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행복을 간절히 원한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면 행복하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은 없다. 아니, 아직 못 봤다. 남부러울 것 없는 엘리트가 끊임없이 바람을 피우는 것도 보았고 SNS에 시크한 척 멋진 일상을 올리거나 몇 달 간의 해외여행을 거의 실시간으로 중계함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부러움을 사는 엄친아도 알고 보면 그 자랑이 허세로 밝혀지기도 한다. 나는 궁금했다. 행복은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는데. 알고 보면 행복이야말로 소박한 일상에 있다던데. 그래서 파랑새라고 하지 않던가. 실컷 바깥에서 찾아 헤매다 지쳐 들어온 주인공이 집에서 발견한 파랑새. 그런데 그런 동서고금의 이야기들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왜 사람들은 좀처럼 행복해지지 못하는 것일까.

결혼 초기부터 4년 간 살았던 전세 아파트를 떠나 성북동 꼭대기에 있는 아주 작은 집으로 들어오면서 드디어 나는 행복한 삶에 접어들게 되었다...라고 하면 거짓말이고, 적어도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에 대해서는 좀 알게 된 것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 행복해지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사람, 공간, 그리고 시간. 즉, 나를 이해해주고 무조건 응원하는 사람과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공간에서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때 행복은 시작된다. 물론 이건 완성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다.


아내와 나는 아파트를 떠나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하기로 마음먹은 뒤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일단 우리가 가진 돈이 턱없이 부족했고 은행은 아파트가 아닌 단독주택에 대해서는 몇 배나 까다로운 대출조건을 내세웠다. 워낙 주택금융에 대해 잘 모르기도 했지만 요즘 사람들이 대부분 아파트에 살다 보니 아파트 이외의 집 거래는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출발부터 차별이 주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막막해도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이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성북동 언덕 꼭대기 골목 끝에 있는 작은 집을 하나 발견했고 친한 친구들의 금전적 도움으로 며칠 만에 계약을 할 수 있었다. 집주인마저 너그러운 분을 만나 이사 전에 두 달간 낡은 집을 수리해서 들어올 수 있는 특전도 받았다. 대출금을 매우 많이 끼긴 했지만 뒷마당까지 있는 어엿한 단독주택의 소유자가 된 것이었다.

이사를 한지 며칠 지나지 않아 아내는 내게 집 이름을 하나 지어보라고 했다. 광고회사에서 평생 남의 회사 걱정이나 하고 살았으니 이젠 자신을 위해서도 뭔가 아이디어를 내보라는 것이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성북동소행성이라는 이름을 생각해냈다. '작지만 행복한 별'이라는 뜻이었다. 물론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당장 행복해질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삶의 방향성이 좀 분명해지는 것 같아서 기뻤다.

우선 아침이 달라졌다. 전에는 거리를 통과하는 차 소리나 두런거리는 이웃 사람들이 내는 생활소음에 잠을 깼다면 성북동에서는 요란한 새소리와 함께 날이 밝았다. 비록 전철역에서 걸어 올라오려면(아내와 나는 차가 없다) 땀을 뻘뻘 흘려야 하는 언덕 꼭대기에 살지만 그 덕분에 차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 장점을 가지게 되었다. 새소리, 바람소리처럼 자연이 만들어내는 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스트레스가 없었다. 가끔 아내가 "저놈의 새가 미쳤나. 왜 새벽부터 울어대고 난리야?"라고 투덜대는 경우는 있지만 그게 진짜 화를 내는 게 아니라 뿌듯해하는 마음의 굴곡된 표현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회사가 끝나면 대부분은 곧장 집으로 왔다. 집에서 아내와 보내는 시간이 밖에서 직장 동료나 친구들과 놀거나 술 마시는 시간보다 좋았다. 사람들이 보고 싶으면 집으로 초대를 했다. 집은 작지만 옥상에 올라가면 가깝게는 광화문빌딩부터 멀게는 남산타워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야경이 펼쳐졌다. 자주 열지는 못하지만 옥상파티는 어느덧 성북동소행성의 '계절 인기 품목'이 되었다. 그러나 가장 좋은 건 집에서 한적하게 음악을 켜놓고 책을 읽거나 작은 볼륨으로 TV를 틀어놓고 아내와 같이 술을 마시는 시간이었다. 그중에서도 새벽에 혼자 일어나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시간을 갖는 건 내가 가진 행복의 크기를 늘리는 일이었다.

