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이 책을 또 읽었다. 10여 년 전에 사서 밑줄을 쳐가며 열심히 읽었고 교보문고에 갔을 때 순간 착각을 해서 비슷한 시기에 또 한 권을 샀었다. 그래서 헌 책은 우리집에 놀러왔던 친구 부인이자 후배인, 지금은 제일기획에서 CD를 하고 있는 카피라이터에게 선물로 주고 새 책은 그냥 가지고 있다가 이번에 새삼 읽게 된 것이었다.

내 평생 같은 책은 세 번이나 산 경험이 있나 헤아려 보니 처음인 것 같다. 그래서 이 책은 나랑 보통 인연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책 뒷장에 붙은 가격표를 보니 7,500원이다.

소설에 대한 본격적인 독후감은 '독하다 토요일'에서 이 책을 함께 읽은 후에 해볼 생각이다. 전에도 얘기했지만 [무기의 그늘]과 더불어 황석영 소설의 엑기스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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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선생은 본능적으로 작가였고 소설가였던 것 같다. 해방 후 몇 년 동안의 경험들을 돌아다 보면 인간 이하의 모욕을 받거나 밑바닥 생활을 한 적도 있는데 그럴 때조차 선생은 '언젠가는 당신 같은 사람을 한 번 그려보겠다'는 식의 문학적 복수를 꿈꾸었다고 하니까. 그런 마음이 불행감을 덜어줌으로써 아주 뼛속까지 불행해하지는 않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저런 인간을 소설로 한 번 써야지, 라고 생각하며 현재의 고통을 승화시키는 대가의 어릴적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이런 날것들의 증언이 있어서 인터뷰글을 좋아한다.

아울러 앞으로 내게 오는 나쁜 새끼들도 좀 귀하게 여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언젠가는 그놈들이 내 작품에 도움을 주는 캐릭터가 되어줄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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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책방 '디어 마이 블루'에서 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자서전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을 읽다가 갑자기 느낀 점을 쓰고 싶어서 포스트잇을 꺼냈다. 이건 독후감이 아니라 독중메모라고 해야 하나? 암튼 우발적인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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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잖은 사람도 운전대만 잡으면 욕쟁이로 변하는 경우가 있다. 운전은 생명과 직결되는 행위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누구든 좀처럼 다른 운전자의 입장에 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저기서 왜 깜빡이를 안 켜?
저 아저씨 왜 안 가고 저기서 뭉기적거리는데?

나도 그런 운전자 중 하나였다(이제 운전 안 한지 십 년도 넘었지만). 어느 늦은 밤 아내와 택시를 타고 집에 오다가 우리가 들어가야 할 진입로 입구를 막은 채 오도가도 못하는 차 한 대를 만났다. 아, 뭐하는 거야...? 라고 작게 중얼거리는 내게 택시운전사가 하신 말씀은 정말 뜻밖이었다.

"다 이유가 있어요."
"네?"
"서있는 차는 다 이유가 있는 거예요."

과연 그 차도 조금 있다가 뭔가 사소한 문제를 해결한 모양인지 위잉,하고 가려던 길로 가버렸다. 어안이 벙벙했다. 그렇구나. 우리는 "아저씨 말씀이 명언이네요!'라고 외치며 택시비에 팁 이천 원을 더 얹어 드렸다.

사람은 누구나 외롭고, 누구나 아프다. 시인 이성복은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라고 썼다. 사실은 아프지 않은 게 아니라 아픈데도 서로 이유를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유를 알고자 하는 대신 누군가의 마음에 '우울증'이라는 이름을 붙인 뒤 어서 정신과 의사를 만나보라고 충고한다. 나는 의사나 심리치료사가 아니니까, 미안하지만 다른 데 가서 잘 치료하고 오라고.

