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중석 작가가 예전에 전시하고 모아 놓았던 사진들을 스튜디오에서 다시 전시 판매한다고 해서 일요일 낮에 아내와 함께 구경을 갔다. 스튜디오 아래층에서 하우스웨딩 때문에 분주하길래 혹시 전시장을 잘못 찾은 건 아닌가 걱정을 하고 2층 문을 빼꼼히 열었더니 개그맨 이휘재 씨가 혼자 서 있다가 "전시회 여기서 하는 거 맞아요. 저도 방금 와서..."라고 얘기를 해주는 것이었다. 곧 오중석 작가가 와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사진들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전에 스튜디오에 왔을 때 구경했던 사진들을 다시 보니 반가웠다. 오 작가가 재미있는 얘기를 많이 해줘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사진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오 작가는 1940~50년대 누군가가 찍은 코닥 필름을 통째로 사서 모으는 게 취미인데 누가 언제 찍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깜깜이' 필름이라고 한다. 운이 좋으면 좋은 사진이 걸리고 아니면 꽝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윤태호 작가의 만화 [인천상륙작전]에도 비슷한 얘기가 있는데 거기선 해방 직후 일본 사람들이 남겨놓고 간 가방들을 '근 수로 달아' 사고 파는 사람들이 나온다. 똑같이 생긴 가방이라 값도 똑같고 속에 금덩이가 들어 있을지 옷가지가 들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채 오로지 운에 맡기는 것이었다. 오 작가도 그렇게 낡은 슬라이드 필름들을 무작위로 꺼내 한 장 한 장 인화해보는 과정에서 만나는 뜻밖의 수작들의 즐거움 때문에 이 필름들을 구입한 것이리라. 말하자면 일종의 '세렌디피티'인 것이다. 



그런 작품 중 관람객들이 가장 좋아하는 사진은 오 작가가 인스타그램에 올렸던 풀장 사진이란다. 1950년대 미국인지 영국인지 알 수 없는 지역에서 찍힌 사진인데 오 작가가 다시 컬러 작업을 한 것이다. 아무래도 인스타그램으로 한 번 보았던 사진이라 전시장에 온 사람들이 가장 반가워 하는 것 같다고 했다. 나와 아내는 어딘가 사막을 향해 걸어가는 한 무리의 사람들 사진을 좋아한다. 역시 1950년대 정도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관광객들인지 아니면 어디 잠시 들렀다가 사막에 온 사람들인지 알 수 없는 사진이다. 모두 수평선처럼 펼쳐진 모래 언덕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데 유독 안경을 쓴 대머리 아저씨 혼자만 뒤를 돌아보는 게 인상적이다. 오 작가는 자신도 이 사진의 정보를 전혀 알 수 없는데 사진을 찍은 시점을 미루어 보건데 키가 크 사람이 찍었을 수도 있고 버스 위에서 찍은 것일 수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어쩌면 두바이나 사우디 어디처럼 카메라 뒤쪽에 커다란 호텔이 서 있는 모습을 상상 보기도 한다고 했다. 

