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국문학 강의를 하고 있는 친구를 만나 술을 마시다가 요즘 문창과 학생들의 꿈이 대부분 동화작가라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젊은 애들이 너도나도 갑자기 동심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나? 그럴 리가 없다. 졸업 후 순수 소설가나 시인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자신이 없으니 그나마 잘 팔린다는 동화 쪽으로 발길을 들여 놓겠다는 속셈이다. 한숨이 나왔다. 도대체 누가 동화작가는 먹고 살 만하다는 환상을 심어 주었단 말인가? [마당을 나온 암탉] 같은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서점에서 [Why?] 같은 아동 학습물이 꾸준히 팔린다고 해서 동화를 쓰는 일이 만만할 리가 없지 않은가.



문제는 장르가 아니라 내용이다. 코난 도일이 ‘먹히는’ 장르인 추리물을 선택해서 쓰는 바람에 지금도 셜록 홈즈가 TV시리즈 등으로 계속 확대 재생산 되고 있단 말인가? 아니다. 내용과 캐릭터가 훌륭해서다. 스티븐 킹의 수많은 소설들은 원래 대중 소설이라 영화계와 방송국에서 앞다투어 작품 계약을 하는가? 아니다. 그의 작품은 흥미진진하고 뭔가 새롭기 때문이다.


소설가 김탁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의 소설들은 서점에 나오기가 무섭게 [조선 명탐정] 같은 대중 영화로, [불멸의 이순신]이나 [나, 황진이] 같은  드라마로 판권이 팔려 나간다. 그런데 그가 작품을 구상할 때마다 “아마 몇 년 있으면 이순신이 뜰 거야”, 라거나 “이번엔 백탑파를 한 번 띄워 볼까”라고 생각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작년에 마포의 문화공간 숨도에서 열렸던 '기획자의 마음'이라는 강의에서 소설가 김탁환을 만난 적이 있다.


어떻하면 그렇게 내놓는 소설마다 현재 트렌드에 부합되는가? 라는 사람들의 질문에 그는 ‘본질이 트렌드다’라는 획기적인 답변을 대뜸 내놓았다. 본질이 트렌드라니? 자기가 트렌드를 따라가거나 예측하는 게 아니라 가만히 인간의 모습과 역사의 물결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뭔가 본질적인 것이 보이고 그것들을 입체적인 시각과 설계로 불러일으키고 나면 결국은 그것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새로운 ‘트렌드’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사랑, 행복, 고통, 질투, 꿈, 비루함 등 몇몇 단어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게 우리 호모 사피엔스의 삶이다. 아울러 역사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곧은 길과 굽은 길의 대결, 도전과 실패의 반복과 교차, 합리와 불합리를 넘어서는 막막함, 만약을 허용치 않는 냉정함, 끊임없이 반추하는 과거와 미래의 대화가 인간의 역사다.



그런 김탁환이 이번에 선택한 소재는 바로 ‘금융’이다. 20세기를 넘어 21세기까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이 ‘자본주의’라는 괴물은 도대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 민족자본이 형성되던 시절에 그 곳에선 어떤 인물들이 살고 있었는지를 작정하고 탐구해 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바로 3권짜리 장편소설 [뱅크]다.


구정 연휴에 무심코 책꽂이에서 꺼내 들었던 [뱅크] 1권은 빠른 속도로 읽혔다. 개성 상인 장훈, 인천 상인 서상진, 서울 상인 홍도깨비 등 한반도 주요 지역의 상권을 대표하는 세 거상이 모여 급격하게 밀려드는 외세의 자본으로부터 이 나라를 지키자고 맹세하는 술자리에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곧 그들의 아들 딸들인 장철호와 박진태, 최인향의 이야기로 뻗어나간다. 