'정혜신의 정적심리학 [당신이 옳다]'는 마음이 아파서 숨이 넘어가는 사람은 큰 병원이나 전문가에게 보내지 말고 심폐소생술(CPR) 하듯 지금 당장 여기서 섬세한 시선과 지지를 통해 보살펴줘야 한다고 말하는 책이다. '적정기술'이란 무엇인가? 간단하지만 본질을 건드려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책에 나온 것처럼 아프리카 아이들이 힘겹게 이고 다니는 물동이 대신 큰 공 모양의 물통을 만들어 굴리고 다닐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언젠가 보았던, 오염된 물에 꽂고 빨아도 순식간에 정수 작용을 해 오지의 아이들도 맑은 물을 마실 수 있게 해주는 빨대 같은 것이다.  

정혜신은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요즘 마음이 어떠세요?"라고 묻는 것만으로 엄청난 비밀을 털어놓게 하거나 삶이 달라지게 하는 경험을 여러 번 했다고 한다. 사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다가가 그렇게 묻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 질문 전후로 털어놓는 이야기의 질이 너무나 달라지는 걸 계속 경험했기 때문에 그렇게 묻는 것이라고 했다. 다만 건성으로 묻지 않고 정말 호기심을 가지고 사소한 부분까지 마음으로 느끼면서 세세하게 물어야 한다는 말을 빼놓지 않는다.  

어떤 이유로 집을 뛰쳐나와 울다가 밤늦게 전화를 걸어온 친구에게 "야, 달밤에 체조하지 말고 빨리 집으로 들어가."라고 충고하는 건 당사자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정혜신은 바로 이 지점에서 한 사람의 운명이 결정될 수도 있다고 단언한다. 자신의 자의적 판단과 논리에 입각해 '빨리 들어가라'고 다그치는 대신 "니가 이 시간에 집 밖을 배회하고 있다면 그건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야"라고 섬세하게 공감해주는 순간 '천애고아' 같았던 마음이 순식간에 풀리고 가슴엔 따스한 체온이 돌아온다는 것이다.

책을 읽어볼수록 심리적 CPR의 핵심은 '행동'이 아니라 '태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월호 사건이 터졌을 때 많은 자원봉사자들은 진도에 내려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고 울면서도 무슨 일이든 했다고 한다. 같이 손 붙잡고 울고 같이 밥 먹고 같이 자는 것만으로도 유족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일인지는 정작 그들도 몰랐던 것이다. 이는 심리적 CPR이 이해하는 게 아니라 느끼는 것이고, 논리의 영역이 아니라 감정의 영역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해주는 사례다. 그리고 그 기술의 핵심 키워드는 언제나 '사람'과 '공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달리 '한'이 많은 민족이다. 스트레스가 그만큼 많다. 그런데 그걸 어디 가서 털어놓을 곳이 없어 못된 시어머니가 되고 태극기 부대가 되고 가출 청소년이 되는 것이다. 그럴 때 나의 감정에 집중해주고 내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가 뒤늦게 결혼하고서 가장 좋았던 것은 우주 최강의 '내 편'이 하나 생겼다는 사실이었다. 언제나 내 이야기에 먼저 귀를 기울여주고 내 기분이 어떤지 제일 먼저 헤아려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눈보라 치고 성난 파도가 넘실대는 바깥에서의 삶을 견디게 해주는 철갑옷을 얻은 것과 같았다. 

정신과 의사 정혜신과 심리 기획자 이명수 부부. 그들은 책상머리가 아니라 국가폭력 피해자,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세월호 참사 피해자들이 생과 사를 넘나드는 심리적 참전의 현장에서 그들이 개발한 '심리적 CPR'로 사람들의 목숨을 살리는 전사들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는 엄격한 잣대나 의학 지식이 아니라 공감이다. 묻고 또 물어 마침내 같은 입장에 서고 또 공감함으로써 벼랑끝에 선 사람들을 살린다. 그래서 이 책에 나온 수 많은 경험담과 사례는 한 번 읽고 머리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늘 곁에 두고 도움이 필요한 타인을 만나는 경우마다 적용시켜야 할 보석 같은 이야기들이다. 

