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쪽을 닮아 길쭉길쭉한 몸매와 금발의 잘 생긴 얼굴을 물려 받은 사내로 태어나 학교는 물론 뉴어크 전 지역을 대표하는 스포츠 스타였다가 해병대 제대 후엔 장갑 비즈니스계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또 미스 뉴저지 출신 미녀의 남편으로 모범적인 삶을 살아 온 유태계 미국인 스위드 레보브. 거의 완벽에 가까운 스위드의 스펙을 보면서 우리는 '저런 놈에게 무슨 걱정거리가 있겠나'라고 투덜대고 싶어진다. 하지만 하나뿐인 외동딸 메리가 월남전에 반대한다면서 엉뚱하게 마을 우체국이 딸린 작은 점방에 사제폭탄을 설치해 사람을 죽임으로써 도망자 신세가 된 사건을 시작으로 그의 인생도 함께 작살이 난다. 예쁘고 영특하지만 말을 심하게 더듬는 게 유일한 걱정거리였던 십대 소녀가 어쩌다가 그런 괴물이 되어 버렸을까. 

어려서부터 밝고 곧은 길만 걸어왔던 스위드 레보브의 참모습은 고등학교 졸업 50주년 기념파티에서 만난 후배이자 작가인 네이선 주커먼에 의해 서서히 그 모습이 포착되기 시작한다. 딸 때문에 흔들렸던 그의 정체성은 아버지와 옛 친구들, 그리고 이웃에 사는 오컷 부부까지 함께 모인 올드림록 홈파티 날 저녁에 아내와 건축가 오컷이 자기집 부엌에서 남몰래 섹스를 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결정타를 맞는다. 나는 이 장면을 읽으며 '이제 스위드도 갈 데까지 갔군'이라 생각하고 그가 오컷이나 아내인 돈이나 둘 중 하나를  총으로 쏴 죽이며 소설이 끝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작가는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이 '시모어 스위드 레보브'라는 멋진 사내의 비극을 강조한다. 이후 계속된 만찬 자리에서는 당시 미국 사회를 흔들었던 린다 러브레이스 주연의 '목구멍 깊숙히(Deep throat)'라는 포르노 영화에 대한 지루한 세대 토론이 있을 뿐이고, 결국 스위드 대신 술주정뱅이이자 오컷의 부인인 제시가 칼로 스위드의 아버지를 죽일 뻔한 에피소드로 허무하게 끝을 맺는다. 

[미국의 목가]는 가장 완벽할 뻔했던 사내가 가장 불행한 남자로 전락하는 비극적인 이야기다. 그런데 그가 불행한 이유는 유태인으로 태어나서도 아니고 미국인이어서도 아니다. 원래 인간이란 다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이 작품의 확장성은 시대와 국경의 경계를 가볍게 지워버린다. 필립 로스는 이 도저한 비관주의를 수다스럽고 신랄하고 야멸차고 유머러스한 문체로 두 권의 책 속에 마음껏 풀어놓는다. 힘과 품격이 대단한 작품이다. 더불어 퓰리처상을 탄 주류 문학작품 속에서 씹, 좆, 보지 같은 비속어를 심심치 않게 접하는 것은 당혹스러우면서 즐거운 일이다. 그건 역설적으로 그 어떤 비속어를 쓰더라도 그 쓰임새가 정확하기만 하면 얼마나 멋진 효과를 가져오는지 보여주는 통쾌한 증거가 되니까. 

아름다운 자연이 펼쳐진 뉴어크 올드림록이 배경이지만 내용은 전혀 목가적이라 할 수 없는데도 굳이 제목을 '미국의 목가'라 붙인 이유는 뭘까. 아마도 페데리코 펠리니가 슬프고 비참한 인생 이야기에 '달콤한 인생'이라는 이름을 지은 것이나 김지운이 그걸 따라한 것이나 아니면 로베르토 베니니가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슬픈 영화를 만든 것처럼 필립 로스도 제목의 패러독스를 통해 독자들에게 잔인한 쾌감을 선사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그리고 이 작품은 제목만 멋진 게 아니다. 소설 곳곳에 격렬하면서도 참신하게 멋진 문장들이 산재해 있다.  

2부 첫머리에 말썽쟁이 딸 메리 때문에 장갑 공장을 찾아온 비키라는 여자에게 스위드가 장갑 생산 공정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은 특히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무두질하는 방법부터 시작해서 가죽 무역 이야기, 그리고 장갑 사업의 역사를 거쳐 재단•재봉 작업에 대한 아주 세세한 공정과 일화까지 장장 18페이지에 걸쳐 숨가쁘게 펼쳐지는 이 스펙터클한 묘사는 소설가가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한 하나의 표본이나 다름없다. 필립 로스는 이 한 장면을 쓰기 위해 가죽과 장갑 생산에 대한 지식을 얼마나 많이 섭렵했을까? 제시가 알콜중독자가 되는 과정을 짧게 묘사한 문장이나 오컷이 전시한 어설픈 추상화를 비평하는 스위드와 그의 아버지 루 레보브의 신랄한 대사들을 읽어보라. 이런 단락 하나만으로 시작해도 당장 훌륭한 단편소설이 하나씩 후딱 튀어나올 것 같다고 당신이 느낀다,에 나는 거액을 걸 용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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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동에 있는 연희문학창작촌은 참 좋은 곳이더군요. 우리나라 현역 작가들이 들어와서 일정 기간 작품을 쓰고 가는 일종의 레지던스였는데, 우선 조용한 동네에 자리 잡고 있는 벽돌 건물이라 고전적인 느낌이 났고 녹음이 우거진 건물들 사이로 난 산책로는 걷는 사람의 마음을 가라앉혀 주는 곳이었습니다. 2018년 10월 13일 토요일 오후, 연희문학창작촌 안에 있는 <책다방 연희>라는 곳에서 '독하다 토요일'의 일곱 번째 모임이 있었습니다. 지난 여섯 번은 한 달에 한 번씩 회원들끼리 대학로 카페 겸 서점인 '책책'에 모여서 한국 소설들을 읽었는데요(권여선의 [안녕, 주정뱅이] -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 - 한강의 [흰] - 김언수의 [뜨거운 피] - 배명훈의 [안녕, 인공존재!] -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이번엔 번외편이자 오픈 모임으로 김탁환 선생을 모시고 그의 소설 [이토록 고고한 연예]를 읽기로 했던 것입니다. 

저와 윤혜자 씨가 페이스북을 통해 공지를 했고 소설가 김탁환 선생도 따로 공지를 해서 많은 분들이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2시부터 모여서 한 시간 동안 묵독을 하고 3시부터 행사를 시작하기로 했었지만 장소가 바뀌어서 그런지 많은 분들이 지각을 했습니다. 김하늬 씨 같은 경우는 뒷문 쪽으로 오는 바람에 책다방 연희로 들어오질 못해서 고생을 했구요. 2시 40분 경에 김탁환 선생이 와서 같이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조금 더 사람들을 기다리다가 3시 10분경에 제가 인사를 하며 행사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독하다 토요일'은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한 시간 정도 미리 정해진 책을 각자 가져와 묵독하고 그 이후에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인데 모임의 모토가 '너무 열심히 하지 말자'라는 얘기를 인사말 삼아 했습니다. 우리가 문학하는 사람들도 아니고 뭔가 이루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니 너무 심각한 토론을 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 저의 처음 생각이었고 아직은 그런 생각이 모임에서 통용되는 것 같아서 좋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모임이 끝나면 얼른 같이 술을 마시러 술집으로 몰려간다고 했더니 다들 웃으셨습니다.  

