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저녁 일곱 시에 CGV압구정에 가서 7시 45분 [올 더 머니] 입장권을 한 장 샀다. 오늘 오후에 CGV 노블레스 회원으로 신규 가입을 한 나는 표를 사면서 혹시 오늘부터 할인을 받을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매표소엔 마침 직원과 수습사원 두 명이 근무 중이었다. 둘 다 젊은 여성이었다.
성준) 저, 오늘 실버회원 가입했는데요.
여1) 네? 실버...?
여2) 노블레스 얘기하는 거야...(귓속말로)
성준) 실버나 노블레스나(속으로).
성준) 오늘부터 할인이 되나 해서요.
여2) 아, 그게 오늘 오후 늦게 저희에게
도착하게 되어 있는데 아직 안 왔네요.
성준) 오후 늦게라니...
지금도 상당히 늦은 오후인 거 같은데.
얼마나 더 늦어야 되는 거예요?
여2) 그러게요. 하하.
성준) 그냥 주세요.
여2) 네, 만천 원. 7시 45분 한 분, 맞으시죠?
성준) 네. 그럼 CJ 원카드 적립은 되죠?
여2) 네, 휴대폰으로 보여주세요...
아, 손님 로그인을 해주셔야.
성준) 아, 제기랄. 로그인...
비밀번호를 바꿨는데 생각이 안 나요.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올 더 머니]를 봤다. 원제를 보니 'All the money in the world'였다. [러브 액추얼리]도 아마 'Love actually is all around'였을 것이다. 우리나라로 들어오면서 제목 싹뚝 잘라먹는 전통은 유구하다.
암튼, 폴 게티라는 사상 초유의 이탈리아 석유 재벌의 손자가 납치되고 범인들이 몸값으로 무려 천칠백만 달러를 요구했다는 게 이야기의 구심점이다. 그것도 70년도 초에. 그런데 이 노인네가 랜섬 지불을 거절한 것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이 있고 그걸 각색한 걸 리들리 스콧이 영화로 만든 것이다.
난 뭔가 긴박하고 스마트한 납치극을 상상했던 모양이다. 더구나 배경이 1970년대인 줄도 모르고 갔었다. 물론 크리스토퍼 플러머나 미셸 윌리엄스의 연기는 훌륭했고 두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을 이끌어가는 스콧 감독의 연출도 유장했다. 그런데도 전체적으로는 뭔가 허전했다. 내가 부자의 삶을 동경하지 않아서인가. 부자들의 내면적 갈등이나 고통에 좀처럼 동화되지 못했고, 범인들의 애절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납치범들에게 귀를 잘린 폴 게티 3세에게 마구 감정이입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전직 CIA요원인 마크 윌버그가 아랍의 왕족들과 협상을 벌이는 자리에서 그들끼리 주고받는 아랍어를 알아듣고 "복수형으로 해주십시오, 폐하."라고 문법을 지적하거나 자신을 비난하는 미셸 윌리엄스에게 'CIA에서 무기를 가지고 다니는 것은 하수들이나 하는 일이고 나는 물건이나 사람을 파는 협상을 주로 했다'라고 말하는 재치 있는 대사들이 더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이 영화는 작품 외적으로 더 화제가 된 영화이기도 하다. 원래 폴 게티 역으로 캐빈 스페이시가 캐스팅되어 영화를 다 완성했으나 뒤늦게 그의 성추행 논란이 터지면서 주연배우를 크리스토퍼 플러머로 바꿔 재촬영을 한 것이다. 2주만에 다시 재촬영을 끝냈다고 하는데 노 개런티로 다시 촬영장에 간 미셸 윌리엄스 등에 비해 마크 윌버그만 재출연료를 비싸게 요구해 구설에 오르게도 했다 한다. 그러나 클리스토퍼 플러머의 연기력이나 발성 등이 하도 훌륭해서 다시 찍었다는 게 믿기지 않은 정도다(원래 감독은 처음부터 이 배우의 캐스팅을 원했으나 제작자들이 더 유명한 배우를 원해 케빈 스페이시가 낙점되었다는 소리도 있다).
전 세계 최고의 부자, 납치와 몸값 요구 등등은 매우 선정적인 소재다. 영화 말고도 대니 보일이 TV드라마로 이 이야기를 또 찍고 있다고 하니. 그러나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는 건 이런 경우에도 해당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신경전, 그리고 전직 CIA요원의 정의 추구하기에 힘을 쏟다 보니 모티브였던 납치는 느슨해져버리고 범인들은 당위성이나 스마트함이 부족해 균형이 깨져버렸다. 실화를 뒤집을 수 없어서이겠지만 마지막에 납치된 손자를 구출하는 시퀀스는 지루하고 요령부득이라 헛웃음이 나올 정도의 해프닝에 가깝다.
그래서 '세상을 다 가지게 된 자가 들여다보게 될 심연'이나 '납치 스릴러를 빙자한 흥미진진 슈퍼리치 해부도감'이라는 씨네21 평론가들의 그럴듯한 한 줄 평에 동의가 되지 않는다. 잘 만들었지만 개인적으로는 큰 울림이 없는 영화. 나의 소감은 이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