방탄소년단은 얼마 전 유엔에서 "오늘의 저는 과거의 실수들이 모여서 만들어졌습니다. 내일, 저는 지금보다 조금 더 현명할지도 모릅니다. 이 또한 저입니다. 그 실수들은 제가 누구인지를 얘기해주며, 제 인생의 우주를 가장 밝게 빛내는 별자리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누구였는지, 내가 누구이고 싶은지를 모두 포함해 나를 사랑하세요."라는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싶어도 혼자서는 할 수 없다. 옆에서 "미안해. 니가 그렇게 힘든지 몰랐어."라며 진심으로 나를 위로해주는 사람이 있을 때 비로소 나는 나를 사랑하고 존중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람이다. 그리고 당신이 옳다, 라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공감의 말 한 마디가 사람을 살린다. 그게 정혜신이 이 책에서 얘기하고 있는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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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미국 작가가 쓴 것 같은 프랑스 소설을 한 권 읽었다. 레일라 슬리마니의 두 번째 장편 소설 [달콤한 노래]다. 물론 이 작품은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콩쿠르상을 받은 작품인 만큼 당연히 정통 프랑스 소설이 틀림 없지만 '아기가 죽었다. 단 몇 초 만에. 고통은 없었다고 의사가 분명하게 말했다...'로 시작하는 첫 문장부터 소설이 끝나는 장면의 "얘들아, 이리 와. 목욕할 거야."라는 대사에 이르기까지 이전에 똑 같은 상을 탔던 선배 작가 에밀 아자르나 파트릭 모디아노의 몽환적인 글들에 비하면 한결 선명하고 단호한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음악 비즈니스에서 일하는 폴과 법조계에서 새롭게 두각을 나타내고 싶어하던 미리암이 등 두 젊은 중산층 부부가 아이들을 돌봐줄 보모를 구하는 에피소드로 시작해서 너무나 일 잘 하고 나무랄 데 없었던 보모 루이즈가 어느날 갑자기 돌변해 두 아이를 살해한 뒤 자신도 자살을 기도한 사건을 다룬 짧은 소설이다. 레일라 슬리마니는 뉴욕에서 실제로 벌어진 사건을 파리로 가져와 새로운 이야기로 만들었다고 한다. 내가 이렇게 소설의 내용을 거침없이 밝힐 수 있는 이유는 그 이야기가 첫 챕터에 모두 나오기 때문이다. 살인이 벌어지긴 하지만 함정이나 서스펜스가 없는 이야기.  

그렇다면 이건 무슨 소설일까. 소설가에겐 어떤 스토리를 던지고 그 시퀀스들을 흥미진진하게 이끌어 가는 것도 주요하지만 등장인물들에게 왜 그런 스토리가 생겨나게 되었을까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것도 못지 않게 중요하다. 그리고 문학성이 높거나 완성도가 뛰어난 작품일수록 등장인물에 대한 묘사나 전후 설명이 더 밀도 높고 입체적으로 이루어진다. 아기가 죽었다는 사실만 밝히고 제대로 된 살해 방법조차 언급되지 않는 첫 챕터를 단숨에 읽은 후 나는 레일라 슬리마니의 소설 [달콤한 노래]는 명백하게 후자에 해당하는 작품임을 직감했다.

누가 죽였느냐,가 초반에 이렇게 밝혀진다면 이제 남은 건 왜 죽였느냐 뿐이다. 그런데 이 소설을 끝까지 읽고 나서도 왜 루이즈가 아이들을 죽이게 되었는지 직접적인 동기는 쉽사리 알 수가 없다. 다만 이 집으로 들어와 처음에는 요정이라는 찬사까지 받던 루이즈라는 여자가 어느 순간부터 폴과 미리엄의 경계를 받는 처지가 되고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일련의 에피소드들을 하나 하나  읽어나가다보면 마지막엔 그녀의 심리상태가 가 얼마나 절박한 상황에 이르렀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이런 팩트들은 레일라 슬리마니라는 뛰어난 작가에 의해 마치 가장 잘 아는 사람에게 그 사람 얘기를 시시콜콜 듣는 것처럼 내밀한 부분까지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이는 루이즈에 대해서만이 아니다. 노동계층인 루이즈에게 공정하게 대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하는, 선량한 부부이면서 동시에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교양 있는 직장인인 폴과 미리암을 묘사한 대목을 잠깐 읽어보자.