'우리는 왜 소설을 읽어야 하는가'라는 제목으로 김탁환 선생이 강연을 시작하기 전에 [이토록 고고한 연예]에서 감명 깊었던 구절을 낭독해보는 코너가 있었습니다. 정아름 씨가 나와서 87페이지 부근에 있는 달문이 인삼 장사하는 대목을 읽었고 572페이지 부분도 좀 긴 내용이지만 읽었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제가 203페이지쯤 달문이 선배 재인들을 만나 산대놀이로 번 돈을 몽땅 나눠주고 나서 모독과 나누는 대화를 읽었습니다. 

김탁환 선생은 자신이 쓴 문장을 남이 읽는 걸 들을 때마다 묘한 감정이 든다고 말문을 열었습니다. 독자는 인상 깊은 부분이라며 낭독을 하는데 막상 작가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힘을 주었던 대목을 찾아 읽어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이죠. 작가와 독자의 입장이 그만큼 다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소설을 읽어야 하는가?'라는 얘기는 다른 데서는 해본 적이 없다고 하면서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김탁환 선생에겐 [이토록 고고한 연예]라는 작품이 어떤 분기점이 된 것 같습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작품임을 넘어서 이제 '달문의 마음'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까지 가지게 되었다고 하니 말입니다. 앞으로 10년 정도는 계속 달문의 마음으로 '사회파 소설'을 계속 써내려갈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달문이 예술에 임하던 자세로, 달문이 사람들을 만나던 자세로, 그리고 나아가 달문이 인생을 살아가던 그 눈부신 자태로. 

그러기 위해서 일단 소설가로 살아가는 것 이외에 모든 것을 정리했다고 합니다. 작업실도 너무 커서 크기를 줄이고, 영화쪽 만나던 사람들도 대폭 정리했고(선생의 작품이 영화화 되는 경우가 많으니까), 칼럼이나 에세이도 안 쓰는 걸 원칙으로 정했다고 했습니다. 강연도 도서관 강연 말고는 안 하기로 하고요. 쉽게 말하면 돈이 되는 건 거의 다 안 하기로 한 것인데 ‘이게 다 달문 때문’이라며 웃었습니다. 가히 마루야마 겐지가 산속으로 들어갈 때 세웠던 결기만큼 김탁환의 마음가짐도 (온화한 성품과는 달리) 매우 분연했습니다. 

오는 10월 22일에 나오는 새 소설 [살아야겠다] 얘기를 했습니다. 메르스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토록 고고한 연예]보다 20페이지 정도 더 두꺼운 책이라 했습니다. 추천사를 써준 심리 기획자 이명수 선생이 '해머 같은 소설'이라고 했다지요. 우선 두께 때문에 그랬겠지만 아마도 프란츠 카프카가 얘기한 그 '망치'까지 중의법으로 표현한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36살의 주인공은 실존인물이었는데 마침 오늘이 그의 생일이라고 했습니다. 김탁환 선생은 학생들을 지도할 때도 언제나 주인공의 나이와 생일 등을 꼭 물어본다고 합니다. 구체적인 인적사항들이 촘촘히 정해져야 비로소 소설의 등장인물은 유일무이한 존재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걸 부여받은 캐릭터와 그렇지 않은 경우는 볼륨 자체부터 다르니까요. 예전에 허 샤오시엔 감독이 줄리엣 비노쉬와 <빨간 풍선>이라는 영화를 찍을 때 카메라 프레임 안으로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줄리엣 비노쉬의 남편 직업이 교수라는 것과 예전에 부부 사이에 있었던 자잘한 에피소드들까지 설명해주더라는 애기를 듣고 감탄했었는데, 또 그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역시 뛰어난 작가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하는 걸 느꼈습니다.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가 나오기 이전부터 김탁환 선생은 ‘인간은 이야기하는 동물이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했습니다. 세상엔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 이야기 앞에서 무력해지지 않겠다는 태도가 소설을 읽는 것이라고 했습니다(이야기 앞에서 무력해지는 경우는 예를 들면 ‘영화를 보는 순간’이라 했습니다. 독서와는 달리 관객이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이 영화가 보여주고 들려주는 대로만 받아들여야 하니까).
그런데 단편 소설을 읽고 내 인생을 바꾸었다, 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합니다. 인생을 바꾸는 건 언제나 장편소설이라는 거죠. 왜 그럴까.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많은 곳을 가기도 하구요. 그런데 그 무엇 하나 나의 의도대로 되는 건 없습니다. 태어나보니 이미 내 부모가 있는 것이고 우연히 만난 사람과 하라고 하니까 그냥 결혼을 하기도 합니다. 활동하는 시대도 내가 정할 수 없죠. 그런데 소설가는 그런 걸 다 의지대로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장편소설에서는. 그래서 장편소설을 쓴다는 것은 주어진 대로 살지 않고 작가가 원하는 세상을 의지대로 그려나가는 행위라고 뜻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작가는 언제나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고 했습니다. [전쟁과 평화]도 [죄와 벌]도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물을 만듭니다. 김탁환은 왜 정도전을 골랐을까. 왜 하필 달문이었을까. 이유는 그 인물에 그의 질문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어느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을 읽어오라고 시켰더니 다 읽은 학생들이 ‘이 소설에 어떤 정보가 들어 있어서 읽으라고 한 건지 잘 모르겠다’라는 반응을 보여 충격 먹은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 질문을 한다는 건 학교 다니는 내내 모든 책은 시험에 나오는(또는 세상살이에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읽는 것이지 이야기가 만들어낸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한다는 걸 배운 적이 없다는 뜻이었으니까요. 아무 감정을 싣지 않고 그냥 이야기만 하려는 사람이 있는데 김탁환 선생은 그게 가장 안 좋은 태도라고 했습니다. 논리적이기만 하면 내용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착각이라는 거죠. 인간은 감정이 전달되어야 움직이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허구인 소설을 읽어야 하는 것이구요. 

김탁환 선생은 소설은 적어도 세 번은 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는 그냥 읽고, 두 번째에는 작가의 입장에 서서 왜 하필 그 인물이고 그 시대였을까를 생각하면서 읽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읽으면서 확 끌리거나 유난히 싫은 부분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하며 읽어보라 했습니다. 그런 게 눈에 띄는 이유는 작가가 그걸 쓰기 전에 ‘천 번 정도’는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소설은 태생부터 굉장히 ‘의도적’인데 그런 건 장편소설 말고는 불가능하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함께 모여 장편 소설을 읽는 일은 매우 소중한 것이라는 얘기도 했습니다. 무엇인가를 함께 느껴보자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제가 ‘작가 김탁환이세 번씩 읽고 싶어질 정도로 짱짱하게 쓰는 외국 작가가 있으면 몇 명만 추천해 달라’고 했더니 존 스타인백과 필립 로스, 그리고 가즈오 이시구로와 오르한 파묵을 들었습니다. [분노의 포도], [빨강머리의 여인], [순수 박물관] 등등의 작품을 거론하면서 말이죠. 

“베스트셀러 작가로 살지 않겠습니다. 진지한 독자 만 명과 살겠습니다. 달문처럼.” 

이제 달문처럼 살겠다고 한 김탁환 작가는 대학 때 우리나라에 18세기부터 있었던 대하소설들을 읽고 깜짝 놀랐다고 했습니다. [유씨삼대록]이나 [곽장양문록] 같은 소설을 읽은 거죠. 그것도 몇 번씩이나.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역사소설을 쓰게 되었고 역사 공부를 더 하게 되었으며 또 그러다 보니 이제는 자기만 쓸 수 있는 게 있다는 강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밖에 못 쓰는 글을 쓰자, 인간의 본질을 틀어쥐고 장편소설을 쓰는 작가가 되자, 라고 결심하게 되었다는 얘기를 결론처럼 했을 땐 장내가 잠시 숙연해졌습니다. 