1868년생 동갑내기로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 모두 아홉 살이었던 이들은 인천 부두를 배경으로 인연을 맺기 시작하면서 모험과 도전, 경쟁, 배신, 살인, 섹스, 러브스토리 등이 난무하는 거대한 이야기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김탁환은 소설을 쓰기에 앞서 자료를 많이 모으고 공부를 많이 하는 작가로 유명하다. 역사소설을 쓰는 사람은 아주 사소한 단서라도 역사적 고증에 철저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통상 한 편의 소설을 쓰기 위해 100권이 넘는 책을 사고 그 중 10권 넘는 책을 샅샅이 읽는다고 하니 소설가의 근면함과 장인정신에 고개를 숙일 따름이다. 이번 소설도 마지막 권 말미에 실린 참고문헌록을 보면 ‘국역 경성부사, 서울특별시시사편찬위원회’, ‘조선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처럼 개화기를 다룬 수 많은 책과 논문들은 물론 우리가 읽었던 장하준의 [사다리 걷어차기]나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 같은 대중서적도 쉽게 눈에 띔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그도 이 소설을 쓰면서 두 번이나 집필을 중단했다고 한다. 은행의 역사에 대해 빠삭하게 공부를 하고 나면 곧 작품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글을 써나가다 보니 이 땅의 주식회사가 생겨난 배경이  필요해졌고, 주식회사 역사를 섭렵하고 나자 다시 조선 후의 경제상황이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전까지는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고종 등 정치적 인물들만으로 가득했던 구한말의 이야기는 작가 김탁환의 노력으로 인해 드디어 경제적인 부분의 상상력까지 갖추게 된 것이다.



나는 오랜 버릇대로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서 등장인물들의 개요와 인상착의를 메모하기 시작했다. 등장인물이 많이 나오는 장편소설을 읽을 때는 이렇게 독자 스스로 인물들의 개요를 정리하면서 읽어야 훨씬 입체적으로 이야기의 흐름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장훈, 서상진, 홍도깨비를 시작으로 해서 어린 철호와 진태, 인향 등은 내 메모의 양이 늘어감에 따라 나이를 먹고 도중에 권혁필 같은 악인도 만나게 된다.



“조정래 선생의 [태백산맥]이 훌륭한 이유는 김범우나 염상진보다 염상구를 잘 그렸기 때문입니다.”



김탁환은 [태백산맥]의 염상구를 예로 들면서 ‘악인 캐릭터 창출의 매력’에 대한 소설가적 쾌감을 만끽했음을 고백했다. 이번 소설 [뱅크]에는 절대 악인 권혁필이 등장한다. 15살에 인천 부두에 흘러 들어 온 권혁필은 타고난 지혜와 집념으로 내거간을 거쳐 인천 상단을 접수함은 물론 나중에는 대한제국 상권을 좌지우지할 위치에까지 다다른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는 수많은 협잡과 배신, 살인, 음모 등이 배경도움에 있었음은 물론이다. 권혁필의 야심 덕분에 천민의 아들로 태어나 멋진 복수극을 꿈꾸던 박진태는 배신자의 운명을 짊어지게 되었고, 기생으로 시작해 천하의 절창으로까지 성공한 장철호의 여동생 장윤주도 결국 아편중독에 이어 비극적 죽음을 맞게 된다.


1권을 하룻밤 새 다 읽은 나는 다음날 건대점 반디앤루니스까지 달려가 바로 2,3권을 샀다. 이번 소설은 각 권마다 꽤 두꺼운 분량이었지만 손에 잡기만 하면 다음 내용이 궁금해 나도 모르게 술술 읽히는 흡입력을 자랑했던 것이다. 나는 책이 너무 빨리 읽히는 게 아쉬워 중요한 장면마다 줄을 치기도 하고 페이지를 접어놓기도 하다가 결국은 한 챕터를 다 읽고 나면 즉시 챕터 시작 페이지로 돌아와 간단한 내용을 메모하기로 했다. 그러자 그 동안 별 생각 없이 읽던 소제목들의 의미가 한결 더 분명하게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희한한 경험을 덤으로 얻을 수 있었다.



[뱅크]는 100년 전을 불꽃처럼 뜨겁게 살다 간 젊은이들의 이야기다. 그러나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2014년을 사는 우리들의 모습과 본질적으로 똑같다. 누구나 성공하고 싶어하고 간절한 사랑을 꿈꾼다. 복수를 인생의 목표로 삼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이 세상을 이롭게 하는 선한 의지로 가득 찬 사람도 있다. 다만 우리의 인생은 이 소설 속의 인물들처럼 그렇게 극적이지도 못하고 구조적으로 완벽하지도 못할 뿐이다. 그래서 흡입력 있는 소설 [뱅크]를 읽는 것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 외에도 우리의 인생이 경험하지 못한 다른 세상을 살아본다는 차원에서 ‘대리만족’의 기능까지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곧 TV드라마로 방영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드라마나 영화가 그렇듯 원작 특유의 분위기와 촘촘한 플롯을 드라마가 따라잡기는 어렵다. 정말로 재미를 느끼려면 소설로 읽어야 한다. 그것은 비범하고 성실한 작가가 튼실한 자료와 상상력으로 축조해 놓은 세계로 함께 들어가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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