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릴러인줄 알고 갔는데 이중 삼중으로 설계된 교묘한 심리극에 홀딱 속았다가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피해자인 줄 알았던 이자벨 위페르는 알고 보니 칼자루를 쥔 여자였고 가해자는 복수를 당하는 게 아니라 어이 없게도 일종의 '사고사'로 죽는다. 


예상했던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뀐 것을 관객들이 서서히 깨달을 때쯤 맨 마지막 묘지 장면에서 뒷모습을 보이며 걸어가는 여자들은 캐롤 리드의 [제3의 사나이]의 엔딩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당당하고 얄밉다.  폴 버호벤의 연출은  그가 평생을 천착해 왔던 폭력과 욕망 사이에 유머까지 끼워넣는 여유를 부리면서도 전체적인 긴장감을 잃지 않는다. 무엇보다 나이가 느껴지지 않는 경쾌한 카메라 워크 역시 '폴 버호벤'이란 감탄을 하게 만든다. 


음악은 예전 [원초적 본능]을 떠올리게 하는 고전적인 맛이 있고 설정이나 시점이 다소 애매한 부분들이 있는데 그것마저도 폴 버호벤스러운 점으로 느껴진다. 이 영화는 원래 미국에서 만들려고 했으나 니콜 키드만, 줄리안 무어, 샤론 스톤 등이 모두 출연을 고사하는 바람에 유럽으로 건너와 이자벨 위페르와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굳이 분류해 보자면 그의 흥행작들인 [로보캅]이나 [토탈 리콜], [스타쉽 투루퍼스]보다는 버호벤 초기작인 [The 4th Man]과 바로 전작인 [블랙북] 사이에 있는 작품처럼 느껴진다. 씨네21 평론가들 중엔 미카엘 하네케와 비교하면 뭔가 아쉬운 점이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 사람도 있던데,  당치 않은 얘기다. 하네케 감독의 도저한 비관주의에 비하면 버호벤은 훨씬 낙관주의자에 가까우니까. 그는 아카데미 시상식 바로 전날 최악의 영화들을 뽑는 ‘골든 래즈버리’ 식장에 가서 최악의 감독상도 받고 주최자들과 낄낄대고 온 최초의 감독이기도 하다. 모두 보통 사람의 내공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이다. 

#폴버호벤짱 #이자벨위페르짱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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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부산에 온 가장 큰 목적은 벡스코역 근처에 있는 '면옥향천'에 가서 메밀소바를 먹는 것이었다. 이 메밀국수집의 주인인 요리사 김정영 씨는 아내가 취미로 마라톤을 하던 20년 전쯤 같은 클럽 멤버로 만났던 사람이라고 들었다. 아내는 그 후 마라톤을 그만 두었지만 정영 씨는 운동을 계속해 지금은 철인3종경기에 나갈 정도라고 한다.

어쨌든 우리가 저녁 여섯 시쯤 가게 앞에 도착하자 정영 씨가 나와 인사를 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오랜만에 보는 아내보다 처음 보는 나를 더 반가워 하는 것이었다. 어리둥절해 하는 나에게 "형님, 조금 있다가 그 이유를 말씀드릴게요" 라고 말하는 정영 씨. 한창 바쁜 시간이라 그런지 26석의 좌석은 가족과 친구, 연인 등 각양각색의 손님들로 꽉 차 있었다.

생각보다 잠깐 기다린 후 우리도 한 테이블을 차지하고 나니 정영 씨가 와서 인사를 했다. 아내인 윤혜자야 예전 마라톤 클럽 멤버였으니까 잘 알지만 나를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더니 엉뚱하게도 '음주일기' 얘기가 나왔다. 예전에 내가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50회 넘게 연재하던 음주일기라는 한심한 글을 우연히 읽고 이내 팬이 되었다는 것이다. 신기하고 놀라웠다. 나도 잊고 있던 음주일기인데 이렇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니.

정영 씨는 그렇게 나와 윤혜자를 따로따로 알고 있었는데 어느 날 두 사람이 사귄다고 하더니 끝내 결혼까지 하더라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 일이 어떻게 될 지 참으로 알 도리가 없으니 그저 늘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며 깔깔깔 웃었다.