그러나 숙연함도 잠시. 강의가 끝나고 몰려간 백암순대국에서는 순대와 수육에 많은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이어갔고 2차로 간 치킨집에서는 각자 치맥을 아낌없이 들이부었습니다. 그 날 처음 뵙는 분들도 많았는데 모두 금방 친해져서 너 나 할 것 없이 웃음꽃을 피웠고 평소엔 뒷풀이에서 맥주만 간단히 마시다가 먼저 사라지곤 하던 김탁환 선생도 그날은 아주 작정을 하고 나왔는지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함께 술을 마셨습니다. 결국은 거의 모든 멤버가 3차인 중화요리 전문점 ‘문차이나’까지 가서 백주를 벌컥벌컥 마시며 밤을 불살랐습니다. 

모두 취해서 다행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거실에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옷가지와 핸드폰 속 사진들을 보니 대단했더군요. 그런데 기분이 매우 상쾌했습니다. 소설을 통해 만나서 그런지 모두 같은 마음처럼 느껴졌구요. ‘독하다 토요일’의 번외편 모임은 이렇게 끝을 맺고 다음 달엔 ‘독하다 토요일 2기’ 모임을 시작해야 합니다. 우선 앞으로 회원들이 함께 읽을 책들을 정해야 하는데, 이번엔 회원 여러분들의 추천을 받아 리스트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한국의 소설에 국한해서 읽어볼까 합니다. 어떤 책들이 좋을까요? 혹시 좋은 책 알고 계시면 추천 좀 해주세요. 꼭 새 책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우리가 아직 안 읽은 책은 다 새 책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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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잖은 사람도 운전대만 잡으면 욕쟁이로 변하는 경우가 있다. 운전은 생명과 직결되는 행위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누구든 좀처럼 다른 운전자의 입장에 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저기서 왜 깜빡이를 안 켜?
저 아저씨 왜 안 가고 저기서 뭉기적거리는데?

나도 그런 운전자 중 하나였다(이제 운전 안 한지 십 년도 넘었지만). 어느 늦은 밤 아내와 택시를 타고 집에 오다가 우리가 들어가야 할 진입로 입구를 막은 채 오도가도 못하는 차 한 대를 만났다. 아, 뭐하는 거야...? 라고 작게 중얼거리는 내게 택시운전사가 하신 말씀은 정말 뜻밖이었다.

"다 이유가 있어요."
"네?"
"서있는 차는 다 이유가 있는 거예요."

과연 그 차도 조금 있다가 뭔가 사소한 문제를 해결한 모양인지 위잉,하고 가려던 길로 가버렸다. 어안이 벙벙했다. 그렇구나. 우리는 "아저씨 말씀이 명언이네요!'라고 외치며 택시비에 팁 이천 원을 더 얹어 드렸다.

사람은 누구나 외롭고, 누구나 아프다. 시인 이성복은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라고 썼다. 사실은 아프지 않은 게 아니라 아픈데도 서로 이유를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유를 알고자 하는 대신 누군가의 마음에 '우울증'이라는 이름을 붙인 뒤 어서 정신과 의사를 만나보라고 충고한다. 나는 의사나 심리치료사가 아니니까, 미안하지만 다른 데 가서 잘 치료하고 오라고.

'정혜신의 정적심리학 [당신이 옳다]'는 마음이 아파서 숨이 넘어가는 사람은 큰 병원이나 전문가에게 보내지 말고 심폐소생술(CPR) 하듯 지금 당장 여기서 섬세한 시선과 지지를 통해 보살펴줘야 한다고 말하는 책이다. '적정기술'이란 무엇인가? 간단하지만 본질을 건드려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책에 나온 것처럼 아프리카 아이들이 힘겹게 이고 다니는 물동이 대신 큰 공 모양의 물통을 만들어 굴리고 다닐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언젠가 보았던, 오염된 물에 꽂고 빨아도 순식간에 정수 작용을 해 오지의 아이들도 맑은 물을 마실 수 있게 해주는 빨대 같은 것이다.  

정혜신은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요즘 마음이 어떠세요?"라고 묻는 것만으로 엄청난 비밀을 털어놓게 하거나 삶이 달라지게 하는 경험을 여러 번 했다고 한다. 사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다가가 그렇게 묻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 질문 전후로 털어놓는 이야기의 질이 너무나 달라지는 걸 계속 경험했기 때문에 그렇게 묻는 것이라고 했다. 다만 건성으로 묻지 않고 정말 호기심을 가지고 사소한 부분까지 마음으로 느끼면서 세세하게 물어야 한다는 말을 빼놓지 않는다.  

어떤 이유로 집을 뛰쳐나와 울다가 밤늦게 전화를 걸어온 친구에게 "야, 달밤에 체조하지 말고 빨리 집으로 들어가."라고 충고하는 건 당사자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정혜신은 바로 이 지점에서 한 사람의 운명이 결정될 수도 있다고 단언한다. 자신의 자의적 판단과 논리에 입각해 '빨리 들어가라'고 다그치는 대신 "니가 이 시간에 집 밖을 배회하고 있다면 그건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야"라고 섬세하게 공감해주는 순간 '천애고아' 같았던 마음이 순식간에 풀리고 가슴엔 따스한 체온이 돌아온다는 것이다.

책을 읽어볼수록 심리적 CPR의 핵심은 '행동'이 아니라 '태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월호 사건이 터졌을 때 많은 자원봉사자들은 진도에 내려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고 울면서도 무슨 일이든 했다고 한다. 같이 손 붙잡고 울고 같이 밥 먹고 같이 자는 것만으로도 유족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일인지는 정작 그들도 몰랐던 것이다. 이는 심리적 CPR이 이해하는 게 아니라 느끼는 것이고, 논리의 영역이 아니라 감정의 영역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해주는 사례다. 그리고 그 기술의 핵심 키워드는 언제나 '사람'과 '공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달리 '한'이 많은 민족이다. 스트레스가 그만큼 많다. 그런데 그걸 어디 가서 털어놓을 곳이 없어 못된 시어머니가 되고 태극기 부대가 되고 가출 청소년이 되는 것이다. 그럴 때 나의 감정에 집중해주고 내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가 뒤늦게 결혼하고서 가장 좋았던 것은 우주 최강의 '내 편'이 하나 생겼다는 사실이었다. 언제나 내 이야기에 먼저 귀를 기울여주고 내 기분이 어떤지 제일 먼저 헤아려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눈보라 치고 성난 파도가 넘실대는 바깥에서의 삶을 견디게 해주는 철갑옷을 얻은 것과 같았다. 

정신과 의사 정혜신과 심리 기획자 이명수 부부. 그들은 책상머리가 아니라 국가폭력 피해자,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세월호 참사 피해자들이 생과 사를 넘나드는 심리적 참전의 현장에서 그들이 개발한 '심리적 CPR'로 사람들의 목숨을 살리는 전사들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는 엄격한 잣대나 의학 지식이 아니라 공감이다. 묻고 또 물어 마침내 같은 입장에 서고 또 공감함으로써 벼랑끝에 선 사람들을 살린다. 그래서 이 책에 나온 수 많은 경험담과 사례는 한 번 읽고 머리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늘 곁에 두고 도움이 필요한 타인을 만나는 경우마다 적용시켜야 할 보석 같은 이야기들이다. 

