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를 한, 영, 일로 읽다!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들어온 말 중 하나가 '우리는 언제 노벨상을 타나?'였습니다. 특히 노벨문학상에 대한 얘기가 많았습니다. 최인훈이나 이문열 같은 작가가 타지 않을까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최인훈 선생은 이미 돌아가셨고 소설가 이문열은 젊은 날 쌓아올렸던 위상을 스스로 허물어뜨린지 오래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옆나라 일본의 가와바타 야스나리나 오에 겐자브로가 노벨문학상을 탄 것을 부러워하긴 해도 그 상을 타기 위해 그들처럼 번역에 제대로 힘을 쏟거나 중견 작가들의 작품을 해외에 소개하는 일은 게을리 했던 것 같습니다. 최근엔 다행히 고은이나 황석영 같은 작가들이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만약 그 추세를 몰아 고은이 덜컥 수상자가 되어버렸다면 상을 주는 스웨덴 한림원이나 받는 우리나라 사람들이나 죄다 곤혹스러워지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해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들려 온 한강 작가의 맨부커상 수상 소식은 참으로 반가웠습니다. 오매불망 노벨상만 바라보고 있던 우리들에게 살만 루시디도 타고 가즈오 이시구로도 탄 맨부커상을, 그것도 오르한 파묵 같은 쟁쟁한 작가들을 제치고 한강이 수상을 했다는 소식은 정말 대단한 사건이었지요. 저는 그 뉴스를 접하고서야 진작에 사놓고 읽지는 못했던 한강의 연작소설집 [채식주의자]를 펼쳐 읽기 시작했습니다. 소설은 벌써 베스트셀러로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의 또 다른 역작 [소년이 온다]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1980년 광주에 대한 이야기를 그렇게 기발한 방식으로 현장에 밀착하면서도 가슴 서늘하게 그리는 작가가 또 있을까요. 그런데 [채식주의자]는 어느 날 갑자기 육식을 거부하고 브래지어도 풀어버린채 채식주의자가 된 '평범했던' 여인을 통해 소년이 온다와는 전혀 다른 문제의식과 감동을 높은 예술적 성취와 함께 전달하고 있었습니다.

지난 가을 아내인 윤혜자 씨와 저는 로버트 파우저 교수님과 함께 인사동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곧 미국으로 돌아가는 파우저 교수님의 배웅하는 자리였지요. 우리는 파우저 교수님의 역작 [외국어 전파담] 출간 기념 강연 시간에 나누었던 얘기를 다시 꺼냈습니다. 파우저 교수님은 그때 한강의 [채식주의자] 얘기를 했습니다. 자신은 영어판과 일어판으로는 이미 읽었고 한글로는 아직 안 읽었는데 아마도 원작인 한글판은 영어로 쓰여진 작품과는 사뭇 느낌이 다를 것 같다고 했습니다. 문화의 차이가 번역에도 나타난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그날 한국어판도 읽어보시라고 제가 즉석에서 책을 한 권을 사드렸습니다. 이렇게 되면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3개국어로 그 작품을 다 읽은 사람은 파우저 교수님이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그리고 다시 가을의 술자리. 윤혜자 씨는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소재로 한 강연을 기획하고 있었습니다. 모국어인 영어는 물론 일어와 한국어에도 능통한 파우저 교수님이 세 나라 언어로 읽은 소설의 차이점과 공통점에 대해 이야기하며 번역의 본질을 짚어보는 특강을 해보면 매우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그에 대해서는 파우저 교수님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구요. 마침 저와 윤혜자 씨가 운영하고 있는 독서모임 '독하다 토요일' 시즌 2가 끝나가고 있었는데 시즌 3을 시작하기 전에 오픈 특강을 한 번 하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즐거운 작당이었습니다. 결국 파우저 교수님은 다음 해 봄 어느날 특강을 약속하고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정말로 봄이 왔고 파우저 교수님도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두 번째 토요일인 2019년 5월 11일 토요일, 광화문과 서소문 사이에 있는 '청춘여가연구소'에 모였습니다. 파우저 교수님의 특강 '[채식주의자]를 한, 영, 일로 읽다!'라는 특강을 듣기 위해서였죠. '독하다 토요일'은 회원제로 운영하는 모임이라서 늘 7~8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책을 읽고 토론을 하다 헤어지곤 했는데 이 날만큼은 써클의 문을 열어 회원이 아닌 분들도 참석할 수 있게 했습니다. 보다 많은 분들이 모처럼의 좋은 강연을 접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습니다. 윤혜자 씨와 저는 간식을 사들고 피어선빌딩 10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오후 2시가 지나자 한 둘씩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임기홍 씨나 서동현 씨, 손연영 씨, 김성희 씨 같은 기존 회원들도 있었고 예주연 씨, 콜린 마샬 씨, 김수진 씨처럼 처음 뵙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3시 10분 전쯤 로버트 파우저 교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먼저 윤혜자 씨가 나와 오늘 강연을 기획하게 된 이야기와 독하다 토요일이라는 모임에 대한 짧은 소개를 했습니다. 그리고 장소를 대여해 준 '청춘여가연구소'의 정은빈 대표가 나와 피곤하고 외로운 현대사회에 이런 장소에서 같은 관심사를 나눔으로써 사람들을 '사회적인 가족'으로 엮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사업을 시작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도 짧게 코멘트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 제가 나가서 다시 독하다 토요일을 하게 된 이유를 시작으로 제가 요즘 토요일마다 벌이고 있는 다른 기획들(토요 식충단, 토요워킹퀸 등)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사전 스피치가 두 번이나 있었고 파우저 교수님도 뒤에 앉아 있는 상태였기에 제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분들은 없었습니다. 비난과 조바심의 눈초리를 의식한 저는 서둘러 이야기를 끝맺고 파우저 교수님에게 강의를 부탁드렸습니다.

파우저 교수님은 1997년에 [한국문학의 이해]라는 책을 영어로 번역하던 에피소드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당시엔 문학이론을 번역하는 일이 드문 시기였고 그 책은 현대와 고전을 아우르는 '문학 사례'가 많았는데 그걸 번역하면서 번역의 어려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Beautiful English'이라는 정의에 대해 회의를 품게 된 파우저 교수는 번역 작품도 일정한 문학성은 가지고 있어야겠지만 그게 반드시 영어권의 고전작품들 같은 품격의 형태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 - 본인은 그것을 '1인야당'이라고 표현- 을 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당장 한국에 와서 생활하면서 부딪히는 '물은 셀프' 같은 표현을 어떻게 번역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죠.

파우저 교수님은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13년 정도 살면서 언어를 다루고 가르쳤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전공이 문학이면서도 윤혜자 씨와 냈던 책은 인문서인 [미래시민의 조건]이었죠. 그 후에 나온 두 권의 책도 마찬가지였군요. 그러다보니 문학이나 번역에 관해 이야기를 듣는 것은 거의 처음이었습니다. 파 교수님(트위터 시절부터 유명했던 그의 애칭)은 '오바마 케어' 가입 안내서나 세금 보고서 같은 글을 번역할 때는 문학성이 필요 없지만 문학작품을 번역할 때는 정확성과 더불어 문학성도 겸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오에 겐자부로가 노벨문학상 수상 수락연설에서 읽었던 유명한 글 - [설국]으로 먼저 노벨상을 탔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수상소감을 끌어와서 더 화제였죠 - '일본은 회색지대다'라는 말처럼 번역도 정확성과 문학성이 조화를 이루어야지 극단적인 논쟁은 곤란하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일본 학생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설국]의 첫 문장을 예로 들었습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우리는 한글로 먼저 읽어 그 뜻을 파악하고 일어, 영어로 된 문장들을 차례로 살펴보았습니다. 파 교수님이 뭔가 번역에 이상한 게 없느냐고 물으니 당장 '눈의 고장'이라는 표현이 어색하다는 반응이 튀어나왔습니다. 국경이라는 말의 뜻도 애매하다는 질문이 이어졌구요. 파 교수님은 일단 에도시대에 막부 별로 나뉘어져 있던 일본 지역의 역사를 이해해야 '국경'의 뜻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을 비롯해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라는 표현이 어떤 풍경을 얘기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을 했고 그런 저런 사정들을 생각하면서 다시 한 번 읽어보면 우리말이나 일어에 비해 영어로 된 문장에서는 '드라마'가 사라지고 건조한 묘사만 남는 특징이 있음도 지적했습니다. 이는 번역 언어로 사용될 때 각각의 언어가 갖는 기본적인 태도에 대해서도 방향성을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예였습니다. 파 교수는 '밥상이 들어왔다'라는 문장이 영어로 번역될 때는 과연 어떤 문장이 되어야 하는가를 물어서 모두들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영어로 하면 식탁이 방으로 걸어들어가는 모습이 연상되어서였죠. "형이 술을 천천히 마셨다."라고 말할 경우도 형을 'Brother'라고 써야할지 'hyeong'이라고 써야할지 고민되는 지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Deborah Smith의 '오역 논쟁'에 대해 얘기를 꺼냈습니다.

