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알리타 : 배틀엔젤]을 개봉일에 보았다. 제임스 카메론과 로버트 로드리게즈가 제작과 감독을 맡았고 일본 작가 기시로 유키토의 만화 ‘총몽’이 원작이라는 것 정도만 알고 극장에 들어갔는데, 결론적으로 이 영화 죽인다.   

일단 발전된 CG기술에 입이 쩍 벌어진다. 커다란 눈과 뾰족한 턱을 가진 알리타의 얼굴은 애니인지 사람인지 모호한데 반해 너무나 사실적인 바디가 이상한 불균형을 선사하며 관객을 새로운 시각적 경험으로 초대한다. 사춘기 인간의 뇌를 가진 사이보그 전사 알리타. 제임스 카메론은 이 세계관에 매료되어 영화의 판권을 이십 년 전에 사놓았지만 당시 기술로는 그것을 만족스럽게 재현할 수 없어서 지금까지 기다렸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기다린 보람이 있었고 사이버 펑크 매니아인 로버트 로드리게즈에게 감독을 맡긴 것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이런 영화에서 가장 쾌감이 높은 순간은 주인공이 자신의 능력을 처음으로 깨닫는 순간이다. 이 영화에서도 알리타가 처음으로 길거리 모터볼 시합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때가 가장 멋있고 신난다. 물론 그 이후에 나오는 수많은 액션신도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하지만. 

뛰어난 점만 먼저 얘기하느라 그렇지 이 영화는 CG나 액션만 훌륭한 게 아니다. 전체적인 구성도 쉽고 재미있으며 개연성도 충분하다. 알리타 역을 맡은 로사 살라자르는 물론 크리스토프 월츠, 마허샬라 알리 등 배우들의 연기도 좋다. 반드시 극장에 가서 보시기 바란다. 이런 영화를 극장에서 안 보면 도대체 무슨 영화를 극장에서 본단 말인가. 이번엔 2D로 봤으니 다음엔 아이맥스로 한 번 더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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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후 '독하다 토요일' 첫 시즌을 마감했다. 책을 읽은 회원들과 함께 이차로 '혜화동 칼국수'에 가서 간단하게 식사와 음주를 하고 우리집인 '성북동 소행성'으로 올라와 옥상파티를 단행했다.  미리 준비한 간단한 안주 말고는 다른 음식 없이 캔맥주를 마셨는데 다들 매우 즐거워했고 모든 사람들이 늦은 밤까지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맥주를 정말 많이 마셨다. 아침에 일어나 옆집 총각과 함께 종로에 있는 '이문설농탕'에 가서 해장을 하면서 아내가 영화 [서치]를 예매했다. 

'부재중 전화 세 통만 남기고 사라진 딸을 찾는 아빠의 이야기'라는 것 말고는 아무 정보 없이 보기로 한 영화였다. CGV대학로에 들어서자 아내가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해서 11층 투썸플레이스에 가서 커피를 사가지고 오는데 가족들과 함께 이 영화를 보고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던 50대 아저씨가 자신의 딸에게 "...그러게. 컴퓨터 화면으로만 보여주는데도 어떻게 저렇게 재미 있게 만들었냐."라고 감탄하는 소리를 들었다. 지나가는 말이었지만 이 짧은 촌평만으로 영화를 잘 골랐다는 것을 직감했다. 

굉장한 영화였다. 푸른 잔디밭과 하늘이 보이는 평범한 데스크톱 배경화면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사라진 딸을 찾기 위해 그녀의 SNS를 뒤지기 시작하는 장면부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까지 단 한 번도 배우가 카메라에 그대로 노출되지 않는다는 스스로의 원칙을 지킨다. 대신 맥북, 페이스타임, TV보도화면, CC-TV, 텀블러, 유투브, 유캐스트 등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각종 매체에 비친 모습이으로 등장하고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화나 그들이 찾는 정보도 구글 검색이나 G메일 등을 통해서 전해진다. 언뜻 우리 스스로 가두고 있는 SNS 상황을 비판하려고 이러는 게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지만 영화는 그런 사회적 메시지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스릴러의 문법에 충실한 전개를 착착 선보인다. 

