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청문회 같은 데서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는 국회의원이나 고위공직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저 사람들은 공부도 많이 했을 테고 사회적 지위도 높은 인간들인데 어쩌다가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주절거리며 살게 됐을까?’라는 생각을 금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고려대 윤성식 교수는 “그래서 인생의 밑그림이 중요하다”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밑그림이란 ‘큰 틀’과 같은 개념이다.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에 대한 커다란 비전 없이 그저 ‘열심히’만 산 사람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무엇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는 물론 삶에 있어서 진정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도 모르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추구하며 살아간다.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든 안락과 쾌락을 추구하든 아니면 봉사와 헌신, 참된 나의 발견, 행복한 가정, 깨달음의 길 등 그 어떤 것을 추구하든 그로부터 가치와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윤성식 교수는 행정학과 경영학을 전공하고 뒤늦게 대학과 대학원에서 불교 공부까지 한 다음 대학교에서 공인회계사 준비반 지도교수, 행정고시 지도교수, 기숙사 사감 등을 역임하며 젊은 학생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눈 사람이다. 행정고시나 회계사 준비를 하는 아이들이니 앞날에 대한 걱정과 계획이 오죽 많겠는가. 그런데 윤성식 교수는 학생들을 만나 얘기를 나눠보고 깜짝 놀라게 된다.  ‘스마트폰이나 가방을 살 때는 몇 날 며칠을 심사숙고하면서 인생의 향방에 영향을 줄만큼 중대한 결정은 너무나도 쉽게 해버리는’ 아이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생은 크고 작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런데 그 선택을 위한 어떤 절대적 가치판단 기준이 마음 속에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지 못하면 ‘팔랑귀’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저자는 유학이나 대학원 진학을 상담하는 학생들에게도 “도대체 그 정보는 어디서 들었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친구나 선배에게서 들었다는 알량한 대답이 돌아온다고 개탄한다. 


 

세상은 불확실하고 복잡하며, 상호의존적이고 비선형적이며 상대적이다. 지금 내린 결정이 인생이라는 바다에 어떤 파도를 일으킬지 정확히 예측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비전과 전략이 없으면 그때그때 근시안적이고 단편적인 관점에서 판단을 내리게 된다. 그 결과 작은 파도에도 이리저리 휩쓸려 우왕좌왕하며 일관성을 잃게 되고 무엇보다도 소중한 노력을 모두 낭비하게 된다. 



세상을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성찰’이 필요하다. 나에 대한, 그리고 세상에 대한 성찰. 그러나 인류 역사상 가장 ‘스마트한’ 기기를 자유자재로 이용하며 살게 된 우리들은 정작 삶에 대한 성찰은 잃어버린 세대가 되어버렸다. 책을 읽고 토론하는 것은 휴대폰이나 SNS에 비하면 대단히 느리고 귀찮은 일이므로 피해버린다. 더구나 내 앞가림 하기에도 바빠 남과 사회적 아젠다에 대해 토론하거나 걱정할 여유도 없다. 그러니 트렌드엔 민감하고 출세하길 간절히 바라긴 하지만 막상 세상 돌아가는 것에는 둔감한 세대가 되어버린다. 남은 것은 가장 쉬우면서도 마음에 드는 방법, 즉 ‘너는 할 수 있다’, ‘간절히 소망하면 우주가 화답한다’ 는 식의 [시크릿]이나 파울로 코엘류의 책들, 그리고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은 ‘위로 기획’에 매달리는 것뿐이다.  



