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람은 신기한 사람이다. 어렸을 때 국악을 배워 국악인으로 생활하는 한편, 자신의 일렉트릭 밴드도 가지고 있다. 운 좋게도 몇 달 전엔 홍대앞 클럽에서 ‘이자람밴드’의 공연을 보았는데 지난 토요일엔 과천시민회관 대극장에서 이자람이 혼자 공연하는 판소리 [억척가]를 보았다. 이 공연은 2011년 초연부터 관객과 평단의 만장일치 찬사를 받고, 프랑스와 루마니아 등 세계적으로도 기립박수를 받으며 큰 화제를 뿌린 바 있다고 한다. 






판소리는 모든 등장인물의 대사와 노래, 동작을 혼자 하는 종합예술이다. 나에게는 얼마 전 타계한 이은관 선생이 ‘TBC향연’이라는 TV프로그램에 나와 ‘배뱅이굿’을 할 때 넋을 잃고 본 이후로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접하는 판소리였다. 놀라운 건 두 시간 반 동안 무대를 꽉 채우며 종횡무진 활약하는 판소리꾼 이자람 뿐 아니라 애초에 브레이트의 희곡을 읽고 영감을 얻어 이 극의 모든 대사와 작창(작곡)까지 해낸 사람 역시 이자람이라는 사실이다. 


숙련된 기교나 타고난 천성을 자랑하는 예술가들은 많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 지성과 감성, 그리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창조력까지 두루 갖춘 사람은 그리 흔치 않다. 그런 점에서 이자람은 우리 예술계의 소중한 자산이라 할 것이다. 


무대가 열리면 이자람이 나와 의고체로 된 ‘적벽가’의 첫 소절을 한 번 읊는다. 그리고는 “이렇게 어려워서 어디 알아먹겠느냐?”면서 더 쉽게 고친 ‘억척가’를 하겠다고 의뭉을 떤다. 김순종이라는 이름처럼 ‘순종적이었던’ 여인이 어떻게 우여곡절 끝에 남편과 헤어져 달구지 하나만 끌고 어린 아이들과 전쟁통을 살아가면서 김안나(이제 애는 더 안 낳아, 안 낳아…하다가 안나킴이 됨), 김억척이라는 이름으로 변하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이 대단한 일인극은 부채 하나를 든 소리꾼 이자람과 고수, 그리고 기타와 드럼, 키보드로 이루어진 밴드와 함께 두 시간 반 동안 관객들을 칼칼칼 웃게 만들고 어흐어흐 눈물 흘리게 만든다. 


그녀의 절창, 능청, 액션, 절묘한 의성어까지…아, 길게 써봐야 손가락만 아프다. 기회가 되거든 다음엔 꼭 놓치지 마시고 직접 보시라. 이런 공연은 ‘Seeing is believing’이요, ‘보는 게 남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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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도널드슨 감독의 흥미진진한 스파이 영화 [노웨이 아웃]을 보면 파티에서 처음 만나 서로 뿅간 캐빈 코스트너와 숀 영이 격정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리무진 뒷자리로 달려가 급하게 섹스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짧은 정사가 끝난 다음 비로소 캐빈 코스트너가 던진 첫 마디는 "My name is Tom." 이었습니다. 숀 영도 “I’m Suzan.” 이라고 대답을 하구요. 전 상병 때 중대 외출외박 스케줄이 뒤죽박죽 꼬이는 바람에 부산 사는 병장 대신 졸지에 외박을 나갔다가 중앙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는데 이 장면에서 꽤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세상에. 섹스 먼저 하고 통성명을 나중에 하는 경우도 있구나. 미국은 정말 멋진 나라야…

 

어제 페이스북을 통해 ‘First Kiss’라는 화제의 동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미국 LA의 렌스튜디오(Wren studio)라는 곳에서 촬영한 이 영상은 서로 모르는 20명의 남녀를 초대해 첫 인사를 시킨 후 다짜고짜 키스를 하도록 요구하는 내용입니다. 이들 중엔 이미 촬영에 익숙한 모델이나 배우, 뮤지션도 있었고 또 스튜디오 측에서 요구하는 사항에 대해 대충 듣고 왔겠지만 막상 처음 만난 사람과 키스를 하려니 되게 쑥스럽고 이상했겠죠. 커플들 중에는 카메라가 돌아가자 어쩔 줄 모르고 조명을 좀 꺼주면 안 되겠냐고 묻는 사람도 있고 아까 들은 상대방의 이름을 다시 물어보거나“당신은 배우니까 전에도 이런 경험이 있었겠죠?”라고 상대방에게 조언을 구하는 남자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모두 ‘첫 키스’를 합니다.


