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연애하는 여자 이야기 - 성수선의 [혼자인 내가 혼자인 너에게]

 


아침에 일어나 무슨 책을 읽을까 서가에서 잠깐 망설이다가 성수선의 [혼자인 내가 혼자인 너에게]를 집어 들었다. 반쯤 읽다가 잠깐 ‘급한’ 다른 책을 본다고 덮어 그대로 책꽂이에 꽂아놨던 책이었다. (그래도 ‘요즘 읽는 책’ 코너에 꽂았다)

 

성수선은 직장인이자 에세이스트인 열혈 독서가다. 그리고 작가다. 나와는 십여 년 전 온라인을 통해서 인연을 맺고 서로 안부를 전하는 친구 사이이며 이젠 페이스북을 통해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는 ‘페친’이 되었다. 얼마 전 그녀가 ‘북포럼’에 저자로 출연했을 땐 직접 방청객으로 찾아가 만나기도 했다. 우리는 그때 비로소 얼굴을 마주하고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일 수 있었다.

 

사실 오늘은 다른 책을 읽어야 하는데 어쩌다 보니 이 책부터 집어 들게 되었다. 아니, 잠깐 꺼내 무심코 책장을 넘겼는데 성석제의 [순정]을 다룬 챕터가 눈에 띄는 바람에 계속 읽게 되었다고 해야 하나? 아, 이 작가도 나처럼 [순정]을 가끔 읽는구나. 지난번에 읽을 땐 그 맛이 또 조금 다르던데…하면서.


[밑줄 긋는 여자의 토닥토닥 에세이 - 혼자인 내가 혼자인 너에게]는 그녀가 쓴 두 번째 독서 에세이다. 책 안에는 일반 직장인처럼 열심히 일을 하다가 퇴근 후면 확 달라지는 그녀의 일상이 들어있다. 그녀는 도대체 저녁마다 혼자 사는 오피스텔로 돌아가 뭘 할까?


책을 읽는다.

 

혼자인 그녀는 오피스텔에 들어가면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예전에 소설가 이병주가 [행복어사전]이라는 책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어 “지금 집에서 톨스토이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병주가 기다리고 있다”라고 한 것처럼 그녀는 혼자 사는 오피스텔에 가서 김영하를 만나고 장정일을 만난다. 레이먼드 카바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소설가 제임스 쉘터나 김승옥, 그리고 시인 류근을 만나 심야식당의 손님들처럼 한바탕 영혼의 술판을 벌인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녀의 문체는 정직하다. 사실은 너무 바르고 정직해서 조금 더 풀어졌으면, 하고 아쉬워할 때도 있다. 소위 ‘범생이’의 느낌이 나는 것이다. 그건 대기업에 다니면서 늘 열심히 사는 그녀의 프로필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가 저녁 8시면 문을 닫고 자기들끼리 노는 오피스텔 1층 라면집 아줌마 아저씨들을 부러워한다. 이건 이율배반이다. 마치 자기 별명을 ‘날건달’이라 지었지만 실제로 만나보면 날건달은커녕 동기들 중에서도 가장 착실하게 광고회사 본부장님으로 잘 살고 있는 내 친구 류 모 씨처럼. 

 

늦게까지 하면 훨씬 높은 매출을 올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라면집은 저녁 8시가 되면 어김없이 영업을 종료했다.


며칠 전 팟캐스트로 ‘창비 라디오 책다방’을 듣다가 기생충학자 서민 교수가 “알라딘서재 시절 알던 분 중에요, 성수선 씨라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다음부터 저를 멀리하고…”라고 눙을 치는 바람에 한참 웃다가 성수선 씨에게 일러바친 적이 있다. 물론 성수선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책을 좋아하는 만큼 사람을 좋아하고 술을 좋아한다.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에게 ‘피곤하니까 한 잔 한다’는 말은 ‘사랑하니까 헤어진다’는 말처럼 설명하기 어려운 말이다”라는 문장을 쓸 수 있는 작가라면 얼마나 훌륭한 술친구인지는 말 안 해도 다 알지 않겠는가. 마침 어제 페이스북에 [밑줄 긋는 여자]가 8쇄를 찍었다는 그녀의 자랑글이 올라왔다. 생각난 김에 다음 주쯤 술 한 잔 사달라고 졸라봐야겠다.