드보라 스미스는 교수가 아닌 전문 번역가라는 점이 특이한 지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인물이었는데 그것과는 상관 없이 소설 내용 전체를 너무 '영국화 했다'는 점이 지적을 받았고 이는 번역자 자신도 어느 정도 시인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백 퍼센트 정확한 번역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결국 번역이란 것은 어느 정도 '창의적'이어야 함을 주장했는데 파 교수는 그에 대해 뭐라 말하기 힘든 입장이었음을 고백했습니다. 미국 출신의 백인 남성인 파우저 교수가 드보라의 편을 들면 역시 백인은 어쩔 수 없어, 라고 생각하게 되기 쉽고 반대파의 입장에 서면 한국에서 오래 생활한 사람이라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같이 번역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콜린 마샬 씨를 괜히 끌어들여 웃음을 자아내게 했습니다. 파 교수의 지목을 받은 콜린 마샬 씨는 '한국어로 쓰여 있는 소설에서는 아내를 약간 비하하는 듯한 남편의 심리가 잘 나타나 있는데 번역을 하면서 그런 뉘앙스들이 다 사라진 게 아닌가'라는 날카로운 의견 및 질문을 펼쳤고 파 교수도 맞다고 하며 그래서 "여보,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여기서?"라는 문장을 영어로 옮겼을 때 여보를 'Darling'이라고 옮긴 것이 얼마나 엉터리인지를 예로 들었습니다. 똑같은 'Darling'이라도 맥락에 따라서는 사랑스럽게 들리기도 하고 비꼬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는 것이죠(일어로는 마초적인 게 느껴지고 영어로는 신사가, 한국어로는 교양 있는 남편이 느껴진다 했습니다). 영국식과 미국식을 오가며 목소리 연기를 펼치는 파 교수님 덕분에 강의를 듣던 사람들이 모두 깔깔깔 웃었고 '달링'은 단박에 우리들만의 유행어로 등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no'라는 단순한 단어 하나에 무려 88개의 각각 다른 의미가 들어 있다는 학계의 보고를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에서 한국어를 가르쳤던 파 교수는 어미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가르치는 게 정말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했던 교수법에 대한 얘기도 들려주었습니다. 말끝을 '~해요'"로 처리하는 이른바 '욘사마적 교과서'라고 한다나요. 아무튼 비빕밥과 'Mixed Rice'는 다른 것인데 파 교수는 어중간하게 타협을 하느니 차라리 'Bibimbab'이라 표기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리고 드보라 스미스의 [채식주의자] 논쟁을 다룬 뉴요커의 기사를 인용하며 번역문장을 왜 읽느냐로까지 생각의 지평을 넓혀갔습니다. 자기는 문학을 좀 가벼운 느낌으로 즐기고 싶은데 요즘 미국에서는 다소 '있어보이려는 의도' 때문에 문학이 소비되기도 함을 얘기했습니다('Political Correct).

강의가 마무리될 때쯤 소설 등단 준비를 하고 있는 김하늬 씨가 '드보라 스미스가 번역을 할 때 한국적인 특수 상황 - 남편의 지나친 여성 비하, 다른 사람들의 억압적 강요 - 들을 모두 약화시킴으로써 오히려 서양 심사위원들이 선택당하기 쉽게 만든 것은 아닐까?'라는 날카로운 질문을 했습니다.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라 보충 질문을 더했습니다. 번역자가 작품을 그토록 두리뭉실하게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강이라는 작가가 쓴 원작의 힘이 너무 강력해서 수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라고. 그림을 그리는 이창희 씨는 더 나아가 드보라가 수상을 하지 못할까봐 의도적으로 작품을 '훼손'한 것은 아닐까 의심하면서 만약에 그렇다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파 교수는 그 질문들에 어느 정도 동감하면서도 모르긴 몰라도 작가가 여성이라 그에 대한 배려도 조금은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를 슬쩍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상이라는 게 항상 시대성을 반영하기 마련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습니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자꾸 드보라를 공격하는 듯한 분위기로 흐르니 김하늬 씨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번역 때문에 좋았던 점에 대해서도 살펴보자'라는 제안을 했고 파 교수가 그 애기를 받아서 번역의 훌륭한 점에 대해서 도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까도 얘기했지만 'Good English'라는 명목 하에 원작을 바꾸어 '좋은 작품'으로 만드는 번역은 어떠한 경우에도 반대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마지막엔 이창희 씨의 소개로 왔다는 미술학 전공자 황규원 씨가 파 교수에게 작품을 세 언어로 모두 읽은 사람으로써 언어별로 그려지는 그림이 어떻게 다르던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정말 흥미진진하고 즐거운 강의였고 수강생들의 열의도 대단했습니다. 보통 강의가 시작되고 시간이 좀 흐르면 흐트러지기 마련인데 이날 모인 사람들은 끝나는 순간까지 단 한 사람도 주의가 흐트러지지 않고 모두 반짝이는 눈으로 강의를 경청했습니다. 그리고 강의 중간 PPT 화면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다 카메라로 찍어서 분위기를 흐리는 사람이 하나쯤 있기 마련인데 이날은 열심히 필기는 해도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어서 기뻤습니다.

뒷풀이는 윤혜자 씨가 추천을 했는데 저도 한 번 가본 적이 있는 서대문의 '고향식당'이라는 음식점이었습니다. 가게는 오래되어서 좁고 지저분했지만 음식만큼은 정말 맛있는 곳입니다. 특히 주인 아주머니가 직접 담근 김치가 일품이고 제육볶음도 무시무시하게 두꺼운 곳이었습니다. 총 13명이 앉아 술과 음식을 마음껏 즐기고 일어섰는데 일인 당 1만6천 원밖에 나오지 않아서 모두들 깜짝 놀랐다는 후문입니다. 음식점을 나서 집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고 파 교수님을 비롯한 몇몇은 다시 버스를 타고 성북동으로 이동해 '성북동 만섬포차'에서 세꼬시와 계란말이 등등을 시켜 이차를 하고 헤어졌습니다. 좋은 강의와 좋은 청중이 만나 서로 행복해했던 밤이었습니다. 윤혜자 씨와 파 교수님은 기분이 너무 좋은 나머지 즉석에서 뭔가 또 모종의 일을 꾸몄는데, 아직은 발설할 단계가 아니므로 당분간은 비밀에 붙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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讀하다 토요일 - 황석영의 <손님>을 읽던 날

봄이 서서히 오고 있습니다. 차갑기만 하던 보도블럭이 점점 녹고는 있지만 아직도 바람은 차갑기만 합니다. 아마도 우리가 사는 세상이 퍽퍽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세상이 퍽퍽하든 어떻든 책을 읽는 소소한 즐거움은 계속되어야겠지요. 2019년 2월 16일 토요일에 서소문에 있는 '청춘여가연구소'에서 讀하다토요일 2기 네 번째 모임이 열렸습니다. 이번에 함께 읽을 책은 황석영의 <손님>이었습니다. 이 책을 예전에 꼼꼼히 다 읽고 이번에 또 한 번 읽은 저는 책상 앞에 앉아서 전날 봤던 영화 <가버나움>에 대한 리뷰를 스마트폰으로 쓰고 있었습니다. 윤혜자 씨와 제가 오는 길에 빵을 좀 사왔는데 조금 늦게 온 김인혜 씨도 홍제시장에서 샀다며 순대와 떢볶이를 가져오셨습니다. 그래서 다들 기뿐 마음으로 빵과 떢볶이 순대를 먹으며 책을 읽었습니다.

<손님>은 6.25사변 때 좌익 세력과 기독교 세력이 황해도 신천(信川)에서 벌인 우리 민족들끼리의 살육전 이야기입니다. 미국에 사는 류요한이라는 목사의 목소리로 시작하는 이 소설엔 특이하게도 유령들이 등장하죠. 1950년 경에 황해도에서 억울하게 죽은 동네 머슴 이찌로, 순남이 아저씨 그리고 얼마 전에 미국에서 죽은 류요한의 형의 류요섭 등이 수십 년만에 고향땅 황해도로 향하는 류요섭의 여행에 동행하며 대화를 주고받음으로써 뒤늦은 살풀이굿을 펼치는 것입니다.

이 책을 읽은 임기홍 씨의 첫 느낌은 '어렵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책 내용이 너무 생소하고 형식이 특이해서 그런 면도 있었지만 우리가 전혀 모르던 내용이라 충격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전쟁 때 여기저기서 불행한 일이 있었다는 건 어렴풋이 들어 알고 있었지만 북한에서 그런 학살이 있었다는 건 왜 의심조차 해보지 않았을까 하는 뒤늦은 자책이 일었던 것입니다. 우선은 반공교육의 폐해가 아닐까 생각했다며 자신은 황석영의 소설은 처음인데 아마 이번 기회가 아니면 이 책도 읽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윗세대들이 어떡하든 자식들에게 이 얘기를 안 하려 한 것은 어쩌면 떳떳하지 못한 역사에 대한 공범의식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어쩌면 이 책에는 우리 세대가 왜 이런 상황에서 살아가야만 하는가에 대한 해답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고 합니다. 뒤늦게라도 이런 책을 읽음으로써 누군가를 이해하거나 미워하거나 알고나 당하자, 라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죠.