‘너는 할 수 있다. 간절히 소망하면 우주가 화답한다’고 속삭이는 공허한 성공학이나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 실패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위로에만 솔깃할 뿐이다. 그런 이야기들이 당장은 달콤할지 몰라도 삶을 바꾸지는 못한다. 더구나 인생의 밑그림이 없는 상태에서 그런 이야기들은 우리를 로맨틱한 방랑자로 만들 뿐이다. 방랑자란 미래를 향해 가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 당장 좋은 것만 찾아서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길을 잃어버리는 사람을 말한다. 방랑자는 산만하고 중심이 없는 삶을 살기 때문에 아주 작은 일에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저자는 강남에서 제일 잘 나간다는 과외선생의 일화를 소개한다. 그 강사에게 잘 나가는 비결을 물으니 ‘비전에 의한 공부’를 얘기하더라는 것이다. 자기는 처음 학생을 만나면 스스로가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알게 될 때까지 며칠간 책을 덮은 채 여기저기 놀러 다니며 계속 대화를 한다고 한다. 한낱 과외선생도 공부를 비전과 연결시킬 줄 아는 것이다. 그 정도로 비전은 중요하다. 저자도 행정학을 공부하고 공인회계사 시험을 거치는 등 이런저런 방향전환을 많이 했지만 ‘학자의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큰 비전은 변함이 없었기에 흔들리지 않는 인생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비전을 잘 세워놓으면 인생의 뒤안길에서 후회가 적어진다. 왜냐하면 행복, 가치, 의미에 대항할 수 있는 대안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아일랜드 트리니티 칼리지의 사이언스 갤러리에는 “행복은 문제가 없는 상태가 아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다”라는 말이 붙어있다고 한다. 우리는 흔히 삶의 목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행복’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저자는 그건 목표가 아니라고 말한다. 진정한 행복은 의사나 판검사가 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의사나 판검사가 된 후에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고귀한 신분이 되고 좋은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 하더라도 일에서 보람과 즐거움, 자부심 그리고 전 인류에 적용되는 보편타당한 가치에 대한 공감 등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건 성공한 인생도 행복한 삶도 아닌 것이다. 



“인생 계획이요? 음…, 일단 졸업하면 회사에 취직할 겁니다. 그리고 5년 안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집을 장만해야죠. 그리고 또…….” 

“그게 인생계획이야?”

“그럼요. 은퇴 후의 인생까지도 계획해 놓은 걸요?” 

“정말로 그게 인생 계획이란 말이야?” 



이 책은 [사막을 건너야 서른이 온다]라는 제목 때문에 자칫 스무 살들을 위한 단순한 인생 지침서로 오해 받기 쉽다. 그러나 찬찬히 책장을 넘기다 보면 20대 보다는 성숙한 나이가 돼서 읽을수록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라는 ‘우문’은 탁상공론이 아닌 학생들과의 구체적인 상담 사례를 거쳐 ‘현답’이라는 형태로 우리 앞에 제시된다. 더구나 책을 읽다 보면 내가 최근 반복해서 들춰보던 [혼•창•통]이나 [일본전산 이야기], 박웅현의 책들, 사사키 아타루나 스티브 잡스 등의 말과 글들이 수없이 어른거린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역시 통찰이 있는 이야기들은 공집합 안에서 다 모이게 되는 모양이다. 








* 책을 읽다가 명백한 오류가 있는 문장을 하나 찾아냈습니다. 혹시나 해서 집에 있는 [톰 소여의 모험]을 찾아보니 톰에게 페인트칠을 시킨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라 폴리 이모였더군요. 톰은 부모가 없는 아이였으니까. 어느 책이나 이런 오류들은 발견되기 마련입니다. 나중에 그걸 알게 된 편집자들은 책상에 앉아 머리카락을 쥐어뜯게 되고…제가 심술궃은 인간이라 이런 게 보이는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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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단어]에 이어 [인문학으로 광고하다] 독서일기도 다시 꺼내 봤습니다. 네이버같은 포털에서 이미 읽으신 분들도 혹 계시겠지만 새삼스러운 마음으로 다시 읽어 봅니다. 이거 뭐, 하다보니 저 혼자 '박웅현 특집'이네요.^^ 





다시는 광고인이 낸 책을 구입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나는, 어느날 고속터미널역에 있는 영풍문고에 가서 [인문학으로 광고하다] 라는 따끈따끈한 새 책을 발견하게 된다. 에잇, 또 광고책이군. 책값도 더럽게 비싸네.(17,500 원이다) 심드렁한 마음으로 그 자리에서 책을 들쳐보던 나는 두 시간 동안 꼼짝않고 책 속에 빠져들었다가 결국 읽을 분량이 반 정도 남은 그 책을 들고 계산대 앞에 서고 말았다. 젠장.

 

 

[인문학으로 광고하다]는 엄밀히 말해서 광고인이 낸 책이 아니다. 광고를 하는 박웅현 CD를 출판기획자이자 컬럼니스트인 강창래가 만나 오래도록 인터뷰하고 함께 어울려 고민도 하고 해서 펴낸 공동저작이다.