그런 내가 어느 날 오후에 아내에게 전화를 해서 "아무래도 회사를 그만두어야겠어."라고 말했다. 물론 아무런 대책 없이 한 소리였고 그녀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그래. 잘 생각했어. 당신이 오죽하면 이러겠어. 당신 회사 오래 다녔잖아."라고 말해주었다.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았다. 아내와 통화를 끝낸 후 나는 정식으로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밝혔고 사람들은 회사를 그만 두면 당장 뭘 할 거냐고 물었다. 그때마다 나는 "아직 나도 잘 모르겠어.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대답해서 사람들을 허탈하게 만들었다. 아마도 '저 자식, 참 속 편한 소리 하고 있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면 바보라고 생각했거나. 바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떤가. 어차피 그들이 내 인생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닌데.

그리고 다행히 우리 집엔 바보가 또 하나 있다. 혼자서 바보라면 외롭겠지만 같이 사는 집에 바보가 하나 더 있으면 무서운 게 별로 없다. 더구나 그 바보는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이해해주고 내 이야기에 무조건 동의하는 사람이니까.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다. 그래도 뭔가 바보 같지만 신나는 일을 해보고 싶다. 세상에는 아직 사람들이 모르는 두 개의 소행성이 있다. 생떽쥐베리가 발견한 소행성 B612 엔 어린 왕자가 살고 서울에 있는 성북동소행성엔 대책 없이 즐거운 바보 커플이 산다는 점이 조금 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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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에 딱 한 장

혜자 2019. 5. 25. 11:19



매년 결혼기념일마다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행사가 뭐 없을까 하다 생각해 낸 것이 '결혼기념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사진 찍기' 놀이였습니다. 첫 해는 우연히 일찍 눈을 떴으나 일어나기는 싫고 해서 무심코 사진을 찍었는데 전날 먹고 마신 술과 안주에 팅팅 부어터진 얼굴들이 재밌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해도 계속 찍다보니 어느덧 여섯 해가 지났습니다. 저희 부부는 해마다 이맘때면 여행을 하기 때문에 올해는 부산의 한 호텔에서 문제의 베드씬을 찍게 되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그 동안 일 년에 딱 한 장씩 찍어서 올린 사진들을 바라보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올해는 좀 근엄하게 찍어볼까도 생각해 보았으나 결국 또 깔깔깔 웃으면서 찍게 되었습니다. 해마다 5월이면 주책 없는 커플사진을 목도하시느라 괴로워하실 만장하신 친구 여러분, 죄송합니다. 오늘 하루만 너그럽게 봐주세요. 내일부턴 정말 안 이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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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전부터 지금까지 아내가 길을 걷다가 모텔 간판만 나타나면 내게 던지는 농담이다. 우리는 둘 다 혼자 살던 시절에 만났으므로 처음부터 다른 연인들처럼 모텔이나 호텔에 갈 필요가 없었던 것이었다. 결혼 전에도 항상 서로의 집으로 가서 자면 되었고 나중엔 아예 살림을 합쳐 살다가 결혼식을 올렸으니까. 아내는 그게 좀 아쉽다면서 툭하면 모텔에 가자는 농담을 한다. 그런 우리에게도 모텔의 추억이 꼭 세 번 있다. 