윤혜자 씨는 우리 모임에서 가장 젊은 김하늬 씨의 소감이 가장 궁금하다고 했습니다. 자신은 어렸을 때부터 반공포스터를 그리고 교련이나 간호교육 따위를 받은 세대지만 이십 대인 김하늬 씨는 그런 분위기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김하늬 씨는 어떻게 얘기를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일단 자기 취향도 아니고 잘 모르는 이야기라 쉽게 공감하기 힘들었다면서 민족의 비극이라기보다는 진영간의 다툼이라는 면에서 지금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너무 슬프고 잔인한 이야기에 할 말을 잃게 되지만 따져보면 이권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닌가 하는 냉정한 시각이 발동했던 것입니다. 유령들과이 서로 대화하면서 화해에 이르는 모습들에도 쉽게 공감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그런 게 바로 씻김굿 아니겠느냐고 했지만 이승에서 서로 실컷 싸우다가 내세에 이르러 겨우 화해하고는 다 잘 될 거야, 라고 하는 건 종교든 정치든 자기 편한 대로 갖다붙이는 게 아닌가 하는 입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서동현 씨는 지금까지 우리가 함께 읽었던 소설가들에 비하면 '헤비급 선수'를 만난 기분이라고 했습니다. 레벨이 다르다는 것이죠. 충분히 공감할 만한 소감이었습니다. 끝까지 읽다보니 김성종의 [여명의 눈동자]도 생각난다고 했습니다. 맑스주의와 기독교가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이땅에 들어와서 얼마나 큰 격랑을 만들어냈는지 절절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손님'이라는 제목은 그런 의미에서 너무나 적확한 표현이었습니다.

김인혜 씨는 우리나라에 처음 기독교가 들어온 게 황해도였고 당시 젊은이들이 기독교와 함께 일본에서 자생했던 사회주의와도 만나게 되면서 얼마나 혼란스럽고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을 이 책을 읽으며 더 하게 되었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차라리 조선시대에 농지개혁을 했더라면 이런 비극은 없었지 않을까 하는 흥미로운 시각도 내보였습니다. 윤혜자 씨가 황석영의 <손님>을 읽으면서 현기영의 <순이삼촌>도 같이 읽어보면 좋겠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때 얘기들은 조정래의 <태백산맥>이나 이병주의 <지리산>등에서도 맥락을 찾을 수 있을 것이란 얘기였습니다. 한집에 사는 저와 윤혜자 씨는 이번에 한 권의 책을 번갈아 읽었는데 각자 읽으며 그은 밑줄이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해서 누가 어떤 구절에 밑줄을 그었는지 따져보는 재미도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우리가 학교 다닐 때 근현대사에 대한 교육을 수박 겉핧기 식으로 배운 것에 대한 분노를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당신에 대해 우리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죠. 하지만 김하늬 씨는 '어제 <오이디프스>와 <안티고네>를 읽었다. 책을 읽다보면 .주인공들이 왜 그렇게 행동했나보다는 작가가 어떤 입장에서 이 글을 쓰게 되었나를 더 생각하게 된다'라고 했습니다. 객관적인 기록이라고 하더라도 누군가의 입장에 치우칠 수밖에 없으니 읽는 이의 입장에서는 불편한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였습니다. 저는 '불편해도 할 수 없다. 그것이 작가에게 필요한 기능 중 하나 아니겠느냐'라고 말했지만 쉽게 합의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 김하늬 씨가 지난 목, 금, 그리고 토요일인 오늘까지 특정 종교에 시달린 사연에 대해 얘기하다가 얼마 전 윤혜자 씨가 스타벅스에서 만난 - 남녀가 마주 앉아 역사와 신념에 대한 얘기를 진지하게 하다가 특정 종교에 대한 충고까지 하는 걸 보고 기가 막혔다 - 얘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학교 선생님인 임기홍 씨가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들 중 만났던 여호와의증인, JMS, 통일교, 신천지 등등의 다채로운 종교인 경험에 대해 얘기하면서 배가 또다시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이제 모임을 끝내고 애프터를 하러 갈 시간이 되었다는 뜻이겠죠.

이차는 서울역 근처에 있는 닭한마리집으로 갔었고 삼차는 또 근처에 있는 작은 술집(이름이 생각 안 납니다)으로 가서 배가 터지게 술과 안주를 먹었습니다. 다음 달엔 정지돈의 소설집 [건축이냐 햑명이냐]를 읽기로 하고 헤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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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들어 처음 열리는 '독하다 토요일' 모임이지만(시즌2로는 세 번째) 감기나 독감, 과중한 업무 등으로 인해 멤버들의 결석이 많은 날이었습니다. 윤혜자 씨는 간밤의 격한 음주와 그에 따른 숙취로 인해 도저히 모임에 참석하지 못할 컨디션이었고 서동현 씨도 독감이 심해서 집에 누워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정아름 씨는 요즘 회사의 과중한 업무 때문에 토요일 오전 내내 기절하듯이 자고 있었던 모양이었습니다. 손영연 씨도 집안에 어려운 사정이 있어서 계속 참석을 못하는 형편이었구요. 아무튼 저조한 출석율을 예상하며 제가 1시 40분쯤 '청춘여가여연구소'에 도착했을 때 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정은빈 대표는 물론 다른 회원 아무도 도착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설상가상 저는 간밤에 금호동 '오남매곱창'이라는 술집에 스마트폰을 두고 왔는데 그 가게는 저녁에나 문을 열어서 아무런 커뮤니케이션 도구 없이 문 앞에 서 있어야 했던 상황이었구요.  노트북으로 카톡을 확인하고 싶어도 안으로 들어가 와이파이 번호를 알아내야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스마트폰이라는 도구에 매여 사는지 다시금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1층에 있는 커피숍으로 가서 사정을 하고 전화기를 빌려 윤혜자 씨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습니다. 다시 10층으로 올라가 출입문에 메모되어 있는 정은빈 대표의 전번을 노트에 메모하고 1층 커피숍에 와서 또 전화기를 빌려 정 대표와 통화를 하고 나서야 출입문 비밀번호가 이미 카톡 메시지로 공유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스마트폰을 잃어버려서 카톡창을 볼 수 없는 상황을 설명하고 비밀번호를 받아서 10층으로 올라오다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진주 씨를 만났습니다. 

간밤에 파티를 열어서 조금 지저분하거나 음식 냄새가 날 수 있다고 했지만 올라와 보니 얘기 들은 것보다 그리 나쁜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곧 정 대표의 친구라는 분이 올라오시더니 주섬주섬 청소를 해주셨습니다. 진주 씨와 저는 이십 분 정도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킨 뒤 테이블 위에 있던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었습니다. 김하늬 씨와 김성희 씨, 임기홍 씨가 속속 도착해서 세 시 정도에는  다섯 명의 인원으로 조촐한 모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읽을 책은 구병모 작가의 [네 이웃의 식탁]이라는 장편이었습니다. 저는 작가의 전작인 [파과]를 재미있게 읽었고 또 세간의 평도 좋은 것 같아서 이 책을 추천했지만 결과적으로 좀 실망스러웠습니다. 윤혜자 씨도 같은 느낌이었는지 시즌1과 달리 책을 미리 읽어보지도 않고 도서목록에 올린 것은 주최자로서의 직무유기라며 저를 맹비난했습니다. 독하다 토요일 멤버들의 수준을 존중하라는 경고이기도 하죠. 

'꿈미래실험공동주택'이라는 곳에 입주해 살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인 장편소설 [당신의 식탁]에 대해 제가 '공동생활과 공동육아의 어려움을 보여주려는 작가의 의도는 성공했지만 그 의도가 성공하는 바람에 오히려 더 안 좋은 소설이 된 케이스'라고 했더니 김하늬 씨도 '용두사미 같은 소설'이라는 말을 꺼냈습니다. 시작은 매우 흥미로운데 서로의 성격이 부딪히고 사건이 생기는 과정에서 남은 것은 육아와 불륜에 대한 앙상한 이야기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정부의 주도 하에 공동주택에 들어가게 된다는 점에서는 어쩌면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자들의 도시]와 비슷한데 노벨상을 받은 그 작품과 달리 이 소설은 그저 현상과 반동만을 다룬 피상적인 이야기로 끝나버렸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야기가 공동주택 담 밖으로 나가지 못한 것 같다'라고 아쉬워하면서 식탁이 들어가는 제목도 참 잘 지었는데 작품은 그렇제 못한 것 같다고 했고 김하늬 씨도 동의하면서 특히 마지막에 수미쌍관 식으로 보여준 에피소드는 작가가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멋부림이 아닐까, 하는 제 대답에 편혜영의 [저녁의 구애]도 비슷한 플롯이 있는데 훨씬 세련되게 구현이 되었다며 역시 아쉬워했습니다. 

캐릭터들의 역할이 너무 정확하게 정해져 있어서 공감하기 힘들었다는 불만도 나왔습니다. 진주 씨는 시간이 없어서 다른 사람들처럼 세세한 분석까지 해가며 읽진 못했는데 아무튼 다 읽고나니 뭔가 허무하고 답답한 느낌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구병모 작가가 어디선가 공동체 생활을 경험하고 쓴  책이라는 얘기를 들었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제가 '그렇다면 공동주택생활이라는 게 육아든 삶이든 인간에게 좋은 대안이 되지 못한다, 라는 통찰이라도 나와야 하는데 이건 그게 아니라 '내가 어쩌다보니 재수 없는 애들을 떼로 만났어' 식의 개인적 경험담을 들려주는 수준으로 주저앉는 느낌이었다는 얘기를 했더니 임기홍 씨가 '똥통에 빠졌다고 한거죠'라고 거들어서 모두들 웃었습니다. 