재미 있었다. 남자들은 모두 양복 바지와 셔츠 차림이고 여자들은 원피스를 예쁘게 차려 입었고 꼬마 여자애만 빨간 바지다. 뭔가 부유해 보이는 사람들인데 뿌연 사막을 배경으로 걸아가는 모습이 [환상특급]이나 [블랙 미러]의 한 장면처럼 낯설어 보이기도 한다. 내가 그 얘기를 했더니 오 작가도 가끔 저승 가는 사람들 사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며 웃었다. 오 작가는 모텔 간판이 있는 사진을 특히 좋아한다고 하는데 우연히 사막 사진과 구도가 비슷하다는 걸 발견하고 두 필름을 겹쳐 보았더니 아주 새로운 그림이 되었다고 하며 우리에게 직접 두 필름을 겹쳐서 보여주었다. 순간 사막에 있던 사람들이 모텔이 있는 거리로 들어오는 신기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아, 이런 재미와 열정 때문에 때로는 새벽까지도 혼자 컬러 작업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세렌디피티 말고도 오 작가가 직접 찍은 사진들도 많았다. 자신은 상업 사진을 많이 찍기 때문에 전시를 할 때는 오히려 그렇지 않은 사진들만 올린다고도 했다. 아무래도 일을 위해 찍은 사진과 그런 목적 없이 그냥 찍은 사진은 작가에게도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명함이 있길래 꺼내보았더니 옆으로 펼쳐지게 되어 있었고 다 펼치자 뒷면에 작가가 찾은 또다른 풀장 사진이 들어 있었다. 우리집이 너무 작아서 걸어둘 수 있는 사진은 없고 오늘은 그냥 명함만 가져가서 벽에 붙여 놓겠다고 했더니 오 작가도 웃으며 그러라고 했다.

좋은 작가들은 일단 자신의 작업을 매우 좋아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오중석 작가도 코닥 필름 얘기를 할 때 얼마나 눈이 반짝이는지 자신은 모를 것이다. 이러니 힘들어도 늘 재미 있어서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이 아닐까. 돈이 많거나 성공한 사람들을 만나면 잘난 척만 들입다 하느라 별 재미가 없다. 진짜 즐거운 건 이런 사람을 만날 때인 것이다. 다음 전시회 때 또 만나자고 얘기하고 웃으며 스튜디오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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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엔 당당하지만 TV를 시청하다 잠드시는 경우 이렇게 옹색한 모습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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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누가 "박수!" 하면 "네~" 하고 대답하던 카피라이터 후배. 이름은 박수연이고 나이는 아직 이십 대인 이 년차 카피라이터. 어리다. 

자기소개서에 '카피 쓰는 할머니'로 늙는 게 꿈이라고 써서 뽑았지만 정말 그런 꿈을 꾼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회사 사람들이 워낙 밥을 먹지 않기로 유명하긴 하지만 그 중에서도 유난히 밥을 먹지 않아 단식의 정점을 찍었던 인물. 밥은 하루에 한 끼쯤 겨우 먹는 눈치고 술은 전혀 못 마신단다. 

도대체 무슨 재미로 인생을 사느냐고 물었더니 '운전'이라고 대답한다. 근데 넌 차가 없잖아? 라고 물으니 그래서 주말이면 꼭 청주로 가서 아빠 차를 끌고 나와 광란의 질주를 한다고 고백을 하는데(물론 그것도 백 프로 믿진 않는다). 

박수에게 약간 충격을 받은 건 손목에 새긴 '337'이라는 문신을 보았을 때. 삼삼칠 박수.

자신의 별명을 가지고 몸에 문신을 새긴다는 게 결코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이 아이에겐 그게 쉬웠나보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을 쉽게 해버린 사람은 나중에라도 어려운 일을 쉽게 할 가능성이 크다. 

박수가 그랬다. 처음엔 잘 못하더니 금새 실력이 늘었다. 아이디어도 잘 내고 PPT도 예쁘게 잘 만들었다. 카피의 기본기도 튼튼해졌다. 

이거 박수 쳐줄 일이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2층 회의실 앞에서 너무 미안한 얼굴로 저 회사 그만둘지도 몰라요, 라고 냅다 말하는 것이었다. 떨어질 게 뻔하지 뭐, 하고 그냥 한 번 응시해 본 광고대행사에서 제꺼덕 합격 통지가 왔다고 한다. 

억울하지만 할 수 없다. 
잘가라, 박수. 

박수칠 때 떠나니 좋구나.

계속해서 박수 안 받아도 좋으니까
거기 가선 설렁설렁 일해라.
야, 속았구나 소리 나오게.
그래도 걔네들 너 못 짤라.
요즘 워낙 초년차 카피라이터 귀해서.