 

 

어떤 사람은 연애편지를 보낼 때 "보고싶습니다" 라고만 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려지지만 보고 싶은 맘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라고 쓴다. 어떤 사람의 마음이 더 잘 전달되겠는가. 박웅현은 정지용의 이 시를 인용하면서 광고 커뮤니케이션은 '보고 싶다는 말을 뭐라고 하면 좋을까'에서 출발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광고를 만들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인문학적 소양이라고 말한다. 가령 박경리의 [토지]를 읽는 것은 당장 광고 아이디어를 내는 데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지만 기초 체력을 기르는 데는 보약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넉 달 간, 한 첩의 보약을 먹듯 [토지]를 읽었다' 고 한다. 인문학적 소양이 받쳐주면 그다음부터는 세상의 모든 일들이 아이디어가 되고 소재가 된다. 길 가다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주는 사람을 보고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타심'을 새삼 환기한 그는, 이를 그대로 광고에 넣는다.

 

 

 

왜 넘어진 아이는 일으켜 세우십니까?

왜 날아가는 풍선은 잡아주십니까?

왜 흩어진 과일은 주워주십니까?

왜 손수레는 밀어주십니까?

왜 가던 길은 되돌아가십니까?

  

사람 안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을 향합니다.

  

 

그렇다면 인문학적 소양이란 무엇인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달라고 하자 그는 베네통 광고의 사진을 찍었던 올리비에르 토스카니의 일화를 얘기해준다. 수녀와 신부의 키스 장면, 천사와 악마로 분장한 백인과 흑인 아이의 포옹 장면, 흑인 여성의 젖을 빨고 있는 백인 아기의 사진 등 수많은 화제작을 남긴 토스카니가 [아카이브]라는 잡지와 인터뷰를 할 때 공산주의에 대해 "우리는 공산주의자가 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진화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박웅현은 공산주의라는 돌발적 주제에 대해 이렇게 잘라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웬만큼 철학적 인문학적 깊이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어딘가에서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 가장 무섭지 않다"는 말도 한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강창래가 따라가서 목격했다는 박웅현의 상공회의소 강의다. 주제는 '한국에서 효과적인 광고 캠페인'이었는데 이제 곧 한국에 와서 커뮤니케이션을 펼쳐야하는 외국인들에게 해야하는 강의였다.

 

그때 박웅현의 첫 마디는 "저는 한국말로 하겠습니다."였단다.

 

"제가 영어를 전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이유로 인해 영어로 말하는 순간 제 지적 수준이 초등학생 수준으로 떨어집니다. 석사 학위까지 받은 사람으로서 석사 학위를 가진 지적 수준으로 말하고 싶습니다."

 

박웅현은 이날 동시통역사를 대동하고 프리젠테이션을 진행했다고 한다. 이는 좋은 프리젠테이션을 위한 과감한 장치이기도 했고 프리젠테이션의 주제를 더 깊게 부각시키는 효과까지 발휘했다. 아무리 칸이나 뉴욕페스티벌에서 상를 타는 광고라도 그 나라의 문화와 생활에 맞지 않으면 이해받지 못한다는 것(우리는 버드와이저의 'wazzaup~'광고를 쉽게 이해 못한다)을 말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동시통역사를 쓰는 것으로 문화적 자존심을 지키면서도 내용과 형식이 강의 내용과 제대로 맞아들어간 적절한 예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우리말을 잘하는 외국인이 있다고 해도 언어만 알아서는 그 문화에 깊이 젖을 수 없는 것이고, 이를 뒤집어서 말하면 좋은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는 그 나라를 이해할 수 있는 인문학적 소양이 쌓여야 한다는 것이다.

 

 

박웅현은 2002년 월드컵과 촛불집회라는 사회적 이슈 속에서도 또다른 통찰을 발견한다. '아디다스'라는 광고주에게 팔려고 만든 이 광고는 결국 집행되지 않았지만 그의 인문학적 소양이 어떤 식으로 발현되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기에 인용한다.

 


촛불

  

믿지 못할 일이었다.

월드컵 16강

거리는 기쁨에 넘쳤다.

같은 시각

또 하나의 믿지못할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두 명의 여중생이 죽었다.

미군 장갑차에 깔려서

친구의 생일잔치에 가던 길이었다.

언론은 크게 다루지 않았다.

미군은 책임이 없다는 발표를 했고

정부는 침묵했다.

두 명의 소녀가 죽었는데

세상은 조용하기만 했다.

한 네티즌이 있었다.

죽은 이의 영혼은 반딧불이 된다고 합니다.

촛불을 준비해주십시오.

저 혼자라도 시작하겠습니다.