삶은 이런전런 책무와 완수해야 할 계약, 잊으면 안 될 약속의 연속이 되었다. 미리암과 폴은 일로 정신이 없다. 그들은 그렇게 일에 치인다는 것이 곧 성공을 알리는 징표이기라도 한 듯, 끊임없이 정신이 없다는 말을 한다. 그들의 삶은 용량을 초과해서, 남은 자리는 겨우 잠을 자기 위한 것일 뿐, 무언가를 응시할 자리는 전혀 없다.

살고 있는 도시만 다를 뿐 성공을 바라보며 일에 치여 허덕이는 것은 우리들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아이들이 생기기 전 폴이 언젠가 미리엄에게 했다는 "우리 여행도 많이 하고, 아이는 팔 밑에 끼고 다니자. 당신은 대단한 변호사가 될 거고, 나는 잘나가는 아티스트들을 프로듀싱할 거야. 아무것도 달라질 건 없어"라는 말은 오래 전 읽은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마스터 키튼]의 한 에피소드 중 "난 서른다섯 살에 중역, 마흔엔 사장이 될 거야. 그럼 은퇴를 하고 세계 여행을 떠나자. 당신은 사교계에 데뷔를 하고 난 그레이엄 그린 같은 소설가가 될 거야...당신이 청혼하면서 내게 한 말이야." 라는 어느 주인공 여자의 대사로 겹쳐진다. 어느 것 하나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현대인들의 자화상이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어도 기댈 언덕이 있었던 폴이나 미리암과 달리 루이즈에겐 아무 것도 없었다. 난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 폴 가족이 근교에 있는 친구 농장에 놀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시내에서 루이즈를 목격했을 때다. 루이즈는 그들을 보지 못하고 쇼윈도 사이를 허정허정 걸어다니고 있었는데 이는 미리암이 자기 집에 있지 않은 상태의 루이즈를 처음 보는 것이었다. 미리암이 차 안에서 루이즈를 멍하니 쳐다보며 '이야기를 착각하고 낯선 세상에 와 있는, 영원히 떠돌아야 할 운명을 선고받은 인물 같아 보인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어린 아들이 "루이즈 아줌마 어디 가는 거야?"라고 묻고 미리암은 "집에 가는 거지. 자기 집으로." 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루이즈는 그때 이미 세든 집에서도 쫓겨날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가슴이 미어지는 씬이다. 

루이즈가 원래는 착한 여자였는지 악한 유전자를 물려받은 인간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나라에 왔던 작가 레일라 슬리마니는 "나는 살인에 대해 설명하기보다는 모욕의 순간들을 자세히 묘사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나 모욕이 있고 모순과 소외가 존재한다. 그리고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가지고 있는 이 프랑스의 젊은 소설가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사건을 수사하던 경감의 현장검증을 앞두고 끝나는 이 소설은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이건 단지 보모의 살인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커다란 질문부터 시작해 관계의 문제, 내가 속한 세상에서 밀려나는 것에 대한 공포,영원히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실존적 절망...그래서 이 이야기는 파리에 사는 루이즈나 미리암만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뉴욕에서 실제로 아이들을 살해했던 보모의 범행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나는 모른다. 어쩌면 작가도 몰랐을 것이다. 사실에 대한 단서가 적을수록 '돌아갈 곳 없는 외로운 사람의 절망적 선택'이라는 작가의 문학적 상상력은 더 큰 힘을 얻는다. 분명한 것 한 가지는 뛰어난 소설가들은 아주 작은 기사 한 줄만 읽고도 훌륭한 소설을 써낸다는 사실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신문 귀퉁이 1단 기사에서 전당포 노파 살해사건을 접하고 구원과 심판에 대한 걸작 [죄와 벌]을 썼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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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지갑

독서일기 2018. 2. 9. 14:29


일을 하다가 막히면 책꽂이에서 아무 책이나 꺼내 아무 페이지나 펼쳐보는 습관이 있다. 