#그래서카피라이터구합니다 #추천해주세요 #초보환영 #경력대환영 #빡세게이삼일 #저와한팀에서일합니다 #굽신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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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걸 올려도 되는지 모르겠으나, 에버노트를 뒤지다 보니 몇 년 전에 써놓은 시가 한 편 있더군요.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변하지 않은 마음이고 생각이라 한 번 올려봅니다.  


<별 볼 일 없는 놈>


아무리 별이 총총한 밤이라도
별에다 소원을 빌진 마

어떤 건 쳐다보는 데만
수만 년이 걸린다는데 
니 얘길 듣고 대답을 하면 
또 수만 년 걸릴 거 아냐 

차라리 재수 없더라도
꾹 참고 사람을 쳐다봐
별 볼 일 없는 놈이라도  
니 옆에 있는 사람이  
하늘 위의 별보다는 나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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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출퇴근길에 조금씩 읽었던 이상한 제목의 단편집 [관내분실]은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이다. 마침 회사 카피라이터 박수가 광고회사 사람들이 쓴 초단편집 같은 걸 빌려주며 재밌다고 하길래 뒤적여보고 나서 느낀 결론은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김동식의 소설집들처럼 기발한 발상과 시퀀스로만 이루어진 소설은 내가 매우 재미없어 한다는 것이었다. 모름지기 좋은 이야기 속엔 '인간' 또는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가 들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받은 게 있으면 줘야 한다는  '기브 앤 테이크 정신'으로 나도 그 후배에게 이 책을 권해줬는데 표제작을 읽고 나더니 "짱 재밌어요, 실장님!"이라고 마음껏 감탄해서 나를 기쁘게 했다. 
 
대상 작품이 표제작인 <관내분실>인데 얼마 전 첫 아이를 임신한 주인공 지민이 '마인드 도서관'에서 분실된 죽은 엄마의 자료를 찾아 헤매는 게 중심 스토리다. 어이 없게도 죽은 뒤에야 '실종' 처리가 된 엄마의 이야기로, 거기엔 도저히 화해할 수 없었던 아버지와의 관계, 그리고 식구들 모두에게 냉담한 남동생의 이야기가 섞여있다. 지민은 마인드 검색에 필요한 자료들을 찾다가 '김은하'라는 이름을 가졌던 엄마가 결혼 전 출판사에 다녔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고 그걸 토대로 '관내 분실'되었던 그녀의 자료를 찾아낸다. 이 과정 중 지민이 TV를 통해 보게 된 '인간의 영혼과 마인드는 같은 것인가?'에 대한 토론 프로그램은 작가의 과학적 지식과 존재론적 고민을 함께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최근 연구결과들은 부정적입니다. 마인드가 영혼이 아니라는 가장 결정적인 반박은, 그렇게 스캐닝된 시냅스 패턴이 더 이상 가소적으로 변형되지 않는다는 관찰로부터 나왔죠. 한 사람의 자아는 끊임없이 변해갑니다. 성장하고, 배우고 반응하고, 노화하면서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변형되지 않는 마인드는 영혼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은 시점에서 고정되어버린, 일종의 박제된 정신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요?" 

엄마가 살아 있을 때 마음을 열고 그 사람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는 자책과 데이터로 구성된 마인드가 과연 인간의 온기까지 재현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심이 엇갈리던 소설은 마지막에 도저히 화해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엄마와 딸의 재회 장면을 짜릿하고 짧게 포착한다. 아마도 심사 위원 중 한 사람인 배명훈이 쓴 '쨍하게 아름다운 순간'이 바로 여기가 아닌가 싶다. 나도 읽으면서 반가웠다. 이 작품은 분명 SF소설이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뇌과학은 잘난 체하는 첨단 지식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간의 이해와 갈등, 그리고 새로운 발견을 위한 지렛대 역할을 하기 때문이었다. 