작은 제안이었다.

한 개의 촛불이었다.

그것으로 무엇을 밝힐 수 있을까?

상대는 미국의 군대였고

모든 이의 시선은 월드컵을 향해 있었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기적이 일어났다.

촛불이 옮겨 붙었다.

그해 한국은 월드컵 4강에 진입했다.

모두들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해 한 개의 촛불이

세상을 환하게 밝혔다.

  

모두들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자신이 예전에 만들었던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와 작년 '그리고 대학에 떨어졌습니다...수험생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라는 광고 모두 시대의 흐름을 읽고 그 흐름 속에서 한 기업의 다짐과 의견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한다. '넥타이와 청바지는 평등하다'도 마찬가지였다. 그 시대를 읽고 인간을 연구하는 것, 그것이 그가 말하는 인문학이다.

 

 

박웅현은 나도 전에 3년 남짓 다닌 적이 있던 광고대행사 TBWA/Korea의 ECD다. '총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뜻이다. 그런 그가 [TV, 책을 말하다]라는 프로그램에 패널로 나온 적이 있다. 젊은 작가 전아리와 함께 출연했었는데, 나는 그때 그가 진정으로 부러웠다. 광고인으로서 독서 프로그램에 나왔다는 게 부러운 게 아니라 광고인이 TV에 나와서 광고 얘기를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게 부러웠던 것이다.

 .

며칠 전 TBWA/Korea에서 박웅현과 함께 일한 적이 있는 친구 이문선의 사무실에 카피 회의때문에 갔다가 이 책 얘기를 해줬더니, 그는 박웅현에 대해 이런 표현을 했다.

 

"나는 세상엔 두 가지 CD가 있다고 생각한다. 박웅현과 박웅현이 아닌 CD."  

 

이런 게 바로 최고의 찬사다. 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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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은 복잡하지만 법칙은 단순하다”

 – 박웅현이 전하는 인생의 ‘단순한’ 법칙들 [여덟 단어] 




은퇴했지만 제가 좋아하는 CF 감독, 김규환 씨와 호주로 촬영을 간 적이 있어요. 촬영장엔 외국인 모델들이 캐스팅을 위해 찾아왔었어요. 우리가 선택을 하는 입장인데도 180센치미터가 넘는 금발의 여자들이 쭉 서 있으니까 이쪽에서 다들 기가 죽었죠. 그런데 김규환 감독이 가더니 “어 그래, 이 친구 괜찮네”라면서 한국어로 의견을 말하고 통역을 시켰어요. 만약 영어로, “You beautiful” “I like it”, 이런 식으로는 말하고자 하는 바의 절반도 전달할 수 없었을 거예요. 김규환 감독은 모델들을 찬찬히 살피고 한국어로 의견을 전달하고 통역사에게 말을 전하게 했죠. 당시에 그 눈빛에 모델들이 압도돼서 떨더라구요.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나요? 외국어라고, 외국인 모델과 일을 한다고 해서 모든 말을 꼭 영어로 할 필요가 있을까요? 



[여덟 단어]라는 책을 읽을 때 저는 특히 이 부분에서 신선함과 통쾌함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많이 마주치게 되고 괴로워하게 되는 ‘권위’에 대한 챕터였는데요, 박웅현은 여기서 저의 광고 선배이자 개인적으론 홍익대학교 학생 동아리 ‘뚜라미’의 선배인기도 했던 규환이 형과의 에피소드를 통해 ‘불합리한 권위에 굴복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해줍니다. 



박웅현의 신작 [여덟 단어]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필요한 자세들을 여덟 개의 단어로 나눈 뒤 각 챕터마다 그 의미를 곱씹어보는 책입니다. 서재에 가만히 앉아서 쓴 게 아니라 20,30대들을 모아놓고 매주 강연한 내용을 따로 옮긴 거니까 에세이라기 보다는 강연록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거 같습니다.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요? 그걸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공자나 부처, 예수를 능가하는 수퍼맨이거나 사이비종교의 교주쯤 되겠지요. 박웅현도 말합니다. 인생은 강의 몇 번 듣는다고, 책 몇 권 읽는다고 달라지지 않는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얘기를 시작하는 것은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스스로에게 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통찰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자들은 왜 남자친구한테 "김태희가 이뻐? 내가 더 이뻐?"라는 질문을 하죠? 김태희가 더 이쁘고, 하지만 난 널 사랑해. 5만원이 비싸? 100원이 더 비싸? 이런 거잖아요.” 성시경, 재밌다. 하하하. 