방탄소년단은 얼마 전 유엔에서 "오늘의 저는 과거의 실수들이 모여서 만들어졌습니다. 내일, 저는 지금보다 조금 더 현명할지도 모릅니다. 이 또한 저입니다. 그 실수들은 제가 누구인지를 얘기해주며, 제 인생의 우주를 가장 밝게 빛내는 별자리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누구였는지, 내가 누구이고 싶은지를 모두 포함해 나를 사랑하세요."라는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싶어도 혼자서는 할 수 없다. 옆에서 "미안해. 니가 그렇게 힘든지 몰랐어."라며 진심으로 나를 위로해주는 사람이 있을 때 비로소 나는 나를 사랑하고 존중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람이다. 그리고 당신이 옳다, 라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공감의 말 한 마디가 사람을 살린다. 그게 정혜신이 이 책에서 얘기하고 있는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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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영된 MBC 프로그램 [무한도전] 중에서도 '레슬링' 편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을 듯하다. 고된 훈련과 연습을 하느라 부상을 당하고 기진맥진한 몸으로 링에 오르던 정형돈, 정준하 등의 모습 위로 흐르던 싸이의 노래 <연예인>은 실로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고 "그대의 연예인이 되어 항상 즐겁게 해줄게요" 라는 노랫말은 연예인들의 고통과 땀과 눈물 속에 들어있던 일말의 진심을 단 몇 초만에 시청자들의 가슴 속으로 전달해 주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때 우리는 연예인이라는 존재가 맨날 놀고먹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매스미디어를 통해 일반인들에게 제공되는 '사회적 공공재'임을 어렴풋이 깨달았던 것이다.

사실 연예인은 예전에도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로 김탁환의 소설 [이토록 고고한 연예]의 주인공 달문을 들어야겠다. 수표교 거지들의 왕초이기도 했고 한때는 기생들의 매니지먼트를 담당하는 조방꾸니 역할도 했으며 소설가 지망생 모독을 도와 동대문에서 인삼 장사를 하기도 했던 달문. 그러나 그를 한 마디로 정의하라고 하면 역시 '광대'가 아닐까 한다. 22년 경력의 소설가 김탁환이 평생 다시 이런 캐릭터를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썼다던 18세기에 실존했던 광대 달문의 이야기. 그게 바로 [이토록 고고한 연예]다.

가장 싸우기 힘든 사람은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달문은 싸우자고 덤비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미드 [프리즌 브레이크]의 '석호필'처럼 남을 도와주지 않고는 못 견디는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아무 것도 가지지 않으려고 했던 사내. 소설의 화자이자 김탁환의 페르소나 같은 인물 모독의 말에 의하면 달문(達文)이라는 이름은 '세상 이치에 통달했다는 뜻'도 들어 있다고 한다. 

집도 절도 없고 일자무식인 달문이 어떻게 세상 이치에 통달한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그는 가진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지만 그 재주로 자신을 돌보지 않고 항상 가난하거니 힘든 이들을 먼저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어쩌다가 산대놀이로 생긴 재산도 다른 이들에게 모두 나눠주고 "하지만 저는 지금 엄청나게 부자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가지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가지는 측은지심의 소유자. 그토록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존재가 김탁환이라는 탁월한 이야기꾼을 만나 황홀한 재주와 예기치 않았던 깨달음들을 페이지 페이지마다 쏟아놓는다.

김탁환은 달문이라는 인물을 만나고 나서도 쉽게 소설로 옮길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세월호 참사가 터진 후 고통 받는 사람들 곁에서 함께 눈물을 흘려주고 거리에서 함께 촛불을 밝혀주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이 소설을 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건 역사소설이라기보다는 사회소설에 가깝고 한 사람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우리 모두가 꿈꾸는 삶의 진실에 대한 이야기로 읽혀야 한다. 

2018년이 다 가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소설을 몇 편만 꼽으라고 하면 나는 단연 [이토록 고고한 연예]를 맨 앞에 놓을 것이다. 지금 책을 펼치시라. 600페이지가 넘는 이야기를 단숨에 읽어내는 진기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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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미 감독의 [잘돼가? 무엇이든]을 어제 오늘 휘리릭 다 읽었다. 이 에세이는 문화웹진 <채널예스>에 연재했던 글과 <씨네21>에 기고했던 글, 그리고 10여 년 전부터 현재까지 썼던 짤막한 일기 등을 발췌해서 꾸민 책이다.

제목인 '잘돼가? 무엇이든'은 이경미 감독이 처음 만든 단편영화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경미 감독이 졸업을 하고 '성공 신화를 이룬 거대 중소기업'에 다니던 시절의 얘기를 각색해서 만든 단편인데 각종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는 등 대단한 히트를 기록했었다. 아마 이 작품 때문에 박찬욱 감독과 공동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영화 감독이니까 당연히 영화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첫 챕터의 제목이 '실연당하는 게 끔찍할까, 시나리오 쓰는 게 더 끔찍할까?'일 정도로 영화 만드는 고충은 사사건건 크다.  그런데 이경미 감독 글의 미덕은 자신의 이야기를 재료로 자조적인 유머를 잘 만들어 낸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소심하거나 이기적인 성격이 많이 드러나고 연애나 사회생활, 영화, 친구 관계 등 각종 분야에서 발생했던 다양한 실패담들이 자주 등장한다.

우선 아름답고 총명한 여성 감독이 쓴 글답지 않게 똥이나 변비 같은 더러운 얘기가 많이 나오고 고학력 지식인의 처지에 어울리지 않게 점이나 운세를 보는 장면도 자주 나온다. '인생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가 이 책의 주제인 모양인데 [미쓰 홍당무]와 [비밀은 없다]를 만들면서 있었던 여러 가지 얘기들과 [비밀은 없다]를 개봉하고 나서 그 영화 때문에 만난 백인 남성과 결혼을 하게 되는('백인 포비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까지 읽고 나면 '인생은 알 수가 없다' 쪽으로 조금 괘도를 수정하는 듯도 하다.

아무튼 찌질한 듯하면서도 공감대를 자아내는 글들은 매우 경쾌하면서도 솔직한 면이 있어 어느덧 이경미 감독이라는 캐릭터와 동질감을 느끼게 되는데, 특히 창작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계속해서 꾼 꿈들을 일기로 기록한다든지 대작가의 글을 읽고 절망하는 대목 등이 특히 공감감다.

창작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자산은,
습작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왔는가 하는 작가의 삶아다. (박완서)

아이 씨, 어떡하지.

2005. 05.12


뒷부분엔 평소 기도를 열심히 하면서 틈만 나면 딸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엄마 얘기, KBS <동물의 세계>에서 "짝짓기를 합니다" 같은 나레이션을 했던 유명한 성우인 아빠 얘기, 언니와 심하게 싸우지만 결국 이 책의 일러스트를 맡아주었던 여동생 얘기 등도 재미있게 펼쳐진다. 

책이 많이 팔렸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무도 솔직하고 유머러스한 글솜씨에 잘난 척하지 않는 마이너한 감성이 독자들을 끌어들였으리라. 책도 예쁘게 나왔다. 추천한다. 서점 가판대에 누워서 '괜찮아, 그냥 너 생긴 대로 살아' 라거나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 했는데 안 그래서 차암 다행이야'라고 외치는 설탕물 같은 에세이들보다 열 배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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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에 한 번, 두 번째 토요일 오후 두 시에 열리는 '독하다 토요일'의 두 번째 모임이 어제 대학로 카페 겸 서점 '책책'에서 있었습니다. 이번에 같이 읽은 책은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이라는 단편집이었습니다. 두 시 이전에 모인 몇몇 분들과 함께 먼저 각자 가져온 책을 묵독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개인적 미팅 때문에 김인혜 씨가 오지 못하게 되었고 정아름 씨도 출장 후유증으로 몸이 안 좋아 참석을 못한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할 수 없으니 다음 달을 기약하자 했습니다. 옆집 총각 서동현 씨는 목요일에 촉발된 숙취에 괴로워하면서도 참석해 묵묵히 책을 읽었습니다.