김성희 씨는 새로운 부서로 발령이 나고 개인적으로도 부산한 일들이 많아서 책을 읽지 못하고 왔는데 오면서 앞부분을 조금 들춰보았다고 하면서 제목만으로는 우리가 비판하는 내요을 상상하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그만큼 제목을 잘 지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진주 씨가 결론이 너무 허무하다고 얘기하자 김하늬 씨는 작가들은 문제 제기만 잘 해도 그 의미가 있는데 이 작품은 문제 제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결책을 주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라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임기홍 씨는 이게 과연 소설인가? 라는 생각을 하면서 읽어다고도 했습니다. [82년생 김지영]처럼 아예 르뽀 형식을 깆춘 작품도 아니면서 작가는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민낯을 보여주려고 한 것 같은데 읽다보면 소설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겠고 정말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를 지경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정부가 주도한 공동주택사업이라는 게 처음엔 거창한 의도로 시작했는데 잘 안 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벌려놓은 사업이므로 꾸역꾸역 그것을 지속하기 위해 무리수를 두고, 거기서 갈등이 나와 사건이 만들어진다든지 하는 게 올바른 작법인 것 같은데 이 소설은 그런 인과관계를 파고들지 않고 그냥 그 내부에서 각각의 캐릭터들이 개인적 사연만 밀고 나가는 느낌이라는 것이죠. 

좋은 소재를 놓고 이 정도밖에 쓰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큰 작품이었습니다. 김하늬 씨는 김탁환 작가에게 들었던 '소설 특강'을 회상하며 사건이 일어나면 끝을 봐야지 도망가지 마라, 라는 얘기에 매우 공감을 했는데 이 소설은 그런 사건들을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후일담 식으로 처리한 것이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중요한 지적이었습니다. 김성희 씨는 시간이 없어서 앞부분에 나오는 효내 얘기만 좀 읽었는데 예전에 읽은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 같은 경우도 많은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 사는 이야기였지만 굉장히 인간미 있었는데 여기 모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너무 어렵다는 얘기도 했는데 저도 동감이었습니다. 재강, 단희, 여산, 교원, 상낙, 효내, 은오, 요진 등의 이름이 하나같이 세련되어서 누가 누군지 구분이 안 갈 지경이었으니까요. 

아무튼 너무 비난 일색이라서 지금쯤 작가의 귀가 꽤 간지럽겠다, 라는 얘기까지 하면서도 캐릭터에 대한 불만이 또 터져나왔습니다. 그러다가 작가가 너무 착해서 그런 것 아닐까, 하는 색다른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뭔가 일을 제대로 해내려면 좀 독하고 못된 구석이 있어야 하고 특히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는 얘기를 제가 꺼냈더니 그게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서  이병헌, 홍상수, 잭 니콜슨 등 자기 분야에서는 눈부신 업적을 이뤘지만 개인생활에서는 '악동'으로 소문난 캐릭터들에 대한 얘기가 가십처럼 흘러나와 한참 수다를 떨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제목은 참 좋은데 참 아쉬워, 라고 말하는 김하늬 씨와 차라리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처럼 한 사람 한 사람 연작소설로 썼으면 더 나았을 것을, 이라 말하는 김성희 씨의 대안 제시가 이어졌고 제가 작가는 좀 못된 구석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의 연장선으로 예전에 광고대행사 다닐 때 술자리에서 늘 동료들과 늘 하던 얘기인 '같이 일하고 싶은 놈은 바보와 개새끼 중 누구를 고르겠냐?' 를 가지고 또 한참 수다를 떨었습니다. 배가 산으로 가서 급기야 제가 예전에 조폭 출신의 건설회사 대표와 회의 끝내고 점심 먹으러 갔다가 그 대표가 "아무거나 자유롭게 시켜요. 여긴 짬뽕을 잘 하지만. 난 짱뽕..."이라고 말씀하셔서 졸지에 여덟 명이 짬뽕 여덟 그릇 먹고 나온 이야기까지 하다가 허둥지둥 모임을 끝냈습니다. 

이날은 뒷풀이 모임조차 참여가 저조해서 다른 분들은 가고 김성희 씨, 진주 씨, 그리고 저 이렇게 셋이서 정동길 따라가다 있는 '장수회관'에 가서 국수전골에 소맥, 볶음밥까지 맛있게 먹고 마신 뒤 헤어졌습니다. 아마 읽은 책에 대해 비판적으로 얘기한 첫 번째 모임이 아니었나 합니다. 이런 날도 있는 거겠죠 뭐. 다음달에 읽을 책은 황석영이 [손님]입니다. 개인적으로 [무기의 그늘]과 함께 황석영의 역작이라고 생각하는 장편소설입니다. 다음엔 또 어떤 독후감들이 등장할지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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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2018년 12월 말일을 향해 달려가고 있네요. '독하다 토요일' 2기 첫 번째 모임은 서울파이낸스센터 지하 1층에 있는 이스트빌리지에서 열렸습니다. 메르스 사태를 다룬 김탁환의 [살아야겠다]를 읽고 많은 얘기를 나눴는데, 실제 있었던 비극적이고 어처구니 없는 사건을 다룬 사회파 소설이라 많은 회원들이 분노 때문에 책을 읽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는 소감을 털어놓을 정도였습니다. 책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제가 게으름을 피우느라, 또 개인사가 너무 버러이어티하다 보니 후기를 쓸 시간을 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어짜할 바를 모르고 앉아있다 보니 시간은 흘러흘러 두 번째 모임이 다가오더군요. 결국 첫 번째 모임 후기는 쓰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어쨌든 [살아야겠다]는 영화화가 결정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오고 있으니 다행이지요. 

2018년 12월 8일 오후 2시에 '독하다 토요일' 2기 두 번째 모임이 열렸습니다. 이번엔 서소문에 있는 '청춘여가연구소'에서 일곱 명이 모여 이승우의 [가시나무 그늘]을 읽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저희 동네에 '파란대문집'이라는 공간이 생겨서 우연히 들렀는데 거기서 그날 만난 사람들 중 한 분이 청춘여가연구소 소장인 정은빈 대표였던 것입니다. 그런 연유로 서소문 피어선 빌딩에 있는 이 공간을 독하다 토요일의 새 아지트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건축을 전공한 서동현 씨의 설명에 의하면 이 건물은 1971년 미국인 선교사가 지은 아파트였다고 합니다. 당시 최고급 건물이었고 차가 건물을 통과해 현관 앞까지 들어와서 입주민이 비를 맞지 않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독특한 구조라 입구를 찾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정말 건물로 들어가는 메인 출입구는 필로피를 통과해야 그 모습을 드러내더군요. 예전엔 아파트였지만 지금은 개인 사무실이나 NGO들의 메카가 되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11층에 있는 '청춘여가연구소'에 들어서니 널찍한 공간과 커다란 창문이 눈에 띄는 훌륭한 공간이었는데 특히 창밖으로 돈의문 박물관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는 멋진 풍광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저희들은 커피 머신이 제공하는 따뜻한 커피를 한 잔씩 들고 넓다란 공간 아무 데나 마음에 드는 곳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읽은 책 [가시나무 그늘]은 제겐 [생의 이면], [식물들의 사생활], [사랑의 생애]에 이어 이승우 작가 작품으로는 네 번째 소설이었고 나중에 생각해보니 예전에 여행 가면서 헌책으로 사서 한 번 읽었던(읽다가 그치긴 했지만) 소설이기도 했습니다. 성북동으로 이사를 오면서 처리한 책 속에 들어 있었던 것 같은데, 아마도 그만큼 다시 읽기는 힘든 책이라 생각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 책을 읽자고 추천한 사람이 또 저란 걸 생각하면 저는 참 일관성 없는 인사인 것 같습니다. 

제가 헌책을 사서 읽었듯이 이 책은 절판이 되어 청소년판 아니고는 책을 구하기 힘들었습니다. 덕분에 회원들이 삽화가 들어 있는 청소년판을 저마다 들고 나타나는 진풍경이 연출되었습니다. 한 분은 책을 구할 수가 없어 남산도서관에서 빌려왔다고 했습니다. 김하늬 씨는 작가의 심각한 문체 때문에 다자이 오사무의 [금각사]나 [인간실격] 같은 작품들이 떠올랐던 것 같습니다. 다만 일본 작가들이 인간 본연의 부조리에 천착한다면 이승우는 시대상이 배경으로 깔린다는 게 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조지 오웰의 [1984]나 마누엘 푸익의 [거미여인의 키스]도 연상되었다고 했습니다. [가시나무 그늘]이 훨씬 뒤에 나왔으니 아마도 작가가 이 책들을 다 읽어보지 않았을까 하는 개연성 있는 추측도 전해주습니다. 작가가 신학대학을 나와 사유가 깊을 것이라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서른두 살에 이런 작품을 썼다는 것은 놀랍다는 평도 내놓았습니다. 진행이 세련되었고 짜임새도 좋아서 지금 읽어도 전혀 올드하지 않다는 의견에 저도 찬성을 표했습니다. 

개, 가시나무, 몰록으로 이어지는 요소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것들에 대해 때로는 친절하게 때로는 불친절하게 자세를 취하는 작가의 설명도 적절해 읽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김하늬 씨가 다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롯데의 편지를 인용한 것 등은 존 '중2병'스럽게 느껴진다고도 했고 저는 작품 전체의 분위기만 생각하면 코난 도일의 [바스커빌의 개]도 떠오른다는 엉뚱한 소리를 했습니다. 

