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먼저 이 영화 [일일시호일]을본 아내는 '영화가 슬프지는 않지만 눈물이 날 수 있으니 주의하라'면서 손수건을 챙겨가라고 했다. 그러나 막상 영화를 보는 내겐 눈물보다는 씁쓸한 미소와 엷은 한숨이 더 자주 나왔다. 아내가 어느 지점에서 눈물을 흘렸는지 거의 다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딱히 하고 싶은 게 없는 스무 살의 노리코는 무엇 하나 특별하지도 않고 잘 풀리는 인생도 아니다. 사실 그 나이 때는 대부분이 다 그렇지만 노리코의 마음은 답답하기만 하다. 같이 다도 수업을 듣는 사촌동생 미치코만 해도 취업이든 결혼이든 뭔가 적극적이고 매번 자기보다 앞서 나가는 것만 같은데 그녀는 맨날 제자리 걸음 같다. 그렇다고 매주 가는 다도에 엄청난 애착이나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학창 시절은 쏜살 같이 지나가 버리고 인생은 무엇 하나 깔끔하게 떨어지는 게 없다. 글을 쓰며 살고 싶지만 출판사 취직 시험에 떨어져 프리랜스 작가가 되어야 했고 결혼을 앞둔 남자가 배신한 것을 두 달 전에 알아 파혼을 해야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다도 수업은 꼬박꼬박 참석하는 노리코. 다도를 가르쳐주는 다케다 선생은 계절마다 바뀌는 거실 족자의 글씨들을 읽어주며 그런 노리코의 마음을 조용히 다독여준다. '매일매일이 좋은 날'이라는 뜻의 '日是好日'이 무슨 뜻일까 생각하며 다도를 시작했던 노리코는 여러가지 사건들을 겪으며 어릴 때 부모님과 함께 봤던 페데리코 펠리니의 [길]이라는 영화가 왜 좋은 작품인지 비로소 알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지만 그때는 이미 고마운 아빠를 저세상으로 떠나보낸 후였다. 

다도는 내용보다 형식이 먼저라는데 난  과연 인생의 내용과 형식 중 어느 것을 선택하려고 이러는 것일까. 어느덧 다도를 시작한지 20년이 넘은 노리코는 생각한다. 옛날 사람들이 가장 추운 때를 입춘으로 정한 건 이제 멀지 않아 봄이 온다는 마음을 가지고 싶기 때문 아닐까. 누구는 좀 일찍 도착하고 누구는 조금 늦게 갈 수도 있는 게 인생 아닐까. 다케다 선생도 말한다. 같이 차를 마셔도 다시 이렇게 똑같이 마실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임해주세요. 

그렇다. 자책할 것도 없고 조급해할 것도 없다. 지금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다. 비 오는 날에는 빗소리를 듣고 눈 오는 날엔 내리는 눈을 바라본다. 여름에는 찌는 듯한 삼복더위를, 겨울에는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다도는 그런 삶의 방식을 어려운 이론 없이 '몸으로 익힐 때까지 반복해서' 가르쳐 준다. 그래서 매일매일이 힘든 날이지만 동시에 매일매일이 좋은 날이기도 한 것이다. 비록 느리고 고단해도 지금처럼 날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고마워하고 또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만 있다면 인생은 그럭저럭 살 만하지 않겠는가. 

키키 키린 할머니는 [걸어도 걸어도]나 [만비키 가족] 같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에서부터 워낙 좋아했지만 유작인 이번 영화에서 늘 다도 교실 안에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은 한 장면 한 장면이 욕심 없는 할머니의 유언을 듣는 것만 같았고 그녀의 목소리는 스님의 법문이나 랍비 또는 신부님의 고언을 듣는 것처럼 매번 지혜롭고 다정했다. 

여러 번 우려낸 찻물처럼 따뜻하고 정갈한 영화를 보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전철 안에서 돌아가신 키키 할머니가 내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힘들지요? 괜찮아요. 스님들이 좋은 일에나 나쁜 일에나 '나무관세음보살'을 외우는 것처럼 여러분도 이제 '매일매일이 좋은 날'이라고 외워보세요. 그럼 좀 나아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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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IP-TV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보았다. 제목부터가 멋지다. 워낙 좋다는 소문을 많이 들어서 진작부터 보고싶기는 했지만 바빠서 극장에서는 놓치고 말았다. 아름다운 이탈리아의 여름을 보는 것만을도 좋은데다가('관객들으르 햇살에 취하게 만들자' 라는 게 감독의 의도였다고 한다) 주연을 맡은 티모시 샬라메와 아미 해머의 매력과 연기도 매우 뛰어나다. 나는 퀴어영화는 슬퍼서 좀 망설이는 편이다. 토드 헤인즈의 [캐롤] 때도 느꼈는데 동성이라서 더 애절한 그들의 사랑은 늘 아슬아슬하고 불행의 씨앗을 품고 있다. 다행히 이 영화에서는 어린 엘리오의 부모가 올리버와의 사랑을 용인하고 위로까지 해주는 편이어서 그나마 견디기가 쉬웠다. 