 




“당신은 방금 처음 본 사람과도 키스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듯한 이 당돌한 영상은 한 의류 메이커가 만든 바이럴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한 일간지 기자는 이런 필름을 만든 의도에 대해 “’낯선 사람들도 마음을 열면 따뜻한 관계를 이룰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했더군요. 


그런데 조금 자세히 뜯어보면 여기에는 좀 더 세련되고 구체적인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이 영상을 제작한 ‘Wren studio’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이 회사가 다양한 중저가 의류를 생산하는 일종의 SPA 브랜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옷을 하나 사려면 무척 고심을 하고 큰맘 먹고 사야 했지만 유니클로나 H&M, Zara 같은 중저가 브랜드들이 생긴 뒤부터는 별 큰 고민 없이 누구나 그럭저럭 옷꼴을 갖춘 의상들을 손쉽게 바꿔가면서 연출할 수 있게 되었죠. 그러나 동시에 다양한 개인의 개성과 취향을 나타내던 ‘그 사람만의 옷’이라는 스토리가 사라지는 아쉬움도 생겼습니다. 

Wren studio’의 창업자이자 크리이에티브 디렉터인 Melissa Coker는 SPA 브랜드의 이런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킬 방법을 고민하다가‘Kiss’라는 단어를 생각해 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방금 산 옷보다는 자기가 자주 입어 길이 들고 편안한 옷을 더 좋아하게 마련이죠.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금방 만나 사람과는 악수 정도는 해도 키스를 하진 않잖아요. 그런데 방금 본 SPA브랜드 옷을 스스럼 없이 사 입는 건 ‘방금 본 사람과 스스럼 없이 키스하는 것과 닮은 것이 아닐까?’ 라는 데까지 생각이 흘러간 겁니다. 자신이 만든 브랜드는 처음 입더라도 편안함과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죠. 


무모한 발상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무모한 발상에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 바로 치밀한 실행력입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Melissa Coker와 감독인 Tatia Pilieva는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으면서 효과적인 바이럴이 될 수 있도록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습니다. 먼저 최대한 ‘리얼’한 상황을 유지할 것, 출연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유롭고 호감 가는 캐릭터로 선정할 것, 나이와 직업 등에 맞게 다양한 의상을 준비할 것(모두 “wren’ 제품들입니다), 게이 커플을 둘 넣어 시각의 유연성을 확보할 것…이상이 그들이 준비한 ‘촬영 컨셉’일 것입니다. 

드디어 촬영이 시작됩니다. 정말 처음 만난 사이인 듯 어색한 인사를 나누는 열 쌍의 커플들은 곧 장난스럽게 또는 긴장감을 유지한 채 키스를 시작합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만큼 다양한 반응이 나옵니다. 억지로 키스를 하다가 더는 못하겠다며 고사를 하는 여자도 나오고 그런대로 부드럽게 키스를 이어가는 커플도 나옵니다. 머뭇거리던 짧은 순간이 지나 의외로 열정적인 키스를 나누는 커플도 있습니다. 이 모든 장면들이 정말 설레면서도 자연스럽게 카메라에 담깁니다. 제가 특히 감탄했던 것은 게이 커플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입니다. 남자 커플의 경우 입은 옷도 굉장히 점잖고 키스 행위도 과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를 존중하는 눈빛이나 행동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옵니다. 여성 게이 커플의 경우엔 ‘우리, 키스를 하기 전 잠깐 눈을 맞추는 게 어떠냐?’는 성숙한 제의까지 합니다. 이처럼 ‘리얼함 속에 숨어 있는 디테일’은 수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내기 위한 프로들만의 세심함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렇게 해서 세상에 나온 바이럴은 지난 월요일에 유투브 사이트에 공개되어 단숨에 3,500만 뷰가 넘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흔히 유곽의 여자들도 ‘비록 몸은 허락할지라도 입술은 아무에게나 허락하지 않는다’ 라는 속설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바뀌어도 ‘키스’라고 하는 내밀하고 개인적인 행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늘 뜨겁기 마련인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걸 캐치해서 이처럼 막강한 바이럴로 성공시킨 사람들의 작업 또한 언제 봐도 참 대단합니다. (지금 ‘Wren Studio’ 웹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바이럴에 등장했던 사람들이 입고 있던 그 옷들에 친절하게 가격표가 매겨져 있습니다) 


이 영상은 아무 배경도 없는 일명 ‘무지 백’에서 촬영되었습니다. 등장인물들에게 눈과 귀를 집중시키는 흔한 촬영기법입니다. 화면이 흑백으로 처리된 점도 마찬가지 이유겠지요.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배경이 없다는 것’은 어쩌면 현대인들의 도시적이면서도 쓸쓸한 자화상이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 씁쓸합니다. 아무런 맥락 없이도 옷을 사고 아무런 스토리 없이도 첫 키스를 할 수 있는, 우리 현대인들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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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운영을 하지 않는 네이버 블로그에 들어갔다가 예전에 대행사 그만둔 후 썼던 백수일기 한 토막을 발견했습니다. 강남역 근처 혼자 살 때였는데 날짜를 보니 무려 2003년 4월이네요. [간장선생]이란 영화 참 좋아했는데.