 

 

 

 






(* 예전에 제가 ‘음주일기’를 한창 쓰며 빈둥거리던 시절에 써놨던 [밑줄 긋는 여자] 독서일기도 있길래 찾아서 함께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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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 가면 좋은 점. 첫째, 공짜로 보고 싶은 책들을 마음껏 볼 수 있다. 둘째, 후덥지근한 길거리와 달리 냉방이 잘 돼 있어서 시원하다. 셋째, 누군가 전화를 해서 “지금 어디야?”라고 물으면 “응, 지금 서점에 있어.”라고 고상한 척 폼 잡으며 대답할 수 있다…

 

요즘은 서점 나들이에 재미를 붙여서 오후엔 대개 고속터미널에 있는 영풍문고에 가서 논다. 집에 있으면 자꾸 TV를 틀거나 멍하니 쓸데 없는 짓거리만 하다가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요즘 서점에 가서 읽은 책들은 김중혁의 [악기들의 도서관], 히가시노 게이고의 [악의], 그리고 성수선의 [밑줄 긋는 여자] 등이었다.

 

나는 성수선이란 작가를 ‘수선 님’이라 부른다. 몇 년 전 한겨레에 소개된 인물 기사를 보고 책꽂이 사이에서 웃고 있는 사진이 마음에 들어서 그녀의 홈피까지 찾아갔었는데, 거기에 있는 수 많은 독서일기와 에세이들을 읽느라 자주 들락거렸던 것이다. 그리고 처음 방명록에 가서 ‘독서일기를 쓰는 분께 음주일기를 쓰는 인간이’라는 제목의 글을 남긴 뒤 친하지는 않지만 간간히 온라인으로 안부를 전하는 사이가 되었다.

 

 

[밑줄 긋는 여자]는 수선 님이 [나는 오늘도 유럽 출장 간다]에 이어 내놓은 두 번째 책이다. 이번 책은 굳이 구분을 하자면 독서 에세이에 속하겠지만 대개의 작가나 학자들처럼 심각하게 폼 잡고 서평을 쓰는 에세이가 아니라 자신의 일과 생활, 생각들을 풀어놓으면서 거기에 자연스럽게 책들이 스며드는 미셀러니에 가깝다.

 

이런 글쓰기의 현실감은 현재 해외영업 전선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저자의 남다른 이력에서 비롯된다. 그녀는 현재 삼성정밀화학 해외영업부 과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사흘이 멀다 하고 해외 영업을 다니는 한편 대학원에서 MBA과정까지 공부하는 저자가 틈틈이 시간을 쪼개서 쓴 글들이기에 각 편마다 에피소드들도 풍부하고 현실감이 넘친다.

 

 

도쿄에 출장을 가서는 [돈까스의 탄생]이란 책을 떠올리고 독일에서는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 원서를 찾아 다니는 도중 일어났던 일들을 얘기하는 식이다. 일본 출장을 가서인가 회사 상사에게 아사다 지로의 단편집 [장미 도둑]을 선물하고 ‘너는 어쩌면 하는 짓도 이렇게 이쁘니?’라는 칭찬을 들었다는 에피소드는 참 재치가 있다. 그 상사의 방에는 그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가 열 권도 넘게 있더라는 것이다. 다들 성의없이 달착지근한 자기계발서 따위를 반복해서 선물할 때 삶의 애환과 아이러니가 배어있는 아사다 지로의 소설책을 선물한 부하 직원이 있었으니 어찌 이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살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과 그에 따른 상념마다 공지영, 박민규, 김영하 등 우리에게 익숙한 작가들의 작품들이 하나씩 하나씩 거론된다. 콘돔은 물론 꽃다발까지 자판기에서 판매되는 외국 출장지에서는 대학 신입생 시절 장미꽃다발을 신문지에 싸서 선물했던 동기의 진심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백만 번 산 고양이]를 읽으면서는 늘 자신의 곁에 있어줄 것이라 믿었던 이성 친구의 결혼 소식에 받은 충격을 얘기하며 평생 자기 짝을 만나지 못할까 두려워하기도 한다.

 

수선 님의 장점이자 단점은 지나치게 솔직하고 심플한 마인드다. 책을 내는 저자라면 좀 현학적으로 굴 수도 있고 쿨한 척 할 수도 있는데, 이 여자는 글 곳곳에 급하고 솔직한 성격을 그대로 드러낸다. 자신은 외로움을 감추지 못하고 질질 흘리고 다닌다면서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로 시작하는 정호승의 시 [수선화에게]를 권하고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을 읽으면서 엉엉 울어버렸던 사실까지 거침없이 고백한다. [백지연의 SBS전망대]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책 읽어주는 여자’라는 패널로 고정출연을 했던 추억을 애기할 때도 앞으로 그런 프로그램이나 TV 출연까지 기회만 된다면 또 하고 싶다는 소망을 숨기지 않는다. 어쩌면 순진하게까지 느껴지는 이러한 면모가 작가로서의 ‘가오’는 덜 서게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참 인간적으로 다가오는 게 사실이다.