첫 번째는 결혼한 다음 해 내 생일 때였다. 그땐 어떤 마음에서였는지 이번 생일엔 친구들을 죄다 불러 모아 밤새 술을 마셔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신사동의 한 술집을 예약했고 저녁 7시부터 술자리가 시작되었는데 생각보다 많은 친구들이 모이게 된 것이었다. 수십 명이 목소리를 모아 한꺼번에 건배를 외쳤고 그때마다 나는 친구들에게 고루 사랑받는 호스트로서의 뿌듯함을 감추지 않으며 술잔을 높이 들었다. 친구들도 다음날이 휴일이라서 그런지 처음 만난 사이인데도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마음껏 술을 마시고 취했다. 술값이 좀 많이 나오겠지만 이미 취한 상태라 '뭐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는 거지'라는 대범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미친 듯이 술을 마시다 문득 눈을 떠보니 모텔 안이었다. 친구 영학이가 너무 취한 나를 보고 신사동의 모텔 하나를 예약한 뒤 키를 선물이라며 주고 간 것이었다. 생일선물로 모텔 키를 받아본 건 아마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닐까 싶다. 아내는 내 옆에 누워 간밤에 얼마나 대단한 일들이 있었는지 얘기해 주었다. 내 친구 중 어떤 여자분들은 술을 마시다 취해서 테이블 앞에서 울고불고했고 어떤 남자분들은 서로 이유도 없이 주차장에 나가 싸우더니 또 곧 화해를 하고... 나는 모텔에 누워 하하하 웃었다. 술이 안 깨서 둘 다 너무 힘이 들었다. 우리는 모텔에서 나와 기념으로 모텔 간판 사진을 찍은 뒤 집으로 돌아왔다. 


두 번째는 옥천에 사는 아내의 고등학교 때 친구 정미 씨에게 놀러 갔을 때였다. 정미 씨는 우리 결혼식에서 주례를 서 준 네 명 중 유일한 아내의 친구였는데 옥천에서 남편, 두 아들 들과 섬유미술 작업을 하며 살고 있었다. 정미 씨와 희관 씨, 그리고 우리 부부까지 네 명은 폐교를 개조한 정미 씨의 작업실에서 밤늦게까지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술잔을 높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정미 씨 부부는 피아노 앞의 의자에 무릎을 베고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아내는 이불속에서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테이블 위엔 소주는 물론 새로 딴 양주 한 병까지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공기가 좋아서 여기 오면 누구나 술을 많이 마시게 돼요,라고 희관 씨가 말했다. 나도 한참을 누워있다가 나와 어찌어찌 밥을 먹고 태관 씨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옥천역까지 갔다.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역으로 들어가려는데 둘 다 너무 힘이 들고 멀미까지 나서 도저히 걸을 수가 없었다. 아내가 우리 그러지 말고 모텔에 들어가서 두 시간만 자고 나오자고 했다. 역 앞에는 모텔들이 많았다. 그중 좀 깨끗해 보이는 모텔을 골라 들어가 '숏타임'을 끊었다.  방에 들어간 우리들은 샤워도 하지 않고 그대로 쓰러져 두 시간을 달게 잤다. 겨우 기운을 차린 우리들은 "모텔에 와서 또 잠만 자다 가네..."라고 쓴웃음을 지으며 옥천역으로 들어가 KTX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세 번째는 지난 1월 24일 성대 앞 도어스에서 술을 마시던 날이었다. 그날은 친구 문송과 술 약속이 되어 있어서 논현동에서 둘이 막 술자리를 시작하는 참이었는데 악당이반의 김영일 대표에게서 호출이 온 것이었다. 김영일 선생이 부르면 무조건 가야 한다. 우리는 당장 술자리를 걷고 광화문에 있는 전집으로 달려갔다. 김영일 선생 말고도 또 한 분의 일행이 있었다. 우리는 맛있는 생선전에 막걸리를 마시다 성대 앞 도어스로 갔다. 여기는 김영일 선생의 단골이기도 하다. 아내도 뉘 늦게 술자리에 합류해서 맥주와 양주를 마셨다. 아내 빼고는 다들 전작도 있고 해서 빠른 속도로 취해갔다. 

