밌잖아요. 이왕 지르는 거 막 쓰죠 뭐. 최 마담의 딸은 말을 타는데 얘가 말 타면서 여러 사람의 목을 베요. 스물 살에 애도 하나 낳구요. 애 아빠는 아직 어리니까 그냥 '전직 삐끼' 정도로 처리할까요?
그러다가 최 마담이 도망가면서 컴퓨터를 건물 관리인한테 맡겨요. 그런데 어떤 기자가 그걸 우연히 손에 넣고 보니 거기 그동안의 대통령 연설문이나 외교문서가 고스란히 다 들어있는 거죠. 말하자면 최 마담의 집이 사실상의 청와대 집무실이었다는 게 밝혀지는 거죠. 바로 전날 대통령은 개헌을 하자고 쉴드를 쳐놓은 상태인데...
눈이 동그래져서 그녀의 얘기를 듣던 모 PD는 손을 번쩍 들어 그녀를 멈추게 하고는 급히라 부하직원을 불렀다.
"야, 이년 당장 치워라. 어따대고 이런 개막장을...도대체 지금 니가 씨부린 것들이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냐, 이 미친년아?"
그 후로 장래가 촉망되던 그 어린 작가는 모 PD가 하도 여기저기 치를 떨며 악소문을 내는 바람에 아주 연예계에 발을 붙일 수 없게 되었고 그리하여 우리는 '제2의 임성한'이 될 아까운 재목 하나를 놓치게 되었다는 아주 슬픈 이야기.
'2016/10'에 해당되는 글 7건
- 2016.10.27 <제2의 임성한> 1
- 2016.10.27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가 생각나는 단편 [뜨거운 차 한잔] 12
- 2016.10.18 산책은 걸으면서 하는 독서가 아닐까 - 이원의 [산책 안에 담은 것들]
- 2016.10.12 눈물 나는 단편 - 권여선의 <봄밤>
- 2016.10.08 대한민국과 대한민국이 아닌 곳의 차이 - [설리-허드슨강의 기적]
- 2016.10.05 옥상 윤 여사
- 2016.10.02 슬프고 웃기고 아련한 스무 살 청춘들의 비망록 -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어제 저녁, 이승연 배우가 나오는 독립영화를 논현동에 있는 '이디야커피랩'에서 보게되었다. 이디야 커피랩 사장께서 매장 한 곳에 'E씨네'라는 아주 작은 상영관을 만들어서 일반인에게 무료로 개방한 것이다.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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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가 된다는 것. 슬리퍼를 신고 트레이닝복을 입고 헝클어진 머리로 어슬렁거리는 동선이 생긴다는 것. 잘 모르는 가게 주인과도 "안녕하세요" 인사를 나눌 수 있다는 것. 뒷골목에 있는 오래된 빵집과 오래된 떡집을 비교할 수 있다는 것. 가장 맛있는 떡과 빵을 고를 수 있다는 것. 지도에 생겨나고 사라지는 곳을 표시할 수 있다는 것. 길을 자꾸자꾸 발견하게 된다는 것. 알게 되는 골목만큼 잠시 멈춤, 즉 간단(間斷)의 시간도 늘어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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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점심시간에 교보문고 가서 산 권여선의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 중 <봄밤>을 회사에서 읽고 조금 울었다. 서점 갈 때마다 조금씩 들춰보다가(이 책의 책장을 펼칠 때마다 이상하게 급한 전화가 왔다) 오늘에야 사서 끝까지 읽은 것이다. 힘들 때 이렇게 슬픈 소설을 읽으면 왠지 힘이 난다. 눈물에도 세로토닌이 들어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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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리 - 허드슨강의 기적] 을 조조로 봤다.
영화를 보면서 많이 울었다. 비행기가 허드슨강으로 비상착륙 하기 전에 여승무원들이 침착하게 매뉴얼에 따라 커다란 목소리로 '머리 숙이고! 몸은 낮추고!'를 반복적으로 외치는 장면부터 이상하게 자꾸 눈물이 났다. 그래, 그냥 저렇게 하면 되는 거였는데.
승객들이 물 위에 불시착한 비행기에서 내려 양쪽 날개 위에 가지런히 서 있다가 한 명씩 구조되는 모습을 보며서도 눈물이 났다. 아니, 그냥 물에 반쯤 잠긴 비행기 선체를 보면서(사실은 아, 세월호 때랑 똑같네, 라는 생각이 반사적으로 들었을 때부터) 화가 나고 눈물이 났다. 아침에 출퇴근용 보트 선원들이 달려와 사람들을 구조하는 장면에서도, 지나가던 헬기가 관제센터와 무전을 주고받고 구조작업을 펼치는 장면에서도 눈물이 나고 울화통이 터졌다. 아, 저 나라와 이 나라는 얼마나 다른가. 155명 전원이 구조되었고 시작부터끝까지 모두 24분만의 일이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연출력에 대해 새삼 더 보탤 말이 없다. 그냥 담백하게 한 시간반의 러닝터임 안에 사고와 반성과 해야할 일과 가족애와 정의로움과 떳떳함을 모두 담아냈다. 기장과 부기장이 공청회 중간에 잠깐 나와 서로 나누는 짧은 대화 중 "We did our job." 한 줄엔 그 떳떳함이 가득 차 있다. 옆자리를 보니 아내도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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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로 도착한 문어를 한 시간동안 밀가루로 세척하신 후 비로소 옥상에 올라와 도도하게 차를 한 잔 하시는 윤혜자 여사.
이상하게 손이 안 가는 작가나 책이 있다. 이 책이 그랬고 이 작가가 그랬다. 예전에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에서 소설가 김훈이 추천한 50권 중 이 책이 들어 있었던 것 같다. 그때 느낌은 '김훈은 후배 작가들의 책도 참 많이 찾아 읽는구나' 정도였다. 그러면서 책 제목을 메모까지 해놨었는데 왜 정작 찾아 읽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이름이나 그 작가가 지닌 분위기가 지나치게 ‘운동권스럽지 않나’ 하는 얼토당토하지 않은 생각을 혼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공선옥은 왠지 뭔가 진지할 것 같고 거룩할 것 같고 게다가 작가의 고향이 전라남도이니 왠지 묵직한 주제의식이나 치열한 의무감을 가졌을 것만 같고…그래서 자꾸 다음에 다음에 하고 미뤘던 것 같다. 그 후에도 서점에서 만났을 때 수채화로 그려진 표지가 너무 ‘나이브’해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아, 이 정도면 병이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주위 사람들이 숱하게 죽었다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도 없는 섬에서나는 멋을 부릴 기회를 잃어버렸다(……)내가 가장 예뻤을 때나는 너무 불행했고나는 너무 안절부절나는 더없이 외로웠다_이바라기 노리코,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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