 

덕분에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마치 친한 친구와 술집에서 만나 대화를 하는 착각을 하게 된다. 힘들고 지친 일상들을 얘기하며 김훈의 [밥벌이의 지겨움]에 공감하고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를 읽은 사람들 중 일요일 저녁 개그콘서트를 보면서 다가올 월요일 생각에 우울해지는 친구가 또 하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동병상련의 기쁨이요 즐거움이다.



우리는 모두 바쁘게 산다(나는 전혀 안 그렇지만).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더 그렇다. 수선 님도 바쁘게 사는 게 몸에 배어서 그런지 늘 바쁘고 늘 뭔가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이다. 첫 책을 출간하고 나서 휴가로 괌에 갔을 때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쉬리라’ 다짐했건만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할 거 같은 강박에’ 스노쿨링 강의에 하루 세 번씩 참가했다는 글을 읽고 깔깔 웃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가하게만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 특히 글을 쓰는 사람들은 책상에 처박혀 있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공지영의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에서 저자가 딸에게 건낸 ‘작가가 되려면 돈을 벌어야 한다’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고 했다. 사람들과 부딪히고 세상살이의 기쁨과 슬픔, 스트레스를 경험하지 않고는 인생의 비밀도 제대로 풀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앞으로도 열심히 회사를 다니면서 또 이런 책들을 내줬으면 좋겠다. 그래야 수많은 직장인들이 그녀에게서 자극을 받고 자기계발서 대신 소설책을 집어들 것이고 일반인들도 글쓰기에 대한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껴서 ‘코카콜라 회장의 신년사’ 같은 파급력 높은 글을 쓰게 될 것 아닌가.

 

 

지금 서점에 가면 카를린 봉그랑의 [밑줄 긋는 남자]보다 성수선의 [밑줄 긋는 여자]를 찾는 게 더 쉬울 것이다. 이번 휴가를 떠나기 전에 들었는데 이미 2쇄를 찍었다고 한다. 그녀의 책을 펼치면 목차 전 페이지에 ‘No Rain, No Rainbow”라는 글이 써 있다.  힘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꾸만 뭔가 저지르는 여자, 그렇지만 우리의 모습과 참으로 비슷한 저자. 그녀의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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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출 했다가 동네 수퍼에 들렀는데 문득 캔커피가 사먹고 싶어지는 겁니다. 요즘은 늘 집에서 원두커피를 내려서 먹곤 해서 캔커피는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캔커피를 하나 들고 와 계산을 하면서 저는 예전에 60만 원짜리 커피를 마셨던 쓰라린 기억을 떠올려야 했습니다. 10여 년 전의 일이니 꽤나 비싼 커피를 마신 셈이죠.

 

 

제가 TBWA/Korea라는 광고대행사를 다닐 때였습니다. 12월 말에 웬일인지 회사에서 카피라이터들에게 노트북을 하나씩 지급한 사건이 있었죠. 워낙 연봉도 세고 직원들에게 잘 해주기로도 이름난 잘 나가는 회사이긴 했지만 당시로서는 좀 파격적인 대우였습니다. 회사의 카피라이터들은 신이 났습니다. 컴퓨터를 잘 다루지 못하는 저도 마찬가지였구요. 노트북을 들고 다니는 카피라이터. 생각만 해도 멋진 일 아닙니까.

 

1월 업무 첫날, 시무식을 마치고 돌아온 저는 회사에 있는 밴딩머신에서 커피를 한 잔 뽑아가지고 제 책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자, 이제 일을 시작해 볼까? 하고 노트북을 열고 종이 커피잔을 집는 순간, 커피잔이 살짝 앞으로 튀어나가더니 노트북 자판에 가서 팍 쏟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어, 어, 앗, 아악! 안 돼~!!!”