영화를 보면서 역시 여름은 '청춘'에게 어울리는 계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각적이고 안정된 연출력 덕분에 1983년 이탈리아의 여름 풍경과 과즙 같은 공기의 느낌까지 두 시간 내내 아름답게 펼쳐진다. 어젯밤 과음으로 오전 내내 누워있던 아내가 무슨 영화 보냐고 묻길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라고 했더니 그런 걸 왜 당신 혼자 보냐고 화를 냈다. 영화가 끝나고 검색을 해보니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전에 [아이 엠 러브]를 만들기도 했단다. 그러고 보니 어쩐지 비슷한 정서가 많은 영화다. 더 놀라운 것은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이 시나리오 각색을 했다는 점이다. 이런 청춘영화를 89세 노인이 쓰다니. 대단한 할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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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저녁에 예약해 놓은 조조영화 [시카리오: 데이 오브 솔다도]를 보러 토요일 아침에 CGV용산아이파크몰에 갔다. 밤늦게 찾아온 후배와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셨으므로 컨디션이 그리 좋지는 않았으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화 볼 시간을 내기 힘드니 숙취에 시달리거나 아침을 굶는 것 정도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매장이 워낙 넓어서 여긴 올 때마다 길을 헤맨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쇼핑몰 사이를 헤매다 겨우 극장을 찾아내 들어가니 내 자리가 있는 열엔 60대 할머니 여섯분이 쫘악 앉아계셨다. 내가 나의 좌석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한 할머니가 "여기 맞아요, 자리"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일어설 생각을 전혀 하지 않으셨다. 다 일행이세요? 그럼 제가 저쪽에 앉을게요, 라고 줄 끝을 가리키자 다들 그게 좋을 것 같다며 맞장구를 쳤다. 자리야 얼마든지 양보해 줄 수 있지만 이 분들은 도대체 이 영화가 어떤 건지는 알고 오신건가, 하는 걱정부터 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어둡고 심각하고 잔인하게 사람 많이 죽어나가는 영화인데. 오래 전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이스턴 프라미스]를 볼 때 만났던 할머니 두 분이 떠올랐다. 영화 초반 얼치기 킬러가 이발소에서 면도칼로 손님의 목을 그어 살해하는 씬에서 걱정을 했었으나 중반쯤 보니 영화 도중 여유있게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하시던 그 할머니. 

아무튼 영화가 시작되었다. 전편 [시카리오: 암살자들의 도시]의 기억이 너무 좋아서 기대감이 컸다. 여전히 묵직하고 사실적인 진행, 강렬한 총격씬, 배우들의 존재감 등 어떤 것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영화였다. 특히 투탑인 베니치오 델 토로와 조슈 브롤린의 연기와 카리스마는 끝장 그 자체다. 시나리오도 역시 좋았는데 영화가 끝나고 확인해보니 1편 '암살자들의 도시'도 썼던 요즘 정말 잘 나가는 각본가 테일러 셰리던의 작품이었다. 그는 작년 개봉했던 [로스트 인 더스트]의 각본도 썼다고 한다. 배우 출신인데 이렇게 잘 쓰다니 정말 놀랍다. 한 십 년 전 날고 기던 배우 출신 각본가 아론 소킨이 생각났다. 정치드라마 [웨스트 윙] 등 미니시리즈 각본을 많이 썼던 그가 아주 수다스러운 편이었다면 테일러 셰리던은 꼭 필요한 대사만 하는 하드보일드 스타일이며서 구조를 잘 짜는 작가다. 이번엔 전작에서 신참 여성 요원 케이트 역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던 엘밀리 블런트가 빠져서 너무 아쉬웠지만 그건 1편에 비해 그렇다는 얘기지 작품 자체만 놓고 본다면 너무 큰 욕심이라 할 수도 있겠다. 스테파노 솔리마 감독도 뚝심있게 이야기를 잘 이끌어 간다. 그러나 전편의 드니 빌뇌브 감독이 그리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총격전 등 액션은 한층 강화되었으니 눈호강, 귀호강이야 더할나위 없이 했지만 절절했던 등장인물들의 사연이 1편에서처럼 새롭지 않으니 너무 매끈하고 정석적으로 흘러간다는 일말의 아쉬움이 있는 것이다. 

그래도 맨 마지막에 죽을 뻔하다가 살아 돌아온 베니치오 델 토로가 자신의 머리에 총을 쐈던 어린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문이 닫히는 장면 이후 뿌듯한 마음으로 엔딩 크레딧을 바라보다가 옆좌석을 살펴보니 할머니들은 어느새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오늘 그 분들은 이 영화에 대해 뭐라 영화평을 남기셨을까. 3편의 제작이 확정되었고 그 작품에선 드니 빌뇌브 감독이 다시 복귀할지도 모르다던데 그 때도 극장에서 나와 우연히 마주칠 수 있을까. 모두 젊고 건강한 편이셔서 충분히 시리즈 세 번째 작품도 보러 오실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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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삶은 '평범하게 사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평범함 속에는 어떤 조건들이 숨어 있는 걸까? 대충 이런 것들 아닐까. 엄청난 연봉은 아니더라도 남들에게 인정받을 만한 직장에 다니고,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아무 때나 이주일 정도 해외여행을 떠나고, 돈과는 상관 없는 나만의 취미생활을 영위하며,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하나 하나 열거하다 보니 헛웃음이 나온다. 이건 평범보다는 차라리 특별한 삶쪽에 가까운 게 아닌가. 적어도 신자유주의 시대의 폭풍을 온몸으로 맞은 뒤 한반도 남한에서 허덕허덕 살아가고 있는 이삼십 대의 젊은이들에게는. 