새로운 멤버가 한 명 있었습니다. 제 후배인 광고인 김휘중 씨였습니다. 제가 몇 주 전 술자리에서 이 모임에 대해 얘기했더니 눈을 반짝이며 자신도 참석하고 싶다고 너무 간절하게 부탁을 해서 초대했습니다. 타고난 길치라 모임 장소를 찾는 데 좀 고생을 했지만 뒤늦게 도착해 책을 읽고 작품에 대한 많은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늦게 도착한 사람도 있고 해서 3시 반까지 책을 읽기로 했고 그 후 십오 분 정도 각자의 독후감과 세줄평 등을 정리하고 얘기를 시작했습니다. 

윤혜자 씨는 <노찬성과 에반>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습니다. 에반이라는 존재는 개를 넘어서 우리가 의지하거나 붙들고 싶어하는 어떤 것처럼 느껴졌다고 했습니다. 옆집총각 서동현 씨는 <건너편>이 너무 슬프고 리얼했다고 했습니다. 적나라했고 정말 있을 법한 사람들의 이야기라 마음이 움직였던 것 같습니다. 수산시장 장면에서는 마치 '사람들이 줄돔 같다'는 생각도 했다고 했구요. <풍경의 쓸모>에서는 무리하게 연결을 원하는 아버지와 노회한 박 교수가 교차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작가의 묘사가 일상을 마구 긁어대는 느낌이고 등장하는 사건 사고들이 '느슨한 시침질처럼 꿰어져' 오히려 거대한 풍경을 이룬 게 아닌가, 하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창단 멤버였지만 지난 달 참석을 못해 이번이 첫 모임이 된 진주 씨는 <노찬성과 에반>을 읽고 자기에게도 에반 같은 존재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했습니다. 다들 <노찬성과 에반>이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같습니다. 김휘중 씨는 자기는 평소 장르소설을 좋아하는데 김애란의 소설을 읽고 홍상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적나라하고 리얼한 느낌을 받았다 했습니다. 그는 <입동>과 <건너편>을 좋아했습니다. 특히 <건너편>에서 연인에게 차이는 이수의 입장이 잘 이해되어 마음 아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입동> 등의 작품들이 현실을 너무 잘 반영해서 '바깥은 여름'이라는 작품집의 제목이 뜻하는 바를 짐작할 수 있었다 했습니다. 아무리 괴로워도 다른 사람들은 그 사정을 모르는 게 세상 일이고 결국 산다는 다 고독하다는 게 핵심이라는 것이죠. 

 영어선생님인 임기홍 씨는 모임에 와서 또 영어책을 읽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위화감을 조성했는데 무슨 작품이 좋았냐고 물었더니 <침묵의 미래>가 흥미로웠다고 털어왔습니다.  다른 소설과 달리 화자가 '언어'라는 게 재밌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노찬성과 에반>에서 왜 찬성이 할머니한테 '목사님이 할머니 싫어한대'라고 얘기했는지 의문을 제기해서 잠시 토론이 있었습니다. 결국은 '목사님이 할머니한테 더 이상 바랄 게 없자 그런 식으로 나온 게 아닐까?'하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목사님이 나쁘다는 것이죠. 저는 읽은지 좀 돼서 기억이 가물가물 했었는데 누군가 의문을 제기하는 바람에 확 걸렸던 대목이었습니다. 

김성희 씨는 <입동>이 좋았는데 '바깥은 여름'이라는 인식 자체가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 김애란의 에센스 같은 느낌이었고 그래서 이 작가의 작품은 다 영화화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눈먼자들의 국가]에서도 이 작가가 상실을 겪은 사람들에 대해 얼마나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 미리 느낄 수 있었다고 하며 지난 번 우리 모임의 작가였던 권여선보다 더 대중성이 있는 것 같다는 소회를 밝혔습니다. 이번 소설도 세월호 사건 때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얘기했는데 다들 그 의견에 공감해서 찾아보니 그때 이 작품을 쓴 게 맞는 것 같았습니다.

손영연 씨는 <건너편>이라는 작품을 읽으면서 마치 누가 글을 양동이로 쏟아붓는 느낌이라 했습니다. 그만큼 강렬했던 것이겠죠. 그리고 <풍경의 쓸모>에서 사진을 찍는 것에 대한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어 좋았다고 했습니다. 시간을 박제해 놓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게 결국은 '전형적으로' 살게 되는 것' 이란 느낌을 받았다 했습니다. 아버지를 돕지도 못하고 결국 교수 임용에 떨어지는 주인공의 삶도 전형적인 것의 대표격이란 생각을 하게 된 것이죠. 김휘중 씨는 그게 바로 살아가면서 나이 먹어간다는 것을 사진을 통해 잘 짚어낸 것이라 말하며 김애란이 글을 너무 잘 써서 좋기도 하지만 막상 그 글을 읽어내는 게 자신과 마주하는 것 같아서 힘들고 기분 나쁘다는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김하늬 씨는 동료 작가와 이 작품집을  올 1월에 이미 읽었는데 그때는 어떻게 쓸 것인지를 얘기를 하느라 조금 다르게 느꼈다고 했습니다. 그때는 <입동>이라는 작품이 별로다,라는 생각이었다는 것이데, 그 이유가 너무 전형적으로 잘 쓴 작품이라 그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독하다 모임에 와 보니 일반 독자들이 이 작품에 대해 반응이 뜨거운 것을 보고 약간 놀랐다는 것이죠.
그녀는 [침묵의 미래]가 좋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청소년들의 문제를 다룬 [가리는 손]이 인상 깊었다고 했습니다. 아는 언니와 나눈 '세월호와 액체괴물' 얘기도 했습니다. 다 얘기하려면 길지만 짧게 말하면 잘 몰라서, 순수해서 오히려 잔인해질 수 있는 아이들에 대한 생각들이었습니다. 그러자 김휘중 씨가 [가리는 손]이 정유정의 [종의 기원]이 생각나는 소설이라 인상 깊었다며 열변을 토했습니다. 
 
정유정에 대한 소설 얘기를 중구난방으로 나누다가 결국 김애란은 잘 쓰는 소설가이며, 너무 잘 쓰다 보니 오히려 역설적으로짜증이 나기도 하다는 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렇지만 장편 <두근두근 내 인생>이나 단편 <입동> 모두 압도적인 소설이라는 상찬을 나누다 모임이 끝이 났습니다.

뒷풀이는 원하는 멤버만 간다는 원칙 하에 광장시장의 '박가네 빈대떡'에 갔었는데 약속이 있다는 김하늬 씨와 손영연 씨만 빼고 모두 달려가 '빈대떡 삼합' 안주에 막걸리와 소주를 마셨습니다. 어쩌다 제가 똥에 얽힌 얘기를 꺼내는 바람에 똥 얘기를 하게 되었는데 김휘중 씨한테 옮겨가면서 또다른 똥얘기로 번져 오랫동안 각종 똥얘기로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끝을 맺게 되었습니다. 다은 달에 한강 작가의 [흰]을 읽기로 하고 다들 무사히 헤어졌습니다. 


다들 세줄평을 발표하지 않아서 제가 쓴 세줄평만 괜히 공유해 봅니다. 

