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영화를 보고 나서 ‘와, 좋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두 가지로 나뉘는데 그 하나는 주제의식이나 플롯이 아주 선명해서 아무런 의심 없이 좋다고 느끼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좋긴 좋은데 도대체 뭐가 좋은지 알다가도 모르겠어서 자고 일어나도 생각이 쉽게 정리되지 않는 경우입니다. 지난 일요일에 본 영화 [노예 12년]은 후자였죠. 영화를 보고 나서 직후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한참을 멍하게 있다가 며칠이 흐른 후에야 이렇게 천천히 리뷰를 써봅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벙찐 표정으로 멀뚱멀뚱 카메라를 쳐다보고 있는 목화농장 노예들의 모습이 아무런 소리도 없이 몇 초간 지속됩니다. 감독이 “자, 이제부터 시작이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보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은 인상 깊은 첫 장면입니다.


1841년 뉴욕의 사라토가에서 바이얼린 연주자로 살아가고 있는 흑인 솔로몬 노섭은 어느날 예술단을 사칭한 사기꾼들에게 속아 폭음을 한 뒤 쇠사슬에 묶여 노예상에게 팔려가게 됩니다. 당시엔 흑인들이 자유롭게 사는 지역과 노예로 사는 지역이 혼재하던 시절이었는데 노섭은 하룻밤의 실수로 졸지에 자유인에서 플랫이라는 이름의 노예로 신분이 달라지게 되어버린 것이죠. 그로부터 12년 간 솔로몬 노섭은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 가까스로 다시 자유인이 되는 데 성공합니다. 이 영화는 얼핏 150여 년 전 한 흑인 남자의 기막힌 삶을 통해 우리가 살던 세상의 야만성을 돌아보고 자유의 소중함을 설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자유를 향한 불굴의 의지로 운명의 비가역성을 이겨낸 안티히어로의 인간승리 이야기’로만 볼 수 없는 게 바로 스티브 맥퀸이라는 감독의 이름 때문이죠. 데뷔작 [헝거]는 못 봤지만 전작인 [셰임]만 보더라도 이 젊은 아티스트가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만한 평범한 인간드라마에 만족할 리가 없다는 선입관이 생깁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선입관에 둘러싸여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사람은 똑똑한 인간이니까 이번에도 허튼 짓은 하지 않을 거야. 또는 저 사람은 업계 평판이 대단하니까 아이디어도 무궁무진하고 통찰력도 뛰어날 거야. 또는 저 여자는 얼굴이 예쁘니까 분명 남자친구가 있을 거야…)



스티브 맥퀸은 놀라운 미술적 재능을 통해 세계적 명성을 획득한 비주얼 아티스트 출신 영화감독입니다. 당연히 그가 만드는 영화는 한 장만 한 장면이 다 당장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도 좋을만큼 때깔이 좋고 구도가 탁월합니다. 이번 영화도 그런 장면들이 차고 넘치게 나옵니다.배가 처음 나타날 때 돌아가는 터빈의 모습과 배 안에서 느닷없이 벌어지는 정사신에서 보여주는 빅클로즈업은 정말 압도적이죠. 그리고 배 안에서 어떤 흑인 여자가 겁탈 당할 위기에 처할 때 노섭의 동료가 그걸 막으려다가 허무하게 칼에 찔려 죽는 장면에서는 너무 놀라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번 드라마는 생각보다 차분하게 진행이 되는 편입니다. 첫 장면 이후의 플래시백 말고는 영화 속 사건들도 그냥 시간 순으로 진행이 됩니다. 말하자면 감독이 자신의 능력을 절제하고 있다는 이상한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어쩌면 감독은 현란한 비주얼적 장치들을 거둬들임으로써 관객들이 보다 더 영화 속의 다른 이야기에 집중하길 바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더 집중적으로 봐줬으면 하는 얘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이 영화는 오래 전 이야기이고 또 솔로몬 노섭이라는 사람이 겪은 특이한 실화이기도 하지만 사람 사는 모습은 언제 어디서나 비슷하듯이 영화에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칠 수 있는 다양한 인간군상들이 등장합니다. 자유롭게 자신의 세상을 유영하다가 갑자기 불의의 덫에 걸려들지만 끝까지 자존감을 포기하지 않고 버티는 노섭, 비교적 인간적이지만 자신의 이해관계와 상충될 때는 그저 허약한 인간일 수밖에 없는 첫 번째 주인 윌리엄 포드, 그리고 자신의 욕망에 휘둘려 바닷물을 마시듯 끊임없는 갈증에 시달리는 두 번째 주인 에드윈 엡스까지.



