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후 '독하다 토요일' 첫 시즌을 마감했다. 책을 읽은 회원들과 함께 이차로 '혜화동 칼국수'에 가서 간단하게 식사와 음주를 하고 우리집인 '성북동 소행성'으로 올라와 옥상파티를 단행했다.  미리 준비한 간단한 안주 말고는 다른 음식 없이 캔맥주를 마셨는데 다들 매우 즐거워했고 모든 사람들이 늦은 밤까지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맥주를 정말 많이 마셨다. 아침에 일어나 옆집 총각과 함께 종로에 있는 '이문설농탕'에 가서 해장을 하면서 아내가 영화 [서치]를 예매했다. 

'부재중 전화 세 통만 남기고 사라진 딸을 찾는 아빠의 이야기'라는 것 말고는 아무 정보 없이 보기로 한 영화였다. CGV대학로에 들어서자 아내가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해서 11층 투썸플레이스에 가서 커피를 사가지고 오는데 가족들과 함께 이 영화를 보고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던 50대 아저씨가 자신의 딸에게 "...그러게. 컴퓨터 화면으로만 보여주는데도 어떻게 저렇게 재미 있게 만들었냐."라고 감탄하는 소리를 들었다. 지나가는 말이었지만 이 짧은 촌평만으로 영화를 잘 골랐다는 것을 직감했다. 

굉장한 영화였다. 푸른 잔디밭과 하늘이 보이는 평범한 데스크톱 배경화면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사라진 딸을 찾기 위해 그녀의 SNS를 뒤지기 시작하는 장면부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까지 단 한 번도 배우가 카메라에 그대로 노출되지 않는다는 스스로의 원칙을 지킨다. 대신 맥북, 페이스타임, TV보도화면, CC-TV, 텀블러, 유투브, 유캐스트 등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각종 매체에 비친 모습이으로 등장하고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화나 그들이 찾는 정보도 구글 검색이나 G메일 등을 통해서 전해진다. 언뜻 우리 스스로 가두고 있는 SNS 상황을 비판하려고 이러는 게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지만 영화는 그런 사회적 메시지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스릴러의 문법에 충실한 전개를 착착 선보인다. 

보통 이런 컨디션이었다면 잠깐 졸거나 연신 하품을 해대겠지만 평소와 달리 영화에 깊이 빠져 좌석에서 등을 떼고 화면을 향해 몰입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너무 촘촘하고 속도감 있는 영화라 숙취까지 날아가버린 것이었다. 존 조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연기는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정확함의 미덕을 가지고 있었고 1991년생인 아니쉬 차간티 감독은  적어도 세 번의 커다란 반전을 가지고 있는 뛰어난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했다. 컴퓨터나 휴대폰을 기반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니까 좀 차갑거나 평면적일 수도 있을 텐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마우스를 조작하는 손의 동작만으로도 주인공들의 마음이 느껴지는 진기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폴더 안에 있던 가족들 동영상을 플레이 해보고 지우려다가 망설이거나 예전에 딸이 찍어놓은 유캐스트 화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은 자신의 딸이지만 그녀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던 아빠의 슬프거나 놀라운 감정들을 섬세하게 전달해준다. 그리고 후반에 밝혀지는 '악역'들도 다 자신만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어서 스토리 전개상 전혀 무리가 없게 느껴진다(늘 느끼는 거지만 악역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능력이 뛰어난 극작의 기본이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아내가 "와, 이 영화 끝내준다. 올해 본 영화 중 최고다!"라고 외쳤다.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정말 100분 남짓의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의 기분 좋은 몰입감이었다. 뒤늦게 숙취가 몰려와서 집에 와서 한잠 자고 일어나 인터넷을 찾아보니 아니쉬 차간디는 직접 제작한 구글 글라스 홍보 영상으로 24시간 만에 100만 뷰를 돌파한 뒤 ‘구글 크리에이티브 랩’에 스카우트된 매우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 감독이었다. 한 마디로 천재라는 소리다. 페이스북에 들어가 영화사에서 제공한 예고편 밑에 달린 댓글을 읽다가 '내가 실종되고 부모님이 내 SNS를 뒤져보는 것만으로도 올해의 호러'라고 쓴 글에서 빵터졌는데 그 밑에 친구들을 소환해놓고 '우리 엄마가 우리들 단톡방을 본다는 건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라는 둥 '자살하기 전에 트위터, 페북 계정부터 폭파시키고 죽어야 합니다. 물론 자살은 무척 안 좋은 겁니다 여러분' 이라는 둥 각종 두려움에 떠는 댓글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압권은 ' 이거 스토리 상 내 이야기면 아빠가 날 찾는 이유가 죽이러 오는 거로 바뀔 것' 라는 댓글이었다. 우리가 SNS에 얼마나 의존하며 사는지 잘 보여주는 예가 아닐 수 없다. 