견고한 슬픔들 -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 

김애란의 소설은 사라진 것들이나 도달하지 못한 곳에 대한 애잔한 반추들이 있어 슬프다. 그러면서도 성실한 취재가 소설의 견고함에 힘을 보탠다. 진작에 끝나버린 연인들의 이야기 <건너편>에 등장하는 '하늘을 친구처럼, 국민을 하늘처럼' 같은 기상청의 캐치프레이즈가 그런 대목이다. 남편을 잃고 영국에 다녀온 주인공이 휴대폰 서비스 시리와 대화를 시도하는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도 서글프다. 다른 단편집 [비행운]에 들어있는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를 추천한다. 그 소설을 읽고나면 김태용 감독의 영화 [만추]에서 탕웨이가 하던 대사가 떠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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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나주 여행을 갔다가 들른  광주 송정시장 안의 작은 서점에서 새로 나온 헤밍웨이의 단편집 [깨끗하고 밝은 곳]을 샀다. 일단 책이 작고 예뻐서 샀고 헤밍웨이의 작품을 요즘 번역으로 읽어보고 싶은 마음도 좀 있었다. 민음사가 만든 이 작품집엔 표제작과 함께 <살인자들>, <병사의 집>, <킬리만자로의 눈>, <프랜시스 매코머의 짧지만 행복한 생애>등이 실려 있고 맨 앞엔 '글을 쓴다는 건 언제나 고독한 일'이라는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노벨문학상을 탔을 때 발표했던 수상 연설문이 실려 있다. 

<깨끗하고 밝은 곳>이라는 소설은 8쪽짜리 짧은 단편인데 늦은 밤 카페에서 술을 마시는 귀머거리 노인과 그의 시중을 들던 웨이터 두 명 사이에 일어난 이야기다. 지난 주에 자살을 하려다 실패한 것으로 알려진 노인은 오늘도 늦게까지 카페에 남아 브랜디를 마신다. 웨이터들이 주고 받는 대화에 의하면 돈도 많은 노인이 자살하려 한 이유는 '아무것도 아닌 일' 때문이었다나. 늦게까지 버티고 있는 노인 때문에 일찍 들어가지 못한다고 생각한 젊은 웨이터 는 그에게 다가가 브랜디를 따라주며 "영감님은 지난주에 죽는 게 나을 뻔했어요."라고 말한다. 그러나 듣지 못하는 노인은 그저 브랜디를 마실 뿐이다.

브랜디를 다 마신 노인은 '비틀거렸지만 어딘가 품위가 있어 보이'는 모습으로 돌아갔고 조급한 웨이터가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자 나이 많은 웨이터가 혼자 가게 뒷정리를 하겠다고 한다. 그는 가게를 정리하면서 말한다. "나는 늦게까지 카페에 남아 있고 싶어. 잠들고 싶어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밤에 불빛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과 함께 말이야." 그게 무슨 엉뚱한 소리냐며 난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던 조급한 웨이터는 퇴근을 하고 나이 많은 웨이터는 문을 닫으며 자신이 매일 밤 가게를 닫을 때마다 약간 망설이는 이유가 뭘까 생각한다. 어쩌면 이 시간에도 카페가 필요한 누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일까.

그는 아까 그 노인을 생각하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로 시작하는 주기도문에 신이나 아버지 대신 '허무'라는 뜻의 스페인어 '나다'를 넣어 읊조려본다. 그리고 퇴근길에 들른 바에서 뭘 드시겠습니까, 라고 묻는 바텐더에게 "나다를 주게"라고 말함으로써 "여기 또 미친 놈이 또 하나 있군." 이란 농담 섞인 핀잔을 듣는다. 마지막으로 들른 바도 깨끗하고 불빛이 밝은 카페였다면 더 좋았을 것을, 이라 생각하는 웨이터. 어쩌면 그는 헤밍웨이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주 깊은 밤에도 자신이 허무에 젖지 않도록 옆에서 환하게 불을 밝혀주는 사람들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웨이터의 마음에서 소설가의 모습이 언뜻 비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제목도 깨끗하고 밝은 곳(A Clean, Well-Lighted Place)이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살인자들>이라는 단편은 암살자들이 찾아왔는데도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어 그대로 집에 머물고 있는 전 헤비급 챔피언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고 <킬리만자로의 눈>은 어렸을 때 고레고리 펙 주연의 영화로 봤던 작품이다. 그런데 이렇게 책으로 찬찬히 읽으니 마지막 주인공이 죽는 장면만 빼놓고 완전히 헤밍웨이 자신의 이야기나 다름없다. <프랜시스 매코머의 짧지만 행복한 생애>도 비슷하다. 이건 주노 디아스의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이라는 장편이 생각나는 제목이다. 하루키도 헤밍웨이의 작품을 따서 <여자 없는 남자들>이란 책을 냈었다. 아마도 존경하는 선배 소설가에 대한 오마주로 이런 제목들을 지었을 것이다. 소설가, 저널리스트, 모험가로 멋진 삶을 누리다 간 헤밍웨이가 부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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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선 씨에게 

유창선 씨, 안녕하십니까? 유창선 씨가 쓴 책 [삶은 사랑이며 싸움이다]를 읽고 문득 편지글로 독후감을 써보고 싶어졌습니다. 당장 저자와 만날 수는 없지만 편지글이라면 함께 앉아서 얘기하는 기분이 들지 않을까 해서요. 그런데 우리나라 말이나 글은 종적인 인간관계 덕분인지 호칭이 꽤나 까다롭습니다. 처음 말을 거는 경우엔 더 조심스럽지요. 약간 고민을 해보다가 그래도 요즘 많이 쓰는 '님'보다는 '씨'가 더 꾸밈이 없고 무심한 것 같아서 그냥 '유창선 씨'라고 부르기로, 제멋대로 정해 버렸습니다. 괜찮으시죠? 


세상은 그대로인데 변덕스러운 것은 나의 마음이다. 지난 밤 그렇게 절망스러웠던 세상의 색깔이 다음 날 아침이면 환해 보이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다.

유창선 씨가 사는 게 힘들고 외로울 때 읽었다는 니체에 대한 글 중 출근길 지하철에서 읽다가 팍 꽂힌 대목이 바로 이 부분이었습니다. 세상은 잔인하지도 따뜻하지도 않고 그저 늘 냉정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라는 평소의 생각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고 앞으로 사는 게 힘들 때마다 나도 이 구절을 다시 한 번 떠올려야겠다 생각하게 된 것인데, 이는 시사평론가로 활동하다가 이명박 박근혜 정권 때 방송 일이 다 끊기자 정권에 줄을 서거나 반대편에 서는 대신 동네 독서실에 틀어박혀서 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던 유창선 씨의 이야기가 너무 마음에 와닿았기 때문이었겠죠. 

근대의 탄생과 함께 신으로부터 개인을 되찾아왔다는 우리들이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현대인들은 일과 일상에 매몰되어 또다시 '나'를 잃어버린 삶을 살고 있습니다. 혼자 있을 시간, 즉 가만히 앉아 자신을 물끄러미 들여다 볼 시간을 좀처럼 가질 수 없게 된 것이죠. 그래서 늘 버릇처럼 '정신이 없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카피라이터로 시작해 TV 광고 만드는 일을 이십 년 넘게 하고 있 는 저도 그런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허구헌날 남의  상품이나 브랜드를 어떻게 하면 빛나게 할 수 있을까 궁리하느라 정작 자신의 인생은 챙기지 못하는 악순환을 반복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카피라이터는 배우 이나영의 입을 빌어 '내 생각이라는 녀석은 잘 지내고 있는지 커피를 마시며 생각해 봅니다'라는 카피를 쓰기도 한 것이겠죠. 