책 말미에 붙은 심사평들을 읽어보면 김초엽이라는 작가가 낸 단편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도 유력한 대상 후보였는데 자신이 쓴 <관내분실> 때문에 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뛰어난 SF작가의 탄생을 예고하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 나는 김초엽의 작품 말고도 김혜진의 <TS가 돌보고 있습니다>와 오정연의 <마지막 로그>도 흥미롭게 읽었다. 심사평 중에서도 재미 있는 글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서울시립과학관의 관장 이정모 편이었다. 이정모 관장은 아무리 작품이 뜻하는 바가 좋고 잘 쓰여졌다 하더라도 재미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유미주의'를 내세웠는데 내게는 매우 설득력 있는 글이었다. 그리고 다른 심사위원들이 대상과 가작에 대해서만 언급한 것에 비해 이 관장은 자기가 예심에서 골랐다 떨어진 작품들만 다루고 있다는 점 역시 특이했다. 본선에 올라야만 심사평을 받는다는 상식을 뒤엎고 낙선작들을 거론한 것이다.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의기소침해 있었을 작가 지망생들에게 이보다 더 큰 위안과 격려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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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나주 여행을 갔다가 들른  광주 송정시장 안의 작은 서점에서 새로 나온 헤밍웨이의 단편집 [깨끗하고 밝은 곳]을 샀다. 일단 책이 작고 예뻐서 샀고 헤밍웨이의 작품을 요즘 번역으로 읽어보고 싶은 마음도 좀 있었다. 민음사가 만든 이 작품집엔 표제작과 함께 <살인자들>, <병사의 집>, <킬리만자로의 눈>, <프랜시스 매코머의 짧지만 행복한 생애>등이 실려 있고 맨 앞엔 '글을 쓴다는 건 언제나 고독한 일'이라는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노벨문학상을 탔을 때 발표했던 수상 연설문이 실려 있다. 

<깨끗하고 밝은 곳>이라는 소설은 8쪽짜리 짧은 단편인데 늦은 밤 카페에서 술을 마시는 귀머거리 노인과 그의 시중을 들던 웨이터 두 명 사이에 일어난 이야기다. 지난 주에 자살을 하려다 실패한 것으로 알려진 노인은 오늘도 늦게까지 카페에 남아 브랜디를 마신다. 웨이터들이 주고 받는 대화에 의하면 돈도 많은 노인이 자살하려 한 이유는 '아무것도 아닌 일' 때문이었다나. 늦게까지 버티고 있는 노인 때문에 일찍 들어가지 못한다고 생각한 젊은 웨이터 는 그에게 다가가 브랜디를 따라주며 "영감님은 지난주에 죽는 게 나을 뻔했어요."라고 말한다. 그러나 듣지 못하는 노인은 그저 브랜디를 마실 뿐이다.

브랜디를 다 마신 노인은 '비틀거렸지만 어딘가 품위가 있어 보이'는 모습으로 돌아갔고 조급한 웨이터가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자 나이 많은 웨이터가 혼자 가게 뒷정리를 하겠다고 한다. 그는 가게를 정리하면서 말한다. "나는 늦게까지 카페에 남아 있고 싶어. 잠들고 싶어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밤에 불빛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과 함께 말이야." 그게 무슨 엉뚱한 소리냐며 난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던 조급한 웨이터는 퇴근을 하고 나이 많은 웨이터는 문을 닫으며 자신이 매일 밤 가게를 닫을 때마다 약간 망설이는 이유가 뭘까 생각한다. 어쩌면 이 시간에도 카페가 필요한 누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일까.