보통 이런 컨디션이었다면 잠깐 졸거나 연신 하품을 해대겠지만 평소와 달리 영화에 깊이 빠져 좌석에서 등을 떼고 화면을 향해 몰입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너무 촘촘하고 속도감 있는 영화라 숙취까지 날아가버린 것이었다. 존 조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연기는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정확함의 미덕을 가지고 있었고 1991년생인 아니쉬 차간티 감독은  적어도 세 번의 커다란 반전을 가지고 있는 뛰어난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했다. 컴퓨터나 휴대폰을 기반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니까 좀 차갑거나 평면적일 수도 있을 텐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마우스를 조작하는 손의 동작만으로도 주인공들의 마음이 느껴지는 진기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폴더 안에 있던 가족들 동영상을 플레이 해보고 지우려다가 망설이거나 예전에 딸이 찍어놓은 유캐스트 화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은 자신의 딸이지만 그녀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던 아빠의 슬프거나 놀라운 감정들을 섬세하게 전달해준다. 그리고 후반에 밝혀지는 '악역'들도 다 자신만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어서 스토리 전개상 전혀 무리가 없게 느껴진다(늘 느끼는 거지만 악역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능력이 뛰어난 극작의 기본이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아내가 "와, 이 영화 끝내준다. 올해 본 영화 중 최고다!"라고 외쳤다.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정말 100분 남짓의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의 기분 좋은 몰입감이었다. 뒤늦게 숙취가 몰려와서 집에 와서 한잠 자고 일어나 인터넷을 찾아보니 아니쉬 차간디는 직접 제작한 구글 글라스 홍보 영상으로 24시간 만에 100만 뷰를 돌파한 뒤 ‘구글 크리에이티브 랩’에 스카우트된 매우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 감독이었다. 한 마디로 천재라는 소리다. 페이스북에 들어가 영화사에서 제공한 예고편 밑에 달린 댓글을 읽다가 '내가 실종되고 부모님이 내 SNS를 뒤져보는 것만으로도 올해의 호러'라고 쓴 글에서 빵터졌는데 그 밑에 친구들을 소환해놓고 '우리 엄마가 우리들 단톡방을 본다는 건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라는 둥 '자살하기 전에 트위터, 페북 계정부터 폭파시키고 죽어야 합니다. 물론 자살은 무척 안 좋은 겁니다 여러분' 이라는 둥 각종 두려움에 떠는 댓글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압권은 ' 이거 스토리 상 내 이야기면 아빠가 날 찾는 이유가 죽이러 오는 거로 바뀔 것' 라는 댓글이었다. 우리가 SNS에 얼마나 의존하며 사는지 잘 보여주는 예가 아닐 수 없다. 

돈이 별로 안 든 영화임은 분명하지만 노력만큼은 그 어떤 영화보다도 가상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생각해 보라. 그 수 많은 페이스북 화면들과 사진, 동영상, 유캐스트 화면 들을 감독과 스태프들이 일일이 다 밤새워 만들었을 것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자료를 좀 더 찾아보니 '촬영은 13일 간 했는데 후반작업은 2년이 걸렸다'는 제작 에피소드를 읽을 수가 있었다. 천재적 능력에 인내심까지 갖춘 이 젊음이의 앞날이 기대된다. 강추한다. 그런데 [서치]의 원제는 'Searching'이었다. 배급사에서 알아서 한 거겠지만 도대체 서칭보다 서치가 왜 더 나은 건지는 정말 아직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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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JTBC뉴스가 끝나고 IP-TV로 이재용 감독의 [죽여주는 여자]를 봤다. 처음엔 일찍 자겠다던 아내도 어느덧 TV앞에 앉더니 끝까지 영화를 지켜보았다. [정사]나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 같은 날렵한 드라마를 만들던 이재용 감독이 웬일로 파고다공원의 박카스 아줌마 얘기래? 했는데 막상 영화는 생각보다 귀엽고 산뜻했다. 이를테면 [친구]를 만들던 곽경택이 어깨에 힘 빼고 [똥개]를 만든 느낌이랄까. 작년 10월에 개봉한 영화다. 


윤여정은 나이로는 분명 노인이지만 그냥 노인이 아니다. 어울리지 않게 청자켓을 입고 새침한 표정을 지어도 어울리고 고양이밥을 들고 마당으로 나오다가 다른 사람의 로맨스를 목격하고 부러워하는 얼굴에도 어울린다. 그렇다. '발리 윤식당'의 셰프도 윤여정이지만 이렇게 자그마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를 숨기지 못하며 흔들리는 눈동자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그녀와 마주할 때 우리는 아직 윤여정만큼 '원톱'을 소화해낼 수 있는 여배우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같이 나오는 배우들과의 화학작용도 좋다. 트랜스젠더 배우 안아주나 윤계상이 윤여정과 함께 이태원의 이층집에서 농담을 주고받는 장면에서 내가 "완전 루저들의 합창이네?!" 라고 했더니 아내도 빙긋이 웃으며 동의했다.