아무 양념도 하지 않은 채 조그만 접시에 담겨 나온 메밀소바를 먼저 맛보라고 했다. 쫄깃하고 입에 착 감기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어 장국에 적셔 먹는 '모리소바'가 나왔고 일인 분을 두 그릇에 나누어 준 '순메밀 막국수'가 나왔다. 일 인분을 두 그릇에 나눠준 이유는 여기서 그 정도만 먹고 이 차 술집으로 가기 위해서란다.

모리소바의 장국은 짜지도 달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밍밍한 것도 아니었다. 메밀면은 조금 전까지 또아리를 틀고 있다가 방금 풀린 것 같은 탄력을 자랑하며 입안으로 들어와 한 번 더 꿈틀댄 뒤 치아 사이에서 잘게 끊어진 채 목 안으로 넘어갔다. 나의 짧은 식도락 경험으로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안정된' 맛이었다.

막국수의 국물이나 면도 정갈함을 잃지 않으면서 독특한 맛의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주 요리들과 함께 돈까스와 카레 고로케가 조금씩 딸려 나왔다. 보통은 막국수와 함께 수육을 내는데 이 집은 돈까스로 바꾸었고 그 결정은 '신의 한 수'로 불릴 정도로 손님들의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바삭바삭한 튀김옷을 입은 돈까스는 고기 육질이 부드러워서 어른은 물론 아이들이 먹기에도 그만이었던 것이다.

면옥향천이라는 상호 위에는 '김정영분식'이라는 마더 브랜드가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이곳에서 직접 면을 만든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식당 이 층에 있는 제면소에 가서 메밀면이 만들어지는 과정도 구경을 했다. 이 식당은 전국에 있는 메밀밭 몇 군데와 계약을 맺어 지역별 품종별로 메밀을 받고 그 식재료들을 잘 조합해서 막국수와 소바를 만든다고 한다. 대단한 포부와 정성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방식이었다.

정영 씨가 우리를 '해운대 하얀 오징어집'으로 데려갔다. 이 집은 오징어를 잘게 채썰듯 내놓는 곳이었다. 썩 마음에 드는 안주는 아니었지만 우리는 '대선' 소주를 시켜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정영 씨가 15년 전 사이판에 있는 식당에서 일 할 때 아내가 여행 가서 만나고 처음이라니 참 오랜 세월이 흐른 것이었다. 그동안 정영 씨는 우동에 전념하다가 어느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서 메밀면으로 방향을 돌렸고 몇 년 간의 노력 끝에 단골손님들에게 그 맛과 품질을 인정 받기에 이른 것이었다.

매출이 안정되고 매일 만석을 기록한 이후로 툭하면 사람들이 돈을 싸들고 찾아와 같이 사업을 하자고 권하지만 김정영 씨는 결코 웅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에게는 '왜 이 일을 하느냐'가 중요한데 같이 일을 하려는 사람들은 대부분 돈만 좇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럼 당신이 일을 하는 이유는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일단은 일이 재미 있어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좋은 재료로 정성을 다해 만든 음식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일 자체가 재미 있어서 열심히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멀리 본다고 한다. 굳이 얘기하자면 함께 만들어 가는 좋은 미래,가 자신의 목적이라 말한다. 하나 같이 평범한 음식점 주인을 넘어서는 멘트들이었다.

운동을 열심히 하는 이유도 그 연장선이다. 그 동안 TV에 자주 출연을 했지만 가게 안에는 그런 홍보 액자는 하나도 없고 오직 '건강한 사람이 건강한 음식을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라는 문구만 걸어 놓았다고 하며 웃었다. 일요일은 칼 같이 쉬는 것도 종업원들의 안정된 삶을 위해서다. 26석의 가게에 11명의 종업원이 일하는데 인원을 줄이지 않는 것도 종업원들의 좋은 삶이 좋은 음식을 만든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리고 생활을 단순하게 만드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맛있는 횟집에는 별다른 '스끼다시'가 필요 없듯이 좋은 음식을 만드는 사람에게는 단순한 생활이 필수라는 것이다. 꾸준한 운동을 통한 체력 관리, 그리고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지 않는 떳떳함. 얘기를 나눌수록 식당 주인이 아니라 철학자와 술을 마시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도 책에서 배운 철학이 아니라 온몸으로 부딪혀 깨달은 생활철학이다.