영화 [버닝]은 무라키미 하루키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1990년대에 이 작품을 읽은 나는 아침에 조깅을 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큰 피해는 주지 않고 오로지 헛간만 조심스럽게 골라 태우는 등장 인물의 무용한 행위가 영화에서 어떤 의미로 작용했을지 몹시 궁금했다(후에 전쟁영화의 레퍼런스급으로 등극한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보기 전 읽은 시놉도 '2차대전 중 참전용사로 네 명의 아들을 잃은 집의 마지막 아들 라이언 일병을 구하기 위한 군인들의 노력'이 전부였는데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영화의 분위기를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감독이 이창동이라는 말에 꽤 독한 영화가 나오겠구나, 예상을 했고 그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유통회사에서 '알바'를 뛰고 있는 소설가 지망생 종수는 일을 하다 행사장에서 춤을 추고 있던 어렸을 적 동네 친구이자 동창인 해미를 만나 가까워진다. 그녀는 취미로 팬터마임을 하기도 하고 고양이 '보일'이를 기르기도 하는데 어느날 종수에게 고양이를 맡기고 아프리카 여행을 훌쩍 떠났다가 벤이라는 돈 많은 남자와 함께 돌아온다. 벤은 특별히 열심히 일을 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스포츠카를 몰고 방배동의 고급 빌라에서 살고 있는 잘 생긴 싱글이다. 종수는 벤이 마치 피츠제럴드의 소설 속 주인공 개츠비 같다는 생각을 하고 벤은 그런 종수와 대마초를 나눠 피우며 자기는 가끔 들판에 널려 있는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습성이 있다고 고백한다. 불이 나도 대부분 아쉬워하지도 않고 큰 범죄가 되지도 않는 비닐하우스 태우기. 종수는 혹시 자기가 비닐하우스 같은 하찮은 존재는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본능적으로 몸을 떤다. 이들은 모두 저녁 노을보다는 아침 햇살이 더 어울리는 나이지만 그들이 모이는 곳엔 늘 석양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단어는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일 것이다. 해미가 아프라카에 가서 들었다는 얘기. 그냥 배가 고픈 사람은 리틀 헝거이고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사람은 그레이트 헝거라는 그럴듯한 메타포. 그레이트 헝거는커녕 리틀 헝거라도 한 번 폼나게 해보고 싶지만 매 순간 가진 것 없이 뜨겁기만 한 젊은 육체를 버거워 해야하는 해미는 아프리카에서 시시각각 색깔이 변해 가는 노을을 바라보면서 "죽을 용기는 없고 그냥 저것들처럼 훌쩍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다며 술집에서 운다. 

평생 아쉽거나 슬픈 일이라고는 당해본 적이 없어서 눈물을 흘려보지도 못한 벤은 그런 청승을 떠는 종수와 해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모든 일에 심드렁하다. 여자든 돈이든 원하기만 하면 바로 생기는 데다가 종수처럼 분노조절이 안 돼서 폭력혐의로 재판을 받는 아버지가 있거나 해미처럼 카드빚 다 갚기 전에 집에 들어올 생각 말라 야멸차게 내치는 가족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 비닐하우스를 태우는데, 아다시피 그것도 그리 큰 재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그는 '재밌네'라는 말을 남발한다.  파주에 사는 종수 집으로 갔을 때 마을에 울려퍼지는 소음이 대남방송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도 그는 무심코"재밌네요"라고 말한다. 사실은 뭐든 게 재미 없어서 자신의 여자들이 파티장 친구들 앞에서 신나게 떠들 때도 하품을 하다가 매번 종수에게 들키면서도. 

종수 역을 맡은 유아인은 영민하지만 '세상이 거대한 수수께기 같아서' 소설을 쓰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청년 역할을 너무나 잘 소화해 내고 있다. 판토마임으로 없는 귤을 까먹고 노을 앞에서 옷을 훌훌 벗은 채 반나로 춤을 추는 전종서도 해미 역에 딱이다. 그러나 이 영화 최고의 캐스팅은 모든 것을 다 가졌으나 권태롭고 그러면서도 끝까지 침착함을 잃지 않은 벤을 연기한 스티브 연 아니었을까. 이창동 감독의 연출력은 어느 하나 뛰어나지 않은 점이 없지만 그 중에서도 벤을 악역으로 설정하지 않은 점이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분명 종수에게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인데 정작 본인은 늘 침착하다못해 천진하기끼지 하다. 도대체 싸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적보다 더 무서운 적은 아마 이처럼 무심한 존재일 것이다. 마지막에 종수가 벤을 칼로 찔렀을 때도 그는 아마 "재밌네"라고 중얼거리며 죽어갔을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를 보고 그래도 희망은 있다, 거나 어떻게든 살아야 하지 않겠니? 같은 가짜 위로의 말은 당분간 삼가해 주시기 바란다. 비극의 주인공을 꾸며내려고 해도 '과잉 설정'이라는 소릴 듣게 되는 상황이 바로 하루에 햇빛이 딱 한 번 드는(그것도 남산 타워에 반사된) 해미의 방일 것인데 어쩌면 그 또래들에게 이 영화의 배경은 2018년 대한민국 전체로 확장되어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예전에 에스컬레이터에서 에티켓을 무시하고 걷거나 뛰어다니는 승객들 대부분이 젊은이들이라는 어른들의 질책에 '나도 언젠가 에스컬레이터에서 뛰지 않고 그냥 서서 가는 입장이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한 대학생 알바생의 가슴 시린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다. 이창동 감독은 이 영화에서 바로 그 젊은이의 분노를 담아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시나리오 작가 오정미 각본가에 의하면 이 영화는 시나리오 작업 단계에서 지금의 제목 대신 '분노 프로젝트'라고 불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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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더 포스트]를 보았다. 1971년 뉴욕 타임즈의 펜타곤 문서 특종 보도를 통해 미국 정부들이 숨겨왔던 월남전의 진실이 밝혀지는 이야기다.

