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통찰력과 막강한 연기력의 행복한 만남 – [마지막 4중주]
주먹으로 맞아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데니스 호퍼는 자신을 고문하던 마피아들에게 담배를 하나 달라고 해서 맛있게 빤 다음 엉뚱한 얘기를 시작합니다. 그것도 아주 침착하고 흥미롭게 빙글빙글 웃어가면서. “난 책을 좋아하지. 특히 역사책을 많이 읽었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한 가지 가르쳐 줄까? 니네 시실리아인들은 원래 곱슬머리가 아니었어요. 그런데 천 년 전쯤에 무어인들의 피가 섞이면서 그렇게 된 거지. 깜둥이 말야. 그러니까 시실리아인들은 죄다 깜둥이의 종자인 거라고…니네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가 깜둥이들하고 그짓을 한 거야...”
얘기를 들으며 점점 얼굴이 일그러지던 보스 크리스토퍼 월큰은 나중엔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런지 그만 킥킥킥킥 웃음을 터뜨리고 맙니다. 데니스 호퍼도 그의 약을 올리느라 마주 보고 더 크게 웃죠. 하하하하하. 자세를 수습하려 돌아서던 월큰은 손으로 데니스 호퍼를 가리키며 다시 한 번 포복절도를 합니다. 아아, 이 새끼 봐라 진짜 웃기네, 하는 표정으로 웃음을 흘리던 크리스토퍼 월큰, 결국은 참지 못하고 부하의 권총을 뽑아서 단숨에 데니스 호퍼를 쏴죽여 버립니다. “1984년 이후로 내가 누군가를 직접 죽이는 건 니가 처음이야!”라는 말과 함께.
기억 나세요? 얼마 전 자살한 토니 스코트 감독의 영화이긴 하지만 매니아들 사이에선 무명 시절의 쿠엔틴 타란티노 시나리오로 더 유명한 영화 [트루 로맨스]의 한 장면이죠. 여기 나오는 크리스토퍼 월큰은 정말 카리스마가 넘치는 악역 전문 배우입니다. 몇 해 전 인사동에 있는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친구들 영화제’가 열렸을 때 아벨 페라라의 [킹 뉴욕]을 추천했던 류승완 감독은 영화가 끝나고 열린 간담회에 나와 “우리 월큰 형님이 나오는 장면에서, 우와!…”라고 흥분하며 크리스토퍼 월큰을 기렸던 기억이 납니다. (영화에서 여자 승객의 돈을 빼앗는 지하철 강도에게 “야, 그러지 말고 차라리 이건 어때? 하고 자신의 지갑 속 돈을 던지며 “생각 있으면 나중에 한 번 찾아오라” 고 말하는 장면은 실제로 월큰의 경험담이라고 합니다. 실제로도 눈빛 카리스마가 장난 아닌 배우라는 얘기죠)
자, 그런 전설적인 악역 전문 배우가, [퓨너럴]에서 숀 펜의 동생 크리스 펜과 함께 사악하게 웃던 그 보스가, [디어 헌터]에서 단 한 발의 탄환이 든 권총을 머리에 대고 끊임없이 러시안 룰렛을 해대던 그 슬픈 또라이가 [마지막 4중주]의 첼리스트로 나온다니. 얼른 상상이 안 갔습니다. 물론 크리스토퍼 월큰이 코미디 영화에 전혀 출연을 안 한 건 아닙니다. 그래도 우리가 기억하는 그는 백 번 양보해도 [수어사이드 킹]같이 살짝 맛이 간 상황의 ‘납치 당한 보스’라도, 결국은 카리스마 작렬,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불이 꺼지고 [마지막 4중주]가 시작되고 나니 조직의 보스 월큰 형님은 어디 가고 파킨슨병 진단을 받아 고뇌하는 노장 첼리스트가 거기 서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푸가’라는 세계적인 쿼텟의 리더인 피터는 자신이 더 이상 연주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새 첼리스트를 구하자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공연곡으로 ‘베토벤 현악4중주 14번’을 결정합니다.