어떤 분야든 정점에 오른 사람들은 자신만의 통찰과 철학을 느낄 수 있는데 김정영 씨도 예외가 아니었다. 물론 조금 특이한 점도 있다. 그의 마라톤 풀코스 기록은 2시간38분이라고 한다. 도대체 무슨 음식점 주인이, 무슨 철학자가 이렇게 지구력이 좋단 말인가.

마지막 술자리 '붉은 수염'에서 술을 마시던 그는 어느 순간 벌떡 일어나 '계산을 했으니 술을 더 드시다가 가시라'고 말하며 작별 인사를 했다. 일요일인 내일 새벽 자전거 200Km를 달리려면 지금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해마다 철인 3종경기에 나가는 메밀국수집 주인을 목격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소주를 한 잔 더 마셔 보았다. 새벽 한 시 가까운 시간이었다.



#면옥향천 #김정영분식 #메밀소바 #부산맛집 #면식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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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기구를 바꾼다
모니터를 껐다 켠다 
노트북을 들고 커피숍으로 간다 
초콜릿을 먹는다 
인터넷 서핑을 한다 
화를 낸다 

아이디어는 안 나오고
시간은 없을 때

광고회사 다니는 사람들은
별 이상한 짓거리들을 한다 
사실은 다 소용 없는데  

아이디어는 조용필이다 
맨 마지막에 나오니까  

(그나마 나오면 다행. 안 나오는 날이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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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먹자고 하는 일인데..." 
 
사회생활을 하면서 한 번씩은 들어봤음직한 '밥벌이'에 대한 멘션이다. 그런데 우리 회사에는 놀랍게도 밥을 잘 안 먹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돈을 아끼느라 그런 건 물론 아니다. 원래 식욕이 없어서인 경우도 좀 있고 다이어트 때문인 경우도 있지만 아무튼 내가 근무하는 3층 기획실의 인원 대부분은 점심을 안 먹거나 일반인과 매우 다른 형태로 음식을 섭취한다.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도 한두 사람 밥을 안 먹는 경우는 있었지만 이렇게 떼를 지어 안 먹는 회사는 처음 아닌가 싶다. 

하루 종일 굶고 가끔 편의점에 가서 컵라면이나 맥주 한 캔을 마시고 들어오는 용 모 실장 같은 경우 왜 그렇게 밥을 안 먹냐고 한 번 물어봤더니 "뭐, 귀찮은데 하루 세 끼를 꼭 다 챙겨 먹어야 하나요?"라고 태연하게 반문한다. 김 모 실장님 같은 경우는 집에서 가져온 찐 고구마나 바나나 등을 끼니로 삼는다. 고 모 실장님은 크게 앓은 뒤 건강관리를 위해 소식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웃기는 건 그러다가 아주 가끔 다 늦은 저녁에 컵라면이나 짜장면 같은 걸 폭식하고는 후회를 한다는  것이다. 

설상가상, 나와 한 팀에서 일하는 카피라이터 승찬 같은 경우는 할 일이 있으면 신경이 곤두서서 밥숟가락을 입에 대지 못하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무슨 프로젝트가 하나 있으면 거의 점심 저녁을 건너뛰고  미친듯이 일만 한다. 그런다고 아주 굶는 건 아니다. 일이 끝나고 밤 늦게 집에 가서 혼자 폭식을 한다고 고백한다. 어머니는 '뭐 하느라 밥도 못 먹고 들어와 이렇게 많이 처먹냐'고 옆에서 한숨을 내쉬시고. 이 놈은 어쩌다가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가면(거의 없는 일이지만) 언제 굶었냐는 듯이 짜장면 곱배기에 공기밥을 추가해서 순식같에 해치우는 괴물이다. 