워싱턴 포스트라는 신문사의 사주 캐서린 그레이엄 역을 맡은 메릴 스트립과 벤 브래들리 편집장 역의 톰 행크스의 연기가 뛰어나고 스필버그의 연출력도 너무나 원숙하다.

영화 중 가장 박진감 있는 장면은 닉슨 정부의 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캐서린이 보도를 결심한 뒤 긴박하게 식자를 만들고 윤전기가 돌아가고 컨베이어 벨트에서 갓 나온 신문을 꺼내 들여다 보고 끈에 묶인 신문 뭉치들이 길에 뿌려지는 일련의 장면들이다. 마치 하루키가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장면을 자세하게 묘사하는 부분을 읽으면서 느끼는 쾌감과 비슷하다. 어제 [팬텀 스레드] 무비토크를 딘행하던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이 영화의 윤전기 장면들을 잠깐 언급하며 '어쩌면 감독들은 이런 장면을 찍기 위해서 영화를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라고 했다. 동감한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런 장면이 길게 이어지는 걸 지켜보고 있으면 글이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기이한 감동이 느껴지니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대법원 판결문을 관객에게 전하는 방법이었다. 카메라는 대법원을 비추는 대신 시끄러운 신문사 내부로 간다. 한 통의 전화를 받은 여기자가 "모두 조용히 하세요!" 라고 외친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지는 신문사. 기자는 전화를 통해 듣는 판결문을 한 문장 한 문장 큰 소리로 따라 읊는다. 관객이 온몸으로 집중해 듣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고 마지막 문장 '언론이 섬겨야 할 것은 정부가 아니라 국민이다'라는 말을 하며 기자가 울먹일 땐 나도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가 [스포트라이트]의 시나리오도 쓴 조시 싱어라는 사실은 영화가 끝난 뒤 큐레이터의 설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아내의 친구가 극찬을 하며 이 영화 꼭 보라고 해서 보게 되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그녀에게 고맙다고 다시 한 번 인사를 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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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저녁 일곱 시에 CGV압구정에 가서 7시 45분 [올 더 머니] 입장권을 한 장 샀다. 오늘 오후에 CGV 노블레스 회원으로 신규 가입을 한 나는 표를 사면서 혹시 오늘부터 할인을 받을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매표소엔 마침 직원과 수습사원 두 명이 근무 중이었다. 둘 다 젊은 여성이었다. 

성준) 저, 오늘 실버회원 가입했는데요.
여1)  네? 실버...? 
여2) 노블레스 얘기하는 거야...(귓속말로) 
성준) 실버나 노블레스나(속으로).

성준) 오늘부터 할인이 되나 해서요.
여2)  아, 그게 오늘 오후 늦게 저희에게
         도착하게 되어 있는데 아직 안 왔네요. 
성준) 오후 늦게라니...
          지금도 상당히 늦은 오후인 거 같은데.
          얼마나 더 늦어야 되는 거예요? 

여2)  그러게요. 하하. 
성준) 그냥 주세요. 

여2)  네, 만천 원. 7시 45분 한 분, 맞으시죠? 
성준) 네. 그럼 CJ 원카드 적립은 되죠? 
여2)  네, 휴대폰으로 보여주세요...
         아, 손님 로그인을 해주셔야.
성준) 아, 제기랄. 로그인...
         비밀번호를 바꿨는데 생각이 안 나요.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올 더 머니]를 봤다. 원제를 보니 'All the money in the world'였다. [러브 액추얼리]도 아마 'Love actually is all around'였을 것이다. 우리나라로 들어오면서 제목 싹뚝 잘라먹는 전통은 유구하다.

암튼, 폴 게티라는 사상 초유의 이탈리아 석유 재벌의 손자가 납치되고 범인들이 몸값으로 무려 천칠백만 달러를 요구했다는 게 이야기의 구심점이다. 그것도 70년도 초에. 그런데 이 노인네가 랜섬 지불을 거절한 것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이 있고 그걸 각색한 걸 리들리 스콧이 영화로 만든 것이다. 

난 뭔가 긴박하고 스마트한 납치극을 상상했던 모양이다. 더구나 배경이 1970년대인 줄도 모르고 갔었다. 물론 크리스토퍼 플러머나 미셸 윌리엄스의 연기는 훌륭했고 두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을 이끌어가는 스콧 감독의 연출도 유장했다. 그런데도 전체적으로는 뭔가 허전했다. 내가 부자의 삶을 동경하지 않아서인가. 부자들의 내면적 갈등이나 고통에 좀처럼 동화되지 못했고, 범인들의 애절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납치범들에게 귀를 잘린 폴 게티 3세에게 마구 감정이입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전직 CIA요원인 마크 윌버그가 아랍의 왕족들과 협상을 벌이는 자리에서 그들끼리 주고받는 아랍어를 알아듣고 "복수형으로 해주십시오, 폐하."라고 문법을 지적하거나 자신을 비난하는 미셸 윌리엄스에게 'CIA에서 무기를 가지고 다니는 것은 하수들이나 하는 일이고 나는 물건이나 사람을 파는 협상을 주로 했다'라고 말하는 재치 있는 대사들이 더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이 영화는 작품 외적으로 더 화제가 된 영화이기도 하다. 원래 폴 게티 역으로 캐빈 스페이시가 캐스팅되어 영화를 다 완성했으나 뒤늦게 그의 성추행 논란이 터지면서 주연배우를 크리스토퍼 플러머로 바꿔 재촬영을 한 것이다. 2주만에 다시 재촬영을 끝냈다고 하는데 노 개런티로 다시 촬영장에 간 미셸 윌리엄스 등에 비해 마크 윌버그만 재출연료를 비싸게 요구해 구설에 오르게도 했다 한다. 그러나 클리스토퍼 플러머의 연기력이나 발성 등이 하도 훌륭해서 다시 찍었다는 게 믿기지 않은 정도다(원래 감독은 처음부터 이 배우의 캐스팅을 원했으나 제작자들이 더 유명한 배우를 원해 케빈 스페이시가 낙점되었다는 소리도 있다). 