노예로서의 생활은 끔찍한 것입니다. 우리도 불과 백 년 전만 해도 종이나 하인이라는 노예제도가 있었죠. ‘식모’라는 이름으로 임금과 성을 착취당하기 일쑤이던 반노예도 있었구요. 그런데 이 노예들도 ‘뒤웅박 팔자’라고나할까, 정해진 주인이나 환경에 따라 고생의 차이가 천차만별입니다. 노섭은 첫 번째 주인인 포드 밑에서는 비록 고생스럽더라도 자신의 의견이나 아이디어를 펼치기도 하고 나름대로 중간 관리자와 싸움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포드가 빚에 쫓겨 그를 잔인하고 포악하기로 소문난 엡스에게 팔아버리죠. 그때부터는 더 생지옥입니다. 목화밭에서 하루 종일 아무리 열심히 목화를 따도 저녁에 결산하는 자리에선 목표량에 모자라는 무게만큼 매일 채찍을 맞아야 했습니다. 도망가려고 몇 번이나 시도를 해봤지만 그 때마다 명백하게 깨닫는 건 잡혀서 나무에 목 매달리기 전에는 탈출할 방법이 없다는 절망뿐이었습니다.



이런 지옥 같은 삶을 언제까지 견뎌야 하는 걸까요? 농장에서 목화를 가장 잘 따는 팻시는 노섭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부탁합니다.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육체적 고생은 물론 주인인 엡스에게 당하는 성폭력, 그리고 주인마님의 노골적인 질투까지 더해지니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말이죠. 그러나 노섭은 그 부탁을 거절합니다. 그녀에게 버티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스스로를 돌보기도 벅차기 때문이었습니다.


‘인생은 견디는 것’이라는 메시지는 오히려 화면 밖의 감독이 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 영화의 폭력장면은 매우 사실적입니다. 처음 노섭이 술에서 깨어나 자신은 플랫이 아니라고 말하다가 등을 얻어 맞을 때를 시작으로 수많은 채찍질, 주먹질, 마님이 팻시에게 던지는 술병, 마지막에 나오는 길고 긴 롱테이크 신의 채찍질 등 어느 하나 편안한 장면이 없이 가장 높은 레벨의 압박감을 유지합니다. 덕분에 괴로운 건 영화 속 노예들만이 아닙니다.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도 그 잔혹한 장면들을 참아내는 건 참으로 힘이 듭니다. 


그런데 스티브 맥퀸 감독은 눈 돌리지 말고 그 장면들을 똑바로 보라고 우리에게 강요합니다. 인터뷰를 읽어보니 마지막에 팻시를 채찍질 하는 장면은 그 중요성 때문에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단 한 번의 테이크로 찍어냈다고 하더군요. 밀도가 대단한 장면이었습니다. 그래도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아마도 노섭이 작업반장과 싸우다가 결국 나무에 목이 매달려 선 채 진흙탕에 발을 디디고 간당간당 서 있는 장면일 겁니다. 두 손조차 묶인 채 미끌미끌한 진흙탕 위에 까치발을 하고 서 있는 노섭은 살짝 미끌어지기만 해도 목숨을 잃을 지경이지요. 그런데 카메라는 이 장면을 롱테이크 기법으로 잔인하게 오래오래 잡아냅니다. 감독의 재능이 빛나는 명장면이죠. 처음엔 안타깝게 지켜보던 동료들도 결국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정말 사는 게 이래도 되는 걸까요?