몇 달 전 새로 들어온 카피라이터 수연은 그 정도가 더 심하다. 아예 끼니 때마다 굶는다. 그래서 그런지 몸도 깡말랐다. 한 번은 궁금해서 "그렇게 안 먹고 어떻게 버티냐?" 물었더니 집에 들어가서 뒤늦게 밥솥 끌어안고 먹으니 걱정 말라고 한다. 그러나 평소 습관이나 음식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아무래도 거짓말인 거 같다. 

이래저래 우리 회사에서 끼니 때마다 밥을 챙겨먹는 사람은 '혹시 나는 식충이가 아닐까?' 하는 자괴감을 느끼도록 되어 있는 아주 나쁜 환경이다. 그동안 점심시간에 정상적으로 식욕을 불태우는 인간은 나와 민섭 팀장 둘뿐이었는데, 다음 주부터 민섭이 다른 회사로 가게 되었다. 대단히 섭섭하고 괴로운 일이다. 이제 나는 누구랑 밥을 먹어야 하나. 걱정이 태산이다. 

오늘 민섭이 환송회라고 롤링페이퍼를 만든단다. 나는 롤링페이퍼에 우리 회사의 '단식 풍조'에 대한 비판의 글을 썼다. 실명을 거론했지만 풀네임도 아닌데 설마 이걸로 필화를 겪지야 않겠지. 에이, 설마. 




용 실장은 안 먹어 
건익 실장님도 안 드셔 
고 실장님도 안 드셔 
문 실장은 늦게 와 
재남 실장은 외출 중 
승찬이는 잘 안 먹어 
수연이는 더 안 먹어 
선아는 다이어트 
은솔이는 아직 안 친해 
유빈이는 너무 과묵해 

3층에서 점심시간에 
식욕에 불타는 건 
현민섭과 나
둘 뿐이었는데 
이제 너마저...

 함께 밥 먹는 사람을 
'식구'라고 부른다지?
잘 가라, 식구!
그리고 또 보자 
한 번 식구는 영원한 식구니까 

- 4년된 식구, 편성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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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JTBC뉴스가 끝나고 IP-TV로 이재용 감독의 [죽여주는 여자]를 봤다. 처음엔 일찍 자겠다던 아내도 어느덧 TV앞에 앉더니 끝까지 영화를 지켜보았다. [정사]나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 같은 날렵한 드라마를 만들던 이재용 감독이 웬일로 파고다공원의 박카스 아줌마 얘기래? 했는데 막상 영화는 생각보다 귀엽고 산뜻했다. 이를테면 [친구]를 만들던 곽경택이 어깨에 힘 빼고 [똥개]를 만든 느낌이랄까. 작년 10월에 개봉한 영화다. 


윤여정은 나이로는 분명 노인이지만 그냥 노인이 아니다. 어울리지 않게 청자켓을 입고 새침한 표정을 지어도 어울리고 고양이밥을 들고 마당으로 나오다가 다른 사람의 로맨스를 목격하고 부러워하는 얼굴에도 어울린다. 그렇다. '발리 윤식당'의 셰프도 윤여정이지만 이렇게 자그마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를 숨기지 못하며 흔들리는 눈동자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그녀와 마주할 때 우리는 아직 윤여정만큼 '원톱'을 소화해낼 수 있는 여배우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같이 나오는 배우들과의 화학작용도 좋다. 트랜스젠더 배우 안아주나 윤계상이 윤여정과 함께 이태원의 이층집에서 농담을 주고받는 장면에서 내가 "완전 루저들의 합창이네?!" 라고 했더니 아내도 빙긋이 웃으며 동의했다.