전 세계 최고의 부자, 납치와 몸값 요구 등등은 매우 선정적인 소재다. 영화 말고도 대니 보일이 TV드라마로 이 이야기를 또 찍고 있다고 하니. 그러나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는 건 이런 경우에도 해당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신경전, 그리고 전직 CIA요원의 정의 추구하기에 힘을 쏟다 보니 모티브였던 납치는 느슨해져버리고 범인들은 당위성이나 스마트함이 부족해 균형이 깨져버렸다. 실화를 뒤집을 수 없어서이겠지만 마지막에 납치된 손자를 구출하는 시퀀스는 지루하고 요령부득이라 헛웃음이 나올 정도의 해프닝에 가깝다. 

그래서 '세상을 다 가지게 된 자가 들여다보게 될 심연'이나 '납치 스릴러를 빙자한 흥미진진 슈퍼리치 해부도감'이라는 씨네21 평론가들의 그럴듯한 한 줄 평에 동의가 되지 않는다. 잘 만들었지만 개인적으로는 큰 울림이 없는 영화. 나의 소감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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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아홉 시부터 극장에서 팝콘을 먹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신경을 가진 사람들일까, 하는 헛된 생각을 하며 영회 [신과함께-죄와벌]을 일요일 조조로 보았다. 이미 천사백만 명이 보았고 일요일인데다 상영 시간이 일러서인지 극장 안은 한산했다.

김용화의 영화는 [미녀는 괴로워] 때도 그랬지만 영화라기보다는 잘 짜여진 한 편의 게임이나 쇼프로를 보는 느낌이다. 아이언맨을 감독한 존 패브로가 출연까지 한 영화 [어메리칸 셰프]나 마크 러팔로가 나오던 [비긴 어게인]을 볼 때도 이건 영화라기보다는 하나의 흥미로운 콘텐츠에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이 영화는 그것들과는 또다른 의미에서 전통적인 영화를 벗어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가 선명한 주호민 원작 웹툰의 틀을 가져오고 강림, 해원맥, 덕춘 같은 캐릭터들이 적재적소에서 버티고 있는 상황이라 이야기가 딴 방향으로 새거나 하는 헛짓거리는 없다. 확고한 프레임에 이야기의 핵인 소방관 자홍의 눈물겨운 사연이 펼쳐진다. 이승과 지옥을 넘나드는 스펙터클한 풍경은 엄청난 CG를 통해 시각적 쾌감을 극대화해준다. 저승 차사들은 삶과 죽음을 초월한 존재들이기에 시종일관 경쾌한 농담과 투덜거림을 섞어가며 게임의 규칙을 설명하고 차태현이 분한 자홍은 유일하게 현실적인 캐릭터를 맡아 관객들에게 교훈적인 신파 메시지를 끌고 가는데 여긴엔 몇 번의 반전이 숨어 있어 흥미를 더한다.

다만 염라대왕을 비롯한 그 많은 지옥 관련 종사자들이 일개 소방관 자홍의 사연에 이토록 휘둘린다는 건 거의 모든 SF들이 가지고 있는 '패럴렐 월드'의 한계임과 동시에 한 편의 에피소드를 이끌어 가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난 아직도 개인적으론 이 평행우주론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인과를 얼버무리기에 너무 편리한 선택이라서 그렇다. 그래서 [인터스텔라]를 볼 때도 주인공들이 온 우주의 시공간을 돌고 돌아 마지막에 거실 책꽂이로 다시 돌아오는 장면에서 그렇게 허탈해 했던 모양이다.

암튼 김용화는 감독이라기보다는 엔터테이너에 가깝고 일종의 사업가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그러므로 이 영화도 하정우 등 주요 등장인물들의 건강이 허락하는 한 헐리우드 뺨치는 프랜차이즈로 거듭 커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사카 코타로의 '사신 치바' 시리즈에서도 보았듯이 지옥이나 저승사자 이야기 등은 언제나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하니까. 막판 쿠키 영상 비슷한 꼭지에서 성주신으로 등장한 마동석을 보고 기분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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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m6bylpWdfFI



[록키]를 다시 극장에서 개봉한다고 하길래 아내에게 이 영화를 꼭 극장에서 봐야겠다고 설레발을 쳤는데 마침 그날은 개봉 전날이었고 그 이후엔 계속 회사 일이 바빠서 예매를 못하고 있다. 다음주엔 꼭 시간을 내서 이 영화를 보고야 말 것이다. 