돈이 별로 안 든 영화임은 분명하지만 노력만큼은 그 어떤 영화보다도 가상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생각해 보라. 그 수 많은 페이스북 화면들과 사진, 동영상, 유캐스트 화면 들을 감독과 스태프들이 일일이 다 밤새워 만들었을 것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자료를 좀 더 찾아보니 '촬영은 13일 간 했는데 후반작업은 2년이 걸렸다'는 제작 에피소드를 읽을 수가 있었다. 천재적 능력에 인내심까지 갖춘 이 젊음이의 앞날이 기대된다. 강추한다. 그런데 [서치]의 원제는 'Searching'이었다. 배급사에서 알아서 한 거겠지만 도대체 서칭보다 서치가 왜 더 나은 건지는 정말 아직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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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광고인이자 글쟁이인 카피라이터인 정철 선배는 [틈만 나면 딴생각]이라는 저서의 책날개에 '좋은 생각, 맞는 생각만 하려고 애쓰다 보면 오히려 머리가 굳는다'라고 썼다. 나는 거기에 이렇게 덧붙여보고 싶다. 회사에서 시키는 일만 하다보면 몸 축나고 머리도 비어 결국엔 바보가 되거나 기계로 전락한다고.

30대 초반에 회사를 그만두고 놀던 시절이 있었다. 남들은 다 열심히 일을 할 시기에, 놀면 안 되는 상황에서 나만 놀게 되었으니 당연히 돈도 없고 친구도 없었다. 더구나 내게는 학력, 학식, 재능, 배경, 배짱 등 사회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부족하기만 한 상황이고 남아도는 건 오로지 시간 뿐이었다. 그래도 뭔가 재미있는 게 없을까 몇날 며칠 시간을 펑펑 써가며 고민하다가 생각해낸 게 바로 '월조회'라는 단체였다. '월요일 아침에 조조를 보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이었는데 명색이 단체이긴 했지만 회원은 달랑 나 하나뿐이었다. 그 시간에 나와 놀아줄 사람은 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재미가 있었다. 남들은 월요병에 시달려가며 주간업무회의를 하고 있을 시간에 혼자 텅 빈 극장에 앉아 조조영화를 보는 맛은 각별했다. 아, 이게 주류 이탈자의 쾌감이구나. 나는 그 새로 취직이 될 때까지 그 소심한 행복을 많이 즐겼다. 

월조회에서 한 번 깨소금맛을 경험한 나는 틈만 나면 '쓸 데 없는 짓'을 구상하는 편이다. 어느날은 아내와 옆집 총각 이렇게 셋이서 밥을 먹으며 '수요미식회'처럼 우리도 날을 정해서 뭘 먹으러 다녀보면 어떨까? 라는 얘기를 하다가 즉흥적으로 '토요식충단'을 만들기도 했다. 이름은 내가 제안을 했는데 자칫 '벌레 충 자'로 오해받을 수 있으니 먹을 것에 충성한다는 뜻의 '토요食忠團'을 병기하기로 했다. 토요식충단은 미식가인 옆집 총각의 취재력과 출판 기획자인 아내의 추진력 덕분에 정식 회원도 모집하고 페이스북에 페이지를 개설하여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다. 여전히 토요일에 성북동 삼총사가 식당을 찾아다니는 일이 주업무지만 두 달에 한 번씩은 회원들을 불러모아 맛있는 식당을 소개하고 함께 즐기는 정기 행사를 이어가고 있다. 

