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제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티셔츠를 걷어 올린 뒤 제 가슴을 감시카메라 앞에 들이대는 소녀가 있다. 이게 무슨 또라이 같은 짓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오른쪽에 핑크색으로 꽥 채운 카피가 보인다. 'SMART MAY HAVE THE BRAINS, BUT STUPID HAS THE BALLS.' 똑똑한 사람들은 두뇌를 가지고 있지만 멍청한 애들은 배짱이 있다는 뜻이다. 가뜩이나 그림도 도발적인데 카피에서 배짱을 뜻하는 속어 'Balls'를 여자 아이 사진에 붙인 건 더 짓꿏은 대목이다. 그리고 오른쪽 아래를 보면 BE STUPID, 즉 멍청해지라는 브랜드 슬로건이 보인다. 청바지의 품질이나 만듦새보다는 그 옷에 들어 있는 반항정신을 전파하는 데 힘쓰는 이탈리아의 패션 브랜드 디젤(DIESEL)의 광고 캠페인이다.
광고회사에서 카피를 쓰고 아이디어를 내는 동안 정말 많은 광고들을 봐왔겠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거 딱 하나만 꼽아보라고 하면 나는 국내외를 통틀어 이 캠페인이다. 다들 스마트를 외치는 시대에 도리어 멍청해지자고 외치는 청개구리들이라니. 이 광고를 처음 보는 순간 나는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를 떠올렸다. 뉴욕 월가에서 필경사로 일하다가 어느 날부턴가 모든 업무를 거부하고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던 어이없는 남자. 영문과를 다니는 동안 전공과목에 별 흥미를 느끼지 멋했던 나도 이 소설을 공부할 때만큼은 너무나 재밌고 가슴이 찡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때 우리를 가르쳤던 채수환 교수님은 정말 이 소설의 광팬이라서 한 학기 내내 바틀비 얘기만 했다. 히피들도 바틀비의 추종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비록 주어지는 음식조차 거부하고 외롭게 죽어갔지만 수동적인 반항아 바틀비는 지금도 아웃사이더들의 가슴속에 살아서 커다란 울림을 주고 있으니까.
생각해 보면 나도 회사를 그만두지 않고 계속 다니는 게 백 번 현명한 일이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대학원도 다니고 경력 관리도 좀 더 신경 써서 남들처럼 승진을 꿈꾸거나 야심 차게 독립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성공이란 '인정받는 광고인'이 되는 것인가 여러 차례 자문해 보았지만 그때마다 내 속에선 그렇지 않다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마음이 시키지 않는 일을 계속하며 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두렵지만 다른 길을 택했다. 부부가 둘 다 회사를 그만두고 놀면서 한옥이나 고치고 있는 모습이 사람들에게 무모하고 어리석게 비칠까 봐 겁이 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아직은 모른다. 요기 베라의 그 유명한 말처럼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지금 밖에는 엄청난 장맛비가 내리고 있다. 코로나 19 때문에 누구나 상상하지 못하던 어려움을 똑같이 겪는 시대가 되었다. 어차피 세상은 달라질 것이다. 그러니 조금 더 이런저런 궁리를 해보며 즐겁게 버텨볼 생각이다. 아내와 나는 이미 스마트를 끄고 '스튜피드' 스위치를 올린 사람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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