얘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피터가 빠지게 된다는 건 25년 간 지속되었던 네 사람의 팀웍이 깨진다는 얘기죠. 타격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당장 제2바이올린인 로버트는 이제 더 이상 다른 사람 받쳐주는 역할만 하긴 싫다며 앞으론 때에 따라서 자신이 다니엘 대신 제1 바이올린을 맡을 수도 있음을 시사합니다. 오랜 친구이자 동료인 다니엘이 당황하는 것은 물론 로버트의 아내이자 쿼텟의 비올라 연주자인 줄리엣도 곤혹스러워 합니다. 그동안 모두의 아버지와 같았던 피터의 리드 하에 가려져 있던 멤버들의 질투, 갈등, 욕심 등이 한꺼번에 표출되는 상황인 것이죠.
자신을 만류하는 줄리엣에게 화가 난 로버트는 홧김에 알고 지내던 조깅 파트너와 하룻밤을 보내게 되고 그 사건 때문에 둘의 사이는 더욱 벌어집니다. 게다가 로버트와 줄리엣 사이에서 태어난 대학생 딸에게 바이올린을 지도하던 다니엘이 그녀와 사랑에 빠져 동침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습니다. 얼핏 단조롭고 고귀한 척 할 수도 있었던 극은 이처럼 클래식 음악에 어울리지 않는 ‘막장스러움’을 통해 인간적인 온기와 삶의 신산스러움을 함께 갖춘 입체적인 텍스트로 발전합니다.
학생들 앞에서 강의를 하던 피터는 자신이 마지막 연주곡으로 선택한 ‘베토벤 현악4중주 14번’의 의미에 대해 질문합니다.
“당시엔 4악장으로 구성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베토벤은 이 곡을 7악장으로 구성했으며, 악장 사이에 쉬는 시간 없이 바로 연주하도록 했다. 40분 동안 쉼 없이 계속 이어서 연주해야 하는 이 곡은 연주하는 동안 악기의 튜닝이 풀리거나 연주자들의 하모니가 망가지기 마련이지. 그렇다면 연주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베토벤의 주문을 어기고 중간에 잠시 멈춰서 조율을 해야 할까, 아니면 다른 연주자들에게 자신의 연주를 맞춰 가며 끝까지 계속 쉬지 않고 연주해야 할까?”
좋은 텍스트엔 언제나 ‘인생의 메타포’가 들어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베토벤 현악4중주 14번’이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죠. 다큐멘터리를 찍던 야론 질버만 감독은 극영화 데뷔작인 이 작품에서 베토벤의 곡을 통해 이기심과 이타심, 화합과 개성의 관계, 그리고 직업과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들을 관객에게 던지죠.
이처럼 명확한 컨셉과 만듦새를 가진 이 영화는 기가 막힌 배우들의 열연으로 더욱 빛이 납니다. 무슨 연기를 시켜야 저 사람이 연기 못 한다는 소릴 한 번 들어볼까, 라는 생각을 갖게 할 정도로 무슨 연기든 완벽하게 해내는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은 물론 , 다니엘 역의 마크 이바니어와 줄리엣 역의 캐서린 키너도 명불허전입니다.
리허설을 하면서 호흡을 고르고 서로 눈빛을 교환하는 배우들의 긴장된 손끝 연기를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까요. 젊었을 때 카잘스와 만났던 장면을 회상하며 즉흥적으로 첼로를 켜는 크리스토퍼 월큰의 몸짓과 연기를 무슨 단어로 표현해야 적당할까요. 그렇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그들이 악기를 연주할 땐 정말 악기를 배워서 실력으로 연주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멋진 음색들이 계속 흘러 나옵니다.
영화는 네 사람이 무대에 서서 ‘베토벤 현악4중주 14번’을 연주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습니다. 연주 도중 한 사람이 떠나고 새로운 사람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연주는 계속 이어지죠. [마지막 4중주]. 이 영화는 텍스트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막강한 연기력이 만나면 얼마나 멋진 드라마가 탄생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게다가 귀를 황홀하게 해주는 정상급 연주들을 한 시간 반 동안 실컷 들을 수 있습니다. 얼른 가까운 극장으로 가십시오.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설 땐 아마 "아, 오늘 술 약속 취소하고 극장으로 오길 정말 잘 했어."라는 생각이 절로 나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