그는 아까 그 노인을 생각하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로 시작하는 주기도문에 신이나 아버지 대신 '허무'라는 뜻의 스페인어 '나다'를 넣어 읊조려본다. 그리고 퇴근길에 들른 바에서 뭘 드시겠습니까, 라고 묻는 바텐더에게 "나다를 주게"라고 말함으로써 "여기 또 미친 놈이 또 하나 있군." 이란 농담 섞인 핀잔을 듣는다. 마지막으로 들른 바도 깨끗하고 불빛이 밝은 카페였다면 더 좋았을 것을, 이라 생각하는 웨이터. 어쩌면 그는 헤밍웨이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주 깊은 밤에도 자신이 허무에 젖지 않도록 옆에서 환하게 불을 밝혀주는 사람들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웨이터의 마음에서 소설가의 모습이 언뜻 비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제목도 깨끗하고 밝은 곳(A Clean, Well-Lighted Place)이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살인자들>이라는 단편은 암살자들이 찾아왔는데도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어 그대로 집에 머물고 있는 전 헤비급 챔피언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고 <킬리만자로의 눈>은 어렸을 때 고레고리 펙 주연의 영화로 봤던 작품이다. 그런데 이렇게 책으로 찬찬히 읽으니 마지막 주인공이 죽는 장면만 빼놓고 완전히 헤밍웨이 자신의 이야기나 다름없다. <프랜시스 매코머의 짧지만 행복한 생애>도 비슷하다. 이건 주노 디아스의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이라는 장편이 생각나는 제목이다. 하루키도 헤밍웨이의 작품을 따서 <여자 없는 남자들>이란 책을 냈었다. 아마도 존경하는 선배 소설가에 대한 오마주로 이런 제목들을 지었을 것이다. 소설가, 저널리스트, 모험가로 멋진 삶을 누리다 간 헤밍웨이가 부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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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the-pr.co.kr/news/articleView.html?idxno=33516



저희 팀이 박호산 배우와 함께 제작한 '화재 안전' 공익광고 인터뷰 기사가 났네요. 코바코 공익광고팀 정준형 차장님이 인터뷰에서 기획과 쵤영 당시의 자세한 에피소드를 얘기해 주셔서 영상 제작 책임자인 저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기존 매체에선 보기 힘든 TV-CM 30초 버전도 한 번 감상해 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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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는 문체가 너무 스타일리시해서 깊이 있는 글을 쓸 수 없을 것이라는 오해를 많이 받았다. 마치 피터 프램튼이 너무 잘 생겨서 기타리스트로서 별로 인정을 받지 못했던 것처럼. 내가 팝송을 처음 듣기 시작했을 때 이미 피터 프램튼은 [Frampton Comes Alive!]라는 앨범을 천 만장 넘게 판매했던 당대 최고 인기 뮤지션이었다. 그리고 대단히 테크닉이 뛰어난 기타리스트였다. 하루키도 그렇다. 나도 뭔가 지나치게 뛰어난 점이 하나 있어서 다른 면이 평가절하되고 있다고 우기고 싶은데, 도대체 그런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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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어제 '독하다 토요일' 의 첫 모임이 있었습니다. 대학로에 있는 '책책'에서 모두 11명이 모였는데 한 곳에 모여서 똑같은 책을 읽는다는 게 과연 어떨까, 하는 약간의 걱정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생각보다 즐겁고 재미있는 모임이있습니다. 옆집 총각 서동현처럼 자주 보는 사람도 있었고 김인혜 씨나 김성희 씨처럼 처음 뵙는 분도 있었습니다. 특히 김인혜 씨는 멀리 청주에서 KTX를 타고 오셨다고 해서 더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우리가 모여서 한 시간 동안 읽은(각자 묵독) 책은 권여선의 [안녕, 주정뱅이]였습니다. 저는 맨 앞에 있는 단편 <봄밤>과 <이모>를 꼭 읽으라고 추천을 했는데 다들 만족스러워 하셔서 다행이었고 정아름 씨 같은 경우엔 <삼인행>이 가장 좋았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습니다.

이 행사를 기획한 윤혜자 씨는 작년에 일본에 연수를 가서 느낀 소회를 얘기하며 일본 사람들이 해외문학을 읽게 하려 노력하는 것을 보고 자기는 오히려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우리 문학을 읽게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 6개월간은 우리 문학만 읽고 그 후에 해외문학을 읽을지 시를 읽을지는 천천히 얘기해 보자고 했습니다. 가능하면 지금 활동하는 작가를 모임에 직접 초청하는 것도 고려해 보겠다는 계획도 귀뜸을 했습니다. 