여기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과거 성매매로 만난 사이지만 서로 예의를 지키고 품위가 있는 멋진 노인들이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이게 가능한 게, 그들을 바라보는 카메라엔 인간에 대한 연민이 스며있기 때문이다. 김기덕이 만들었으면 비린내가 났을 영화가 이재용이라는 필터를 거치면서 한층 담백해졌다. 그렇다고 푸근하거나 흐뭇한 것까지는 아니다. 그래도 윤여정이 오랜 친구들의 부탁을 들어주느라 살인자가 된 뒤 미련없이 체포되어 경찰차로 실려갈 때 운전하던 경찰이 건내주는 담배 한 가치의 연기는 참으로 위로가 된다. 작품 전체가 열여섯 평짜리 이층 양옥집만 하다면 거기에'사는 게 다 그렇지 뭐' 하고 라는 동의가 두세 평짜리 옥탑방처럼 붙어 있었기에 더 좋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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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연극이 무대에 다시 오른다는 소식만으로도 사람들이 꺄아, 소리를 지르는 작품들이 있다. 지난 달 1년 만에 다시 막을 올린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가 그랬다면 이번 달엔 2년 만에 대학로로 돌아온 [프로즌] 역시 그렇다. 도대체 사람들은 왜 이 작품들에 열광하는 걸까. 극단 맨씨어터 10주년 기념으로 올린 [프로즌]을 보았다.

연극을 영어로는 'Play'라고 한다. 기본적으로 뭔가를 생산하는 행위라기보다는 노는 것에 가까워서 그럴 것이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면 그럴 듯한 거짓말을 지어놓고 무대 밑에서, 또 무대 위에서 서로 암묵적으로 진짜처럼 여기며 그 세계를 통해 진실을 말해보려는 '수작'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더 맞는 거 아닐까. 더구나 [프로즌] 같은 번역극은 분명히 우리나라 배우들이고 우리 말 대사인데도 등장인물들의 이름이나 의상, 분장, 배우들의 억양 등에서 어릴 적 TV에서 보던 '더빙 외화'를 보는 듯한 낯섦을 경험하는 재미가 플러스 된다. 물론 그만큼 배우들의 연기와 대사 능력이 보증되어야만 가능한 쾌감이겠지만.

어린 딸 로나를 유괴당하고 20년 동안 그녀가 살아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던 낸시가 있다. 그리고 로나를 비롯한 수십 명의 소녀를 납치 및 성폭행한 소아성애자이며 연쇄살인범인 랄프가 있다. 두 사람 사이엔 연쇄살인범들의 심리를 연구하는 정신과의사이자 알코홀릭인 아그네샤가 끼어든다. 그녀는 랄프 같은 사람은 정상인들과는 뇌구조부터 다르므로 그의 납치 강간 살해행위도 범죄라기보다는 일종의 질병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심리 전문가다. 그러나 천진한 미소를 띤 살인마에게 사랑하는 딸을 잃은 낸시도 그렇게 생각할까? 대충 설정만 훑어봐도 만만치 않은 연극이다. 과연 이렇게 꽉 짜여진 등장인물 구도 속에서 배우들은 어떤 이야기를 펼쳐갈 것인가.


랄프는 참 표현하기 힘든 인물이다. 관객들에게 혐오와 연민을 동시에 느끼게 해야 한다. 어린아이에게 말을 걸었다가 무시를 당하면 심하게 상처를 받는 약한 영혼임과 동시에 소녀들을 밴으로 유인해서는 '아프지 않게' 죽였다고 자랑하는 섬뜩한 싸이코패스이기도 하다. 심지어 자신을 체포하러 온 경찰들의 무능을 지적하기도 하는 전도본말의 캐릭터다. 랄프 역을 맡은 배우 박호산은 흥분하면 말을 더듬거나 쌍욕을 내뱉는 중간중간 해맑은 미소를 내보이는 설정에 '틱장애'라는 신의 한수를 더 얹어 싸이코 살인마의 내면으로 깊숙히 들어간다. 막판에 격하게 자신의 뺨을 치는 장면에서는 '정말 아프겠다'라는 생각에 저절로 객석에서 비명이 튀어나오지만 나중에 만나 물어본 결과, 그 순간엔 아픈 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그만큼 극 속으로 몰입한 것이다. 낸시 역을 맡은 배우 우현주의 발성과 대사처리능력 또한 탁월하다(극단의 대표인 우현주는 공동번역 작업까지 맡았다).