눈을 떠보니 또 허름한 모텔방 안이었다.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더니 내가 어느 순간 맛이 가더니 잘 걷지도 못할 지경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술집을 나올 때 다들 취해 있었는데 나는 특히 그 정도가 심해서 무릎이 계속 꺾인 모양이었다. 아내는 도저히 나를 데리고 집까지 갈 자신이 없어서 눈에  띄는 3만 원짜리 모텔로 들어왔다고 한다. 방은 몹시 좁았고 새하얀 침대와 베개는 지나치게 푹신해서 몸이 꺼지는 기분이었다. 안 좋은 자세로 잤더니 여기저기 얻어맞은 것처럼 몸이 아팠다. 아내가 "여보, 우리 신발은 어딨지?"라고 묻길래 방문을 열어보니 옹색한 현관에 아내와 내 신발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욕실을 열어보았으나 타일이나 욕조의 상태가 너무 정 떨어져서 도저히 샤워를 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우리는 일회용 칫솔로 양지만 하고 서둘러 모텔을 나왔다. 1층에 있는 객실에서 나와 현관 옆에 있는 카운터에서 할머니에게 인사를 드리려고 했는데 아무도 없길래 그냥 나왔다. 우리가 성대 앞 싸구려 모텔에서 자게 될 줄은 몰랐다고 하며 헤어졌다. 나는 곧장 회사로 가고 아내는 필라테스 선생을 만나러 간 것이었다. 


예전에도 물론 이성과 함께 모텔에 간 적이 있었다. 그러니 그건 아내와 만나기 전의 일이니까 숨기거나 비난을 받을 일도 아니다. 그러나 아내와 모텔에 갈 때마다 번번이 건전하게 잠만 자고 나오는 건 문제가 있다고 본다. 다음엔 멀쩡한 정신에 모텔에 가서 반드시 아내와 뜨거운 밤을 보내고야 말겠다고 불끈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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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천명 2020.03.08 07: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짐을 꼭 실천하시길..




아내와 나는 살림을 합치고 성수동에 있는 전세 아파트에서 4년을 살았다. 성수동에서 살면서 가장 좋았던 것은 출퇴근이나 외출을 하기 위해 전철을 타려면 한강공원을 가로질러야 한다는 점이었다. 뚝섬유원지역에서 내려 집까지 이어진 공원길엔 새들이 노니는 푸르른 나무와 꽃들, 그리고 깨끗한 보도블럭이 기분 좋게 조성되어 있었고 곳곳에 벤치와 깨끗하고 쾌적한 화장실이 있었다. 특히 화장실은 나처럼 갑자기 대소변을 해결해야 하는 일이 잦은 인간에겐 정말로 고마운 시설이었다. 우리는 벤치에 앉아 함께 웃다가도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변해서 서로의 가방이나 소지품을 맡기고 화장실로 뛰어가는 일이 많았다. 똥오줌 걱정 없이 천천히 걷기만 하고 아무 것도 안 해도 되는 공간. 누구의 소유도 아닌 벤치. 나는 이런 게 너무나 좋았다.

사람들은 공원에 와서 산책도 하고 체조도 했다. 아침부터 모여 배드민턴을 치는 사람도 있고 클라이밍 동회회 사람들이 모여 암벽등반을 하기도 했다. 어느 날은 뚝섬유원지공원 안 인공암벽에 오르는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아는 얼굴을 만나기도 했다. 처음 이사를 왔을 때 우리집에 와서 도배를 해주신 지물포의 여사장님이었다. 암벽등반 장비를 갖추고 절벽을 오르는 아주머니의 모습은 도배를 할 때나 가게를 지키고 있을 때와는 딴판이었다. 새롭고도 멋있었다.

주말이나 휴일이면 많은 사람들이 공원을 찾았다. 특히 주머니 사정이 넉넉치 못한 젊은이들이나 데이트족들이 많이 와서 편의점에서 산 캔맥주를 마시거나 배달 치킨을 시켜 먹었다. 모처럼 원피스를 빼입고 하이힐을 신고 나왔다가 공원에 와서 어색한 데이트를 하게 된 젊은 여성과 그 파트너의 모습을 바라보는 건 조금 서글프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건 잠깐이었다. 눈부신 젊음들에겐 그런 서글픔쯤은 금방 날려버리는 힘이 있었으니까. 밤이면 버스킹을 하는 뮤지션들도 있었고 마술을 연습하는 사람, 혼자 색스폰을 부는 사람도 있었다. 공원이라는 열린 공간은 숨가쁘던 일상을 멈추고 각자 자신의 진짜 모습을 바라보거나 보여주는 곳이었다.