여기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과거 성매매로 만난 사이지만 서로 예의를 지키고 품위가 있는 멋진 노인들이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이게 가능한 게, 그들을 바라보는 카메라엔 인간에 대한 연민이 스며있기 때문이다. 김기덕이 만들었으면 비린내가 났을 영화가 이재용이라는 필터를 거치면서 한층 담백해졌다. 그렇다고 푸근하거나 흐뭇한 것까지는 아니다. 그래도 윤여정이 오랜 친구들의 부탁을 들어주느라 살인자가 된 뒤 미련없이 체포되어 경찰차로 실려갈 때 운전하던 경찰이 건내주는 담배 한 가치의 연기는 참으로 위로가 된다. 작품 전체가 열여섯 평짜리 이층 양옥집만 하다면 거기에'사는 게 다 그렇지 뭐' 하고 라는 동의가 두세 평짜리 옥탑방처럼 붙어 있었기에 더 좋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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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도 뉴욕을 사랑하는 작가 우디 앨런은 근 십 년 동안 유럽을 떠돌며 영화를 찍어야 했다. 갑자기 뉴욕에 대한 사랑이 식어서가 아니라 더 이상 미국에서는 자신의 영화에 돈을 댈 투자자들을 찾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헐리우드는 전세계가 사랑하는 시네아티스트 우디 앨런조차도 살아남기 힘든 블록버스터의 왕국인 것이다. 


[매치 포인트] [스쿠프] [환상의 그대]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 등등에서 스칼렛 요한슨, 페넬로페 크루즈 증 새로운 뮤즈들과 함께 유럽에서 소소하지만 자유로운 작업을 진행했던 우디 앨런은 회심의 역작 [미드나잇 인 파리]의 엄청난 흥행으로 인해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이름만으로도 위엄이 서는 ‘여왕’ 케이트 블란쳇과 함께 새 영화를 찍게 된다. 그게 바로 [블루 재스민]이다. 



케이트 블런쳇은 말한다. “우디는 사실 이 역할을 자기가 직접 연기하고 싶어했다. 그런데 재스민이 여자라서 할 수 없이 나를 시킨 것이다.” 케이트의 통찰력 있는 지적이 아니라도 그 동안 우디의 영화들은 모두 자신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 영화 또한 마찬가지다. 부자 남편을 만나 뉴욕에서 상류생활을 즐기던 재스민(자넷이란 이름도 상류상회에 어울리게 재스민으로 바꿨다)은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어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여동생집에 얹혀 살게 된다. 돈은 한 푼도 없지만 여동생한테 갈 때도 일등석을 타고 간다. 루이비똥 가방에 놀라는 여동생에게”이건 다 예전에 산 거고, 내 이니셜이 들어가 있어 중고는 팔기도 힘들어서 그냥 들고 온 것”이라 변명한다. 


그러나 현실은 잔인한 법이다. 재스민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칫과의 사무원으로 취직을 하기도  하지만 자기는 이것보다는 더 뭔가 의미 있고 대단한 일을 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 전부터 사람들이 나한테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되어보라고 했어. 인터넷으로 인테리어 디자인을 배워야지. 그러려면 먼저 컴퓨터 강좌부터 들어야겠네…"그런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마음에도 안 드는 칫과의사가 사귀자고 덤비질 않나, 여동생이랑 사는 ‘루저’가 오히려 자길 업신여기질 않나. 그녀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것은 샤넬의 트위드 재킷과 에르메스 백, 그리고 거짓말뿐이다. 



나는 우디 앨런의 영화가 해피엔딩인 경우가 거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처럼 비극적으로 끝나는 경우도 본 기억이 없다. 모든 것을 잃은 재스민은 길거리에서 혼잣말을 하며 끝을 맺는다. 재스민이 어떻게 될지를 생각하면 그저 한숨만 나온다. 거의 차이밍량의 [애정만세]에 버금가는 엔딩씬이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거기엔 묘한 쾌감이 있다. 나이 80이 넘은 이 악동 할아버지는 우리들에게 섣불리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식의 위로를 건네지 않는다. 대신 “너만 외롭고 힘든 게 아니니 너무 억울해하지 말라”는 역설의 카타르시스를 던져준다. 그래 좋다. 산전수전 다 겪은 우디 할아버지도 힘들단다. 그러니 우리 모두 힘을 내자.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까지는  아닐지라도 뭐, 조금 위로는 되는 법이니까.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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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섹스를 두려워합니다. 물론 좋아하기는 하죠. 그런데 좋아하면서도 동시에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세상엔 그렇게 많은 성적 농담들이 존재하는 겁니다.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자꾸 섹스를 웃음의 소재로 삼는 거죠. 자신이 바람둥이임을 자랑하거나(나 어제 걔 먹었다), 그 친구를 부러워하는 동성 친구 얘기가 반복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너 걔 먹었구나? 나쁜 새끼!) – 레드 제플린의 노래도 있습니다. [Dyer Maker] “너 걔 먹었냐?”(Do you make her?)라는 뜻이죠.