윤혜자 씨는 청소년판으로 책을 대하니 뭔가 정답을 찾아야 할 것 같은 강박이 생기더라고 하며 웃었습니다. 청소년, 하면 뭔가 시험이 떠오르는데 이 책을 가지고 시험 문제를 내면 내는 것 자체가 무척 힘들 것 같다는 김하늬 씨의 농담에 오히려 정답이 없어야 할 것이라며 자기는 청소년이라는 단어 때문에 책 읽는 새로운 방법을 소환한 느낌이라며 지금까지 독하다 토요일에서 다룬 책 중 가장 흥미로운 독서였다는 말도 했습니다. 책에서 이야기하는 힘, 권력, 집단과 그에 비해 도드라지는 개인의 나약함 등을 생각하면 마음이 굉장히 아프고 씁쓸했고 마지막 희규의 아버지를 암시하는 썬글라스의 사내 대목에서는 이 소설이 격동의 시대를 얘기하고 있지만 결국은 지금의 이야기로 확장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 ㅇ리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이런 저런 사건과 현상들에 대해 얘기하다가 '윤창호법'에 대한 얘기까지 주제가 뻗어나가기도 했습니다. 

죽기 전에 진실과 정의에 대한 믿음을 지켜낼 수 있을까 고민하던 주인공이 마지막에 거대한 사건에 그냥 엮여버리는 것을 보면서 하이어라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 본연의 슬픔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고등학교 때 이 작품을 읽었다면 과연 이런 걸 다 이해할 수 있었을까, 라는 의문을 던지자 고등학교 선생님인 임기홍 씨는 그 나이엔 어떤 문제든 이해하는 애들과 못하는 애들이 공존할 수밖에 없다며 웃었고 김하늬 씨가 아마 [어린 왕자]처럼 연령대별로 다 다른 느낌일 것이라는 얘기도 했습니다. 윤혜자 씨는 사람들이 명화라고 하는 그림들을 책이나 다른 매체로 보았을 때 그게 뭐가 좋은데? 라고 생각했다가 막상 루브르 박물관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진품과 마주쳤을 때 느꼈던 경이로움을 이 소설 읽으면서도 비슷하게 느꼈다는 다소 의외의 고백을 했습니다. 이승우가 좋은 소설가라고 불리는 이유를 이번 책에서 깊게 느꼈다는 것이죠. 

책을 읽은 사람들은 모두 희규가 불쌍하다고 아우성을 쳤는데, 그 와중에 서동현 씨는 주문한 책을 어제 택배로 받는 바람에 결국 책을 읽지 못하고 왔다며 아쉬워 했습니다. 그는 독하다 토요일에서 읽은 책 중 제일 재미 있었던 건 [뜨거운 피]였다고 했습니다. 그 책에 '진실은 구리로 된 훈장'이라는 대목이 인상 깊었는데 그건 어떤 가치든 무의미하다는 부정적인 인식이며 그래서 사람들은 안전해지고 싶은 욕구 때문에 교회를 다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제시했습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분리불안'은 종교 뿐 아니라 유행하는 롱패딩, 유명한 맛집, 유행어, 실시간 검색어 등등 우리 삶 전반에 걸쳐 존재함으로써 그것 때문에 사는 것 자체가 점점 더 피곤해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김성희 씨는 책의 서문이 매우 좋았다고 했습니다. 작가가 인용한 에리히 프롬의 글도 인상 깊었구요. 책을 읽다보면 우리는 모두 지배당하는 것에 길들여져 있음을 깨닫게 되어 슬프고 그런 인물의 대표격으로 등장하는 희규가 애처로우면서도 또 한긋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소설에 등장하는 개에 의한 죽음이라는 장치- 명회가 이상해지자 죄책감을 느낀 희규도 그를 모방해 똑같은 방법으로 몸을 던지는 - 가 '길들여진다'는 것의 의미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으며 젊은 나이에 남자들끼리 주고받는 이런 기이한 우정의 구조를 혜진이가 공감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소감도 밝혔습니다. 

임재섭 씨는 단체와 개인의 관계에 대해 다룬 이 소설을 읽으면서 군대 시절을 많이 떠올리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내가 군대니까 이렇게 구는 거지 밖에서 만났으면 나도 좋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식으로 말하는 것인데 결국 그런 말이나 표현들이 집단의 억업된 구조가 만들어내는 부조리가 아닌가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임재섭 씨가 군대 얘기를 하니까 갑자기 불행했던 우리의 현대사가 필름처럼 휘리릭 지나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혜진은 희규의 수첩을 들고 다녔을까, 하는 김하늬 씨의 질문부터 시작해 희규는 왜 찌질하게 혜진에게 '사랑합니까?'라고 두 번이나 물어봤는지에 대한 해답들이 중구난방으로 쏟아졌습니다. 남자는 안 변 하는 것 같다,  젊은 베르테르 때부터 그랬다, 라고 말하는 김하늬 씨. 그냥 내 옆에 있는 여자를 좋아하는 게 남자의 속성인 것 같다, 라고 말하는 임기홍 씨. 후진 소설 같았으면 둘이 여관에서 가서 잤을 텐데 안 그래서 다행이었다, 라고 말하는 윤혜자 씨. 임기홍 씨가 모든 남자의 실존은 '이 여자가 나를 좋아하나?'라는 주제에서 떠나지 못한다고 말해 다들 배꼽을 잡고 웃었습니다. 

그 밖에도 희규를 괴롭히던 40대 사장을 여성으로 선정한 이유에 대한 토론도 있었고 주인공의 캐릭터 변화 때문에 청소년 문학으로 선정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있었습니다. 특이한 것은 삽화에 대한 소감들이었는데 모든 삽화에 등장 인물들의 표정이 없이 텅 비어 있는 게 책의 주제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느낌이라 좋았다는 중평이었습니다. 깨달을 만하면 끝나는 마지막에 대해서는 좋았다, 아쉬웠다, 의견이 엇갈리기도 했고 전체적으로 좀 긴 단편소설 같다는 얘기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올해의 책'으로 꼽을 만하다는 긍정적인 결론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관념적인 면이 많으면서도 작가가 잘 짜여진 블록처럼 소설적 장치들을 많이 마련해 놔서 읽기에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뜨거운 피] 얘기로 다시 돌아가서 만약 이 소설을 영화할 경우 주인공 희수 역으로 누가 가장 잘 어울리냐에 대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영화배우 박신양, 이병헌, 박휘순 등이 물망에 올랐다가 아이고, 다 부질없다, 라는 누군가의 일갈에 모임을 끝내고 이차 장소인  광화문 '안성또순이'집에 가서 먹고 마시고 놀다가 헤어졌습니다. 다음 모임인 2019년 1월 12일엔 구병모의  [네 이웃의 식탁]을 읽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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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동에 있는 연희문학창작촌은 참 좋은 곳이더군요. 우리나라 현역 작가들이 들어와서 일정 기간 작품을 쓰고 가는 일종의 레지던스였는데, 우선 조용한 동네에 자리 잡고 있는 벽돌 건물이라 고전적인 느낌이 났고 녹음이 우거진 건물들 사이로 난 산책로는 걷는 사람의 마음을 가라앉혀 주는 곳이었습니다. 2018년 10월 13일 토요일 오후, 연희문학창작촌 안에 있는 <책다방 연희>라는 곳에서 '독하다 토요일'의 일곱 번째 모임이 있었습니다. 지난 여섯 번은 한 달에 한 번씩 회원들끼리 대학로 카페 겸 서점인 '책책'에 모여서 한국 소설들을 읽었는데요(권여선의 [안녕, 주정뱅이] -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 - 한강의 [흰] - 김언수의 [뜨거운 피] - 배명훈의 [안녕, 인공존재!] -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이번엔 번외편이자 오픈 모임으로 김탁환 선생을 모시고 그의 소설 [이토록 고고한 연예]를 읽기로 했던 것입니다. 

저와 윤혜자 씨가 페이스북을 통해 공지를 했고 소설가 김탁환 선생도 따로 공지를 해서 많은 분들이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2시부터 모여서 한 시간 동안 묵독을 하고 3시부터 행사를 시작하기로 했었지만 장소가 바뀌어서 그런지 많은 분들이 지각을 했습니다. 김하늬 씨 같은 경우는 뒷문 쪽으로 오는 바람에 책다방 연희로 들어오질 못해서 고생을 했구요. 2시 40분 경에 김탁환 선생이 와서 같이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조금 더 사람들을 기다리다가 3시 10분경에 제가 인사를 하며 행사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독하다 토요일'은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한 시간 정도 미리 정해진 책을 각자 가져와 묵독하고 그 이후에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인데 모임의 모토가 '너무 열심히 하지 말자'라는 얘기를 인사말 삼아 했습니다. 우리가 문학하는 사람들도 아니고 뭔가 이루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니 너무 심각한 토론을 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 저의 처음 생각이었고 아직은 그런 생각이 모임에서 통용되는 것 같아서 좋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모임이 끝나면 얼른 같이 술을 마시러 술집으로 몰려간다고 했더니 다들 웃으셨습니다.  