제가 권여선의 이 작품집을 첫 책으로 선택한 이유를 묻길래 작년에 읽은 책 중 가장 인상 깊었고 전부터 이 작가의 작품을 좋아해서 그랬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술을 좋아하는 저는 알콜중독으로 인생이 망가지는 주인공의 이야기에 깊은 공감을 느꼈고 그 처연함에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더니 김인혜 씨가 자기는 <봄밤>을 읽고 대성통곡을 했다고 하셔서 매우 신기하고 기뻤습니다. 

공무원으로 일하는 김성희 씨는 소설 속 주인공 수환이 영경을 만나기 전에 언제든지 자살할 수 있다는 생각을 단검처럼 지니고 살았다는 문장이 정말 기억에 남았다고 말씀하셨고 고등학교 영어교사인 임기홍 씨는 소설 속 인물들이 너무 치열하게 사는 것 같아 마음이 스산했다고 했습니다. 반면에 회사원 정아름 씨는 아름다운 커플처럼 느껴졌다고 했습니다. 특히 톨스토이의 [부활]에 나오는 분자 분모 이야기가 마음에 와닿았다고 했습니다. 프리랜스 헤드헌터인 손연영 씨는 봄밤으로 시작해서 봄밤으로 끝나는 이 소설이 일상은 소소한 사건과 대화들이 이어져 결국 한 사람의 삶이 된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옆집 총각이자 화장품 회사 부장님인 서동현 씨는 봄밤이라는 제목과 달리 일상이 증발하듯 바짝 말라버린 주인공들의 삶이 너무 서글펐다고 했구요. 글을 쓰는 김하늬 씨는 한계에 부딪힌 사람들이 새로운 한계를 만났을 때 그걸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읽었다고 했습니다.  

<봄밤> 말고도 <이모>에 대해서도 많은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한 시간동안 책을 읽고 이십 분 정도 시간을 내 각자 '세 줄평'을 써보기로 했는데 모두 다른 각도에서 작품들을 접근하는 게 재미있고 신기했습니다. 덕분에 작품을 더 깊이있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책책'에서의 모임이 끝나고 대학로 '문샤인'에 가서 와인과 요리를 조금씩 더 나누고 헤어졌습니다. 와인 두 병은 저희 부부가 냈고 나머지 요리값은 공평하게 N분의 1을 했습니다. 다음 달 두번째 토요일 2시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습니다. 다음에 읽을 책은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입니다. 

우리는 문학청년도 아니고 열렬한 지식인도 아닙니다. 그러나 책을 읽는 즐거움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목적 없이 토요일 오후에 그런 사람들이 선의를 가지고 모인 것만으로도 너무 좋았습니다. 요즘은 책을 읽는 사람이 드물어서 그런지 드러내놓고 자랑하기도 멋쩍은 무슨 비밀 모임 같은 느낌도 들었습니다. 계속해서 가볍고 사소한 모임으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끝으로 오늘 제가 썼던 세줄 평을 덧붙여 봅니다. 

<봄밤 세 줄평> 
영경이 편의점에서 소맥부터 시작해 여관에 들어가 인사불성이 되도록 마시는 장면들 묘사는 정말 압권이다. 슬프고 아픔답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프랑스와즈 사강의 법정 진술은 김영하의 데뷔작이 아니라 권여선의 <봄밤>에 와서야 비로소 육체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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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이나 우주선, A.I 등 신기한 인물이나 사건이 나오지 않는 SF를 쓰는 방법의 예를 들라고 하면 나는 대뜸 테드 창의 단편들을 얘기했을 것이다. 작가가 창조한 세계의 룰들이 이미 그 작품 속 사회에서 당연하게 돌아가고 있다면 신기한 사건이나 장치가 없더라도 소설은 이미 깊이 있는 SF, 또는 그 이상의 고전으로 완성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그 대답 목록에 다른 작가와 작품을 하나 더 추가해야겠다. 바로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다.
 