 


잘 생기고 번듯한 직장도 있는 뉴욕의 여피족 브랜든은 외모나 지위에 어울리지 않게 하루 종일 포르노를 보고 틈만 나면 자위를 합니다. 왜 그럴까요? 한 마디로 ‘섹스중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명색이 섹스중독인데도 정작 여자랑은 섹스를 잘 못합니다. 클럽에 가서 놀 때도 보스가 껄떡이던 세련된 커리어 워먼은 술자리가 끝나고 결국 멋있고 매력적인 브랜든에게 옵니다. 하지만 그런 여자랑은 원나잇 스탠드로 끝내버리고 맙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그러니 회사든 집이든 컴퓨터 하드디스크에 수많은 변태 포르노를 쌓아놓고 보는 게 일인 거죠. 그것도 즐기는 게 아니라 매 순간 자신을 경멸하면서 말이죠.

 

그런 브랜든에게 여동생 씨씨가 찾아옵니다. 처음에 전 씨씨가 브랜든의 옛 애인인줄 알았습니다. 허락도 없이 집에 들어와 레코드를 크게 틀어놓고 샤워를 하는 씨씨를 도둑으로 오해한 브랜든이 야구배트를 들고 욕실로 쳐들어갔을 때 그녀는 태연하게 음모까지 노출하면서 브랜든과 얘기를 나누거든요. 그 이후에도 거의 벌거벗은 모습으로 집안을 돌아다니구요. 그런데 알고 보니 여동생이더군요. 아무튼 씨씨는 빈티지 모자를 쓰고 다니며 뉴욕의 클럽에서 노래를 하는 자유로운 영혼인데 팔에는 자살하려다 실패한 면도칼 자국이 무수한 상 똘아이입니다.  

 

브랜든은 씨씨가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클럽에서 두 남매의 주제가나 다름없는 ‘뉴욕, 뉴욕’을 부른 뒤 그날 처음 만난 자신의 보스와 엉켜 집에 와서 같이 자지를 않나, 집에 있는 노트북을 켜서 브랜든이 평소에 음란채팅 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내고 화를 내질 않나. 급기야 브랜든이 자위하는 장면까지 급습해서 훔쳐보고 마구 비웃기까지 합니다. 그러다가도 자기 마음이 약해지면 자고 있는 브랜드의 이불로 파고들어 무섭다고 춥다고 킹킹댑니다. 브랜든은 그런 씨씨가 미워서 냅다 소리를 질러 방에서 쫓아버리죠.

 


브랜든도 노력을 안 하는 건 아닙니다. 회사에서 ‘설탕을 좋아하는군요’ 드립을 통해 급 친해진 지적인 여성 동료와 섹스를 전제로 한 데이트를 시도합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집으로 그녀를 끌어들이는 데도 성공합니다. 브랜든은 뭐 하나 부족함이 없는 멋있는 남자니까요.

그러나 역시. 섹스든 연애든 정말 잘 해보고 싶은 상대랑은 더 잘 안 되는 게 세상 이치인가 봅니다. 그녀와의 섹스에서 발기에 실패한 브랜든은 수치심에 떨며 미안하다고 사과를 합니다. 물론 이럴 때 괜찮다고 하는 그녀의 위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돌아간 뒤 곧바로 콜걸을 불러 격렬한 섹스를 합니다. 왜 이러는 걸까요. 콜걸이 돌아간 뒤 모멸감이 두 배로 늘어나는 건 당연한 일인 걸 알텐데 말이죠.

 

오시마 나기사의 [감각의 제국]에서 주인공은 세상이 무서워서 계속 섹스 속으로만 도피하다가 결국 섹스 속에 파묻혀 죽어버리고 맙니다. 브랜든도 그런 전철을 밟아야 하는 걸까요? 부끄러운(쉐임!) 자신을 견딜 수 없어 길거리를 돌아다니던 브랜든은 또다시 창녀 두 명과 난교 파티를 벌이고 게이 클럽을 찾아가 남색까지 감행합니다. 밤새도록 길거리를 돌아다닙니다. 또다른 클럽에 가서는 모르는 커플에게 일부러 시비를 건 다음 그야말로 개처럼 얻어맞습니다. 뭘 해도 직성이 풀지 않습니다. 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지칠대로 지친 브랜든은 지하철 안에서 문득 정신을 차리고 달려가 또다시 자살을 시도한 씨씨를 욕실에서 발견하고는 간신히 그녀의 목숨을 구해냅니다. 그러나 병원에서 깨어난 그녀의 모습과 목소리는 수십만 광년 떨어져 있는 별처럼 보입니다. 제대로 된 여자와의 관계는 물론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동생과도 제대로 마음을 주고받지 못하는 브랜든. 결국, 뛰쳐나가 오열합니다.