'우리는 왜 소설을 읽어야 하는가'라는 제목으로 김탁환 선생이 강연을 시작하기 전에 [이토록 고고한 연예]에서 감명 깊었던 구절을 낭독해보는 코너가 있었습니다. 정아름 씨가 나와서 87페이지 부근에 있는 달문이 인삼 장사하는 대목을 읽었고 572페이지 부분도 좀 긴 내용이지만 읽었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제가 203페이지쯤 달문이 선배 재인들을 만나 산대놀이로 번 돈을 몽땅 나눠주고 나서 모독과 나누는 대화를 읽었습니다. 

김탁환 선생은 자신이 쓴 문장을 남이 읽는 걸 들을 때마다 묘한 감정이 든다고 말문을 열었습니다. 독자는 인상 깊은 부분이라며 낭독을 하는데 막상 작가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힘을 주었던 대목을 찾아 읽어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이죠. 작가와 독자의 입장이 그만큼 다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소설을 읽어야 하는가?'라는 얘기는 다른 데서는 해본 적이 없다고 하면서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김탁환 선생에겐 [이토록 고고한 연예]라는 작품이 어떤 분기점이 된 것 같습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작품임을 넘어서 이제 '달문의 마음'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까지 가지게 되었다고 하니 말입니다. 앞으로 10년 정도는 계속 달문의 마음으로 '사회파 소설'을 계속 써내려갈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달문이 예술에 임하던 자세로, 달문이 사람들을 만나던 자세로, 그리고 나아가 달문이 인생을 살아가던 그 눈부신 자태로. 

그러기 위해서 일단 소설가로 살아가는 것 이외에 모든 것을 정리했다고 합니다. 작업실도 너무 커서 크기를 줄이고, 영화쪽 만나던 사람들도 대폭 정리했고(선생의 작품이 영화화 되는 경우가 많으니까), 칼럼이나 에세이도 안 쓰는 걸 원칙으로 정했다고 했습니다. 강연도 도서관 강연 말고는 안 하기로 하고요. 쉽게 말하면 돈이 되는 건 거의 다 안 하기로 한 것인데 ‘이게 다 달문 때문’이라며 웃었습니다. 가히 마루야마 겐지가 산속으로 들어갈 때 세웠던 결기만큼 김탁환의 마음가짐도 (온화한 성품과는 달리) 매우 분연했습니다. 

오는 10월 22일에 나오는 새 소설 [살아야겠다] 얘기를 했습니다. 메르스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토록 고고한 연예]보다 20페이지 정도 더 두꺼운 책이라 했습니다. 추천사를 써준 심리 기획자 이명수 선생이 '해머 같은 소설'이라고 했다지요. 우선 두께 때문에 그랬겠지만 아마도 프란츠 카프카가 얘기한 그 '망치'까지 중의법으로 표현한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36살의 주인공은 실존인물이었는데 마침 오늘이 그의 생일이라고 했습니다. 김탁환 선생은 학생들을 지도할 때도 언제나 주인공의 나이와 생일 등을 꼭 물어본다고 합니다. 구체적인 인적사항들이 촘촘히 정해져야 비로소 소설의 등장인물은 유일무이한 존재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걸 부여받은 캐릭터와 그렇지 않은 경우는 볼륨 자체부터 다르니까요. 예전에 허 샤오시엔 감독이 줄리엣 비노쉬와 <빨간 풍선>이라는 영화를 찍을 때 카메라 프레임 안으로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줄리엣 비노쉬의 남편 직업이 교수라는 것과 예전에 부부 사이에 있었던 자잘한 에피소드들까지 설명해주더라는 애기를 듣고 감탄했었는데, 또 그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역시 뛰어난 작가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하는 걸 느꼈습니다.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가 나오기 이전부터 김탁환 선생은 ‘인간은 이야기하는 동물이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했습니다. 세상엔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 이야기 앞에서 무력해지지 않겠다는 태도가 소설을 읽는 것이라고 했습니다(이야기 앞에서 무력해지는 경우는 예를 들면 ‘영화를 보는 순간’이라 했습니다. 독서와는 달리 관객이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이 영화가 보여주고 들려주는 대로만 받아들여야 하니까).
그런데 단편 소설을 읽고 내 인생을 바꾸었다, 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합니다. 인생을 바꾸는 건 언제나 장편소설이라는 거죠. 왜 그럴까.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많은 곳을 가기도 하구요. 그런데 그 무엇 하나 나의 의도대로 되는 건 없습니다. 태어나보니 이미 내 부모가 있는 것이고 우연히 만난 사람과 하라고 하니까 그냥 결혼을 하기도 합니다. 활동하는 시대도 내가 정할 수 없죠. 그런데 소설가는 그런 걸 다 의지대로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장편소설에서는. 그래서 장편소설을 쓴다는 것은 주어진 대로 살지 않고 작가가 원하는 세상을 의지대로 그려나가는 행위라고 뜻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작가는 언제나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고 했습니다. [전쟁과 평화]도 [죄와 벌]도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물을 만듭니다. 김탁환은 왜 정도전을 골랐을까. 왜 하필 달문이었을까. 이유는 그 인물에 그의 질문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어느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을 읽어오라고 시켰더니 다 읽은 학생들이 ‘이 소설에 어떤 정보가 들어 있어서 읽으라고 한 건지 잘 모르겠다’라는 반응을 보여 충격 먹은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 질문을 한다는 건 학교 다니는 내내 모든 책은 시험에 나오는(또는 세상살이에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읽는 것이지 이야기가 만들어낸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한다는 걸 배운 적이 없다는 뜻이었으니까요. 아무 감정을 싣지 않고 그냥 이야기만 하려는 사람이 있는데 김탁환 선생은 그게 가장 안 좋은 태도라고 했습니다. 논리적이기만 하면 내용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착각이라는 거죠. 인간은 감정이 전달되어야 움직이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허구인 소설을 읽어야 하는 것이구요. 

김탁환 선생은 소설은 적어도 세 번은 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는 그냥 읽고, 두 번째에는 작가의 입장에 서서 왜 하필 그 인물이고 그 시대였을까를 생각하면서 읽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읽으면서 확 끌리거나 유난히 싫은 부분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하며 읽어보라 했습니다. 그런 게 눈에 띄는 이유는 작가가 그걸 쓰기 전에 ‘천 번 정도’는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소설은 태생부터 굉장히 ‘의도적’인데 그런 건 장편소설 말고는 불가능하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함께 모여 장편 소설을 읽는 일은 매우 소중한 것이라는 얘기도 했습니다. 무엇인가를 함께 느껴보자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제가 ‘작가 김탁환이세 번씩 읽고 싶어질 정도로 짱짱하게 쓰는 외국 작가가 있으면 몇 명만 추천해 달라’고 했더니 존 스타인백과 필립 로스, 그리고 가즈오 이시구로와 오르한 파묵을 들었습니다. [분노의 포도], [빨강머리의 여인], [순수 박물관] 등등의 작품을 거론하면서 말이죠. 

“베스트셀러 작가로 살지 않겠습니다. 진지한 독자 만 명과 살겠습니다. 달문처럼.” 

이제 달문처럼 살겠다고 한 김탁환 작가는 대학 때 우리나라에 18세기부터 있었던 대하소설들을 읽고 깜짝 놀랐다고 했습니다. [유씨삼대록]이나 [곽장양문록] 같은 소설을 읽은 거죠. 그것도 몇 번씩이나.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역사소설을 쓰게 되었고 역사 공부를 더 하게 되었으며 또 그러다 보니 이제는 자기만 쓸 수 있는 게 있다는 강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밖에 못 쓰는 글을 쓰자, 인간의 본질을 틀어쥐고 장편소설을 쓰는 작가가 되자, 라고 결심하게 되었다는 얘기를 결론처럼 했을 땐 장내가 잠시 숙연해졌습니다. 

그러나 숙연함도 잠시. 강의가 끝나고 몰려간 백암순대국에서는 순대와 수육에 많은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이어갔고 2차로 간 치킨집에서는 각자 치맥을 아낌없이 들이부었습니다. 그 날 처음 뵙는 분들도 많았는데 모두 금방 친해져서 너 나 할 것 없이 웃음꽃을 피웠고 평소엔 뒷풀이에서 맥주만 간단히 마시다가 먼저 사라지곤 하던 김탁환 선생도 그날은 아주 작정을 하고 나왔는지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함께 술을 마셨습니다. 결국은 거의 모든 멤버가 3차인 중화요리 전문점 ‘문차이나’까지 가서 백주를 벌컥벌컥 마시며 밤을 불살랐습니다. 