2003.4.24 PM 3:00

낮잠에서 깨어나 늦은 점심을 먹기 전 케이블TV 채널을 이리 저리 돌리며 지난주 놓친 연속극들을 섭렵하다가 충동적으로 시티문고로 달려가 허겁지겁 책을 몇 권 구입함. 


≪타임머신≫, ≪투명인간≫ 등을 썼던 H.G 웰스의 ≪세계문화사≫, 

다큐멘터리 영화 <보울링 포 컬럼바인>의 감독이 쓴 <<멍청한 백인들≫, 

그리고 일본의 드라마 작가이자 소설가 카마타 토시오의 ≪29세의 크리스마스≫ 1, 2권. 



2003.4.24 PM 5:00

느닷없이 '이게 몇 년만이냐'며 해도 지기 전 동네로 찾아온 후배 이종혁과 순대집에서 소주를 마심. 전날의 음주행각과 늦은 점심식사 등의 영향으로 인해 소주 두 병을 겨우 비우고 일어섬. 카운터 앞에서 미적미적하고 있는데 이종혁이 마침 잔돈이 없다고 선수를 치며 오천 원을 내밈. 두 지갑의 돈을 합쳐봐도 이천 원이 모자람. 짧게 절망하고 카드를 꺼낸 뒤 이종혁에게 차비조로 삼천 원을 돌려줌. 백수의 카드를 쓰게 하다니... 얄미운 놈.



2003.4.24 PM 8:00

저녁뉴스를 보다가 인터넷에 들어가 평소처럼 약간의 포르노를 다운받음. 태풍권의 영향으로 전국에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끝나고 <위풍당당하지 못한 그녀>를 건성으로 보다가 TV를 끈뒤 ≪29세의 크리스마스≫를 집어듬.


비가 오기 시작함. 소설은 생각보다 재밌고 몹시 맥주가 땡김. 옆 건물의 편의점으로 달려가 카스 500cc를 두 캔 사고 냉동만두를 레인지에 데운 뒤 맥주를 홀짝거리며 소설을 탐독함. 1권을 다 읽고 맥주 두 캔을 다 마시니 어느덧 새벽 3시. 2권은 내일 마저 읽기로 하고 침대로 올라감.



2003.4.25 AM 9:00

계획보다 일찍 깨어난 자신을 원망하며 조간신문을 집으러 나가다가 이사를 가는 옆집 아줌마와 마주침. 조만간 첼로를 하는 처녀가 혼자 이사올 거라는 아줌마의 귀뜸에 환호작약함. 화장실에서 신문을 대충 훓어보고 간단한 아침을 끓여먹은 후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가면서 미소지음. '어서 침대로 들어가라고,다시 자도 된다고'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따뜻하게 속삭여 주는 듯한 착각속에 평화롭게 잠이 듬. 



2003.4.25 PM 12:00

이틀전에 약속한 전 회사 동료 김욱현 부장과의 점심식사. 탕수육에 빼갈을 네 잔 정도 마심.

회사로 잠깐 올라가 마주치는 동료들마다 '잘 지내고 있다'고 과장되게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킬킬대다 귀가함.



2003.4.25 PM 5:00

어제 인터넷으로 대여신청한 DVD <간장선생>이 도착함. 영화를 보기 전 백수일기를 토닥거리고 있는데 우체부 아저씨가 초인종을 누름. 주간지 [Film2.0] 2년 정기구독 사은품으로 고른 공짜 DVD 16장이 등기우편으로 도착함.



내일을 향해 쏴라(SE)

타이타닉

에이리언1(SE)

에이리언2(SE)

사운드 오브 뮤직

가위손

다이하드1(SE)

다이하드2(SE) 

로마의 휴일(SE)

THE BEATLES "A HARD DAY'S NIGHT"

바닐라 스카이

가게무사

판타스틱 소녀백서

더 도어즈(SE)

터미네이터2(UE) - 2장으로 침




갑자기 쏟아진 DVD의 세례에 잠시 어이없어 함. 일단 내일 반납해야 하는 <간장선생>을 보기로 결정함. 내일은 전주영화제에 가서 밤새도록 네 편의 영화를 봐야 하므로 컨디션 조절이 절실함. 오늘은 일체의 저녁약속을 삼가기로 다짐함. 


백수, 바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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