 

변하고 싶지만 변할 수 없는 지옥 같은 생활. 지옥 같은 세상.

 

 

브랜든은 지하철 안에서 또다시 어떤 여자와 눈빛을 교환합니다. 약혼반지까지 끼고 있는 그 여자도 묘한 눈빛으로 브랜든을 끌어들입니다. 눈에 익은 장면이다 했더니 이 씬은 영화 첫 장면이랑 겹치는 부분이군요. 그 옛날 AFKN에서 봤던 앤소니 퍼킨스 주연의 영화 [콜렉터]의 마지막 장면 같기도 하구요. 이제 두 사람은 또 어딘가로 가서 미친듯이 섹스를 하겠지요. 당연히 그 누구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을 거구요. 어떤 여자하고도 진지한 관계로는 4개월을 넘겨 본 적이 없다는 브랜든이니까요.

 


영화 감독으로 데뷔하기 전에 이미 비주얼 아티스트로 이름을 날린 스티브 맥퀸은 이전 작 [헝거]와 [쉐임] 단 두 편으로 어떤 경지에 오른 듯 합니다. 브랜든이 알몸으로 침대에 누워 앤서링머신 소리를 듣는 첫 장면부터 시내에서 조깅을 하는 기나긴 쇼트까지 영화 곳곳에 그가 잡아놓은 차가우면서도 꽉찬 화면들은 보는 사람들의 시각과 감성을 압도합니다. 상상의 여지를 한껏 열어놓고 사람의 몸에만 천착하는 척하는 역설적 스토리텔링 기법도 신선하구요. 어쨌든 이 영화에 쏟아진 화려한 찬사와 수상 경력들이 아니더라도 그의 작품은 두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충분한 ‘우량주’라고 생각합니다.

 

 

캐리 멀리건. 미국 영국 드리마 좀 보는 사람들이라면 “내가 예전부터 캐리 멀리건의 팬이었는데 말이야…”라고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이 되는 묘한 매력의 배우죠. 이번 영화에서도 [위대한 개츠비]의 데이지와는 전혀 다른 캐릭터를 그녀만의 압도적인 표정과 목소리와 몸짓으로 소화해 냅니다.

 

마이클 파스벤더가 이 영화의 수훈갑이라는 건 아무도 부인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적인 캐릭터를 이만큼 소화해낼 배우가 또 있을까싶게 그의 연기는 대단합니다. PR필름을 보면 파스벤더가 이 영화에 합류한다는 소식만으로도  주요 스텝들이 모두 기뻐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그만큼 믿음이 가는 배우란 뜻이겠지요. 심지어 얼굴도 멋있게 생겼습니다. 저와 혜자는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마이클 파스벤더는 나중에 더 나이가 들면 제러미 아이언스처럼 될 거 같지 않아?”라고 하며 좋아했습니다.

 


일찍이 시인 유하는 ‘바람 부는 날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왜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고 했을까요? 거기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온갖 욕망과 이미지가 끓어넘치는 현대성의 블랙홀이었지만 정작 거기 가 보면 텅 빈 공허만이 있는 거니까요. 마치 ‘바다가 굉장한 건 거기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라는 말처럼. 그런데도 우린 걸핏하면 지금도 압구정동으로, 바다로 달려가고 있지 않습니까. 슬슬 압구정동에 가도 소용없다는 걸 인정해야 할 때가 온 거 같은데요. 이젠 차라리 이렇게 얘기해 보는 건 어떨까요?

 

 

“바람 부는 날엔 압구정동에 가도 소용 없다… 그래도 다행이다. 나만 외로운 게 아니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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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가 많은 글입니다. 


SNS와 모바일의 시대로 변하면서 ‘스포일러’에 대한 경각심은 어느 때보다 더 커지고 있습니다. 이젠 누구나 영화를 본 뒤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사회적 관계망’에 감상평을 실시간으로 올리기 때문에 영화의 주요 내용이나 감상평도 미리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 것이죠. 그래서 영화를 보기 전에 그 영화에 대한 기사나 리뷰를 절대 보지 않는다는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보게 됩니다.

