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화장실에 다녀 오다가 충동적으로 그제 서촌 벼룩시장에서 한 권에 천 원씩 주고 산 책 들 중 정이현의 소설집 [오늘의 거짓말]을 집어 들었다. 예전에 읽은 책이지만 너무 오랜만이라 제목이 제일 낯익은 <삼풍백화점>부터 다시 읽었다. 분명 전에 읽은 소설인데도 다시 읽으니 제목 말고는 기억 나는 게 하나도 없다는 게 신기했다. 아니, 주인공인 여자애가 대학 졸업 후 구직 중이었다는 것은 어슴프레 기억이 났고 그에겐 삼풍백화점에 근무하는 고등학교 때 친구가 있었다는 게 희미하게 떠오르긴 했다. 그러나 주인공 여자가 구직의 일환으로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 건물 삼류 에로영화 사무실에 찾아가서 사장에게 "떡 영화라고 들어봤지?"라는 질문을 받는 장면은 맹세코 전혀 새로운 장면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이 장면만 건너뛰고 이 소설을 읽었단 말인가.

삼품백화점이 무너지던 날을 기억한다. 마포에 있는 광고대행사에서 카피라이터 초년생으로 근무하던 나는 몇 미터 저편에 앉아 있던 선배 아트디렉터(당시엔 디자이너라는 호칭을 더 많이 썼다) 김 차장이 아내의 전화를 받으며 "어? 뭐라구?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고?" 라고 외친 뒤 즉시 켠 TV를 통해 흉측하게 무너진 분홍색 건물을 보았다.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바로 전 해에 성수대교가 끊어져 사람들이 많이 다치고 죽더니 이젠 멀쩡하던 백화점이 무너졌단 말인가. 머리가 멍해졌지만 당장 급한 카피를 쳐내야 했고 회의 준비도 해야 했다. 당장 삼풍백화점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는 내가 한심했다. 다음날 내가 모시고 있던 카피라이터 박 부장님이 사내 카피라이터들을 불러모아 특별 점심을 샀다. 어리둥절해 하는 우리들에게 그는 '무사귀환기념 점심턱'이라고 고백했다. 전날 퇴근시간이 되기 전에 몰래 회사를 빠져나간 박 부장님은 만년필이나 하나 살까 하고 삼풍백화점으로 차를 몰고 가다가 화장실이 급해 다른 곳에 잠깐 멈췄고, 내린 김에 현금인출기에 들어가 돈도 찾으려 했는데 고장이 났는지 작동이 잘 되지 않아서 시간을 좀 지체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백화점 언덕으로 올라가니 차들이 꽉 막혀 있었고 어떻게 된 일이냐고 교통경찰에게 물었더니 백화점이 무너졌으니 어서 차를 돌리라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다. 그때 마침 화장실이 급하지 않았다면, 또는 현금인출기가 말을 잘 들었다면 자신은 지금 여기서 여러분과 함께 점심을 먹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고 부장님은 웃었다. 

소설 속 중주인공에겐 삼풍백화점에 다니던 고등학교 동창 R이 있었다. 힉교 다닐 때 친하진 않았지만 대학 졸업 후 우연히 만나 뒤로 취직을 못했던 주인공에게 작은 위로가 되어주고 하던 순한 친구였다. 주인공이 집으로 돌아가 일기장에 '나는 오늘,'이라고 쓰던 순간 백화점은 무너졌다. 한 층이 무너지는 데 걸린 시간은 1초에 지나지 않았다. 사고가 난 뒤 주인공은 조간신문에 난 사망자와 실종자 명단을 읽지 않았다. 옆면에는 삼풍백화점 사고를 다룬 명사 칼럼이 있었다. 호화롭기로 소문난 강남의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것은 사치와 향락에 젖었던 대한민국에게 하늘이 내리는 경고일지도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주인공은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항의했다. 필자의 연락처를 알려줄 수 없다는 독자부의 담당자에게 소리를 쳤다.

그 여자가 거기 한 번 와본 적이나 있대요? 거기 누가 있는지 안대요? 나는 하아하아 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미안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내 울음이 그칠 때까지 전화를 들고 있어 주었던 그 신문사 직원에 대해서는 아직도 고맙게 생각한다.

소설 속 주인공은  텅 빈자리로 남아있던 백화점 자리에 2004년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에 이사를 갔고 그곳을 떠난 뒤에야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맨 마지막 '글을 쓸 수 있었다'는 말에서 이 소설이 어느 정도 자전적 이야기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몇날 며칠 뉴스만 틀면 삼풍백화점 사고 소식이 들려왔다. 수백 시간 동안 콘크리트 잔해에 깔려 있을 때 노래를 부르며 버티다가 기적적으로 구조된 어느 이십 대 여자가 '콜라가 먹고 싶다'라고 얘기하는 바람에 어느 음료회사가 평생 그녀에게 콜라를 무상으로 제공하기로 했다는 기사가 화제였다. 우리는 마포의 사무실에 모여앉아 "나 같으면 나오면서 콜라 대신 포르셰라고 외쳤을 텐데..."같는 농담을 하면서 키득키득 웃었다. 그때 모여서 웃던 사람들 중 내 곁에 있는 사람은 없다. 다들 어디선가 잘 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 이 소설을 읽었다. 다리가 무너지고 백화점이 무너지고 수학여행 가던 고등학생 삼백 병이 물에 잠겨 죽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잘 살고 있는 우리들. 과연 우리는 잘 살고 있는 건가,라고 소설은 뒤늦게 내게 묻는다. 그러게. 나는 잘 살고 있는가. 우리는 멀쩡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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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서강대 김대건홀에서 열리는  '김아라 배우 아카데미'에 아내를 따라가 이명세 감독의 특강을 들었다. 이명세 감독은 오래 전부터 한 번 만나뵙고 싶었는데 드디어 오늘 강의를 통해 인사를 할 수 있었다. 여러 예술 장르 중에서도 '영화는 정말 ET와 같은 존재다'라는 명제로 말문을 연 이명세 감독은 1895년 '열차의 도착'이라는 최초의 영화부터 시작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연기론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를 펼쳤다. 특히 연극 워크샵에 참여하는 배우들에게 영화 연기와 연극 연기의 차이에 대해 얘기하는 형식으로 진행된 강의는 이명세 감독이 가지고 있는 영화에 대한 풍부한 식견과 함께 실제 제작 현장에서 일어났던 많은 일화들을 들을 수 있는 소중한 자리였다. 

