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서점에 가면 주로 소설책 코너에서만 서성이는 ‘이야기 중독자’이지만 뭔가 아이디어에 쫓길 땐 남들이 써놓은 ‘아이디어 내는 법’ 같은 책들도 자주 삽니다. 이번에 프리랜스 카피라이터 김하나가 쓴 [당신과 나의 아이디어]도 경쟁 프리젠테이션을 앞두고 그런 심정으로 산 책입니다. 


주인공이 종로구 누하동에 있는 조그만 술집(이곳의 사장 황영주는 실제로 지은이의 오랜 친구라고 합니다)에서 어떤 모르는 남자와 ‘미스티’라는 노래에 대한 얘기를 주고받다가 ‘창의성’에 대한 이야기로, 또 ‘아이디어’에 대한 이야기로 꼬리에 꼬리를 물어 대화를 나누게 된다는 설정의 책입니다. 대화체로 계속 이어지다 보니 다른 실용서처럼 딱딱 떨어지는 맛은 덜하지만 이런저런 상식들을 토대로 ‘아무 것도 아닌 것들도 다 훌륭한 아이디어로 변할 수 있’고 ‘별 생각 없이 지나치는 것들이나 역사 속의 사건들에도 사실은 굉장한 아이디어들이 숨어 있음’을 알 수 있어 시시때때로 가볍게 들춰보기 좋습니다. 


오늘도 막연한 마음으로 책을 읽다가 신영복 선생에 대한 다음 글을 발견했습니다. 








그녀 : 제가 ‘신영복식 층간소음 해결법’이라고 부르는 건데요. 언젠가 신문에 실린 신영복 선생 인터뷰를 봤더니, 위층에서 쿵쿵 뛰는 애가 있으면 올라가서 아이스크림이라도 사주면서 얼굴도 보고 이름도 묻고 해보라는 거예요. 그러면 좀 낫대요. 

나 : 왜요? 

그녀: ‘아는 애가 뛰면 덜 시끄럽다’는 거예요. 

나 : 허! 완전히 다른 방향의 해결책이네요. 

그녀 : 네. 전 이 얘기를 듣고 너무 좋았어요. 생각의 방향이 틀어지는 게 느껴지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이들을 못 뛰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어디 되나요. 아파트라는 주거형태의 한계상 아무리 소음을 줄이는 설계를 해도 윗집에서 애가 뛰면 울리게 마련이지요. 그런데 신영복 선생의 상자는 물리적 완화가 아니라 심리적 완화라는 결론을 도출한 겁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상황이 마음에 안 들면 항의를 하거나 규탄을 합니다. 신영복 선생은 위층 사람에게 항의를 하는 대신, 그 상황을 나아지게 할 현명한 아이디어를 냈지요. 

동시에 이 이야기는 소통을 강조하는 선생의 뜻을 전달하는 도구로도 쓰이고 있지요. 층간소음 얘기를 하고 있지만 사실은 사람 사이의 소통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아이디어이기도 한 겁니다. 




신영복 선생의 정신세계는 정말 섹시하지요? 이 이야기는 당장 그대로 따다가 어느 건설회사나 통신회사의 기업PR로 써도 손색이 없을 것 같네요. 전 책 한 권에서 마음에 드는 이야기나 소재 한 가지만 건져도 남는 장사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시집에서도 딱 시 한 편 건지면 좋은 거구요.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 책은 벌써 본전은 넘은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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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금

혜자 2014. 1. 19. 13:03



이런 남편과 사는 게 좋다는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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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심윤경의 소설들을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맨 처음 읽은 건 후배 송인덕이 저희집까지 찾아와 선물로 주고 갔던 책들 중 하나인 [달의 제단]이었는데, 어느 양반댁 종손이 주인공으로 나오서 자칫 엄격하고  고풍스러운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소설은 뜻밖에도 아주 탐미적이고 영리하며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독특한 구조더군요.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원작을 가지고 KBS [TV문학관]에서 단막극으로 만든 적도 있더라구요. 