모두 취해서 다행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거실에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옷가지와 핸드폰 속 사진들을 보니 대단했더군요. 그런데 기분이 매우 상쾌했습니다. 소설을 통해 만나서 그런지 모두 같은 마음처럼 느껴졌구요. ‘독하다 토요일’의 번외편 모임은 이렇게 끝을 맺고 다음 달엔 ‘독하다 토요일 2기’ 모임을 시작해야 합니다. 우선 앞으로 회원들이 함께 읽을 책들을 정해야 하는데, 이번엔 회원 여러분들의 추천을 받아 리스트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한국의 소설에 국한해서 읽어볼까 합니다. 어떤 책들이 좋을까요? 혹시 좋은 책 알고 계시면 추천 좀 해주세요. 꼭 새 책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우리가 아직 안 읽은 책은 다 새 책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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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미루고 미루다 이제야 쓰게 되었네요. 독하다 토요일에서 정한 책의 마지막권은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이었습니다. 지난 9월 8일 오후 2시 대학로 서점 '책책'에서 사람들이 모여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날은 모임이 끝나고 저희집 '성북동 소행성'에 가기로 했었고 옥상에서 맥주도 한 잔씩 하기로 했었습니다. 그래서 미리 김하늬 씨에게 우쿠렐레 연주를 부탁하기도 했었구요. 약속대로 김하니 씨가 우쿠렐레를 가져와서 더 즐거웠던 토요일이었습니다. (아깝게도 김인혜 씨는 집안일 때문에, 손영연 씨는 회사일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정아름 씨도 집안 사정으로 참석을 못했고 김성희 씨는 결혼식장 갔다가 전철을 반대로 타는 바람에 고생고생하며 늦게 도착했습니다. 왜 그런 날 있잖아요. 평소에는 안 그러는데 그날만 이상하게 헷갈리는 날. 임기홍 씨는 여전히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원서를 들고 나타났구요. 독하다 토요일 때만 읽는 책이 틀림 없는데, 다 읽으면 자신이 정리한 영어단어장을 회원들에게 보내주기로 했습니다)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은 5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단편소설들이 모여 장편을 이룬 작품입니다. 좀 특이한 시도라고 할 수 있죠.  저는 이 작가 역시 '판타스틱'이라는 SF잡지에서 발견했는데요, 데뷔작이 <드림,드림,드림>이라는 단편이었습니다. 아쿠다가와라는 소설가를 알게 해주신 친할아버지에게 감사한다는 얘기를 어딘가 인터뷰에서 읽었는데 그런 언급 자체부터 좀 특이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보건교사 안은영]이라는 소설을 읽고 혹딱 반했죠. 평범한 교사가 학교에서 근무하면서 이사장의 손자인 한문선생과 손을 잡고 귀신을 퇴치하는 내용인데 매우 재미 있습니다. 

아무튼 저는 이렇게 좋아하는 작가지만 윤혜자 씨는 자기 취향이 아니라는 부정적인 태도로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어린 티가 팍팍 나는 글이라는 평가였죠. 그런데 김하늬 씨는 대체로 재미 있게 읽었다고 했습니다. 요즘 들어 온기를 품고 있는 글들이 좋아졌는데 이 작가의 글이 그렇다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주인공 중 칼에 오십몇 번이나 찔려 죽는 사람도 나오지만. 그러면서 등장인물 중 양혜경과 윤창민 등을 거론했는데, 자세한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짧은 글들임에도 완결성이 느껴지고 연결도 잘 되어 있어 좋다는 소감도 얘기했습니다. 

임기홍 씨는 병원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정말 큰 병원에서는 이런 일들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고 했습니다. 통속적인 남녀 역할이 바뀌어진 것들도 재미 있다고 했습니다. 제가 외과수술을 잘 하는 천재소녀 얘기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하면서 갑자기 '언어학 개론' 얘기를 꺼내며 'Me Tazan, You Jane' 얘기를 했고 퍼포먼스(실제 실행)와 컨피던스(내재적 능력)의 차이 등을 매우 심도 있게 설명해서 사람들의 기를 죽였습니다(자세한 내용은 물론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천재들은 감성적인 면에서 무딘 편인데 여기 나오는 천재는 너무 쿨하다고도 했습니다. 그는 소설 쓰는 사람들이 궁금하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이런얘기를 쓸 수 있을까 늘 감탄한다는 것입니다. 이 소설은 중간 이후로 좀 루즈해졌다가 마지막에 화들짝 놀라게 하는 면이 있어서 좋았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김하늬 씨는 자기는 원래 '숲보다 나무를 보는 성향'인데 모든 인물이나 사건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면에서 이 책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쓴 [올리브 키터리즈]와 매우 비슷한 책이라고 느꼈다고 했습니다. 모여서 하나의 책을 읽으면서 각자 예전에 읽었던 책을 떠올리는 것도 독서모임의 즐거움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정아름 씨는 한 번 통독을 하고 다시 읽었는데도 재미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두번째 읽을 때는 어디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를 살피면서 읽었는데 진선미 아줌마 부분을 가장 웃으면서 읽었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정세랑이 긍정적인 부분을 잘 다루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잠깐 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뭔가 세어보았다고 했는데( 열다섯 개라고 했는데) 뭔지는 생각이 안 납니다. 너무 늦게 정리를 하다 보니 이렇군요. 거듭 죄송합니다. 

김하늬 씨가 중간에 [죽고싶지만 떡볶이는 먹고싶어] 얘기를 했는데 아마 제목 때문에 그런 얘기를 한 것 같습니다. 

윤혜자 씨는 작가가 '머리 좋은 편집자'로 느껴졌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나이든 사람들은 잘 그리지 못했지만 상대적으로 젊은 20대 30대들에게는 각광을 받을 만큼 잘 썼다는 얘기를 했고, 그것만으로도 베스트셀러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출판기획자의 입장에서 얘기를 해보면 무슨 책이든 연령층에 따라 독자층이 확연히 구분되기 마련인데 자신이 처음 기획을 했던 [마흔의 심리학]이라는 책도 중년들에겐 공감을 얻었지만 20대들에겐 외면을 받았던 경험을 떠올린 것 같았습니다. 

정아름 씨가 입사 10년차의 고민은 무엇일까 얘기를 시작했더니 김하늬 씨가 '회사 생활보다는 그 나이에 찾아오는 우울증 등 개인적인 심리가 더 큰 일'이라고 했고 이어 정아름 씨가 책 안에서 싱크홀에 빠졌던 여자의 슬럼프 부분이 마음에 와 닿았다고 하며 자신도 정신과 의사나 전문가의 상담을 한 번 받고 싶다고 했더니  윤혜자 씨가 상담은 자기가 해줄 테니 어서 돈을 내라고 농담을 해서 다들 웃었습니다. 

어쩌다가 대학교 얘기가 나왔고 '통페합'에 대한 비판이 중구난방으로 쏟아졌었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윤혜자 씨는 '출판사의 기획'에 의해 쓰여진 책인 거 같은데 너무 많은 등장인물이 나오다 보니  중간중간 기복이 느껴져 작가가 겨우겨우 썼을 것 같은 안쓰러운 느낌도 받았다고 했고 정아름 씨가 차라리 장편소설이라는 얘기를 안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의견도 조심스럽게 내놓았습니다. 그래도 젊은 사람들을 따뜻하게 다루는 시선이 좋았고 특히 장유라 편에서 화물연대에게 빵을 주는 장면을 읽으며서 이 작가가 사회적인 문제도 잘 다루는 것 같다고 윤혜자 씨가 잠깐 칭찬을 했습니다. 

그후 관장합시다, 10년 후 영점 조정, 문용림 교조적이더라, 진선미 아줌마의 딸...등등 아무말 대잔치 같은 순간이 있었는데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김성희 씨도 통폐합 얘기를 오래 했고 소설에서 귀에 벌 들어간 사람이나 컬에 찔린 사람 얘기는 너무 '잘 기획된 느낌'이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임기홍 씨가 대학 얘기에 나도 공감한다고 하면서 9월이 수시입학이 절정인데 교사로서 입시를 대하는 부모들을 보면 마치 자녀의 배우자를 고르는 느낌이라는 얘기도 했습니다. 

서동현 씨는 여기 모인 사람 중 자기만 공대 출신(건축과)이라고 얘기를 꺼내면서 이번 책은 많이 읽지 못하고 왔지만 일단 문체가 매우 좋았고 눈에 띄는 표현들도 많았다고 했습니다. '통속적이고 적나라한 일상을 잘게 다져서 계속 카메라로 비추는 느낌'이었다고 간단한 총평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건축가들도 다 스타일이 달라서 어떤 사람은 전체부터 구상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 작가처럼 장면장면을 그려서 나중에 한덩이로 만드는 경우도 있다고 했습니다. 소설을 건축에 비교하니 또다른 재미가 있었습니다. 

김성희 씨가 자신은 '병원 드라마 성애자'라는 고백을 하며 그래서 이 책을 더 각별하게 읽었다는 얘기를 했고 그러다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예전에 학교 다닐 때 싫었던 기억들에 대해 얘기를 하자 거의 모든 사람들이 참여해 그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그러다가 임기홍 씨가 또 유발 하라리의 [사피에스] 얘길 꺼내며 '우리는 개체가 사라지기 전에도 진화를 하는 놀라운 일을 한다. 그래서 인간 세상은 그냥 쫓아가기에도 정신이 없다'는 내용의 얘기를 해서 모임의 종말을 재촉했습니다. 

이날은 '혜화칼국수'로 이차를 가서 전과 칼국수 등을 먹고 약간의 술을 마신 뒤 약속대로 저희집 '성북동소행성'에 올라갔습니다. 각자 마실 맥주를 사가지고 옥상에 올라가 노을을 바라보며 놀있습니다. 커다란 다라이에 얼음물을 채우고 맥주를 담가놓았더니 뭔가 피크닉을 온 것 같았습니다. 김하늬 씨가 우크렐레를 꺼내 연주를 하며 노래를 불렀고 저도 답례삼아 기타를 가져와 노래를 불렀습니다. 같은 뚜라미 출신이지만 저와 다르게 기타를 매우 잘 치는 임기홍 씨가 반주를 해줘서 사람들이 이런저런 노래를 많이 부르고 놀았습니다. 원래는 노을 지고 달 뜨면 헤어질 생각이었는데 너무 재미 있어서 열한 시 넘어서까지 놀았습니다. 

