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북악산 등산길에 오르면서 측근과 경호원들에게 조선의 도읍을 정하기까지 태조 이성계와 무학도사에게 있었던 일화를 해설사처럼 설명해주는 장면은 드라마 [웨스트윙]에서 걸핏하면 미국의 국립공원에 대해 강의하는 걸 즐기던 대통령 마틴 쉰를 떠올리게 한다. 아론 소킨이 각본을 쓴 이 드라마의 대통령도 노무현처럼 민주당 출신이있다. 차이가 있다면 노무현이 마틴 쉰은 경제학자 출신이지만 노무현은 인권변호사였다는 점 정도일까. 그보다 더 중요한 차별 포인트는 아무래도 노무현이 우리나라 최초의 고졸 대통령이었다는 점일 것이다. 노무현을 싫어하는 사람들 중엔  아직도 그의 학력에 대해 비아냥거리는 경우가 있지만 정작 그는 그 사실을 부끄러워 하기는커녕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는 편이었다. 학력은 고졸이었지만 그는 뛰어난 변호사였고 영어도 뛰어나게 잘했으며 그 누구보다도 아는 것이 많은 지식인이라는 프라이드가 강했으니까.  


미안해 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이런 유서를 남기고 불현듯 세상을 버린 전직 대통령의 장례식에서 총리가 읽을 추도사를 써야하는 연설기획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건 아마 본인이 아니면 아무도 영원히 알 수 없으리라. 그래서였을까. “다시는 정치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다시는 바보 노무현으로 살지 마십시오”라는 눈물 나는추도사를 썼던 '노무현의 筆士’ 윤태영이 노 전 대통령과의 이십 년 인연 이야기를 소설로 썼다. 

소설 [오래된 생각]을 읽으면서 연설 잘 하던 노무현 전 대통령 생각이 많이 났다. 그의 시원하면서도 조리 있고 품격 넘치는 연설을 다시 듣고 싶어졌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유투브로 노무현의 연설을 찾아 들으면 눈물이 찔끔 날 때가 많다. 그래서 아내는 친구 양희 작가가 각본을 쓴 다큐멘터리 영화 [노무현입니다]를 어떻게 봐야하나 벌써부터 걱정이 태산이다. 눈물이 날까봐. 그저 대통령을 좋아했던 사람들이 이 지경이니 거의 24시간을 곁에서 붙어지내던 사람의 심정은 어떠할까.

회고록일수도 있었던 글이 소설로 탄생한 것은 열린정부 시절을 보다 입체적으로 그리고 싶었던 작가의 야심 때문이었으리라. 작가 윤태영은 운동권 경력 때문에 취직이 요원해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던 시절부터 시작한 글쓰기가 평생 직업이 된 '프로페셔널 라이터'다. 노무현 캠프 일을 맡으면서 방송원고와 홍보물들을 주로 썼고 노무현의 자서전 [여보, 나 좀 도와줘]의 집필에도 참여했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 당선 후에는 그의 연설기획 비서관이 되어 가장 지근거리에서 대통령이 하는 모든 말을 기록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당연히 노무현 정권의 속사정에 대해 그 누구보다 밝을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은 노무현 정부가 몰락의 길을 걷던 2006년부터 시작된다. 김대중에 이어 민주정부의 길을 이어갔던 참여정부는 한미FTA와 부동산 가격 폭등, 북한 핵실험에 대한 반응, 작전통제권 환수문제, 대연정 제의 등등으로 인해 계속 하락세의 길을 걸어야 했다. 어느 정권이나 레임덕은 있었지만 노무현 정부는 처음의 그 기대만큼이나 실망감도 커서 그 댓가도 더 가혹했던 것이다. 게다가 노무현은 스스로 권력을 독점하지 않으려 제도적 노력을 기울인 최초의 집권자였다. 집권 초기 벌였던 ‘평검사들과의 대화’는 지금 보면 답답할 정도로 순진한 시도였고 결국 그는 검찰에 의해 자신의 모든 것을 잃는 신세가 된다. 

소설이 사실을 바탕으로 한 팩션이라고 하더라도 수기나 백서와 다른 것은 가상의 인물들을 설정해 사건을 보다 감성적이고 입체적으로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도 노무현 대통령은 물론 글쓴 이 윤태영도 진익훈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의 여릴 적 친구이자 훗날 야당 대변인으로 대립각을 세우게 되는 인수, 그리고 그의 첫사람이었으나 결국 인수와 결혼하게 되는 희연 등이 등장해 이야기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 

권력이란 손잡이가 없는 칼과도 같은 것이었다. 쥐고 휘두를 수는 있지만 그러는 동안 자기 손에서도 피가 흐를 것을 감당해야 했다. 어설프게 사용했다가 자신만 다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만큼 조심해야 하는 것이 권력이었다. 