내가 '록키 시리즈'를 만나 것은 불광극장에서 본 [록키2]부터였다. 고등학교 때였나보다. 그리고 점점 나이가 들고 영화를 좋아하게 되면서 [록키]가 얼마나 대단한 영화인지 알게 되었고 텔레비전에서 성우들의 더빙판으로 이 영화를 한 번 본 후 홀딱 빠지게 되었는데, 거기에 기름을 더 부은 것은 대학생 때 읽었던 어떤 소설에 등장하는 록키였다. [영자의 전성시대]로 유명한 조선작이 예전에 쓴 단편소설 <아메리카>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인 술집 아가씨가 심란한 마음을 달래려고 무슨 제목인지도 모르고 대낮에 변두리 극장에 들어가서 보게 된 영화가 바로 록키였다. 신나게 권투만 하는 영화인줄 알았던 주인공은 마지막에 록키가 경기에서 지고나서 퉁퉁 부은 얼굴로 여자친구인 에드리안을 애타게 찾는 장면을 보면서 대책 없이 울음을 터뜨린다. 에드리안, 아아 록키. 아아 에드리안.  영화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가장 힘들 때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의 이름을 애타게 부른다는 사실만이 그녀의 가슴을 적셨다.  

이 영화는 실패담이다. 나이 든 스파링 파트너 출신의 퇴물 복서가 챔피언의 쇼맨십 덕분에 모처럼의 기회를 얻었지만 처절하게 싸운 뒤 결국은 장렬하게 판정패 한다는 이야기. 물론 사람들은 주인공이 실패하는 이야기보다는 성공담을 좋아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진정성이 있다면 말이다. 모든 진정성 있는 실패담은 여운을 남긴다. 소설가 김탁환은 김관홍 잠수사의 이야기를 쓴 [그래서 그는 바다로 갔다]에서  '이야기를 잘 하는 사람이 이야기꾼이 아니라 간절한 이야기를 많이 가진 사람이 이야기꾼'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건 실베스타 스텔론이라는 이야기꾼이 작두를 탔을 때의 이야기가 맞다. 정말 간절하고 궁핍했던 시절에 그가 직접 쓴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실베스타 스텔론은 무하마드 알리의 권투 경기를 TV로 보다가 뭔가 느낀 게 있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고 단 사흘만에 [록키]의 각본을 완성했다고 한다. [람보] 시리즈의 무식한 근육질이나 최근 [가디언스 오브 갤럭시2]에서 뭉툭한 몸매와 목소리로만 연상되는 실베스타 스텔론도 사실 젊었을 땐 대학까지 나온 날렵한 인텔리였다. 영화를 하고 싶어서 도시로 나와 험한 일을 하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슬라이(그의 애칭)는 '록키'의 각본이 헐리우드를 떠돌며 값이 천정부지로 오를 때도 타협을 하지 않는 뚝심을 보였다. 시나리오에서 흥행의 단초를 예감한 제작자들은 알 파치노 같은 당시 스타나 권투선수 출신의 라이언 오닐 등을 주인공으로 쓰려고 했으나 스텔론이 결사 반대해서 결국 그가 주연까지 맡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적은 예산으로 영화를 찍게 되었고 작품 안에 나오는 낡은 아파트 등도 실제 슬라이가 살던 당시의 모습 그대로였다. 애드리안과의 스케이트장 데이트 장면도 돈이 없어서 야밤에 찍게 되었는데 이건 가난한 록키가 밤 늦게 스케이트장 관리인에게 뒷돈을 찔러주고 링크 전체를 데이트장으로 쓴다는 순애보적 아이디어에 현실성을 더하는 멋진 설정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옳은 선택이었던 것이다. 실제 록키와 비슷한 처지에 있던 슬라이의 삶이 그대로 묻어나온 덕분에 영화는 수 많은 관객들의 가슴을 울릴 수 있었고 실베스타 스텔론은 이 영화 한 편으로 '어메리칸 드림'의 표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실패담이면서 동시에 성공담이기도 하다. [록키]에 비하면 그 뒤 나온 2편 3편 등은 갈수록 기름기가 끼고 거만함이 느껴져 록키라는 복서도 그저 하나의 기름덩어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성공한 밴드의 모든 데뷔앨범이 훌륭했던 것처럼 실베스타 스탤론의 실질적인 데뷔영화 [록키]도 걸작 중의 걸작이다. 이런 전설을 극장 스크린으로 만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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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화장실 살인사건과 레베카 솔닛의 저서 등등을 필두로 페미니즘 논쟁이 한참 달아 올랐을 때 나는 아내에게 '그 논쟁들이 이해는 되지만 저렇게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건 좀 과한 것 아니냐'는 얘기를 했다가 '밤에 혼자 택시를 타거나 어두운 밤길을 혼자 걸어 집으로 가야 하는 여자들의 두려운 심정을 남자들은 모른다’라는 핀잔을 들었다. 맞는 말이다. 역사를 뜻하는 단어 ‘History’가 he+story, 즉 ‘그의 이야기’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남성 중심적 사고가 당연한 세상에서 살아온 내가 여자들의 근원적인 공포나 억울함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도 모른다. 물론 그래서 자꾸 공부하고 토론하고 해야하는 것이겠지만.