그러다가 문득 깨닫게 됩니다. 아, 인생이라는 건 정말 참는 것의 연속이구나.‘참을 인 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라는 속담도 있지만 결국 인생을 살게 하는 것은 참을 수 있어서 참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어서 참는 경우가 더 많은 거구나, 하는 아픈 깨달음이죠. “제가 가진 선의는 제가 소유한 만큼의 동전 갯수를 넘지 못합니다”라는 노예상의 말처럼 세상의 선의에 기대 산다는 건 헛된 망상일 뿐입니다.노섭도 마지막에 집으로 돌아오는 행운을 잡게 되었을 때 자신을 죽여달라던 팻시를 한 번 꽉 껴안아주고는 그대로 도망치듯 마차로 오릅니다. 혼자 살기도 바쁜데 남의 챙길 여유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사정이 이 정도인데도 우리는 배를 타기 전 노섭이 내뱉었던 말 “I don’t wanna survive, I wanna live!”라는 말을 기억해야 하는 걸까요? 멋진 말이긴 하지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감독은 오스카 작품상을 타고 난 직후 이 대사를 다시 한 번 언급했지만.


아무튼 참 세고 진하고 묵직한 영화였습니다. 요즘 여유가 없어서 이 영화와 함께 등장한 화제의 작품들을 아직 못 보았지만 한동안 이 영화를 쉽게 잊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이 모든 훌륭한 얘기를 이끌어 가는 데는 명배우들의 명연기가 있었습니다. 요즘 ‘셜록’ 시리즈로 인기 절정에 있는 베네딕트 컴버베치와 스티브 맥퀸의 모든 영화에 출연 중인 마이클 패스빈더가 연기 경연을 벌이고, 얄미운 작업 반장 역을 맡은 폴 다노의 연기도 [데어 윌 비 블러드]에 이어 또 한 번 대박이죠. 팻시 역을 맡았던 루피타 니용고는 결국 올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탔군요. 제작자인 브래드 피트도 뒷부분에 잠깐 출연하는데, 너무 천사 같은 역으로 나와서 헛웃음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쟁쟁한 스타들을 조연으로 만들어버린 치웨텔 에지오프의 연기는 정말 발군입니다. 이 친구를 어디서 본 듯 하다구요? 저도 궁금해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러브 액추얼리]에서 키이라 나이틀리의 남편으로 나왔더군요. 그 유명한 ‘스케치북 고백 신’에서 거실 안 소파에 앉아있던 흑인 남자가 바로 그였습니다. 엡스의 부인으로 나왔던 사라 폴슨은 [Studio 60 on the Sunset Strip]이라는 아론 소킨의 드라마에서 매튜 페리의 전 애인이자 돌고래 소리를 잘 내던 코미디언이었구요. 중요한 건 아닙니다. 뭐, 그렇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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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도 아니다. 그렇다고 뮤지컬도 아니다. 무대 위에 이러저러한 소도구들이 보이고 연기자들이 손가락으로 연기를 시작하면 한 사람이 그걸 진지하게 ENG카메라로 찍고 나머지 사람들은 부지런히 다음 장면에 등장할 소도구들을 준비한다. 카메라에 찍힌 장면들은 무대 위에 있는 대형 스크린에 영화처럼, 뮤직비디오처럼 실시간 투사된다.  