이 장편소설은 1990년대 후반의 영국, 어느 시골 마을에 있던 기숙 학교 '헤일셤'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함께 보내는 캐시, 토미, 루스 등의 이야기다. 무대가 되는 학교에는 뭔가 비밀스러운 분위기가 흐르는데 이는 학생들이 모두 다른 인간들에게 장기를 기증하기 위해 유전자 변형으로 태어난 클론들라는 게 밝혀지면서 풀린다. 학교 생활을 하면서, 또 섹스에 대해 알게 되면서 그들은 서서히 자신들이 어떤 운명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 자각하게 되고 그에 맞춰 순응하게 된다(담배를 피우면 절대로 안 된다고 강조하는 루시 선생님에게서 '네 몸은 네 것이 아니야'라는 암시가 강하게 풍겨온다).

[나를 보내지 마]라는 책의 제목은 주인공 캐시가 자신이 아기를 낳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고나서 카세트 테이프로 듣게 된 노래 가사 'Never let me go, baby'에서 'baby'를 '아기'로 생각하고 인형을 흔들었다고 마담에게 오해를 산 장면에서 유래되었다. 아기를 낳지 못하므로 피임을 안 하고 섹스를 해도 된다는 사실에 오히려 좋아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런 이야기 자체를 피하게 된다. 특히 중반에 영화배우로 사는 게 꿈이라는 남학생에게 충고하는 에밀리 선생의 이야기가 가슴 아프다. 너희들은 결코 영화배우 같은 건 될 수 없어. 그저 운전사나 간병인 등으로 살아가야 해.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여러 편의 이야기를 담은 미드 <블랙 미러>처럼 이 소설도 바이오 산업이 발달된 근과거나 가상의 세계를 담고 있는데 막상 장기 기증에 대한 구체적인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대신 클론들이 얼마나 인간처럼 살고 싶은지를 알려주는 장면들이 많다. 자신에게 유전자를 물려준 '근원자'를 찾아 몰래 외출을 한다든지 자신들에게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열심히 그림을 그려 '마담'에게 전한다든지 하는 게 그것들이다. 심지어 어떤 커플이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면 헤일셤 관계자들이 그 진위를 가려주고 사실로 인정되면 두 사람은 몇 년 간 기증을 유예하고 함께 살게 된다는 소문까지 퍼지지만 나중에 그건 사실이 아님이 밝혀진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마치 제인 에어가 그렸던 영국의 시골처럼 조용하고 아날로그적인 배경을 뒷그림으로 깔면서도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클론들의 서글픔을 아주 담담하고 델리케이트하게 묘사한다. 주인공들이 헤일셤을 떠나 코티지에서 만난 선배 중 헤어질 때마다 서로의 팔꿈치를 툭 치며 웃는 커플이 있었는데, 이는 TV 드라마에 나오는 인간들의 행위를 따라한 것이라는 것을 캐시가 알아채고 존재론적 회의에 젖는 식이다. 나중에 캐시는 간병사가 되어 기증자인 토미와 루스를 차례로 돌보게 되는데 어른이 되어 회상하는 그들의 과거에는 분명 성장소설적인 요소와 애증이 교차된 평범한 인간들의 모습이 함께 들어 있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라는 얘기를 알고 있음에 틀림 없다. 정말 인간적인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인간의 입장을 떠나야 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 소설은 그 화두에 닿아 있으니까. 이시구로가 노벨문학상을 탄 직후 그의 오랜 친구인 소설가 살만 루시디는 "이시는 기타도 잘 치고 가사도 잘 써서 밥 딜런 정도는 쉽게 이긴다"라는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문학의 대가들끼리 나눌 수 있는 멋진 축하인사라고 생각한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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