흔히들 알랑 드롱이 잘 생기긴 했지만 그를 명배우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뭔가 열연을 하지 않고도 잘 생긴 얼굴 덕분에 날로 먹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야말로 가만히 세둬 두기만 해도 그림이 된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굉장한 미덕이라고 이명세 감독은 말한다. 말하자면 이런 정도 분위기의 남자배우와 여자배우는 금새 사랑에 빠질 수 있지만 만약 송강호 같은 배우였다면 수 많은 작업과 과정이 있어야만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걸 관객들이 납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라는 매체의 특징은 바로 이런 것에서 시작된다. 연극과 달리 배우의 얼굴과 아우라를 밀착해 잡아내는 카메라와 촬영 이후에 벌어지는 '편집의 마술'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배우들에게 연기력이 필요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훨씬 더 정교하고 깊은 연기력이 필요하다. 다만 스타니스랍스키가 설파한 '메소드 연기'에만 너무 의존하다 보면 '오버'라는 페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영화는 연극과 달라 20 정도만 연기해도 200의 효과가 나올 수 있는 장르라고 한다. 그 예로 이 감독은 [겨울 나그네]라는 영화에서 이혜영이나 안성기보다 연기를 더 잘 한 배우는 다름 아닌 강석우였음을 상기시켰다. 그는 불필요한 오버를 하지 않음으로써 영화 속에서 말 그대로'민우'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명세 감독은 만나는 배우들마다 마이클 케인의 강연집인 [명배우의 연기수업]이라는 책을 추천한 얘기를 하며 그 책 안에 자신이 썼다는 추천사 얘기도 해줬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오명(Notorious)] 때의 일화다. 키스씬을 찍을 때 어떻게 하면 두 남녀의 사랑을 더 강렬하게 보일 수 있을까 궁리하던 히치콕 감독은 캐리 그랜트와 잉그리드 버그만의 하체를 강제로 묶어놓고 촬영을 했다는 것이다.얼핏 생각하면 미친 짓처럼 느껴지지만 결과적으로 이 장면은 영화 사상 가장 애절한 키스신으로 남았다고 한다. 영화란 궁극적으로 '화면 속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다'라는 이명세 감독의 주장을 정확하게 뒷받침해주는 에피소드가 아닐 수 없다.

강의가 끝나고 함께 밖으로 나왔다가 자전거를 타고 온 이명세 감독과 함께 커피숍에 들러 잠깐 커피를 마셨다. 너무 오랜만에 만나는 아내와 감독님이 지난 얘기를 나누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두 사람이 서로 알고 지내게 된 계기가 무슨 인터뷰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아내가 예전에 기자 생활을 했었으니까) 사실은 당시 아내가 '이명세 감독 후원회'를 사칭했던 사람에게 돈을 뜯길 위기에 처했다가 그걸 해결하는 과정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정말 어이 없는 계기로 친분을 텄던 두 사람은 뒤늦게 그걸 기억해 내고는 깔깔깔 웃었다. 

그날 들은 강의 얘기를 했고 우리가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내는 배우들 얘기도 좀 했다. 연극은 물론 박정범 감독의 영화 [산다], 문소리 감독의 [여배우는 오늘도]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배우 이승연 얘기를 시작으로 뒤늦게 결혼한 뒤 성북동으로 이사해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박호산이나 김혜나 얘기도 하게 되었다. 한 동네 선후배라는 친분 덕분에 얼마 전 온에어 된 '화재안전' 공익광고에 박호산이 출연한 얘기를 했더니 그 광고를 당신이 만들었냐며 감독님이 반가워 하셨다. 이명세 감독은 무릎에 물이 차는 등 건강이 안 좋아서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는데 덕분에 무릎도 낫고 담배도 끊었다고 했다. 요즘은 자전거로 돌아다니다가 예쁜 커피숍에서 커피 마시고 책 읽으며 다니는 게 새로운 낙이라고 했다. 새로운 작품은 거의 다 구상이 끝났는데 투자자가 잡히는대로 제작에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M]이나 [형사:듀얼리스트] 등 우리가 좋아했던 감독님의 작품들을 거론하며 어서 새 작품이 극장에 걸렸으면 하는 마음을 전했다. 아내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감독님과 나는 뜨거운 아메리카노였고 나만 샷을 하나 추가해서 마셨는데 커피 맛이 좋았다. 다음에 또 만나자는 얘기를 하고 가볍게 포옹을 하고 헤어졌다. 자전거를 끌고 걸어가는 감독님의 뒷모습이 청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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