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연극이 무대에 다시 오른다는 소식만으로도 사람들이 꺄아, 소리를 지르는 작품들이 있다. 지난 달 1년 만에 다시 막을 올린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가 그랬다면 이번 달엔 2년 만에 대학로로 돌아온 [프로즌] 역시 그렇다. 도대체 사람들은 왜 이 작품들에 열광하는 걸까. 극단 맨씨어터 10주년 기념으로 올린 [프로즌]을 보았다.

연극을 영어로는 'Play'라고 한다. 기본적으로 뭔가를 생산하는 행위라기보다는 노는 것에 가까워서 그럴 것이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면 그럴 듯한 거짓말을 지어놓고 무대 밑에서, 또 무대 위에서 서로 암묵적으로 진짜처럼 여기며 그 세계를 통해 진실을 말해보려는 '수작'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더 맞는 거 아닐까. 더구나 [프로즌] 같은 번역극은 분명히 우리나라 배우들이고 우리 말 대사인데도 등장인물들의 이름이나 의상, 분장, 배우들의 억양 등에서 어릴 적 TV에서 보던 '더빙 외화'를 보는 듯한 낯섦을 경험하는 재미가 플러스 된다. 물론 그만큼 배우들의 연기와 대사 능력이 보증되어야만 가능한 쾌감이겠지만.

어린 딸 로나를 유괴당하고 20년 동안 그녀가 살아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던 낸시가 있다. 그리고 로나를 비롯한 수십 명의 소녀를 납치 및 성폭행한 소아성애자이며 연쇄살인범인 랄프가 있다. 두 사람 사이엔 연쇄살인범들의 심리를 연구하는 정신과의사이자 알코홀릭인 아그네샤가 끼어든다. 그녀는 랄프 같은 사람은 정상인들과는 뇌구조부터 다르므로 그의 납치 강간 살해행위도 범죄라기보다는 일종의 질병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심리 전문가다. 그러나 천진한 미소를 띤 살인마에게 사랑하는 딸을 잃은 낸시도 그렇게 생각할까? 대충 설정만 훑어봐도 만만치 않은 연극이다. 과연 이렇게 꽉 짜여진 등장인물 구도 속에서 배우들은 어떤 이야기를 펼쳐갈 것인가.


랄프는 참 표현하기 힘든 인물이다. 관객들에게 혐오와 연민을 동시에 느끼게 해야 한다. 어린아이에게 말을 걸었다가 무시를 당하면 심하게 상처를 받는 약한 영혼임과 동시에 소녀들을 밴으로 유인해서는 '아프지 않게' 죽였다고 자랑하는 섬뜩한 싸이코패스이기도 하다. 심지어 자신을 체포하러 온 경찰들의 무능을 지적하기도 하는 전도본말의 캐릭터다. 랄프 역을 맡은 배우 박호산은 흥분하면 말을 더듬거나 쌍욕을 내뱉는 중간중간 해맑은 미소를 내보이는 설정에 '틱장애'라는 신의 한수를 더 얹어 싸이코 살인마의 내면으로 깊숙히 들어간다. 막판에 격하게 자신의 뺨을 치는 장면에서는 '정말 아프겠다'라는 생각에 저절로 객석에서 비명이 튀어나오지만 나중에 만나 물어본 결과, 그 순간엔 아픈 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그만큼 극 속으로 몰입한 것이다. 낸시 역을 맡은 배우 우현주의 발성과 대사처리능력 또한 탁월하다(극단의 대표인 우현주는 공동번역 작업까지 맡았다).

왜 '프로즌'인가. 대사 중 아그네샤가 아직 탐구하지 못한 인간의 뇌 세계를 '얼어붙은 땅' 비슷하게 표현한 것도 있고 또 20년 전 로나를 유괴당한 순간부터 낸시의 감정이 얼어붙어서 그렇다는 말도 있다. 나는 영국의 극작가  브라이오니 래버리(Bryony Lavery)가 창조한 극단적인 이야기와 한국 배우들의 열연이 보여주는 극한의 시너지가 이 여름의 더위를 꽝꽝 얼려버리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뚱딴지 같은 생각을 해 본다.


이 연극은 여성 캐릭터인 낸시와 아그네스만 붙박이 출연이고 랄프 역은 세 명의 남자 배우가 돌아가면서 맡는다. 그러면서도 하루 한 번 공연 뿐이다. 하루에 두 번 공연을 올리는 연극도 있지만 이 작품은 그런 건 꿈도 꾸지 못한다고 한다. 연극이 끝나면 배우들이 모두 탈진하기 때문이란다. 2년 전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최대의 고통을 보여준다는 세평 덕분에 '멘탈 탈곡극'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심리 스릴러 [프로즌]. 강추하는 작품이다. 7월 16일까지 에그린 씨어터에서 상연한다. 놓치지 마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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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노무현입니다]를 보았다. 과연 눈물 없이 이 영화를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미루고 미루다 가긴 했지만 상영관 입구에서 곽티슈를 한 통씩 나눠주길래 '에이, 이건 좀 오버 아냐?'라고 했던 아내는 막상 안에 들어가서 상영 내내 휴지를 뽑아 눈물을 닦고 코를 팡팡 풀었다.