 

 

커피는 이미 노트북 자판 위로 쏟아졌고 제 입에선 알 수 없는 비명들이 쏟아졌습니다. 얼른 전원선을 뽑고 전 버튼을 누르고 노트북을 거꾸로 들어 흔들고 별짓을 다 해봤지만 노트북은 다시 살아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차라리 물을 쏟았으면 얼른 전원을 끄고 거꾸로 해서 말리면 되는 수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커피는, 특히 자판기 밀크커피는 설탕이 많이 들어가 있어서 자판에 들러붙어 부품들을 빠르게 부식을 시킨다는 겁니다.

 

아, 새해 첫날부터 이게 뭐람.

 

저는 이 비극적인 소식을 경원지원팀에 알려야 했습니다. 경영지원팀 차장님이 와서 노트북을 가져가더니 좀 있다가 전화를 걸어 저를 위로하더군요. 차라리 데스크탑이었으면 자판만 갈면 되는데 이건 노트북이라 전체를 바꿔야 한다. 이 노트북이 120만 원짜린데 수리비가 물경 80만 원이란다. 그러니 차라리 새 노트북을 사는 게 낫다. 우리, 새 노트북을 사도록 하자. 근데 너무 비싸다. 회사에서 반을 부담할 테니 편성준 씨가 반을 부담해라. 거의 한 번도 안 쓴 노트북인데, 참 안 됐다.

 

하늘이 노래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토를 달지 않고 그러자고 순순히 동의를 했습니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경영지원팀이랑 잘 못 지내는 편이라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거든요. 그 예로, 그 전 해 겨울에 회사 동료들하고 스키장 갔다가 오는 길에 삼성동 글래스타워 앞 사거리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무릎을 크게 다쳤을 때도 저는 병가를 내지 못했습니다(후배의 차는 폐차를 시킬 정도로 큰 사고였습니다). 그런데 경영지원팀 왈, 다친 건 알겠는데 그게 일하다가 다친 게 아니라 놀러 갔다 오며 다친 거라 병가를 내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몹시 화가 난 저는 그런 법이 어디 있냐고 따졌지만, “그런 법이 있다”는 차장님의 침착한 답변이 돌아올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본의 아니게도 며칠간 팀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무단결근’을 해야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저는 참 멍청한 선택도 많이 했고 억울한 일도 많이 당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항상 손해 보는 삶을 살았지만, 그래도 결국 예쁘고 착한 아내와 결혼도 했고 주변에 괜찮은 친구들도 꽤 많은 인생이니까요. 이젠 심지어 저를 부러워하는 사람도 간혹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한 연설이 생각납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라고 했던가요? 저도 계속 그의 말처럼 멋진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비록 앞으로도 제가 하는 선택들이 ‘hungry’보다는 ‘foolish’에 가까울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지만 말입니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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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구에서 팔던 장난감 같은 영화 - [퍼시픽 림] 



영화 [퍼시픽 림]에 에 나오는 ’카이주’는 괴수의 일본 발음이라죠. 외계인은 늘 하늘에서 날아오는 줄 알았는데, 어느날 태평양에서 괴물들이 출현해 도시를 파괴하고 다니는 겁니다. 외계인들이 수억 년 전 공룡시대에 지구에 왔다가 ‘아, 아직 때가 아니구나’하고 그때부터 진득하니 기다렸다가 이제야 나타났다는 거죠. 


카이주라는 이름부터 그 괴물들을 쳐부수는 로봇 ‘예거’를 두 명이 조종한다는 설정, 그리고 괴물들의 입장에서 보면 장난감처럼 무력하기만 한 탱크와 비행기들…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 오타쿠 맞습니다. 오덕입니다. 마징가Z나 로보트태권V같은 캐릭터들이 우리나라 만화라고 생각하며 자랐던 저희 세대랑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 같습니다. (영민했던 저는 철이가 마징가Z의 조종관으로 들어가 기어를 조종하면서 “화이야, 온!”이라 외치는 걸 보고 일본 만화라는 걸 진작에 눈치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만화의 주인공들은 왜 기어나 버튼을 조작하면서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걸까요? 기합 넣는 건가? 아직도 궁금해요) 



이 영화의 ‘좋은 로봇’ 예거는 마징가나 그레이트 마징가, 태권V처럼 버튼이나 기어 대신 두 명이 직접 몸을 움직여 조정하는 일종의 ‘모션 트레이스’ 방식입니다. 브라이언 브라운이 [F/X]에서 썼던 그 특수장비 옷처럼 말입니다. 아, 얼마 전에 휴 잭맨이 나왔던 [리얼 스틸]도 대충 이런 식이었군요. 