그런데 정말 스포일러는 그렇게 나쁜 것일까요? 아니, 그보다 먼저 스포일러가 정말 그렇게 흔한 걸까요? 스포일러는 스릴러나 추리물 등에서 반전이나 의외의 결말을 미리 알려 보는 이의 김을 빼는 행위를 말합니다. 종로3가 피카디리극장 앞에서 [유주얼 서스펙트]를 보려고 줄을 서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남자가 버스 창문을 열고 “범인은 절름발이다!”라고 소리친 사건이 가장 유명한 스포일러 사례입니다. 물론 저도 어느날 저녁 [디 아더스]를 보러 간다고 했을 때 제 자리로 일부러 와서 “걔네들, 다 귀신이다?”라고 속삭였던 사악한 후배 카피라이터년의 만행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스포일러라는 단어는 스릴러나 추리물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분야에 다 쓰이게 되었습니다. 이젠 영화에 대해 무슨 얘기만 좀 하면 다 스포일러라고 합니다.


이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보러 갔을 때도 스포일러를 조심하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주인공인 파이가 마지막 부분에서 일본인 보험조사원들에게 두 개의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 대목이 이 영화의 반전이라는 것이죠. ‘두 개의 이야기’라는 반전, 맞습니다. 그런데 이걸 미리 알고 가면 안 되는 것이었을까요? 감동의 폭이 줄어든다구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공교롭게도 전 얀 마텔의 원작 소설을 읽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파이가 구출되는 장면까지만 읽고 (아마 바쁜 일이 생겨서 거기까지만 읽다가 팽개치고 다시 안 집어 든 거겠죠) 병원 부분부터는 읽지 않았더군요.

가장 중요한 장면을 빼먹은 덕에 저는 극장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이 영화가 ‘리처드 파커라는 호랑이와 파이라는 소년이 작은 구명보트 위에서 227일간 표류하다가 결국 살아남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기’라고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맨 마지막에 파이가 영화의 화자인 소설가에게 “두 가지 이야기 중 어느 게 더 마음에 드느냐?”라고 물었을 때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요. 이건 정말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소년과 호랑이의 믿을 수 없는 227일간의 표류기’에서 그쳤다면 이 이야기는 신기하고 감동적이지만 그저 흥미로운 이야기에 머물렀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의 질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구요.

하지만 마지막에 또 한 가지의 이야기가 등장하면서 관객은 어떤 이야기를 선택해야 하는가, 라는 새로운 차원의 문제에 도달하게 됩니다. 즉 [파이 오브 라이프]는 많은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믿거나 또는 믿고 싶은 이야기들도 그 껍질을 한 겹 벗겨냈을 때는 본질이 얼마만큼 달라질 수 있는가, 라는 깨달음으로 외연을 확장합니다. 소년의 성장담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단숨에 인식론의 사다리를 성큼성큼 걸어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집에 와 원작 소설을 다시 찾아보았습니다. 파이가 일본 운수성 해양부 직원들의 과자를 빼앗아 먹으며 두 가지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책 어디에도 그로 인한 새로운 인식에 대한 얘기는 없었습니다. 황당하더군요.

 


부커상 수상에 빛나는 언어의 마술사 얀 마텔이 펼치는
놀랍고 감동적인 227일산의 인도 소년 표류기

- 인간이 이토록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는 드문 경험이었다. 중앙일보
- 파이의 희망이 점점 커져 당신 심장 안에서 노랫가락이 되어 흐르기를. 조선일보
- [로빈슨 크루소] [걸리버 여행기] [백경]을 잇는 최고의 모험소설 마거릿 애트우드
- 거칠고, 의미심장하고, 드라마틱하며, 재미있는 진정한 소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소설책 [파이 이야기]의 책 뒷면과 띠지에 붙어있는 서평들입니다. 어느 것 하나 ‘또 다른 이야기’에 대한 언급조차 없습니다. 번역자의 후기를 읽어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이 책이 나올 당시 서평자들이나 번역자까지도 이 작품의 진짜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인간승리’나 ‘희망, 또는 신의 문제’ 등으로만 파악하려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안 감독이 [라이프 오브 파이]를 영화로 만들면서 파이의 또 다른 이야기에 방점을 찍지 않았다면 이것은 그냥 소설의 부록쯤에 해당하는 에피소드로 남았을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이 대목은 이안 감독이 얼마나 대단한 시네아티스트인지 다시 한 번 증명해주는 사례이기도 하구요.


원작소설도 끝까지 읽지 않고 다른 매체의 리뷰도 읽지 않은 채 영화관에 간 덕분에 전 영화를 보고 나서도 이 영화의 진정한 가치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씨네21]에 쓴 글을 읽고 거기에 제 나름의 생각까지 보탠 뒤에야 극장에 가서 이 영화를 한 번 더 보고 그 진가를 마음껏 즐겨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 전에도 [팅거 테일러 솔저 스파이]가 화끈한 첩보물인 줄 알고 갔다가 그 진중한 분위기에 눌려 두 시간 동안 몸을 배배 꼬며 고생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야구에 대한 지식이나 비즈니스적 감각이 전무한 상태로 [머니볼]을 보고 나와 “이게 뭐지?” 하고 당황한 적도 있구요. 스필버그의 [뮌헨]도 1972년 당시의 국제 정세와 사회적 분위기를 좀 더 익히고 갔더라면 훨씬 더 풍부하게 영화를 즐길 수 있었을 텐데, 라고 후회를 했습니다.