그런 면에서 이 영화 제목에 등장하는 ‘여배우’라는 단어는 좀 퇴행적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하게 된다. 일단 배우가 감독한 영화, 라는 선입견을 제거한 채 보기는 힘들었고 감독이 문소리라는 여성이지만 ‘여류 작가’라는 말이 사라졌듯이 배우면 배우지 앞에 꼭 젠더를 표시해야 한단 말인가, 라는 의문을 갖게 되는데 이는 첫번째 단편 <여배우> 편을 보고 나면 이내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떡끄떡 하게 된다. 대한민국 영화계에서 나이 든 여배우로 산다는 게 얼마나 애매하고 힘든 일인지는 문소리가 친구들과 등산길에서 만난 천만 관객 감독과 그 동료들을 통해 뼈저리게, 질리도록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연기 잘 해서 탄 트로피들은 빛 좋은 개살구이고(야, 나 메릴 스트립 아냐) 현실은 젊고 이쁜 여배우들이 득세하는 세상이라 문소리가 할 역할은 ‘성격 센 정육점 여자’ 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실 ‘야, 나 이뻐 안 이뻐?’라고 매니저에게 묻는 장면이나 남편인 장준환 감독의 ‘그럼 술이라도 줄이세요’ 등의 빵 터지는 대사는 페친인 성수선 작가 담벼락에서 이미 읽어서 새로울 게 없었고 여배우 문소리의 고충도 짤막한 영화 소개 기사들을 읽어보면 그리 짐작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혹시 영화 내내 그런 투정과 신세한탄만 들입다 쏟아지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도 있었다. 그러나 웬걸, 첫 단편 <여배우>를 지나 두 번째 <여배우는 오늘도>, 그리고 세 번째 <최고의 감독>으로 갈수록 영화의 시야는 넓어지고 시나리오의 유머와 공감대는 신랄하면서도 깊어진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해진 걸까. 이 영화는 문소리가 중앙대 대학원 졸업작품으로 만든 단편에 새로 만든 단편들을 더 붙여서 옴니버스로 구성한 독립영화다. 당연히 문소리라는 개인의 이야기로 시작했으며 그가 매니저와 함께 타고 다니는 밴 안에서의 일상이 주를 이룬다. 등산길, 주점, 노래방, 일식집, 은행 등의 장소에서 여배우의 피곤한 일상들이 펼쳐지고 성병숙이 연기하는 엄마와의 실갱이나 요양원의 시어머니 같은 픽션들이 더해질 땐 살짝 스테레오타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야기는 마지막 장례식장에서 그 포텐이 터진다.

세 번째 작품 <최고의 감독>은 십사년 전에 문소리와 '햇빛 좋은 날’인가 하는 영화 한 편을 찍고 계속 방황하다가 갑자기 작고한 '이 감독님’의 장례식장에서 벌어지는 얘기다. 예전의 의리를 생각해서 잠깐 문상만 하고 오려던 문소리는 장례식장에서 “어이, 문 스타!”라고 비아냥거리는 옛 동료 배우와 마주치게 된다. 인기도 없고 늙고 비루한, 예전엔 문소리 좋다고 따라다닌 적도 있지만 결국엔 이혼 당한 채 지금 아무도 없는 장례식장에서 술에 취해 문소리에게 주정을 해대는 남자. 서로 가치 돋친 대화를 주고받던 두 사람은 뒤늦게 도착해 대성통곡을 하는 신인배우 서연이와 함께 망자에 대한 엇갈린 평가와 예술에 대한 의견을 나누며 싸우게 된다.

처음엔 누가 저렇게 연기를 잘 하나 했는데 알고 보니 그는 화제의 연극 [미국인 아버지]로 이름을 날린 배우 윤상화였다. 그리고 철없으면서도 속이 빤히 보이는 신인 역은 전여빈이라는 배우였다. 전여빈은 학교 선배인 문소리의 첫 단편 <여배우>를 보고 SNS에 영화의 한 장면을 캡처한 뒤 ‘문소리 감독님, 저와 함께 작업해 주십시오’라는 글을 올린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마술처럼 세 번째 영화에 캐스팅이 돼서 마지막 단편을 같이 찍게 된 것이었다. 연기력 좋은 두 배우와 문소리의 케미에 마지막 불을 당기는 건 이 감독의 미망인으로 나오는 배우 이승연이다. “나가 주실래요?” 라는 대사가 순식간에 “나가라고, 이 썅년아!”로 변화되는 짧은 순간에 야무지게 전여빈의 머리채를 움켜쥐는 그의 연기는 정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뛰어나서 보는 이들에게 대단한 쾌감을 제공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일본 만화 [음주가무 연구소]가 떠올랐다. “안녕하세요. 음주가무연구소 소장 겸 술주정뱅이인 나노미냐에요”라고 도도하게 시작하다가 결국엔 망가지고 마는 그 유쾌한 만화처럼 이 영화에서도 문소리는 걸핏하면 썬글라스를 챙겨 쓰고 연예인인 척 하지만 결국엔 찌질하고 불안한 민낯을 드러내곤 한다. 그러나 마지막 장례식장 시퀀스에서는 고슴도치처럼 싸우던 상대들이 함께 ‘화해의 맞담배’를 피운 후 새벽 묘지를 지나 이차를 가는 모습은 사뭇 감동적이다. 

따지고 보면 아둥바둥 살 일이 뭐 있나. 이 감독의 예술 세계도, 이 감독이 서연이와 잤는지 안 잤는지도 뭐 그리 중요한 건 아니지 않나. 결국 이 밤이 지나면 문소리는 또 한 명의 여배우로 살아갈 뿐이고, 그건 이 영화를 보는 다른 관객들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영화는 묻고 있는 듯하다. 문소리 개인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결국은 모든 사람들의 인생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어설픈 교훈보다는 공감과 유머를 던질 줄 아는 이 넉넉한 시선이 감독 문소리의 다음 영화를 기대하게 한다. 극장에서 보기 바란다. 짧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걸 보면 당신도 흐뭇한 미소를 짓게 될 것이라 장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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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남이자 한 아이의 아버지인 50대의 출판사 사장에게도 새로운 연애가 찾아올 수 있을까. 아마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나이나 상황과는 상관 없이 불쑥 찾아오기도 하는 거니까. 연애감정이라는 것은 누가 심지 않아도 이끼처럼 적당한 응달만 있어도 어느새 자라나기도 하니까. 그래,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그 다음엔? 뒤늦게 진정한 사랑을 발견한 주인공이 결혼생활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새로 생긴 젊은 여자랑 멋진 사랑을 이어갈까? 그럴 리가 없다. 적어도 이게 홍상수의 영화라면.  

