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연유에서인지는 모르겠는데 고등학교 2학년 때 명동 엘칸토 예술극장에서 피터 한트케의 언어유희극 <카스파>를 본 적이 있다. 아무런 사정 정보 없이 보게 되었는데 당시로는 매우 파격적인 일인극이라 충격을 받은 기억이 있다. 

나는 연극 도중에 목이 칼칼해서 계속 '음,음...'하고 헛기침을 했는데 배우가 갑자기 연극을 멈추고 나를 똑바로 노려 보며 "거, 연극을 볼 때는 그 목으로 음,음...소리 좀 내지 말아요!"라고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지금 생각해 보면 그 배우도 좀 너무 했던 것 같다). 고등학생인 나는 너무 놀라고 무안해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었다. 그러니 어찌 그 연극을 잊을 수가 있으랴.  


내게 명동은 구두와 연극의 거리였다. 엘칸토 예술극장이라는 이름도 금강제화라는 구두회사의 후원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을 것이다. 추송웅의 [빨간 피터의 고백]을 본 것도 명동 삼일로 창고극장에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창고극장은 사라졌고, 엘카토예술극장도 없어졌다. 그런데 언제인가 명동예술극장이 다시 문을 열었다. 

동네에 사는 김진경 연출가가 이 연극을 우리에게 추천했고 아내가 김광덕 배우에게 예약을 부탁했는데 마침 예약 취소된 자리가 있다고 해서 운 좋게 빨리 그 연극을 보게 되었다. 어제 저녁 연극을 보고 나와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휴대폰으로 급하게 관람후기를 써서 페이스북에 올렸었다. 오늘 정신을 가다듬고 독서일기를 하나 올린 뒤 오자 수정을 해서 여기에도 다시 한 번 올려 본다. 


아아. 내가 이렇게 문화 생활을 자주 해도 되는 걸까. 성북동으로 이사 온 뒤로 영화는 좀 줄었는데 오히려 연극 나들이가 부쩍 늘었다. 배우들이 이웃에 살아서 그런가 보다. 오늘은 명동예술극장에서 에우리피데스의 희곡을 로버트 알폴디가 새로 해석한 연극 [메디아]를 관람했다. 성북동에 사는 여배우 김광덕 씨가 코러스로 출연하는 작품인데 오랜만에 보는 배우 이혜영 주연 작품이라 더욱 기대가 되는 연극이었다.

난 어렸을 때 엉터리로 읽은 기억이 조금 나긴 하는데(그리스 비극이 다 그렇듯이)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과 배신, 분노, 복수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일단 나는 이혜영의 목소리와 억양을 매우 좋아하는데 이번 연극의 타이틀 롤인 메디아 역으로는 이혜영 이외의 배우를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딱 적역이었다(단 8분 간 출연했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 남명렬 배우 - 요즘 아로나민 골드 CM에 나와 '드신 날과 안 드신 날의 차이을 경험해 보십시오' 라고 말하는 분 - 도 좋았다) 같이 출연한 김광덕 씨는 이혜영 선배와 출연하며 그 카리스마를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다는 소감을 남겼다.

믿었던 남자 이아손에게 배신을 당한 메디아의 마지막 선택은 무엇일까. 배신자에게 가장 큰 아픔을 남기는 방법을 고안해낸다. 그건 바로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을 죽이는 것이다. 최고의 복수는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스스로 용서 받을 수 있는 여지를 남기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단히 극단적인 방법이지만 비극의 장치로서 이보다 더 센 선택은 없을 듯하다. 감독은 신들의 이야기였던 원작에서 신의 영역을 모두 삭제하고 철저하게 인간의 '러브 스토리'로 개작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중에 관객과의 대화에서 이혜영 배우에게 들은 얘기지만 '분노는 큰 사랑에서 온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도 했다.