 

스포일러를 두려워한다는 건 텍스트를 대하는 자신의 게으름에 대한 변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난 아무 것도 모르는 순수한 상태에서 그것과 마주치고 싶어요”는 언뜻 들으면 순결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눈앞에 있는 것만 겨우 보고 듣고 만족하겠다는 심뽀인 것입니다.

여행을 가면서 그 지역에 대한 역사나 문화를 일부러 공부하지 않겠다고 떼를 쓰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로마를 여행하면서 로마의 역사나 로마 황제들의 에피소드를 하나도 모르고 간다면 포로로마노의 콜로세움에 가더라도 그에겐 그저 무너져가는 오래된 돌담에 불과하겠죠. 나중에 “야, 로마가 경치는 참 좋더라,” 뭐 이런 정도의 얘기야 할 수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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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만의 잔치’라고 외면하려다가도 자꾸만 보게 되는 아카데미 시상식.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제니퍼 로렌스의 여우주연상 수상이었습니다. 무엇이 엠마누엘 리바, 제시카 차스테인, 나오미 왓츠 같은 관록의 후보들을 제치고 스물세 살 여배우에게 오스카 트로피를 안기게 했을까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을 보고나니 결론은 역시 연기력이더군요. 만만치 않은 캐릭터를 완전히 장악한 채 온몸을 던져 때론 웃기고 때론 울리는 제니퍼 로렌스의 포스는 정말 대단합니다. 그리고 영화 자체도 무척 재밌습니다. 미국의 소도시에 사는, 뭔가 잘 안 풀리고 정체되어 있는 등장인물들을 배경으로 섹스와 정신병원, 스포츠 도박, 댄스 경연 등을 시트콤처럼 아주 수다스럽고 구수하게 풀어놓습니다.

남편이 죽은 뒤 한동안 너무 슬퍼서 회사 사람 전부와 잤다고 말하는 제니퍼 로렌스나 다니던 학교 교장과 싸우고 일찍 퇴근해 보니 같은 학교 문학선생인 아내가 역사선생과 샤워를 하며 자신들의 ‘웨딩송’을 틀어놓고 있었던 게 도저히 극복이 안 되다고 말하는 브래들리 쿠퍼나 다들 파격적인 사연들을 많이 가지고 있으나, 정작 야한 장면 보다는 욕이 많이 나와서 19금이 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대사에 ‘Fu**’이 자주 등장합니다.

남자 주인공 브래들리 쿠퍼도 거의 완벽한 연기를 펼치지만 로버트 드 니로의 쪼잔한 아버지 연기는 그야말로 명불허전입니다. 어젯밤 CGV압구정에서 10시 영화로 봤는데 관객 모두 깔깔거리고 즐거워하며 보다가 극장을 나섰습니다.

이 영화, 좋습니다. 강추입니다. 몇 년 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나 [데어 윌 비 블러드] 같은 무시무시한 작품들 틈에서도 기죽지 않고 선전하던 [주노]를 만났을 때의 기분이랄까요? 참, ‘실버라이닝(silver lining)’은 구름의 흰 가장자리라는 뜻이랍니다. 한줄기 희망이란 뜻이지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언제나 그렇듯 ‘희망’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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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밤에 CGV압구정에서 [우리도 사랑일까]를 봤습니다. 이 영화, 좋던데요? 언뜻 줄거리만 놓고 보면 어느 바람난 여자의 ‘내 마음 나도 몰라’ 고민담 같은 시시한 이야기일 수도 있었는데 거기에 좋은 연기와 내공 깊은 연출이 더해지니 마치 잘 만들어진 명품 가구처럼 아주 탄탄하면서도 반질반질한 작품이 되었습니다. 



마고라는 프리랜스 작가는 취재 차 어느 도시를 여행하다가 대니얼이라는 남자를 만납니다. 뭐, 여행 갔다가 누군가를 만나는 건 참 흔한 설정이기도 하지요. 실생활에선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이지만. (윤대녕의 소설들을 읽다 보면 혼자 여행을 떠나고픈 충동에 시달립니다. 그런데 막상 가보면 소설 속에서처럼 서늘한 인상을 한 여자가 혼자 선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거나 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음, 얘기가 옆으로 샜군요) 


그런데 알고 보니 대니얼은 마고와 한 동네에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바로 맞은편 집에. 여기까지는 [사랑과 전쟁]의 도입부와 다름이 없습니다. 