이 작품은 캐릭터도 좀 뻔하고 인물들간의 갈등구조나 해소도 고만고만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진격의 거인]처럼 진지하게 벽을 쌓아 괴물을 막는 어이없는 설정도 나옵니다. 대신 로봇들의 질감이나 규모는 진짜 현실감 넘칩니다. 시가지에서 괴물과 싸우느라 거침없이 부서져 나가는 건물과 자동차들은 그야말로 스펙터클합니다. 문방구에서 파는 그리운 장난감 같은 이 작품을 보고 ‘대도시파괴성애자를 위한 영화’라는 글을 누군가 인터넷에 올렸다는 얘길 듣고 한참 웃었습니다. 


여주인공 마코 모리 역의 기쿠치 린코는 좀 안습이더군요. 그렇게 이쁘지도 매력적이지도 않고 눈만 큰 여자애. 브래트 피트 주연의 [바벨]에 나올 때는 그렇게 인상 깊었었는데. 린코 대신 배두나가 맡았어야 했다는 어느 페친의 말씀에 많이 동감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보다 이 캐릭터에 대한 감독의 무신경함이 더 큰 패착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앞섭니다. 



공감 가는 점도 많은 영화입니다. 우선 이런 블록버스터마다 등장하는 ‘팍스 아메리카나’가 없어서 좋습니다. 물론 대사는 모두 영어로 나옵니다만 이 영화에서 미국은 그저 ‘태평양연안(퍼시픽 림)’의 동맹군일 뿐이죠. 그리고 두 명의 조종사가 ‘드리프트’를 해야 한다는 설정도 재미 있었습니다. 드리프트는 서로의 경험과 생각, 심리상태 등을 모두 공유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이런 걸 하게 되면 서로의 성적 취향을 속속들이 알게 되고 결국 “이런 변태새끼!” 소릴 할 만도 한데, 어린 관객을 위해 그런 건 다 그냥 넘어가는군요.  


영화 종반 즈음, 괴수들의 공격으로 최신 예거들이 동작을 멈췄을 때 제일 처음 만들어졌던 구닥다리 예거가 나서서 세계를 구하는 장면이 나오죠. 디지털 기반의 기계들이 어떤 에러로 인해 동작을 멈추었을 때 바보 같은 아날로그가 나선다는 이 설정은 기성세대들에게 보내는 감독의 따뜻한 위로이자 찬가일 겁니다. 찡했습니다. 저도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죠. 제기랄. 


전 이 영화를 공짜표로 보았습니다만, 뭐 돈을 내고 봤다고 하더라도 재미있게 즐기며 봤을 것 같습니다. 거창한 기대나 새로운 선언 없이 ‘아는 사람들끼리’ 모여 소소하게 떠들면서 볼 수 있는 그런 정감 있는 영화죠. 제가 볼 때는 옆에 초등학생, 앞에 중학생들이 앉아서 함께 떠들면서 봤는데 걔들이 중간에 화장실도 다녀오고 서로 내용도 물어보고 하는 게 오히려 정겹고 좋았습니다. 



영화 보면서 웃었던 거 하나. 이런 영화에서 대장들은 아무리 시끄러운 장소에서도 입만 열면 다른 사람들이 일순 조용해지고 연설하는 목소리도 쩌렁쩌렁 울리게 마련이죠. 이 영화에 나오는 저항군 사령관 스탁커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설하는 목소리는 기름지고 호흡도 여유롭습니다. 배경음악도 우퍼가 진동할 정도로 장엄하게 깔리죠. 다른 영화에서 수사결과를 발표하는 경찰청장이나 전쟁을 선포하는 대통령들도 연설 참 잘 합니다. 그런데 실제 세계에서는 왜 다들 그렇게 목소리들이 쫌팽이 같을까요? 억양이나 발음도 후지고. 


전 박원순 시장을 좋아하는데, 서울시장 선거전 할 때 TV토론 본면서 답답해 죽는 줄 알았습니다. 상대 후보 나경원의 똑부러지고 앙칼진 말솜씨에 비하면 그 분은 얼마나 어눌하고 느려터지던지. 박 시장님, 어렸을 때 웅변학원 같은 데 좀 다니시지 그러셨어요…? 그래도 응원합니다. 존경하구요. 음. 뭐 결론이 좀 이상하네요. 하지만 고치지 않고 그냥 가겠습니다. 이건 그냥 비 오는 날 아침에 일찍 일어난 김에 마구 쓰는 영화 수다니까요. 영화평이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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