앞뒤로 움직이는 기다란 의자를 이용한 심플한 무대도 멋졌고 그리스 비극이지만 모두 현대 의상을 입고 나오는 점도 좋았다. 다만 유머가 거의 없는 정극 특유의 팽팽한 긴장감 때문에 좀 힘들었다. 그리고 해설을 대신해 가끔 나오는 직설적인 대사는 너무 친절해서 짜증이 났다.

연극이 끝나고 나서 내 앞에서 일어서던 여자 관객은 옆 친구에게 "야, 내 기가 다 빨린 느낌이다." 라며 웃었다. 두 시간 내내 계속된 열연과 긴장감에 약간 탈진을 한 것이다. 물론 연출가도 배우도 관객도 쉬운 길을 마다하고 일부러 선택한, 고되지만 뿌듯한 탈진감이었다.

끝으로 이혜영 얘기 하나만 더. 연극이 끝나고 관객과의 대화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두 아이를 죽인 뒤라 옷과 손에 피를 묻힌 상태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특히 이혜영이 개인적인 얘기를 언급하는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그동안 계속 작품 활동을 하긴 했지만 지난 이십 년간 엄마와 아내로서 아이들 키우는 데만 집중하다가 작년에 연극 [갈매기]를 기점으로 '숨어있던 욕망'을 다시 발견했음을 깨닫고 작품이 끝난 뒤 집에서 일주일을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심정을 추동력 삼아 이번에 다시 [메디아]라는 작품에 임하게 되었다고 한다. 4월 2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상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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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과 문체의 향연’에 있어서 우리 글이 도달할 수 있는 빼어남의 정점에 서 있다고 생각되는 에세이 [자전거 여행] 어딘가에서 김훈은 시장에서 파는 해산물들을 바라보며 ‘인간은 기본적으로 개불과 다를 바 없다. 입과 항문으로 구성되어 있을 뿐 나머지는 다 부속물이다’라는 생각을 토로한 적이 있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매우 인색한 평가지만 평소 거대담론이나 인간의 신념따위를 도무지 믿지 못하는 그의 솔직한 심정이 서려있는 글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비록 역사소설이라 하더라도 권력이나 영웅의 이야기와는 거리가 먼 ‘개인’으로 귀결된다. <칼의 노래>가 임진왜란 당시의 전지적 시점이 아닌 이순신 개인의 일인칭 시점으로 전개된 것이나 <흑산>도 천주교 박해 당시 나라 안팎의 역사정치적 상황을 파고드는 대신 황사용이나 정약전이라는 개인의 선택에 집중했던 게 그 까닭이다. 

그런 김훈이 일제시대부터 8.15해방, 6.25와 월남전을 지나 10.26과 1980년대를 아우르는 소설을 쓴다면 어떤 모습이 될까. 그 해답이 바로 6년 만에 새로 나온 소설 [공터에서]다. 소설은 마동수라는 한 사내의 초라하고 쓸쓸한 죽음으로 시작된다. 독립문 근처 빈민들이 모여 사는 쪽방촌에서 쓸쓸하게 죽어가는 그의 생애는 일제시대 서대문형무소에 끌려가서 매 맞던 모습에서부터 만주를 떠돌아 아나키스트 운동을 하다가 실패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도 영원히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던 인물의 약전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1979년에 독재자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찾아온 그의 죽음이 다른 소설에서처럼 한 세대를 마감시키고 새로운 탄생을 축복하는 도식도 아니다. 그는 북에서 젖먹이를 잃고 내려온 아낙을 만나 그 사이에서 두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첫 아이는 장세, 둘째는 차세라 이름 지었다. 