광고 일을 하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정말 내가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광고주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물건이 많이 팔리거나 브랜드의 가치를 높이는 광고를 만들어 줄 것을 원하지만 그게 어떤 각도로, 어떤 포인트로 제작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모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는 광고뿐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 생각됩니다.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지만 어떻게 해야 자신이 행복해지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어느 순간 일상을 멈추고 자신을 들여다 볼 계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유창선 씨가 동네 독서실로 들어가면서 비로소 진짜 내가 하고싶은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처럼 말이죠.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한 번밖에 살지 못한다. 하지만 자신의 결단에 따라서는 여러 번의 삶을 살 수 있다. 지금 살고 있는 삶이 나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 새로운 삶을 위한 결단을 내린다면 우리는 또 한 번의 삶을 살 수 있다. 

이 책은  '책을 읽는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고독한 행위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근무하던 곳에 사표를 내고 나오며 '돌아갈 다리를 내 손으로 끊어버린 셈'이라 생각했던 유창선 씨. 저도 사표를 여러 번 써보았기 때문에 그게 어떤 심정이었을지 약간은 이해가 됩니다만 다른 건 몰라도 당시의 결심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했을 것이라는 것만은 확신합니다. 마음이 온전히 내 것이고 나를 채우는 전부라면 정신은 그저 테크니컬하게 사용하는 무형의 도구일 뿐이라고 생각하니까요. 마음이 시킨는 대로 사는 것, 결코 쉽지 않습니다.

진보적인 정치평론가였던 유창선 씨는 양심이 시키는 대로 세상을 버리고 책을 통해 더 넓은 세상으로 깊이 들어가는 길을 택했죠. 그리고 그 결심은 '나의 고민은 이천몇백 년 전 소크라테스의 고민과 다를 바가 없다'는 깨달음을 얻으면서 추진력을 얻은 것 같습니다. 플라톤이 쓴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그대로 당시 유창선의 처지를 설명하는 우화이기도 했고 유창선을 대신해 선배 철학자가 목숨 걸고 먼저 써 놓은 '양심선언'이이기도 했으니까요.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을 읽으며 '나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고  카프카가 쓴 소설 [변신] 속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 보면서 현대인의 태생적인 불안을 실감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백이 숙제의 신화를 해체했던 루쉰의 글은 또 어떤가요. 정치를 비롯한 인간의 삶은 그것 자체가 욕망의 덩어리일진대, 지고지선한 얼굴을 한 영웅의 모습은 존재할 수 없다는 그의 통찰은 빅토르 위고가 쓴 [파리의 노트르담]에서 보여준 절대악도 절대선도 없다는 깨달음과 상통하는 이야기일 겁니다. 

오독일 수도 있겠지만 책의 목차를 다시 더듬으며 유창선 씨가 책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누었던 대화들을 제 마음대로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왜 제목이 '삶은 사랑이며 싸움이다'였는지 다시 생각해 봅니다. 사랑하는 삶을 살려면 부단히 싸워야 한다는 유창선 씨의 말에 공감하기에 일단 책에서 언급되었던 책들을 찾아 꼼꼼히 읽어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독서에 관한 책을 읽는 것이 예쁜 여자에 대한 동경만 채우는 일이라면 그 텍스트를 찾아 읽는 일은 직접 그녀를 만나 손을 잡고 살결을 만지고 입김을 불어넣어 결국 내 애인으로 만드는 일이니까요. 

자신의 결단에 따라 누구나 여러 번을 살 수 있다는 유창선 씨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제 생각에 당신은 두 번째 인생을 멋지게 살고 계신 것 같습니다. 요즘은 문화계도 허지웅처럼 얄쌍하거나 김어준처럼 지랄스럽거나 아무튼 좀 튀어야 하는데 유창선 씨는 너무 고지식한 아저씨처럼 보이는 게 아닐까 좀 걱정을 했습니다. 하지만 책을 깊게 읽고 넓게 생각함으로써 얻은 정신의 수려함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책의 부제가 '존엄하게 살기 위한 인문학 강독회'인 것처럼 존엄하게 살고 싶은 눈 밝은 독자들이라면 유창선 씨의 숨은 가치를 단박에 알아볼 테니까요. 너무 일이 바빠 사 놓고도 읽지 않을 게 뻔해 전작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를 아직 구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음 주쯤엔 사서 읽도록 하겠습니다.


요 며칠 날씨가 미친듯이 춥고 미세먼지도 많았습니다. 건강 유의하시고 더 좋은 글 많이 써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만 총총.

독자 편성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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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어떤 평론가가 작가 이병주를 평하면서 그가 일제시대와 815해방, 625사변, 419혁명, 516쿠데타 등등 파란의 역사를 온몸으로 겪어온 세대라 그만큼 할 이야기도 많은 작가라고 쓴 걸 읽은 기억이 난다. 작가에게 할 얘기가 많다는 것은 일단 축복일 것이나 그토록 많은 이야기를 몸에 저장하기 위해 그가 살아내야 했던 힘겹고 유난한 세월 또한 그에겐 축복이었을까. 


김이정의 소설 [유령의 시간]을 읽으면서 똑같은 생각을 했었다. 이 소설은 작가의 아버지 이야기이며 동시에 그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일제시대에 일본에 가서 공부를 할 정도로 똑똑하던 이섭은 독립운동을 하던 실천적 지식인인 숙부의 영향으로 인해 사회주의자가 된다. 그리고 한때 '이마가 아름다운 여인' 진을 만나 아이 셋을 둔 행복한 가장이었으나 자신이 수배되어 도망 다니는 동안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남과 북으로 갈린 생이별을 하게 된다. 실의에 젖어 살던 이섭에게 미자라는 여자가 왔다. 그녀 또한 전쟁이 터지던 날 폭발사고로 남편을 잃은 불운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며 네 아이를 더 낳게 된다. 작가의 분신인 ‘지형’은 그들의 첫째 딸인 것이다. 

제주도에서 말을 키우기도 하고 서해안에 와서 새우를 키우기도 하던 이섭. 사람들은 신수가 번듯하고 배운티도 많이 나는 이섭이 왜 제대로 된 직장생활을 못하고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사업을 하며 전국을 떠돌아야 하는지 궁금해 하지만 이섭은 그저 술잔을 기울이며 쓰게 웃을 뿐이다. 대한민국에서 한 번 사회주의자로 낙인 찍힌 사람은 취직을 하기도 어디 한 군데 정착하며 살기도 힘든 것은 물론 오촌 친척의 해외 지사 발령까지 불가능하게 만드는 ‘연좌제’의 시절이었던 것이다. 별 재미를 보지 못했던 제주도 말 목장도 해안의 새우 양식장도 결국 예전 장인의 도움 없이는 차릴 수 없었던 것에 심한 콤플렉스를 느끼며 살았던 이섭. 그는 새로운 가족들과 생활을 꾸려가면서도 예전 아내와 아이들을 잊지 못한다. 불행한 일이다.

그러나 자칫 무겁고 답답하기만 한 내용일 수도 있는 이야기는 김이정의 물 흐르듯 유려한 필력으로 생명력을 얻는다.  작가의 글은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낄 만한 문장들이 많이 나온다.  예를 들면 일본에서 건너 온 이모 윤과 그녀의 딸 미희를 지형이 처음 만날 때의 느낌을 간단하게 묘사한 이런 글을 보라. 