문제는 이 영화엔 ‘악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고의 남편 루는 집에서 요리책을 집필 중인 닭요리 연구가입니다. 루는 마고를 지극히 사랑할 뿐 아니라 마음이 넓은데다 유머감각도 뛰어난 남자입니다. 마고도 이 남자를 무척 사랑합니다. 마고는 알코올중독으로 고생하는 시누이를 비롯한 시댁 식구들과도 두루두루 사이가 좋습니다. 

그럼 새로 나타난 대니얼이 나쁜놈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특이하게도 관광지에서 인력거를 끌며 돈을 벌고 취미생활로 몰래 그림을 그리는 대니얼은 마고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만 대뜸 같이 자자거나 같이 살자거나 하며 보채지 않습니다. 인력거꾼이면서도 지적인 면모를 풍기는 대니얼은 심지어 마고와 루의 결혼기념일에 극장까지 공짜로 인력거를 태워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기껏 한다는 소리가 “30년 후에 등대 밑에서 만나 키스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냐”며 2040년 8월 5일 2시에 둘이 만날 것을 약속하자고 합니다. 


만약 그 약속이 지켜졌다면 또 하나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생겨났겠죠. 그러나 마고는 대니얼이 자신을 떠나던 그 날 새벽에 사랑하는 남편 루에게 어렵게어렵게 고백을 하고 맙니다. 당신을 너무너무 사랑하지만, 그리고 당신에게 너무나 미안하지만, 난 아무래도 새 남자 루에게 가야겠다고. 

가슴 아픈 장면입니다. 인생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다는 걸 잘 알면서도 매번 이런 장면을 볼 때마다 한숨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고백 장면은 마고를 배제하고 루만 계속 핸드헬드로 프레임 안에 머물게 함으로써 독특한 미학적 성취까지 이루어 냅니다. 그러니까 가슴 아프면서도 감독의 재치가 돋보이는 장면이기도 한 거죠. 


이런 저런 정황으로 봐서 이 영화의 감독 사라 폴리 역시 천재인 거 같습니다. 배우 겸 감독인 그녀는 작년인가 극장에서 개봉했던 귀엽고도 발칙한 영화 [스플라이스]의 여주인공이기도 했습니다.(인디 SF영화 좋아하시는 분들께 강추) 그리고 영화를 보는 내내 감탄했던 것이 이 영화에서는 그 어떤 소재가 나오더라도 이내 자연스러워진다는 것입니다. 인력거, 닭고기 요리책, 수영장 물속에서 오줌 싸기, 여자들의 음모가 그대로 드러나는 샤워장 씬, 놀이기구, 쓰리썸까지... 

그리고 단순한 애정사에서 비껴나 개개인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슬기롭고도 우스꽝스러운 시선들이 있습니다. “비행기를 놓치는 건 두렵지 않아요. 비행기를 놓칠까 봐 걱정하게 되는 게 두렵지.”라는 마고의 통찰력 있는 대사도 좋지만 환희와 쓸쓸함이 교차하는 놀이공원 장면에서 촌스럽게 흐르던 ‘Video kill the radio star’라는 노래는 또 얼마나 잘 어울리던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정다운 노래들, 그리고 루가 편집자와 전화통화할 때 마고가 루의 입안에 자기 손가락들을 넣고 마구 휘저으며 장난치는 장면은 참으로 사랑스럽죠. 헤어지기로 한 뒤 샤워를 권하고 늘 해왔듯이 샤워하는 마고의 머리 위로 찬물 한 바가지를 부어 놀래킨 뒤 기다렸다가 “나중에 나이 들어서 추억거리로 얘기해 주려고 매일 이렇게 했었다”라고 털어놓는 루의 말을 들을 땐 참 마음이 찡해지기까지 합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이 영화의 제목은 아무래도 ‘우리도 사랑일까’ 보다는 ‘이것도 사랑일까’가 더 어울리지 않나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는데 원제는 ‘Take this waltz’, 레오나드 코헨의 노래더군요. 영화 마지막쯤에 이 노래가 흐르면서 마고와 대니얼의 새로운 나날들이 함축적으로 전개되는데 매우 아름답고도 파격적입니다. 

아, 그리고 여주인공 미셸 윌리엄스가 참 아름답습니다. 몸매도 훌륭하고 연기도 정말 섬세하게 잘 하구요. 인터넷으로 기사를 찾아봤더니 우리나라에선 9월 27일에 개봉했던데 벌써 이번 주에 대부분 막을 내리는 모양입니다. 아깝지만 나중에 IP TV로라도 꼭 한 번 찾아서 보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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