오늘은 [이 정도는 알아야 하는 최소한의 인문학]이라는 책이다. 이 책의 네 번째 챕터엔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들이 쓰여 있다.  '사람은 서로 신뢰하고 존중할 때 행복하다'는 글에 이끌려 본문을 펼쳐보다가 예전에 어디선가 흥미롭게 읽었던 실험 이야기가 다시 언급되어 있길래 읽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길거리에서 지갑을 잃어버렸을 때 되찾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라는 질문을 가지고 실험을 했다. 50 달러가량의 돈을 지갑에 넣고 이름을 표시한 1,100개의 지갑을 전 세계 도시 곳곳에 떨어뜨려 놓았다. 지갑이 가장 많이 돌아온 도시는 어디였을까? 

놀랍게도 인구 13만 명이 사는 덴마크 올보르에서는 지갑 100%가 회수되었고 지갑 속 돈도 그대로였다고 한다. 이로써 덴마크는 세계에서 신뢰도가 가장 높은 나라임이 증명된 것이다. 멕시코나 중국, 이탈리아, 러시아에서는 지갑이 돌아오는 확률이 굉장이 낮았다고 한다. 

사회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악에 바치지 않고도 잘 살 수 있는 나라일수록 행복감도 클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실험을 하면 과연 몇 개의 지갑이 되돌아올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지갑을 자주 흘리는 나로서는 여러 번 해 본 실험이다(비록 원해서는 아니었지만). 한숨이 나온다. 슬프다. 일이나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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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수의 [뜨거운 피]를 읽고 있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작가 김언수가 '구암'이라는 가상의 도시를 배경으로 희수라는 건달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는데, 우선 놀라운 것은 쫀득쫀득한 대화들이 장난 아니게 재미 있다는 것이다. 원래 건달들이 주먹보다는 입으로 먹고 산다는 것은 많이 알려진 얘기이긴 하지만 여기 나오는 희수나 만리장 호텔 사장 손영감 등 주요 등장인물들이 주고받는 대사는 반말과 존대를 자연스럽게 오가는 부산 사투리의 유연함에 힘입어 한 마디 한 마디가 퐁당퐁당 튀어다니는 느낌이다. 장르가 느와르 소설이기에 범죄 얘기가 영화차럼 흥미롭게 펼쳐지고 기기묘묘한 불법과 사기, 도박 시퀀스들이 흘러넘친다. 나이 마흔이 되어 집 한 칸 없이 호텔방을 전전하는 희수의 처지에선 짙은 우수도 흐른다. 

김언수는 어렸을 때부터 한국전쟁 때 내려온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판자촌에서 자랐는데, 거기 섞여 살던 건달, 창녀, 사기꾼, 살인자 들의 모습이 그대로 소설 속 구암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책 뒤에 붙어있는 '작가의 말' 중 일부를 읽어보자(난 소설을 읽기 전에 작가의 말부터 읽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비밀은 없고, 마음은 안타깝고, 피는 뜨겁다. 그래서 그 동네 술자리에선 싸움이 벌어지고 술판이 엎어지는 일이 흔했다. 죄다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백수에, 건달에, 루저 주제에 서로에게 훈장질을 어찌나 해대는지, 사실 술자리가 엎어지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한 남자가 점잖게 충고를 한다. "니가 일을 그딴 식으로 처리하니 망조가 드는 거다.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니 내 말 들어라." 그러면 앞의 남자가 발끈한다. "너나 잘해라. 이 새끼야. 마누라한테 처맞고 다니는 주제에 어따 대고 훈장질이고." 그러면 어김없이 술판이 뒤집어지고 소주병이 날아다니고 주먹질이 이어진다. 하지만 하루만 지나면 다시 또 술을 마시며 "어제는 미안했다." "미안은 무슨. 우리가 뭐 남이가." 이 난리를 치는 동네 말이다.  