“서울 사람들은 전부 얼굴이 하얗디야. 우리 언니가 서울 갔다 왔는디 거기 사람들은 수돗물을 먹어서 얼굴이 다 그렇게 하얀 거랴.” 
  지난봄, 숙자가 자랑처럼 한 말이었다. 숙자의 언니가 방직 공장에 취직하러 서울에 다녀 온 직후였다. 
  일본은 서울보다 수돗물이 더 잘 나오는지, 그들은 유난히 희었다. 몸 전체에 석회라도 발라 놓은 것 같았다. 미희는 밑단에 흰 수술이 달린 큰 꽃무늬 반팔 상의와 곧은 다리가 허벅지까지 드러나는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녀가 신고 있는 흰 에나멜 구두가 내리꽂히는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작가는 소설에서처럼 실제로 어느 날 아버지가 자기 형제들을 불러 앉혀놓고 이제부터 자서전을 쓰기 시작했다고 알리며 ‘유령의 시간’이라는 제목까지 그때 정해 두었다고 '작가의 말'에서 밝히고 있다. 김이정은 아버지가 시작한 글을 40년 만에 완성하게 된 셈이고 어차피 그 일은 오빠 대신 소설가가 된 자신의 몫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이 소설의 초고를 쓰기 시작한 것은 뜻밖에도 절명의 위기에 봉착했을 때였다고 한다. 모든 것을 다 잃은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매일 도서관에 나가 글을 쓰는 것 뿐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그는 이 소설로 대산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이 글이 그에게 구명보트가 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누구에게나 살면서 꼭 해야 할 자신의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그게 김이정의 개인사처럼 대한민국의 아픈 역사의 질곡과 만나는 지점에 있을 경우에는 많은 독자들에게 더욱 묵직한 울림이 되는 것이다. 최순실과 박근혜의 국정 농단 등으로 모든 의욕이 사라지는 시기에 허무를 견디는 심정으로 출퇴근 시간마다 전철 안에서 악착 같이 이 책을 읽었다. 책 뒷표지에 실린 소설가 김미월의 글 일부가 내 소감과 거의 똑같기에 이 글의 결론을 대신해 여기에 옮겨둔다.

모든 훌륭한 소설이 그러하듯이 [유령의 시간]은 결국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인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고 세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고 마침내 나 자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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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 손이 안 가는 작가나 책이 있다. 이 책이 그랬고 이 작가가 그랬다. 예전에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에서 소설가 김훈이 추천한 50권 중 이 책이 들어 있었던 것 같다. 그때 느낌은 '김훈은 후배 작가들의 책도 참 많이 찾아 읽는구나' 정도였다. 그러면서 책 제목을 메모까지 해놨었는데 왜 정작 찾아 읽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이름이나 그 작가가 지닌 분위기가 지나치게 ‘운동권스럽지 않나’ 하는 얼토당토하지 않은 생각을  혼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공선옥은 왠지 뭔가 진지할 것 같고 거룩할 것 같고 게다가 작가의 고향이 전라남도이니 왠지 묵직한 주제의식이나 치열한 의무감을 가졌을 것만 같고…그래서 자꾸 다음에 다음에 하고 미뤘던 것 같다. 그 후에도 서점에서 만났을 때 수채화로 그려진 표지가 너무 ‘나이브’해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아, 이 정도면 병이다). 


그러다가 얼마 전 이비인후과 갔다가 들른 강남역 알라딘에서 이 책을 다시 보고는 ‘책값도 삼천 원밖에 안 하는데 어디 사볼까’라는 생각이 들어 집어들었다. 그러나 웬걸, 책을 읽기 막상 시작하자마자 너무 재미있어서 출퇴근길과 휴일 지방 여행 가는 버스 안에서 이틀만에 다 읽어버렸다. 쓸 데 없는 선입견이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 알려주는 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는 1980년대 광주 언저리에 살던 파릇파릇한 청춘들의 이야기인데 주인공은 해금이라는 여자애다. 해금이 위로는 언니가 셋 있는데 그 이름이 순금이 정금이 영금이다. 할아버지가 비단금(錦) 자를 정해놓고 이래저래 한자를 한 개씩 돌려 이름을 짓다가 네 번째도 또 딸입니다,라는 아들의 소릴 듣고는 “니무랄, 암거나 허라고 혀’라고 화를 내는 바람에 ‘혀금이'가 될 뻔 했는데 그나마 애 아버지가 바다 해(海)자를 쓰는 바람에 해금이가 되었고 그 다음에 태어난 막내딸은 드디어 '비단 금'자를 벗어나 영미가 되는 바람에 해금이만 가장 억울하게 되었다는 조금 웃기는 사연이다. 해금이는 예쁘지도 공부를 썩 잘하지도 않지만 속이 깊고 착한 아이였다. 이 이야기는 해금이와 그의 친구인 경애, 승희, 정신이, 수경이, 그리고 4.19기념일에 도청 앞에서 우연히 만나 음악실에 가는 바람에 평생 친구가 된 남자애들 승규, 진만이, 태용이, 만영이 들의 ‘청춘스케치’인 것이다. 

어디서나 스무 살 무렵의 이야기에는 늘 피끓는 우정과 연애가 있고 꿈이 아직 뭔지도 모르면서 내지르는 무모한 도전과 좌절, 그리고 희망이 있지만 이들이 있던 곳은 80년대 광주였으니 그 남다르고 슬프고 웃기고 아스라한 사연들이야 오죽하랴. 작가는 하나하나 애정이 가는 친구들의 사연에다 그 가족들의 이야기까지 얹고 정겨운 전라도 사투리와 쌍욕까지 곳곳에 뿌려서 다 읽고 나면 들큰하면서도 아주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아니, 만들어냈다기보다는 들려줬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혹시 작가 친구들의 실제 얘기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책을 다 읽고 난 지금도 그들이 방금까지 살았던 것마냥 생생하게 느껴지니 말이다.

모두 평범하고 예쁜 아이들이었다. 자기들이 얼마나 예쁜 나이인지 모르는. 그러다가 광주항쟁 때 날아온 유탄에 경애가 맞아 죽고 이에 충격을 받은 수경이가 자살을 하고 집안꼴이 마음에 안 들어 밖으로 나돌던 승희는 성질 급하게 스무 살에 애를 낳는다. 승희를 좋아했던 진만이는 화를 내고 승희를 진짜로 좋아했던 만영이는 승희의 아이를 거둔다. 세상을 바로잡고 싶었던 정신이는 대학을 그만 두고 공장에 위장취업을 했고 서울대학을 다니며 힉생운동을 하던 승규는 남산으로 끌려가 죽도록 맞은 뒤 군대로 끌려갔다가 자살을 한다. 자살을 할 애가 절대로 아닌데. 그 중간에 해금이도 '나타나기만 하면 세상이 환해지는’ 이환과의 첫사랑을 경험하고. 

스무 살이라는 나이는 눈부시도록 아름답지만 또한 얼마나 불안정하고 가뭇없던가. 살아남은 아이들끼리 모여 비명에 간 친구 승규의 장례를 치루는 장면이 마지막이간 하지만 이상하게 슬프지 않다. 그들이 방금 아주 힘든 인생의 쓴맛을  봤다지만 그래도 여전히 '꽃향기만으로도 가슴이 설레는' 마음으로 남은 인생을 뚜벅뚜벅 살아갈 것이라는 믿음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 앞부분에 발췌해 놓은 시 <내가 가장 예뻤을 때>의 일부분은 이 소설 제목의 연유를 밝히는 것과 동시에 해금이를 비롯한 주인공들에게 대한 작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다시 한 번 고백하는 것으로 읽힌다. 언제 기회가 되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보기 바란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당신이 가장 예뻤던 때는 언제였던가.그 때 당신 곁에는 누가 있었던가.  


(……)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주위 사람들이 숱하게 죽었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도 없는 섬에서 
나는 멋을 부릴 기회를 잃어버렸다 

(……)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너무 불행했고 
나는 너무 안절부절 
나는 더없이 외로웠다 


_이바라기 노리코,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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