마장세는 월남전에 나가 훈장까지 탔지만 그 이력을 자랑스러워 하지 않는다. 심지어 제대 후 고국으로 돌아오지도 않고 괌으로 가서 고철 사업을 하며 살아간다. 적진에서 탈출하는 과정에서 아직 살아있던 동료를 죽였던 죄책감이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하면 너무 뻔한 이야기가 될 터이고 정작 그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묘비 사이를 걸어가면서 마장세는 1972년 9월 25일 롱하이에서 덜 죽은 김정팔을 사살한 일은 잘한 일도 아니고 잘못한 일도 아니며, 거기에 잘잘못을 들이댈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가을빛에 반짝이는 말뚝들이 마장세의 마음 속에 그런 생각을 끌어당겨주었다. 그때 죽이지 않았더라면 김정팔은 밀림 속에서 혼자 죽거나, 적에게 끌려가서 심문받다가 죽었을 것이고, 실종으로 분류되어 무공훈장도 묘비도 없었을 것이지만 딱히 어느 쪽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때 김정팔을 쏘아 죽인 것은 일이 그렇게 되어질 수밖에 없는 대로 되어진 것이라고 마장세는 비석들 사이를 걸어가면서 생각했다. 그렇지 않은가? 무엇이 잘못되었단 마인가. 마장세는 스스로에게 되물어서 마음을 안정시켰다. 

김훈의 소설에서 인간은 똥을 싸고 토악질을 하거나 물비린내에 시달리며 겨우 목숨을 부지하는 존재들이다. 주인공이라고 해도 좀처럼 착한 사람이나 악한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어쩔 수 없이 자신에게 닥친 상황과 세상을 겨우 또는 기진맥진 ‘살아내는’ 개인들이 존재할 뿐이다. 김훈의 이러한 비관은 역사소설에서는 비장함과 멋스러움으로 다가오는데 현대소설에서는 그대로 비참함이 된다. 그들은 역사의 중심에 설 수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변방을 떠돌며 고철이나 쓰레기 수거사업을 하고 광야를 달리는 대신 어중간한 ‘공터에서' 서성일 뿐이다. 동생 차세도 오랜 실직 상태에 시달리다 형과 친구의 일을 돕지만 다시 실직 상태가 된다. 모두 지금의 상태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달리 방법을 알지 못한다. 

김훈이 이렇게 여러 세대를 이야기한 적이 없다. 다섯 권짜리 대하소설이 될 수도 있었던 이 이야기는 역사와 사회로 곁가지를 치고 뻗어나가지 않고 개인 차원으로 수렴하는 작가의 특질 때문에 300페이지가 조금 넘는 소설로 마감되었다. 그러면서도 근 60년을 살아온 한 집안의 내력과 그 주변인물들에 대한 쓸쓸한 소회가 마음을 서늘하게 적신다. 더구나 형용사와 부사를 배제하는 그의 글쓰기는 주어와 술어의 단조로운 반복이지만 화려하지 않아서 더 화려해지는 역설을 낳는다. 

그도 몬테크리스토 백작 같은 멋진 영웅담이나 복수극을 쓰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심장에 깊은 허무를 탑재하고 있는 김훈이라는 캐릭터는 결코 그런 글을 쓰지 못할 것이고 쓰지도 않을 것이다. 시인이자 에세이스트인 장석주는 [글쓰기는 스타일이다]에서 ‘허무를 말할 때 그의 문체는 가장 화사해진다’라고 했다. 나도 김훈이 쓴 벚꽃 지는 날에 대한 짧은 글을 기억한다. 미인은 화장을 하지 않은 맨얼굴일 때 그 아우라가 더욱 빛난다. 김훈의 글이 그렇다.   


*사족 : 내가 읽은 것은 초판5쇄인데, 188페이지 마동수의 묘지 얘기를 할 때 ‘마차세의 동지들이 거기 묻을 것을 요구했다’라는 문장은 ‘마동수의  동지들’을 잘못 쓴 게 아닐까 생각된다. 아무리 읽어보아도 마동수에 관한 이야기이고, 마차세에겐 이렇다 할 동지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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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소설 [공터에서] 독후감을 쓰려고 장석주의 [글쓰기는 스타일이다]에서 김훈 부분을 다시 들춰 본다. 난 독후감을 쓰기 전에 백지에 몇 개의 단어, 또는 몇 줄의 문장을 끄적이는 버릇이 있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것이다. 어떤 작가의 작품이든 몇 줄의 메모에서 글이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것을 상상하는 건 늘 즐겁고 짜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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