우리는 햇볕 좋은 봄날이나 가을의 휴일이면 작은 그늘막과 돗자리를 들고 공원 잔디밭으로 나갔다. 가끔은 놀러 온 친구들과 공원으로 나가 간단한 와인파티를 열기도 했다. 사람들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아내는 공원에 있는 커플들의 뒷모습만 봐도 부부인지 불륜인지 금방 알 수 있다고 했다. 손을 꼭 잡거나 서로의 손을 지나치게 다정히 어루만지며 가는 커플은 거의 다 불륜이라는 것이었다. 아내의 말을 듣고 다시 사람들을 쳐다보니 정말 그런 것도 같았다. 일단 부부는 나란히 서서 가는 경우가 드물었다. 남편이 앞서 걷고 2보 이상 떨어져 아내가 걷는 경우가 흔했다. 저 사람들도 처음엔 나란히 손을 잡고 걸었을 텐데, 라는 생각을 했다. 인간의 감정이 균질하게 흘러갈 수는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세월이 지나 다 그렇게 된다는 건 슬픈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둘이 공원을 걸을 때마다 '불륜커플 코스프레'를 많이 했다. 내가 아내의 손을 잡아 끌거나 허리를 감싸안으면 아내가 "어머, 왜 이러세요~?!"라고 외치는 식이었다. 부부보다는 불륜 커플이 훨씬 더 행복해 보였으니까. 이제는 다른 동네로 이사를 와서 한강공원에 갈 일이 거의 없지만 다행히 우리는 아직도 길을 걸을 때 손을 잡고 가는 경우가 많다. 서로를 위해서 좋은 버릇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불륜 커플처럼 보이려면 지금보다 손을 더 꽉 잡거나 서로 만지작거리면서 가야 하는 것 아닐까 잠깐 반성을 해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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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꼴라가 있는 풍경

혜자 2018. 9. 24. 11:54



마당에 나와 빨래를 널고 있는데 아내가 따라 나와 날씨가 너무 좋다고 소리를 지르더니 텃밭에 있는 루꼴라를 딴다. 햇볕은 쨍하고 바람은 시원하다. 소행성으로 이사오길 참 잘했다. 이 여자와 결혼하길 참 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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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희망천사 2018.10.09 14: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늘 즐겁고 행복한 삶을 보내시길 ~~



이주일 전쯤인가, 저녁 시간에 집에서 만난 아내가 요즘 무슨 특별한 일은 없었느냐고 인사치레로 묻길래 별 일 없었다고 하다가 마침 그날 낮 수영장에서 있었던 '조금 특별한 일'이 생각나서 잠깐 그 얘기를 해주었다.

그날 몸이 찌뿌듯해서 점심시간을 이용해 수영장에 잠깐 갔었는데 탈의실에서 옷을 다 벗고 샤워실로 들어갔더니 파우치 안에 수영복이 없는 것이었다. 이럴 수가. 수영모자나 안경은 전에도 잃어버린 적이 있지만 수영복을 잃어버린 건 처음이었다. 할 수 없이 옷을 다 입고 밖으로 나와 카운터에서 가서 여직원에게 혹시 습득 신고가 들어온 수영복이 있는지 물었더니 없단다. 맞은편에 있는 매점으로 가서 주인 아줌마에게 새 수영복을 달라고 했다. 처음 갔을 때 내게 수영복을 무척 비싸게 팔았던 아줌마였다. 수영복을 분실했다고 했더니 아줌마가 수영복 잃어버린 게 무척 잘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환하게 웃으며 새 수영복을 내주었다. 이번에도 비싸게 팔면 뭔가 항의를 하려고 했는데 어느새 눈치를 챘는지 좀 저렴한 제품을 권했다. 새 수영복을 받아들고 다시 탈의실로 가서 옷을 벗고 샤워를 했다.