출퇴근 시간에만 조금씩 아껴서 읽고 있는데 마침 김동식의 [회색인간]을 비롯한 소설집 세 권도 도착해서 걱정이다. 뭐부터 읽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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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다. 첫단추를 잘못 끼우면 단추를 다시 다 풀어야 하고 지휘관이 잘못된 방향을 가리키면 부대원들이 엉뚱한 곳으로 가서 몰살을 당하기도 한다. 광고도 마친가지다. 클라이언트는 브랜드의 가치를 높이거나 매출을 올려줄 답을 간절히 원하는데 정작 자신은 정답이 뭔지 모른다. 그건 광고회사나 컨설팅 회사가 할 일이고 그래서 클라이언트는 돈을 낸다. 그런데 광고회사가 떳떳하게 돈을 받기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질문'을 바꾸는 거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 책 [Change The Question]의 저자 최상학이다. 

최상학은 광고에 있어서 중요한 건 답이 아니라 질문이라 말한다. 맞는 말이다. 옳은 답을 찾기 위해서는 좋은 질문을 해야 한다.  저자는 책 초반에 소설가 이윤기의 자전적 소설 <하늘의 문>에서 할머니와 인민군의 대화를 예로 들며 질문이 어떻게 생각의 프레임을 바꾸는지를 잘 설명해준다. 정치에서도 광고에서도 '진실'보다 중요한 건 진실인 것처럼 믿게 만드는 '프레임' 인 것이다. 

그래서 의심이 필요하다. 광고주가 지금 목말라하는 게 맞는 단계일까. 광고회사인 우리가 정한 광고 목표는 맞는 설정일까. 하지만 말이 쉽지 이게 생각대로 잘 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교 다닐 때를 생각해 보자. 하루 대여섯 개의 과목을 바꿔가며 계속 공부한다. 시험 시간엔 45분동안 풀어야 할 문제가 수십 개다. 하나하나 곰곰히 생각해보고 본질을 따져볼 시간 같은 건 전혀 없다. 정해진 시간 안에 누가 더 빠르게 문제를 풀고 실수를 안 하느냐가 우등생과 열등생을 만들고 당락을 결정한다. 그러니 시험지나 시험문제를 의심해 본 적이 있을 리가 없다. 문제(질문)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라고 생각할 여력이 없는 것이다. 

'질문'은 당신이 가장 중요한 문제를 무엇이라고 규정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책은 이 한 마디를 하기 위해 쓰여진 것일지도 모른다. 저자가 하고 싶은 얘기들은 앞부분에 모두 집중되어 있고 나머지는 부록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렇다고 뒤쪽에 있는 내용이 쓸 데 없다는 소리는 아니다. 앞부분에 있는 '질문'과 '본질'이 그만큼 중요하게 반복적으로 다뤄지고 있다는 얘기다. 저자가 광고회사 AE 출신이라 그런지 이 책은 독서를 한다기보다 잘 만들어진 PPT 기획서로 프리젠테이션을 받는 느낌이다.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나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실은 모르고 있는 소중한 덕목들을 이 책이 하나하나 다 일깨워 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것도 쉬운 언어로, 풍부한 경험과 메타포를 통해서. 

예전에 다른 회사에 있을 때 최상학 이사와 함께 일해본 경험이 있었는데 책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그는 매우 치밀하고 박식하며 무엇보다 '성의'가 있는 기획자였다. 당시에 그가 원하는 것에 비해 내 능력이 받쳐주지 못하는 것 같아서 안타깝고 미안해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아는 거 다 가르쳐 줘도 괜찮아. 왜냐고? 가르쳐 줘도 안 해. 다들 안 하더라." 

책이나 강의에서 당신이 아는 것들을 다 쏟아부으면 나중에 어떡하냐는 아내의 말에 그가 했다는 대답이다. 그렇다.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다 똑똑해지는 것도 아니고 당장 현업에 적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안 읽은 사람과는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난 앞으로 이 책을 책상에 놔두고 막연할 때마다 한 번씩 들춰볼 생각이다. [CTQ]는 당장 물고기를 주는 게 아니라 낚시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책이니까. 

최상학은 마지막에 로버트 드 니로를 예로 들면서 연기자에게 '메소드 연기'가 있다면 광고인에겐 '메소드 광고'라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광고인이 직접 소비자나 생산자 입장이 되어 몰입하는 광고 창출과정을 얘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론 삼아 이런 글로 그 챕터를 마감한다. 