어제 제 페이스북 친구 김정욱 씨가 올린 글입니다. 성시경이 하는 라디오 방송을 들은 모양이죠? 이번 책 [여덟 단어]는 ‘자존’이라는 글자로 문을 엽니다. 우린 모두 김태희처럼 예쁠 수도 없고 고소영이 될 수도 없죠. 고소영한테 왜 김태희처럼 예쁘지 않냐고 따지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의 모든 ‘엄친아’ ‘엄친딸’들은 이런 어불성설을 먹고 자라납니다. 남과 비교하자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자존’이죠. . ‘나의 기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세상을 보는 눈이, 그리고 나를 대하는 자세가 달라집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 독특한 개성과 능력을 가진 독립체들이니까요. 


그런데 남들과 비교되는 순간 불행의 늪으로 빠져들고 맙니다. 이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어나는 일인가 봅니다. 알랭 드 보통도 [불안]이라는 책에서 이런 경험을 토로하죠. (그러나 쾌적한 집에 살며 편안한 일자리로 출퇴근한다 해도 경솔하게 동창회에 나갔다가 옛 친구 몇 명((이들보다 더 강력한 준거집단은 없다))이 아주 매력적인 일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우리 집보다 더 큰 집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왜 이리 불행하냐는 생각에 정신을 못 가누기 십상일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 성공한 케이스로 박웅현은 [나무열전]이라는 책을 쓴 사학자 강판권 씨를 들고 있습니다. 그는 ‘촌놈’출신이라는 자신의 약점을 강점으로 바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학자라죠? 이러한 자존의 성찰은 자연스럽게 ‘본질’의 문제로 연결됩니다. 



박웅현은 남들 앞에 서서 말하는 게 힘들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그 단점을 어떻게 극복했는가 하는 과정을 다시 떠올리며’본질’의 문제를 풀어갑니다. 남들보다 잘 하자, 가 아니라 ‘내 얘기를 내 방식대로 잘 전달하자’고 생각을 바꿨을 때 그는 비로소 프리젠테이션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수영을 배울 때도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왜 나는 이렇게 남들보다 배우는 속도가 느릴까,하고 자책하는 대신 “잘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땀 흘리려고 하는 거니까”가 본질이라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어찌 보면 간단한 이치죠? 


본질(本質). 


저는 이 말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많이 씁니다. 그런데 'Everything changes but Nothing changes.’라는 에르메스 브랜드의 지면광고 카피만큼 본질을 한 마디로 표현한 예는 드물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있게 마련이죠. 예를 들면 사람들의 웃음 같은 거.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웃음, 기쁨, 감동, 행복, 공감 등 몇 가지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전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감동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지난 학기 제게 강의를 들은 학생 중에 학점에 불만이 있다고 이메일을 보낸 온 친구가 있었습니다. 자기는 제가 내준 과제를 빠짐없이 성실하게 다 했고 밤새워 ‘프레지(Prezi)를 배워 기말과제도 발표했다는 것입니다. 그 학생의 심정은 이해가 갑니다. 파워포인트에 글이나 그림을 올리고 링크시키는 것도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없으면 하지 못하는 저에게 프레지 같은 프리젠테이션 도구는 그야말로 신세계처럼 멋진 것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중요한 건 도구가 아니라 ‘콘텐츠’였습니다. 저는 그 학생보다 더 투박하지만 좀 더 아이디어가 살아있는 과제물에게 좋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박웅현은 ‘촛불’을 예로 들어 콘텐츠의 힘을 역설합니다. 한일월드컵이 열리던 2002년 “죽은 이의 영혼이 반딧불이 된다고 합니다”라는 어느 네티즌의 제의에 의해 일파만파 퍼져나갔던 촛불의 힘. 이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 촛불시위로 번져갔습니다.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고 의무감에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던 거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 좋은 콘텐츠는 미디어가 무엇이든 퍼지게 되어 있다는 것. 광고를 하는 저희들 머릿속에도 늘 이런 생각으로 가득하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런 콘텐츠를 만들 수 있을까요? 리처드 파인먼은 [생각의 탄생]이란 책에서 “현상은 복잡하다. 그러나 법칙은 단순하다.”라는 중요한 힌트를 던져줍니다. 잡다한 지식이나 곁가지 상황들을 걷어내고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과 통찰에 집중하면 문제는 의외로 쉽게 풀릴 수 있다는 것이죠. 인구에 회자되는 지구상의 모든 강력한 콘텐츠들은 다 그렇게 탄생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콘텐츠를 만드는 기초체력을 기르기에 가장 좋은 것은 다시 ‘책 읽기’라고 박웅현은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전작인 [인문학으로 광고하다]나 [책은 도끼다]같은 경우에서도 늘 책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저자는 자신이 신문보다는 단행본을 즐겨 읽는 이유도 신문은 그냥 흘러가는 느낌인데 비해 책은 집중해서 다 읽고 나면 뭔가를 얻는 힘이 있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책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밑줄을 치게 되고 다시 펼쳐보게 되고 그러다가 이런 시도 발견하게 되니까요. 안도현 시인의 ‘스며드는 것’ 이라는 시입니다. 며칠 전에 제 페이스북 친구 중 한 분이 먼저 쓰신 [여덟 단어] 리뷰에서 이 시를 올리셨더라구요. 저도 한 번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스며드는 것 