왜 '프로즌'인가. 대사 중 아그네샤가 아직 탐구하지 못한 인간의 뇌 세계를 '얼어붙은 땅' 비슷하게 표현한 것도 있고 또 20년 전 로나를 유괴당한 순간부터 낸시의 감정이 얼어붙어서 그렇다는 말도 있다. 나는 영국의 극작가  브라이오니 래버리(Bryony Lavery)가 창조한 극단적인 이야기와 한국 배우들의 열연이 보여주는 극한의 시너지가 이 여름의 더위를 꽝꽝 얼려버리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뚱딴지 같은 생각을 해 본다.


이 연극은 여성 캐릭터인 낸시와 아그네스만 붙박이 출연이고 랄프 역은 세 명의 남자 배우가 돌아가면서 맡는다. 그러면서도 하루 한 번 공연 뿐이다. 하루에 두 번 공연을 올리는 연극도 있지만 이 작품은 그런 건 꿈도 꾸지 못한다고 한다. 연극이 끝나면 배우들이 모두 탈진하기 때문이란다. 2년 전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최대의 고통을 보여준다는 세평 덕분에 '멘탈 탈곡극'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심리 스릴러 [프로즌]. 강추하는 작품이다. 7월 16일까지 에그린 씨어터에서 상연한다. 놓치지 마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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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노무현입니다]를 보았다. 과연 눈물 없이 이 영화를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미루고 미루다 가긴 했지만 상영관 입구에서 곽티슈를 한 통씩 나눠주길래 '에이, 이건 좀 오버 아냐?'라고 했던 아내는 막상 안에 들어가서 상영 내내 휴지를 뽑아 눈물을 닦고 코를 팡팡 풀었다.

눈물의 포인트는 안희정의 인터뷰였다. 별로 슬픈 얘기도 아니었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노무현은 확실히 별종이었다. 노무현의 운전기사와 전 국정원 직원의 인터뷰를 보면 알 수 있다. 평생을 생각한 대로 행동하고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이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던 사내. 그에게 우회도로나 지름길은 없었다. 그냥 정도를 뚜벅뚜벅 걷다가 절벽을 만나자 거기서 수직낙하했다. 그가 바로 노무현이다.

아내는 영화를 보고 나서 "이인제는 확실한 악역, 강원국은 유머와 코믹 담당"이러고 깔끔하게 정리를 해줬다. 나는 나레이션 한 번 없이 내러티브가 이렇게 잘 연결될 정도면 감독이나 구성작가들이 자료화면을 얼마나 많이 봐야 했을까를 생각하며 그 노고에 감탄했다. 감독과 함께 이 영화의 구성을 담당한 작가는 아내의 친구인 양희 씨다. 

우리는 영화를 보고 나와 남대문 부원면옥에 가서 냉면과 닭무침, 그리고 소주를 주문했다. 아내는 한 병만 마시라고 신신당부를 했지만 닭무침 안주가 남아서 할 수 없이 한 병을 더 주문해야 했다. 그리고 나와 서울로를 걷다가 서울로 기획에 첨여했던 시청 직원 온수진 주무관을 만나 커피도 한 잔 했다.

영화는 슬펐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오히려 역설적인 희망이 생겼다. 우리는 노무현이라는 성공 케이스를 경험한 사람들이다. 선한 사람들이 이기는 경험. 그게 중요하다. 광고회사도 성공경험은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경쟁PT를 선호한다. 가끔은 우리가 옳다는 걸 확인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막판에 죽음을 선택했다고 해서 그 누가 이를 실패라 말할 수 있겠는가.

비록 '노사모'는 아니었지만 우리 모두 노무현과 함께 한 시간을 기억하자. 어쨌든 그런 희망과 환희를 안겨 준 사람이 있었다니, 고마운 일 아닌가. 노무현의 눈물을 딛고 일어선 문재인 정부는 좀 더 강하고 더욱 세련되어지길 바란다. 그리고 그렇게 될 것이라 믿는다. 그게 '동업자' 노무현을 기리는 최선의 방법이니까.


(* 어제 낮술에 취해 페이스북에 올린 리뷰인데 기록 차원에서 여기에도 남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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