"Method Advertising을 위해서는 지금까지 말씀드렸던 8개의 키워드가 모두 필요합니다. '합목적적 상상력'이 있어야 하고 생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DOING'해야 합니다. 'YOU'의 입장에서 새롭고 진정성이 느껴져야 하고, 가고자 하는 그것이 브랜드, PT의 '본질'과 관련이 있는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며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예측'을 통해 객관적으로 직시하고 수정, 보완해야 합니다. 아무도 안 했던 방식이라고 머뭇거리지 말고 과감하게 당당하게 해버리는 'MINOR'가 되면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항상 지금 갖고 있는 '질문'이 틀린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 합니다. 결국 'Method Advertising '은 '진짜 질문을 통해 진짜 답을 찾는' 일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광고를 더 잘 하고 싶고 답을 더 잘 찾고 싶어서 쓴 아홉 가지 방법론들이지만 모든 좋은 책이 그렇듯 이 책 역시 크게 보면 인생을 잘 사는 방법과 흐름이 같다. 우수한 광고인의 생각법을 엿보기 위해 산 책에서 인생의 길까지 탐색할 수 있다면 이거야말로 남는 장사 아닌가. 당신이 광고인이든 아니든 상관 없다. 이 책을 사서 한 번 읽어보기 바란다. 하고 싶은 얘기를 일목요연하게 펼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고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비로소 정말 알게 되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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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그대로인데 변덕스러운 것은 나의 마음이다. 지난 밤 그렇게 절망스러웠던 세상의 색갈이 다음 날 아침이면 환해 보이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다." 

그제 산 유창선의 [삶은 사랑이며 싸움이다]를 출근길에 읽다가 이 대목에서 팍 꽂혔다. 그렇다. 세상은 잔인하지도 따뜻하지도 않다. 그저 늘 냉정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사는 게 힘들 때마다 이 구절을 생각해야겠다. 유창선은 시사평론가로 활동했었는데 이명박 박근혜 정권 때 방송 일이 다 끊기자 정권에 줄을 서거나 반대편에 서는 대신 동네 독서실에 처박혀서 책을 읽었다고 한다. 이 책은 그 독서들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것이고 그 첫번 째가 니체를 읽던 때의 이야기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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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뭘 배우러 다니는 걸 좋아한다. 강연도 많이 듣고 음식이나 꽃을 배우러 다니기도 한다. 사실은 나도 아내처럼 뭔가 배우러 다니고 싶지만 회사 일만으로도 벅차 좀처럼 시간을 내지 못할 뿐이다. 세상에 시험 안 보는 공부만큼 재미 있는 건 없다. 인생을 헤아려 보아도 주로 돈 안 되는 일을 할 때가 더 재미 있었다. 일단 누가 시켜서, 또는 먹고 사느라 할 수 없이 하는 일과 내 자유의지로 하는 일은 모든 면에서 천지차이다. 매일 일에 치여 사는 샐러리맨들에겐 그래서 휴일이 필요하고 사생활이 필요한 것이다.

​​"자유의지를 가질 때만 비로소 커피 한 잔이나 럼주 한 잔도 더 맛있게 음미할 수 있을 것이었고, 담배 연기와 무더운 날 바다에서 하는 수영, 토요일마다 보는 영화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메렝게 음악, 이 모든 게 육체와 정신에 더 좋은 느낌을 선사할 것이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소설 [염소의 축제]를 읽다가 눈에 번쩍 뜨여 잠시 멈추고 밑줄을 그으며 이 대목을 되새겼다. 이승우의 [가시나무 그늘]을 읽을 때도 느꼈던 ‘자유의지’의 소중함에 대한 한 구절이다. 오늘 같은 토요일 한가하게 한 잔 하는 차와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사실은 너무나도 소중한 행복이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소설은 [새엄마 찬양] 이후 처음인데 노벨문학상을 탔던 만큼 대단한 필력과 통찰력에 유머까지 겸비하고 있다. 이런 우수한 작가가 말년에 극우파로 전락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고 가슴 아플 뿐이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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