 안도현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는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 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2008년 창비





시인이라서 이런 눈을 가지게 된 걸까요? 아닙니다. 남들보다 더 열심히, 더 자세히, 마음으로, 제대로 들여다봤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살면서 열심히 본다는 것(見) 역시 참 중요한 것이죠. 이 책에서는 자존에서 시작해 본질, 클래식(고전), 본다는 것, 현재 등등의 단어들이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줄줄이 이어집니다. 그 단어들은 모두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첫 물음에 대한 답의 단서들을 품고 있는데 어떤 때는 안도현이나 고은 시인의 시로 설명되기도 하고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아포리즘이나 고전평론가 고미숙의 문장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눈만 뜨면 정보가 넘쳐나고 인터넷, 모바일 기기들이 24시간 옆에서 나를 끊임없이 간섭하는 시대. 이는 곧 ‘결핍이 결핍된’ 역설의 시대이기도 합니다. 예전엔 구하기도 힘들었던 책들이, 영화들이 이젠 너무 많아서, 구하기가 너무 쉬워져서 제목만 읽었는데도 이미 그걸 안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읽기만 하고 생각을 안 하면 남는 건 제목뿐입니다. 박웅현이 강조하는 인문학도 바로 그런 것이죠. 무엇이 본질적인 것인지, 고전이 왜 중요한지, 발견이라는 것이 왜 필요한지를 천천히 생각해 보는 것. 그것은 많은 책을 읽어 지식을 쌓는 것보다는 한 가지를 보더라도 ‘깊게’ 읽고 느낌으로써 본질적인 것에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잘 나가는 광고인들 중에는 욕을 먹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회사 일은 안 하고 밖으로 돌아다니며 강의나 심사위원만 하다고 욕 먹고, 해외광고제 같은 데 가서 자료들을 잔뜩 선점해 뻔한 광고책 쓴다고 욕 먹고, 실력에 비해 과대평가 되어 방송에만 자주 나온다고 욕먹고. 어쩌면 박웅현도 그런 사람일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이 하면 그냥 광고 얘긴데 박웅현이 내는 책만 왜 유독 ‘인문학’ 딱지를 붙여주느냐 불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박웅현을 이 책에서 배우고 함께 궁리해 본대로 다시 한 번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박웅현이 계속해서 이런 책을 쓰고 강의를 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뭘까요? ‘자존’을 생각한다면 남보다 더 인정받는 광고인이나 유명인이 되기 위해서는 아닌 거 같구요. ‘현재’를 생각한다면 노후를 위한 꼼수로 이러는 것도 아닌 거 같고. ‘권위’라는 챕터에 비춰보면 우리는 ‘똑똑하고 잘난 박웅현’한테 주눅들 필요가 하나도 없는 거겠죠. 


잘은 모르겠습니다. 전 그저 그저 박웅현이 책 말미에 쓴 대로 ‘묵묵히 자기를 존중하면서, 클래식을 궁금해 하면서, 본질을 추구하고 권위에 도전하고. 현재를 가치 있게 여기고, 깊이 봐가면서, 지혜롭게 소통하면서 각자의 전인미답의 길을 가자.”라는 그의 주장으로 만들어지는 ‘박웅현의 인생’이라는 고유 브랜드를 앞으로도 흥미롭게 천천히 지켜보고 싶을 따름입니다. 