나만큼이나 쓸 데 없는 일을 좋아하는 아내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아내는 아침밥을 먹지 않으면 하루를 시작하지 못하는 남편 덕에 매일 아침 식사 준비를 하는 수고를 떠안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식탁 사진을 찍어 올리는 '매일매일밥상'이라는 페이지를 운영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의외로 반응이 좋아서 이제는 수많은 구독자들이 우리들의 소박한 아침 밥상 사진을 기다리게 된 것이다. 쓸 데 없는 생각이라 여겼던 행위가 사실 아주 쓸 데 없는 생각은 아닌 경우가 많은데 지나고 보니 '매일매일밥상'이 그런 경우였다. 

연말에 동네에 있는 커피숍 '성북동 콩집'에 앉아 '올해 읽은 책 베스트5'를 작성하고 있는 나를 보고 아내가 '그러지 말고 사람들과 같이 모여서 소설을 읽는 모임을 한 번 만들어 보면 어떠냐'고 했다. 그거 좋은 생각이라 생각해서 만들어진 게 '독하다 토요일'이다. 우리가 만든 이 모임은 이름만 독할 뿐 사실은 매우 널널한 독서클럽이다. 다른 그룹처럼 책을 전투적으로 읽고 와서 열띤 토론을 벌이거나 하는 것은 우리 성격에 맞지도 않으니 자제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모인 회원들은 내가 미리 공지한 6권 중 '이달의 책'을 들고와 모임 장소에서 한 시간 정도 묵독한 뒤 각자 책에 대한 소감을 얘기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사실 처음엔 한 시간 뒤 각자 '세 줄 평'을 작성해 읽어보기로 했었으나 이마저도 시들해져서 요즘은 나만 하고 있다). 우선 육 개월만 시험삼아 모임을 가져보기로 하고 내가 6권의 한국 소설을 선정했는데 생각보다 회원들도 빨리 모였고 다들 우리나라 소설을 읽는 즐거움이 쏠쏠하다고 말해줘서 나름 보람을 느끼고 있다. 오늘이 여섯 번째 모임이니 빨리 이 글을 마감하고 대학로 '책책'으로 달려가야겠다. 

생각해보면 위에 열거한 짓거리들 중 돈이 되는 모임은 하나도 없다. 요즘 인스타그램에 쓰고 있는 '공처가의 캘리'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어떠랴. 언제나 그랬듯이 인생에서 돈보다 중요한 게 바로 이런 '즐거움' 아니던가. 그러니 쓸 데 없는 짓을 두려워하지 말자. 장담하건데 가끔 딴생각을 할수록 인생은 즐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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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프리랜스 카피라이터로 일할 때 모 그룹 회장님의 '추모 영상’을 만든 적이 있었다. 병원에 있는 회장님이 돌아가시면 장례식장에서 틀어놓고 하객을 맞을 중요한 영상이었다(대기업엔 그런 의전도 존재한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회장님에 대한 자료들을 모아 공부를 하고 그분의 인품과 업적이 드러나도록 정성을 다해 추모 카피를 썼다. 같이 일하던 PD도 열심히 관련 자료를 모으고 편집을 해서 썩 괜찮은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았다. "큰 산이 있었습니다..."로 시작하는 카피도 심금을 울린다는 평가를 받았다. 