지젤이라는 여자가 어느 기치역 벤치에 앉아 있다(그녀는 레고인형으로 표현된다). 우선 어렸을 적 13초 간 만났던 첫사랑의 남자부터 회상해 본다. 뒤이어 또 다른 남자 이야기도 있다. 이 이야기는 지젤이라는 여성이 평생 사랑하고 떠나보내고 잊어야 했던 다섯 명의 남자들을 찾아나서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 모든 이야기가 연기자의 얼굴과 몸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표현된다. 손가락은 마치 벗은 몸처럼 느껴지고 두 손가락이 엉킬 땐 매우 에로틱하기까지 하다. 손톱을 기른 손가락은 그대로 피겨스케이트 선수가 된다. 손가락이라는 기관이 얼마나 섬세한 존재인지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놀라운 건 손가락 연기만이 아니다. 카메라 웍도 장난이 아니다. ‘접사’라는 방식이 이렇게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는지 정말 몰랐다. 아주 작은 소도구들, 물 속에서 퍼지는 잉크, 책상 위의 비닐이나 모래 등이 접사를 통해 순식간에 거대한 회오리와 바다, 해변, 기억 속의 마을 등으로 변한다. 그리고 탁월한 음향효과는 물론 한 곡 한 곡 들을 때마다 감탄하게 만드는 끝내주는 선곡이 관객들의 눈과 귀를 황홀경에 빠트린다.  아울러 감독이 직접 듣고 낙점했다는 유지태의 사려 깊고 귀족적인 나레이션도 정말 멋지다.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식탁해서 시작된 이 ‘손가락 공연’은 친구들의 수 많은 아아디어와 공감각적인 장치들이 더해져 이젠 가는 곳마다 전 세계인들을 놀래키는 공연이 되었다. '키스 앤 크라이'라는 제목은 피겨 스케이팅 선수가 연기를 끝내고 심사위원들이 매긴 점수를 기다리는 공간을 뜻한다. 인생의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곳은 사랑과도 많이 닮은 것 같아서 이 작품 제목으로 정했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동물원]이라는 범상치 않은 소설집을 냈던 작가 토마 귄지그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토토의 천국]과 [제 8요일]의 자코 반 도마엘이 감독이다. 그의 부인은 안무 담당자. 아마 맨 처음 이 아이디어를 낸 사람일 것이다. 손가락으로 하는 장난 같은 공연인데 열 명이 넘는 어른들이 아주 진지하게 움직이는 모습들도 이상한 감동을 준다. 공연을 보면서 저 아이디어 중 어느 하나만 베껴서 CF에 써먹어도 대박일 것이다, 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직접 베끼면 안 되겠지만. 거기서 영감을 얻어 창조적으로 변형을 해야겠지만. 아, 안다 알아. 그냥 너무 멋진 장면이나 장치들이 많아서 하는 소리지. 최근에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라는 시집을 읽었다. 크리에이터들은 이 공연을 보고나면 정말 몇 주일은 안 먹어도 배가 부를 것이다. 아니, 배가 고파질 것이다. 아니, 목이 마를 것이다. 그러니 이 공연을 꼭 봐라. 아니, 보지 마라. 아니, 당신 마음대로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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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있는 집에

엄마의 마음을 잇자


빈 집에

여행간 주인을 잇자


부모님 집에

손주의 재롱을 잇자


집에

새로운 생활을

이어주자





저는 이 광고가 차라리 전처럼 코믹 어프로치로 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누군가 말싸움을 하고 있는데 TV화면에서 제3자가 나타나서 훈수를 둔다든지, 아니면 부모 몰래 남자친구를 집으로 데려왔는데 아빠가 TV 안에서 헛기침을 한다든지…그래서 “에이, 그런 게 어딨어?!”라고 어이없어 하면서도 그 내용은 다 이해가 가는 그런 광고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요. 


왜냐하면 이 광고는 놀랍게도 ‘따뜻하고 훈훈한 내용’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회사에 있는 엄마가 아이에게 멀리서도 모정을 전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신혼여행 가서도 집에 있는 고양이의 상태를 살필 수 있고,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어린 아들의 재롱을 큰 사진으로 전송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전 이게 불편합니다. 이거야말로 ‘비정상의 정상화’처럼 느껴지기 때문이죠. 아이는 엄마가 직접 집에서 보듬어 키워야 한다고 합니다. 고양이도 직접 쓰다듬어줘야 정이 더 생기구요. 할머니에게 손자 얼굴을 벽걸이 TV로 어루만지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직접 시골에 놀러 가야죠. 물론 이 광고처럼 하며 살 수도 있습니다. 편리하니까요. 안 하는 것보단 나으니까요. 그러나 아름다운 모습은 아닙니다. 그건 분명합니다. 광고주가 “왜 남의 돈으로 하는 캠페인에 딴지를 거는 거냐?”고 화를 내거나 광고회사가 “그럼 니가 한 번 해봐라” 하고 화를 내더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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