이 독서일기를 쓰기 전에 제법 많은 단어와 문장들을 메모했었는데, 쓰면서 대부분 버렸습니다. 이런 책은 남의 리뷰만 휘리릭 훑어보고 ‘음, 무슨 얘긴지 대충 알겠네.’라고 넘겨버리기엔 너무 아까우니까요. 그러니 지금 제 리뷰를 대충 읽어보신 뒤 얼른 책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책상 옆에다 놓고 인생이 막연해질 때마다, 자신이 무능해 보일 때마다, 싫은 놈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울 때마다 한 번씩 들쳐 보시기 바랍니다. 정답이야 얻을 수 없겠지만 적어도 유용한 힌트 몇 개 정도는 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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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 광고하는 박웅현 ECD. 벌써 몇 년째. 그를 넘어서는 사람이 없다.

 

(저도 어디 가서 강의할 때면 뉴튼의 사과와 아르키메데스의 목욕탕 얘길 자주 하는데 여기서 똑같은 얘기가 나오길래 깜짝 놀랐습니다. 하긴 워낙 유명한 에피소드니까요. 이 동영상은 오늘 후배 정신이 페북에서 알려주는 바람에 허락도 없이 가져왔습니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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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독후감은 쓴지도 꽤 됐고 또 지금도 가끔 인터넷에 떠돌아 다니기도 하는 글입니다. 그런데  최근 다시 이 책을 찾아 읽어볼 필요가 생겼고, 또 어떤 분께서 이 글을 이메일로 한 번 보내달라 하시는 바람에  다시 들춰보게 된 겁니다.  



다시는 광고인이 낸 책을 구입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나는, 어느날 고속터미널역에 있는 영풍문고에 가서 '인문학으로 광고하다' 라는 따끈따끈한 새 책을 발견하게 된다. 에잇, 또 광고책이군. 책값도 더럽게 비싸네.(17,500 원이다) 심드렁한 마음으로 그 자리에서 책을 들쳐보던 나는 두 시간 동안 꼼짝않고 책 속에 빠져들었다가 결국 읽을 분량이 반 정도 남은 그 책을 들고 계산대 앞에 서고 말았다. 젠장. 

<인문학으로 광고하다>는 엄밀히 말해서 광고인이 낸 책이 아니다. 광고를 하는 박웅현 CD를 출판기획자이자 컬럼니스트인 강창래가 만나 오래도록 인터뷰하고 함께 어울려 고민도 하고 해서 펴낸 공동저작이다. 


어떤 사람은 연애편지를 보낼 때 "보고싶습니다" 라고만 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려지지만 보고 싶은 맘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라고 쓴다. 어떤 사람의 마음이 더 잘 전달되겠는가. 박웅현은 정지용의 이 시를 인용하면서 광고 커뮤니케이션은 '보고 싶다는 말을 뭐라고 하면 좋을까'에서 출발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광고를 만들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인문학적 소양이라고 말한다. 가령 박경리의 '토지'를 읽는 것은 당장 광고 아이디어를 내는 데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지만 기초 체력을 기르는 데는 보약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넉 달 간, 한 첩의 보약을 먹듯 <토지>를 읽었다' 고 한다. 인문학적 소양이 받쳐주면 그다음부터는 세상의 모든 일들이 아이디어가 되고 소재가 된다. 길 가다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주는 사람을 보고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타심'을 새삼 환기한 그는, 이를 그대로 광고에 넣는다.


 왜 넘어진 아이는 일으켜 세우십니까?

왜 날아가는 풍선은 잡아주십니까?

왜 흩어진 과일은 주워주십니까?

왜 손수레는 밀어주십니까?

왜 가던 길은 되돌아가십니까?

 

사람 안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을 향합니다.


   

그렇다면 인문학적 소양이란 무엇인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달라고 하자 그는 베네통 광고의 사진을 찍었던 올리비에르 토스카니의 일화를 얘기해준다.

수녀와 신부의 키스 장면, 천사와 악마로 분장한 백인과 흑인 아이의 포옹 장면, 흑인 여성의 젖을 빨고 있는 백인 아기의 사진 등 수많은 화제작을 남긴 토스카니가 [아카이브]라는 잡지와 인터뷰를 할 때 공산주의에 대해 "우리는 공산주의자가 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진화하지 못했다."라고 말한 것이다.