홍상수의 스물한 번째 장편 영화 [그 후]는 문학평론가이자 작은 출판사 사장인 봉완(권해효)이 여직원 창숙(김새벽)과 사랑하는 사이였다가 헤어진 후 새로운 여직원 아름(김민희)을 맞이하는 얘기다. 조금 더 얘기하자면 봉완은 창숙을 사랑했지만 헤어졌고, 뒤늦게 아내 해주(조윤희)는 이 사실을 알고 격분했으며 아무 것도 모르던 아름은 그 사이에  채 엉뚱한 봉변을 당한다. 얘기만 들으면 상투적인 치정멜로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우리가 매번 비슷비슷한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자꾸 보는 이유는 섹스나 불륜을 잘 다루어서가 아니라 그런 소재를 다루면서도 상투적인 대사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새로움 때문이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사소하고 한심한 인물이나 사건들을 통해 인간의 심연을 깊이 들여다 보게 하기 때문이다. 
 

이번 영화도 역시 그의 영화답게 술을 마시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중국집에서 술을 마시던 창숙은 나이 많은 봉완에게 치사하다고 화를 내며 엉엉 운다. 간절하지만 사랑은 늘 이렇게 이루어지기 힘든 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나중에 입사한 아름을 하루만에 쫓아낼 정도로 굳건해 보인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을 보면 창숙의 존재는 묘연하기만 하다. 그 뜨겁던 다짐이나 맹세는 다 어디로 간 걸까.

중국집에서 술을 마시던 아름은 봉완에게 믿음에 대해 이야기 한다. 사람은 믿는 게 중요하다고. 아름은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다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무시하는 요즘 풍조 때문에 하나님이란 말을 쏙 빼고 그 얘기를 하려니 믿음에 대한 토론이 본질을 벗어나 자꾸 겉도는 느낌이다(이 와중에도 교인인 아름은 '하나님'이라고 하고 교인이 아닌 봉완은 '하느님'이라고 한다. 아주 작은 부분이지만 중요한 차이다). 나중에 출판사에서 쫓겨나면서 열몇 권의 책을 챙겨나오던 아름은 택시 안에서 갑자기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비로소 하나님의 은총을 실감한다. 그러나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다.

약간의 시간이 흘러 아름이 봉완의 출판사에 다시 찾아간다. 이번에 무슨 상을 받게 된 봉완에게 축하 인사를 전하기 위해서라지만 사실은 아내의 눈을 피하면서 연애를 이어가기 위해 자신을 내쫓았던 창숙의 뒷얘기가 궁금해서이기도 하다. 그러나 봉완은 아름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한참 얘기를 나누던 중에 "아, 우리 전에 만났었죠? 아, 같이 술도 마셨죠."라고 한심한 기억력을 드러낸다. 남아 있어야 할 창숙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다른 여직원이 들어오면서 배고픈데 뭘 시켜먹자고 봉완에게 말한다. 봉완은 중국음식을 시키자며 아름에게도 권한다. 허무하다. 당시에는 간절했던 마음도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무 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린다. 


한여름 푹푹 찌는 더위를 뚫고 극장으로 들어가 겨울에 찍은 영화를 보는 맛이 각별했다. 더구나 흑백영화다. 이런 작은 영화는 차분한 흑백이 어울린다. 관객이 인물들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늘 그렇듯이 홍상수 영화에 출연하는 사람들은 권해효부터 김민희까지 최상의 연기를 보여준다. 이는 감독이 배우들을 만나 많은 얘기를 나누고 그들의 습성이나 표정, 버릇을 영화 속에 녹여내기 때문일 것이다. 감독이 촬영 당일 아침에 장비를 세팅하는 스태프들 사이에 앉아 비로소 디테일한 대사를 쓰는 것도 배우들의 실제 삶을 영화 속에 끝까지 반영하려는 노력 때문이 아닐까. 더구나 권해효와 조윤희는 실제 부부다. 크게 관계는 없지만 그런 걸 알고 보는 것도 영화의 즐거움을 더 크게 늘리는 요인 중 하나가 된다고 생각한다. 

인생은 가치는 결과에 있을까 아니면 과정에 있을까? 아무래도 홍상수는 후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지나고 나면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그 과정이, 순간순간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언제나 현재가 제일이다. [그 후]라는 제목은 촬영장으로 쓰인 출판사에 있던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에서 즉흥적으로 따온 것이지만 이 모든 사건이 지나간 후에 과연 뭐가 남았는지를 반추하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 아름이 출판사를 나설 때 새 여직원이 시킨 중국집 철가방과 입구에서 깐 마주친다. 나는 이 장면을 보고 무릎을 쳤다. 그건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이 중국음식 배달 오토바이와 비교해 봐도 그리 큰 일이 아니라는 뜻이니까. 홍상수의 영화를 무조건 지겨워하거나 키득거리면서만 볼 수 없는 이유는 그가 펼쳐놓는 이야기들이 우리의 인생과 이토록 닮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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