눈물의 포인트는 안희정의 인터뷰였다. 별로 슬픈 얘기도 아니었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노무현은 확실히 별종이었다. 노무현의 운전기사와 전 국정원 직원의 인터뷰를 보면 알 수 있다. 평생을 생각한 대로 행동하고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이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던 사내. 그에게 우회도로나 지름길은 없었다. 그냥 정도를 뚜벅뚜벅 걷다가 절벽을 만나자 거기서 수직낙하했다. 그가 바로 노무현이다.

아내는 영화를 보고 나서 "이인제는 확실한 악역, 강원국은 유머와 코믹 담당"이러고 깔끔하게 정리를 해줬다. 나는 나레이션 한 번 없이 내러티브가 이렇게 잘 연결될 정도면 감독이나 구성작가들이 자료화면을 얼마나 많이 봐야 했을까를 생각하며 그 노고에 감탄했다. 감독과 함께 이 영화의 구성을 담당한 작가는 아내의 친구인 양희 씨다. 

우리는 영화를 보고 나와 남대문 부원면옥에 가서 냉면과 닭무침, 그리고 소주를 주문했다. 아내는 한 병만 마시라고 신신당부를 했지만 닭무침 안주가 남아서 할 수 없이 한 병을 더 주문해야 했다. 그리고 나와 서울로를 걷다가 서울로 기획에 첨여했던 시청 직원 온수진 주무관을 만나 커피도 한 잔 했다.

영화는 슬펐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오히려 역설적인 희망이 생겼다. 우리는 노무현이라는 성공 케이스를 경험한 사람들이다. 선한 사람들이 이기는 경험. 그게 중요하다. 광고회사도 성공경험은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경쟁PT를 선호한다. 가끔은 우리가 옳다는 걸 확인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막판에 죽음을 선택했다고 해서 그 누가 이를 실패라 말할 수 있겠는가.

비록 '노사모'는 아니었지만 우리 모두 노무현과 함께 한 시간을 기억하자. 어쨌든 그런 희망과 환희를 안겨 준 사람이 있었다니, 고마운 일 아닌가. 노무현의 눈물을 딛고 일어선 문재인 정부는 좀 더 강하고 더욱 세련되어지길 바란다. 그리고 그렇게 될 것이라 믿는다. 그게 '동업자' 노무현을 기리는 최선의 방법이니까.


(* 어제 낮술에 취해 페이스북에 올린 리뷰인데 기록 차원에서 여기에도 남겨 봅니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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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열한시 반쯤 퇴근해서 오늘 아침 출근하기 직전까지 자는 시간 빼놓고는 계속 아내에게 야단을 맞는 대기록을 세웠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겠냐고 물으시겠지만, 그게 가능하다.

발단은 퇴근 직후 나의 행태였다. 언덕길을 올라오느라 숨이 차고 더웠던 나는 들어오자마자 창문을 앞뒤로 열고 옷을 활활 벗어 아무 데나 집어던졌는데 그러느라 현관문을 미처 닫지 못한 관계로 이른 여름모기들이 방충망이 없는 현관문으로 대거 난입했고, 그 중 몇 마리가 날아다니다 아내의 몸을 물고 달아났던 것이다. 아내는 빨리 현관문을 닫으라고 소리를 질렀고 모기약을 들고 와 자신에게 바르라고 명령했다. 모기약을 발라준 뒤 샤워를 하고 돌아와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나에게 등이나 긁으라고 핀잔을 주던 아내는 소변을 보러 화장실에 갔다가 내가 욕실을 물바다로 만들어 놓았다고 또 화를 냈다. 그러면서 아내는 내가 한 번 입은 옷을 빨래통이 아닌 옷장에 다시 처넣기를 반복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아내의 말을 듣고 세탁실 앞을 보니 내가 한 번씩 입었던 티셔츠와 바지, 반바지, 잠자리 옷 등이 작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 밖에도 뭔가 사소한 야단을 몇 가지 맞았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 내가 왜 이렇게 왜 이렇게 하루 종일 야단을 맞아야 하나 생각해 보았다. 나는 그런대로 성실하고 듬직한 남편이다. 담배도 피우지 않고(끊은지 10년이 되어간다) 술도 많이 마시지 않고(자주 마시긴 한다) 도박도 하지 않으며 바람도 피우지 않고 일도 열심히 한다(잘 한다는 애긴 아니다). 더구나 아내를 사랑한다. 그런데 왜 이러는 걸까.

출근 준비를 다 한 뒤 마당을 쓸고 있는 아내에게 인사를 하러 갔더니 "당신은 왜 물건을 제자리에 못 둬?"라고 묻는다. 나는 그런 일 없다고 항변을 하고 있는 사이 아내는 내가 사용하고 재활용 쓰레기박스 옆에 세워놓은 큰 빗자루를 옥상 계단 밑으로 옮기는 것을 보았다. 생각해 보니 그 빗자루는 늘 계단 밑에 있었다.

출근해서 컴퓨터를 켜고 있는데 아내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왔다. 세무서에 왔는데 종소세가 너무 많이 나와 슬프다는 것이다. 오늘은 5월 31일. 종합소득세. 그렇다. 남편은 잘못이 없었다. 문제는 늘 그놈의 돈, 또는 나라, 시스템에 있었던 것이다. 좋은 나라에서 살면 좋은 남편은 저절로 되는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이제부터 하루에 한 번씩 나라에 책임을 전가하자. 새 정부에게는 좀 미안한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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