박웅현은 공산주의라는 돌발적 주제에 대해 이렇게 잘라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웬만한 철학적 인문학적 깊이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어딘가에서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 가장 무섭지 않다는 말도 한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강창래가 따라가서 목격했다는 박웅현의 상공회의소 강의다. 주제는 '한국에서 효과적인 광고 캠페인'이었는데 이제 곧 한국에 와서 커뮤니케이션을 펼쳐야하는 외국인들에게 해야하는 강의였다. 그때 박웅현의 첫 마디는 "저는 한국말로 하겠습니다."였단다.


 "제가 영어를 전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이유로 인해 영어로 말하는 순간 제 지적 수준이 초등학생 수준으로 떨어집니다. 석사 학위까지 받은 사람으로서 석사 학위를 가진 지적 수준으로 말하고 싶습니다."


 

  

박웅현은 이날 동시통역사를 대동하고 프리젠테이션을 진행했다고 한다. 이는 좋은 프리젠테이션을 위한 과감한 장치이기도 했고 프리젠테이션의 주제를 더 깊게 부각시키는 효과까지 발휘했다. 아무리 칸이나 뉴욕페스티벌에서 상를 타는 광고라도 그 나라의 문화와 생활에 맞지 않으면 이해받지 못한다는 것(우리는 버드와이저 wazzaup~광고를 이해 못한다)을 말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동시통역사를 쓰는 것으로 문화적 자존심을 지키면서도 내용과 형식이 강의 내용과 제대로 맞아들어간 예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우리말을 잘하는 외국인이 있다고 해도 언어만 알아서는 그 문화에 깊이 젖을 수 없는 것이고, 이를 뒤집어서 말하면 좋은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는 그 나라를 이해할 수 있는 인문학적 소양이 쌓여야 한다는 것이다.

 박웅현은 2002년 월드컵과 촛불집회라는 사회적 이슈 속에서도 또다른 통찰을 발견한다. 아디다스라는 광고주에게 팔려고 만든 이 광고는 결국 집행되지 않았지만 그의 인문학적 소양이 어떤 식으로 발현되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기에 인용한다.

 

촛불

 

믿지 못할 일이었다.

월드컵 16강

거리는 기쁨에 넘쳤다.

같은 시각

또 하나의 믿지못할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두 명의 여중생이 죽었다.

미군 장갑차에 깔려서

친구의 생일잔치에 가던 길이었다.

언론은 크게 다루지 않았다.

미군은 책임이 없다는 발표를 했고

정부는 침묵했다.

두 명의 소녀가 죽었는데

세상은 조용하기만 했다.

한 네티즌이 있었다.

죽은 이의 영혼은 반딧불이 된다고 합니다.

촛불을 준비해주십시오.

저 혼자라도 시작하겠습니다.

작은 제안이었다.

한 개의 촛불이었다.

그것으로 무엇을 밝힐 수 있을까?

상대는 미국의 군대였고

모든 이의 시선은 월드컵을 향해 있었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기적이 일어났다.

촛불이 옮겨 붙었다.

그해 한국은 월드컵 4강에 진입했다.

모두들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해 한 개의 촛불이

세상을 환하게 밝혔다.

 

모두들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자신이 예전에 만들었던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와 작년 '그리고 대학에 떨어졌습니다...수험생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라는 광고 모두 시대의 흐름을 읽고 그 흐름 속에서 한 기업의 다짐과 의견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한다. '넥타이와 청바지는 평등하다'도 마찬가지였다. 그 시대를 읽고 인간을 연구하는 것, 그것이 그가 말하는 인문학이다.

 박웅현은 나도 전에 3년 남짓 다닌 적이 있던 광고대행사 TBWA/Korea의 ECD다. '총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뜻이다. 그런 그가 'TV, 책을 말하다'라는 프로그램에 패널로 나온 적이 있다. 젊은 작가 전아리와 함께 출연했었는데, 나는 그때 그가 진정으로 부러웠다. 광고인으로서 독서 프로그램에 나왔다는 게 부러운 게 아니라 광고인이 TV에 나와서 광고 얘기를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게 부러웠던 것이다.

 며칠 전 TBWA/Korea에서 박웅현과 함께 일한 적이 있는 친구 이문선의 사무실에 카피 알바 때문에 갔다가 이 책 얘기를 해줬더니, 그는 박웅현에 대해 이런 표현을 했다.

 "나는 세상엔 두 가지 CD가 있다고 생각한다. 박웅현과 박웅현이 아닌 CD." 

 이런 게 바로 최고의 찬사다. 쉣.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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