영화기획자인 제 친구 김유평 씨가 어느날 “요즘은 심윤경의 소설을 야금야금 꺼내 읽는 맛에 산다”라는 얘기를 했을 때도 저는 뭐 그냥 시쿤둥했었는데 어느날 헌책방에서 그녀의 데뷔작인 [나의 아름다운 정원]을 읽고 나서는 그 말을 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은희경의 데뷔작 [새의 선물]을 연상시키는 ‘홍제동 버전 성장소설’이었는데 역시 문장이 탄탄하고 진한 유머와 페이소스는 물론 이야기를 능숙하게 이끌어가는 힘이 돋보이는 작품이었습니다. 한레문학상 수상작이었죠. 


그 다음 읽은 책이 [사랑이 달리다]입니다. 이건 뭐 작가가 대놓고 독자를 웃겨 쓰러뜨리기 위해 쓴 듯 빵빵 터지는 캐릭터들이 종횡무진하는 굉장한 작품입니다.  서른아홉 살이 되도록 아빠의 신용카드만 믿고 취직 한 번 안 한 여자가 있습니다. 그녀는 ‘잘 생기고 학벌 좋지만 섹스리스인 남편’ 말고 언제나 새로운 남자와의 연애를 꿈꾸는 똘끼 충만녀 혜나입니다. 그리고 그 곁에는 수십 억원의 빚을 지고도 태평스럽게 오픈카를 몰고 다니는 말썽쟁이 작은 오빠가 있고 젊은 여자와 바람이 나 집을 나가버린 아빠, 돈 오만 원에도 벌벌 떠는 사업가 큰 오빠 등등 시트콤스러운 캐릭터들이 줄줄이 등장하는데 정말 스피디하고 유쾌합니다. [사랑이 채우다]가 후속작이라는데 아직 그 책은 못 구했습니다. 


며칠 전 알라딘 중고서점에 갔다가 [서라벌 사람들]이란 연작소설이 있길래 또 샀습니다. 심윤경이 역사소설을 쓴다고 하길래 어떤 식일까 했는데,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황당함과 대담함이 공존하는군요. 


심윤경은 신라의 황실 사람들을 거인으로 상정합니다.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들에게 군림하려면 일단 겉모습부터 일반인보다 월등하게 커야 한다는 거죠. 등장인물 중 하나인 지증제의 음경은 한 자 다섯 치에 이르러, 아무리 색사에 능한 여성이라도 그의 거대한 양물을 감당하지 못하는 바람에 황손은 황위를 잇지 못하고 몽달귀신이 될 위기에 처합니다.  그러나 그의 신하가 백방으로 수소문 하던 중 기골이 장대한 여인을 드디어 찾아내(“바로 내가 원하던 바요! 내가 모시는 어른의 기골이 또한 장대하오! 그분과 동침하다가 옥문이 찢어져 목숨을 읽은 여인이 그간 여럿이었더니, 그분의 배필이 되실 분을 이제야 찾았소”) 태후로 봉하게 되죠. 이들은 이차돈의 순교 이전의 사람들이기에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때는 기도 대신 ‘교합례’를 지냅니다. 즉, 조상을 모신 자리에서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대표로 섹스를 하는 겁니다.  


이날 천제에서 지증제와 연제황후는 그들의 몸을 받친 뱀 모양 제단을 와지끈 무너뜨리고도 교합을 멈추지 않았다. 그 먼지 오르는 잔해 속에서도 한 식경이나 합환을 계속 했으니 그들의 땀과 애액 제단 아래로까지 흘러내려 태자 법흥의 비단옷을 적셨고 그 벽력 같은 교성에 동해 바다의 용까지 잠에서 깨어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합화례가 끝나면 황제와 황후는 서로 노고를 치하하며 특별한 수라상을 받으시었는데, 각각 검은 돼지와 흰 돼지를 한 마리씩 드시었다.



일연스님의 저작을 연구한 뒤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경건한 심정으로’ 이 소설을 썼다고 눙을 치는 호방한 작가의 변이 믿음직스럽습니다. 오늘 이차돈의 목을 자르는 에피소드가 들어있는 ‘연제태후’ 한 편 읽었는데 앞으로도 ‘준랑의 혼인, ‘변신’, ‘혜성가’, ‘천관사’ 등의 연작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도 재미있을 거 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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