수영복을 착용하고 수영장 안으로 들어가며 물안경을 썼더니 이번엔 물안경 끈이 툭 끊어지는 것이었다. 이럴 수가. 물안경 없이 수영을 하면 눈이 몹시 아프고 충혈도 되는데. 할 수 없이 다시 나와 옷을 입고 매점으로 갔다. 아줌마가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다며 반가워했다. 내가 물안경 줄이 끊어질 줄 어찌 알고 기다렸냐고 물으려고 하는데 아줌마가 내 카드를 디밀었다. 수영복을 사고 신용카드를 안 가져 가셨다는 것이었다. 나는 굳은 얼굴로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물안경도 하나 달라고 했다. 아줌마가 또 몹시 기뻐하는 환한 얼굴로 물안경을 권했다. 비싼지 아닌지 따져 볼 겨를도 없이 물안경을 들고 다시 탈의실로 가서 옷을 벗고 샤워를 한 뒤 수영복과 물안경을 착용하고 수영장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너무 흘러서 레인을 몇 번 왔다갔다 하지도 못하고 뛰쳐나와서 늦은 점심을 먹어야 했다...

내 얘기를 다 들은 아내가 한숨을 내쉬며 측은한 눈길로 내 얼굴을 쳐다봤다. 남편이 남들보다 어려운 인생을 살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정도인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그래도 이런 얘기를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아내가 곁에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도 없이 달밤에 대나무숲에 가서 혼자 이런 얘길 두런두런 주절이고 있으면 그 인생이 얼마나 서글프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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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공처가의 캘리 2018. 5. 14. 09:05

쓰레기 분리수거를 열심히 수행하고 난 후 녹차를 마시는 공처가의 일요일 오후 정신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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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열한시 반쯤 퇴근해서 오늘 아침 출근하기 직전까지 자는 시간 빼놓고는 계속 아내에게 야단을 맞는 대기록을 세웠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겠냐고 물으시겠지만, 그게 가능하다.

발단은 퇴근 직후 나의 행태였다. 언덕길을 올라오느라 숨이 차고 더웠던 나는 들어오자마자 창문을 앞뒤로 열고 옷을 활활 벗어 아무 데나 집어던졌는데 그러느라 현관문을 미처 닫지 못한 관계로 이른 여름모기들이 방충망이 없는 현관문으로 대거 난입했고, 그 중 몇 마리가 날아다니다 아내의 몸을 물고 달아났던 것이다. 아내는 빨리 현관문을 닫으라고 소리를 질렀고 모기약을 들고 와 자신에게 바르라고 명령했다. 모기약을 발라준 뒤 샤워를 하고 돌아와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나에게 등이나 긁으라고 핀잔을 주던 아내는 소변을 보러 화장실에 갔다가 내가 욕실을 물바다로 만들어 놓았다고 또 화를 냈다. 그러면서 아내는 내가 한 번 입은 옷을 빨래통이 아닌 옷장에 다시 처넣기를 반복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아내의 말을 듣고 세탁실 앞을 보니 내가 한 번씩 입었던 티셔츠와 바지, 반바지, 잠자리 옷 등이 작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 밖에도 뭔가 사소한 야단을 몇 가지 맞았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 내가 왜 이렇게 왜 이렇게 하루 종일 야단을 맞아야 하나 생각해 보았다. 나는 그런대로 성실하고 듬직한 남편이다. 담배도 피우지 않고(끊은지 10년이 되어간다) 술도 많이 마시지 않고(자주 마시긴 한다) 도박도 하지 않으며 바람도 피우지 않고 일도 열심히 한다(잘 한다는 애긴 아니다). 더구나 아내를 사랑한다. 그런데 왜 이러는 걸까.

출근 준비를 다 한 뒤 마당을 쓸고 있는 아내에게 인사를 하러 갔더니 "당신은 왜 물건을 제자리에 못 둬?"라고 묻는다. 나는 그런 일 없다고 항변을 하고 있는 사이 아내는 내가 사용하고 재활용 쓰레기박스 옆에 세워놓은 큰 빗자루를 옥상 계단 밑으로 옮기는 것을 보았다. 생각해 보니 그 빗자루는 늘 계단 밑에 있었다.

출근해서 컴퓨터를 켜고 있는데 아내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왔다. 세무서에 왔는데 종소세가 너무 많이 나와 슬프다는 것이다. 오늘은 5월 31일. 종합소득세. 그렇다. 남편은 잘못이 없었다. 문제는 늘 그놈의 돈, 또는 나라, 시스템에 있었던 것이다. 좋은 나라에서 살면 좋은 남편은 저절로 되는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이제부터 하루에 한 번씩 나라에 책임을 전가하자. 새 정부에게는 좀 미안한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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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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