문제는 오랜 기간 혼수상태에 있던 회장님께서 좀체 돌아가시질 않는 것이었다. 처음엔 다행이라고 얘기를 하긴 했지만 막상 대기 시간이 길어지고 딱히 할 일이 없던 홍보실 직원들이 틈만 나면 우리를 불러 추모영상을 수정하다 보니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거듭되는 수정에 지친 우리들은 급기야 저녁에 모여 소주를 마시며 '미안하지만 이제 그만 회장님이 돌아가 주셔야 수정 편집도  끝나고 대금 결제도 될 것 같다'며 울분을 토했다. 우리의 바람과 상관 없이 결국 회장님은 돌아가셨지만 맹세코 그때 말고는 '누가 죽었으면' 하고 바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정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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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는 그가 올린 연극들이 오늘날처럼 전 세계를 풍미하는 고전이 되리라고는 결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이야 전 세계의 대학에서 그의 극작만을 평생 연구하는 사람들이 차고 넘치지만 당시에는 그도 그냥 연애하는 남녀가 나오고 고민하는 왕자나 고리대금업자, 권력을 쥐기 위해 이전투구하는 왕족들이 등장하는 '대중 연극'을 만드는 것이고 자신은 극단을 운영하기 위해 계속 대본을 쓰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니까. 그런데 결국 그 시대를 대변하는 작품들은 거창한 얘기보다는 이처럼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사소하고 개인적인 이야기일 경우가 많지 않은가. 

물론 어제 대학로 아름다운 극장에서 본 [장군슈퍼]라는 작품을 셰익스피어의 작품들과 비할 생각은 없다. 다만 어느 시대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사이즈'가 아니라 '공감대'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얘기하고 싶은 것 뿐이다. 이 연극은 아들 장군이의 이름을 딴 슈퍼마켓에서 일어나는 잔잔하고 착한 이야기들을 담았다. 편의점과 마트가 판을 치는 세상에 왜 굳이 슈퍼마켓 이야기인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모든 게 커지고 자동화된 공간보다는 조금 뒤쳐져도 그 덕분에 아직 '아날로그'가 남아있는 곳에 따뜻하고 정감있는 사연들이 피어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죽은 남편이 남기고 간 슈퍼가 마트에 밀리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는 엄마와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을 못해 슈퍼 일을 보는 장군이, 그리고 동네에서 작은 술집을 운영하는 장군이의 이모 선희, 옆집에 사는 재수생 성환, 그리고 성환이 약사라고 얘기해서 그런 줄 알았던 미선, 슈퍼에 와서 혼자 맥주를 마시곤 하는 미남 등이 이 연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언제나 믿고 보는 배우 이승연과 이모 역의 박진호가 극의 중심을 잘 잡아주고 장군 역의 김상균과 성환 역을 맡은 오영윤이 웃음코드와 눈물이 나는 장면들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잔잔한 이야기지만 미선의 정체나 장군의 친모 이야기 등 극을 지루하지 않도록 하는 복선들도 있어 90분 간 전혀 지루할 틈 없이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어제는 연극계의 아이돌이라는 오영윤의 팬들이 많이 온 모양이었다. 그가 나와 연기를 할 때마다 객석에 있는 여성 관객들의 반응이 대단했다. 

연극이 끝나고 나서 배우 이승연과 함께 간단하게 술자리를 가졌다. 그녀는 공연이 끝나고 배우, 연출 등과 함께 짧게 오늘 공연에 대한 리뷰와 보완점 등을 얘기하고 오느라 조금 늦었다며 미안해했으나 우리들은 오히려 이렇게 좋은 작품을 볼 수 있게 연기를 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더블 캐스팅, 트리플 캐스팅 등으로 이루어져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들이 나오는 날을 체크해서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춘천거기]등을 쓴 작가 김한길(소설가이자 정치인인 그 김한길 말고)의 작품이라 이미 탄탄한 적품성을 인정 받았지만 이번에 극단 '가족의 탄생'이 새롭게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리면서 더 좋은 작품을 선보이려 노력한 마음이 느껴진다. 9월 21일까지 대학로 '아름다운 극장'에서 상연한다. 시간 내서 보시길 추천한다. 우리는 인터파크로 티켓을 예매하서 봤는데 티켓값이 너무 싸서 미안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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