윤태영이 소설 속에서 진익훈의 입을 빌어 권력의 양면을 묘사한 문장이다. 일단 이 소설은 그의 안정되고 의미 있는 문장들을 음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읽어볼 가치가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소설가로서 또 문장가로서 그가 보여줄 수 많은 가능성에 대해 헤아려 본다. 노무현과 가장 가까웠던 필사 윤태영은 문재인 대통령의 수락연설 중 백미로 꼽히는 이런 문장을 쓴 사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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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이 복잡하고 집중이 안 될 때는 책장에서 아무 책이나 꺼내 펼쳐보는 습관이 있다. 세스 고딘의 [보랏빛 소가 온다2]를 펼쳤다. 전에 줄 쳐놓은 페이지들이 눈에 띈다. 그러나 내가 밑줄 친 곳엔 별 게 없다. 다른 페이지를 뒤적인다. 그러다가 230페이지에서 멈췄다. 

완전히 기대의 반대로 하기 

텍사스의 한 은행가로부터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 그 사람은 자기네 은행이 경쟁사보다 더 많은 ATM 기계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정된 예산을 가지고 선전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내 아이디어? ATM기의 20달러 지폐 칸에 100달러짜리 지폐를 몇 장 넣어두라고 했다. 많이는 말고, 아주 조금만. 
틀림없이 소문이 퍼질 것이다! 사람들의 기대를 깨고 완전히 반대되는 행동을 함으로써(아아, 그러나 내 아이디어를 닮은 그 사람은 '챔피언 되기'에 관해 아는 것이 없었던 관계로 이 방법은 실현되지 못했다). 


왜 이 아이디어는 실현되지 못했을까? 터무니 없는 조언이라고 생각했겠지. 아이디어 실현 여부보다 더 아픈 건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세스 고딘처럼 재빨리 빛나는 아이디어를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보기에는 굉장히 위험하지만 사실은 절대적으로 안전한 유아용 장난감을 만들 수도 있다. 교회에 록밴드를 소개시키는 것은 어떨까? 시끄러운 물건을 소리 안 나게 내놓는다든가, 뚱뚱한 물건을 날씬한 물건으로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청구서를 보낼 때 막대사탕 하나를 같이 넣어 보내는 것도 괜찮겠지. 




세스 고딘은 끊임없이 생각한다.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이런 건 너무 정직하니 거꾸로 한 번 생각을 해볼까...? 지름길은 없다. 자꾸 새로운 생각을 해보는 사람만이 새로운 길을 찾는 법이다. 세스 고딘의 얘기에서 절망을 느낄 것인가, 희망을 느낄 것인가. 선택은 오로지 당신의 몫이다. 

(*위 글 중 '뚱뚱한 물건을 날씬한 물건으로'는 다이어트 코크 자판기 아이디어에서 이미 실현된 듯하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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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

혜자 2017. 5. 13. 14:56




왕가위의 영화 [아비정전]에서 장국영은 장만옥에게 아무 것도 묻지 말고 그냥 일 분만 같이 시계 초침을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일 분이 흐르자 그윽한 눈빛을 하고는 이렇게 여자의 마음을 흔드는 멘트를 날린다. 

"1960년 4월 16일 오후 3시. 우리는 일 분 동안 함께 했어. 난 잊지 않을 거야. 우리 둘만의 소중한 일 분을."

생각해보면 아비는 요즘 우리가 얘기하는 '나쁜 남자'의 전형이었다. 참 유치하지만 난 이 대사가 너무나 절묘해서 오래 전부터 날짜에서 시간까지 죄다 외우고 있었다. 

갑자기 비가 후두득 떨어져 안으로 들어온 토요일 오후의 성북동 소행성. 신디 로퍼의 ‘At last’앨범을 틀어놓고 각자 책을 읽던 아내와 나는 빗소리에 마음이 움직였다. 창 밖을 바라보던 아내는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와, 좋은데.” 

그래서 나는 우리 둘만의 일 분을 남겨보기로 했다. 컴컴한 하늘에선 사나운 비가 내리고 오디오에선 신디 로퍼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내는 [음식의 언어]라는 책을, 나는 [오래된 생각]이라는 소설을 읽고 있다. 그녀는 내가 이런 동영상을 찍은 걸 아직 모른다. 방금 또 천둥이 쳤다. 뭔가 깊은 산장에 둘만 갇혀 있는 느낌이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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