'독하다 토요일'을 시작할 때 함께 읽기로 했던 책들(권여선의 [안녕, 주정뱅이]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 한강의 [흰] 김언수의 [뜨거운 피] 배명훈의 [안녕, 인공존재]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이 모두 끝났습니다. 다음엔 번외편인 김탁환의 소설 [이토록 고고한 연예]를 읽을 때 만나기로 하고 그때 다음 책들은 뭘로 정할까도 얘기해 보기로 했습니다. 

끝으로 제가 써 본 세줄평을 첨부해 봅니다: 

50여 명의 등장인물들이 희미한 끈으로  이어진 이 연작소설은 로버트 알트만의 [숏컷]을 생각나게 한다. 병원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는 많다. 생과 사를 다루기에 적합해서 그럴 것이다.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도 병원을 중심으로 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태피스트리처럼 엮여지는데 마지막엔 가네시로 가즈키의 소설 [영화처럼]이 그랬듯이 극장에서 감동적인 결말을 맺는다. 가볍고 따뜻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살인이나 불륜, 연애, 섹스 등을 아무렇지도 않게 섞어도 차가워지지 않는 건 정세랑이라는 작가만의 능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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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광고인이자 글쟁이인 카피라이터인 정철 선배는 [틈만 나면 딴생각]이라는 저서의 책날개에 '좋은 생각, 맞는 생각만 하려고 애쓰다 보면 오히려 머리가 굳는다'라고 썼다. 나는 거기에 이렇게 덧붙여보고 싶다. 회사에서 시키는 일만 하다보면 몸 축나고 머리도 비어 결국엔 바보가 되거나 기계로 전락한다고.

30대 초반에 회사를 그만두고 놀던 시절이 있었다. 남들은 다 열심히 일을 할 시기에, 놀면 안 되는 상황에서 나만 놀게 되었으니 당연히 돈도 없고 친구도 없었다. 더구나 내게는 학력, 학식, 재능, 배경, 배짱 등 사회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부족하기만 한 상황이고 남아도는 건 오로지 시간 뿐이었다. 그래도 뭔가 재미있는 게 없을까 몇날 며칠 시간을 펑펑 써가며 고민하다가 생각해낸 게 바로 '월조회'라는 단체였다. '월요일 아침에 조조를 보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이었는데 명색이 단체이긴 했지만 회원은 달랑 나 하나뿐이었다. 그 시간에 나와 놀아줄 사람은 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재미가 있었다. 남들은 월요병에 시달려가며 주간업무회의를 하고 있을 시간에 혼자 텅 빈 극장에 앉아 조조영화를 보는 맛은 각별했다. 아, 이게 주류 이탈자의 쾌감이구나. 나는 그 새로 취직이 될 때까지 그 소심한 행복을 많이 즐겼다. 

월조회에서 한 번 깨소금맛을 경험한 나는 틈만 나면 '쓸 데 없는 짓'을 구상하는 편이다. 어느날은 아내와 옆집 총각 이렇게 셋이서 밥을 먹으며 '수요미식회'처럼 우리도 날을 정해서 뭘 먹으러 다녀보면 어떨까? 라는 얘기를 하다가 즉흥적으로 '토요식충단'을 만들기도 했다. 이름은 내가 제안을 했는데 자칫 '벌레 충 자'로 오해받을 수 있으니 먹을 것에 충성한다는 뜻의 '토요食忠團'을 병기하기로 했다. 토요식충단은 미식가인 옆집 총각의 취재력과 출판 기획자인 아내의 추진력 덕분에 정식 회원도 모집하고 페이스북에 페이지를 개설하여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다. 여전히 토요일에 성북동 삼총사가 식당을 찾아다니는 일이 주업무지만 두 달에 한 번씩은 회원들을 불러모아 맛있는 식당을 소개하고 함께 즐기는 정기 행사를 이어가고 있다. 

나만큼이나 쓸 데 없는 일을 좋아하는 아내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아내는 아침밥을 먹지 않으면 하루를 시작하지 못하는 남편 덕에 매일 아침 식사 준비를 하는 수고를 떠안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식탁 사진을 찍어 올리는 '매일매일밥상'이라는 페이지를 운영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의외로 반응이 좋아서 이제는 수많은 구독자들이 우리들의 소박한 아침 밥상 사진을 기다리게 된 것이다. 쓸 데 없는 생각이라 여겼던 행위가 사실 아주 쓸 데 없는 생각은 아닌 경우가 많은데 지나고 보니 '매일매일밥상'이 그런 경우였다. 

연말에 동네에 있는 커피숍 '성북동 콩집'에 앉아 '올해 읽은 책 베스트5'를 작성하고 있는 나를 보고 아내가 '그러지 말고 사람들과 같이 모여서 소설을 읽는 모임을 한 번 만들어 보면 어떠냐'고 했다. 그거 좋은 생각이라 생각해서 만들어진 게 '독하다 토요일'이다. 우리가 만든 이 모임은 이름만 독할 뿐 사실은 매우 널널한 독서클럽이다. 다른 그룹처럼 책을 전투적으로 읽고 와서 열띤 토론을 벌이거나 하는 것은 우리 성격에 맞지도 않으니 자제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모인 회원들은 내가 미리 공지한 6권 중 '이달의 책'을 들고와 모임 장소에서 한 시간 정도 묵독한 뒤 각자 책에 대한 소감을 얘기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사실 처음엔 한 시간 뒤 각자 '세 줄 평'을 작성해 읽어보기로 했었으나 이마저도 시들해져서 요즘은 나만 하고 있다). 우선 육 개월만 시험삼아 모임을 가져보기로 하고 내가 6권의 한국 소설을 선정했는데 생각보다 회원들도 빨리 모였고 다들 우리나라 소설을 읽는 즐거움이 쏠쏠하다고 말해줘서 나름 보람을 느끼고 있다. 오늘이 여섯 번째 모임이니 빨리 이 글을 마감하고 대학로 '책책'으로 달려가야겠다. 

생각해보면 위에 열거한 짓거리들 중 돈이 되는 모임은 하나도 없다. 요즘 인스타그램에 쓰고 있는 '공처가의 캘리'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어떠랴. 언제나 그랬듯이 인생에서 돈보다 중요한 게 바로 이런 '즐거움' 아니던가. 그러니 쓸 데 없는 짓을 두려워하지 말자. 장담하건데 가끔 딴생각을 할수록 인생은 즐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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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배명훈이라는 작가를 폐간된 잡지 [판타스틱]에서 처음 발견했습니다. 그 잡지엔 별별 기괴한 상상력을 지닌 SF작가들이 많이도 등장했는데 SF를 잘 모르는 제게는 역설적으로 듀나나 김보영 같은 인기작가들보다는 배명훈이나 정세랑 같은 '약간 삐딱한' 작가들이 더 눈에 띄었습니다. 약간 삐딱하다는 것은 우주나 물리학을 다루거나 하는 본격 SF라기보다는 개인들의 사소한 관심사들이 독특한 방식으로 전개되는 새로운 이야기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배명훈은 어디에선가 인터뷰에서 '일반 소설에다가 과학적 지식을 첨가해서 쓴 다음 SF라고 우기면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며 <스마트 D>라는 데뷔작을 준비했다는 얘기를 읽은 기억도 있었구요. 아무튼 그래서 오래 저부터 제가 좋아했던 [안녕, 인공존재]라는 작품집을 '독하다 토요일'의 다섯 번째 작품으로 선정을 했습니다. 

꽤 오래전에 읽은 책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아서 <크레인 크레인>, <누군가를 만났어>, <안녕, 인공존재!>, <변신합체 리바이어던>만 다시 읽고 대학로 책책으로 갔습니다. 손영연 씨는 SF인지 모르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는데 일단 글이 신기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표제작에 나오는 쓸 데 없는 물건, 즉 '무용지물'에 대해 호감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저와 비슷한 느낌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반면 윤혜자 씨는 시종일관 불편한 책이었다고 했습니다. 일단 '너희들은 이렇게 못 쓰지?'라고 뻐기는 듯한 작가의 잘난 척이 싫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책 뒷쪽에 붙어있는 '출간사유서'를 읽고 더 심해졌다고 했습니다. 존재성에 대해서 나는 이 정도 쓸 수 있어,라고 말하는 듯한 작가의 태도가 몹시 거슬린다는 것이었죠.  윤혜자 씨는 언제나 그랬듯이 남편이 가진 책 말고 이번에 새로 똑같은 책을 구입했는데 2010년 초판인쇄를 시작한 책이 아직도 초판인 것은 그런 태도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조심스럽게 내놓았습니다. 작가의 태도에 대해서는 저도 어느 정도 공감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다만 저는 배명훈의 작품엔 적어도 '인간'이 들어 있는 것 같다고 소심한 항변을 했습니다. 

서동현 씨는 마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읽는 것처럼 새로웠다고 말했습니다. 자기는 아이작 아시모프를 좋아하는데 이 작품은 그 기발함이 정통 SF와는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과학이나 기술을 소재로 샤먼이나 초월까지 자유롭게 다루는데 이는 마치 예전 [퇴마록] 시리즈를 썼던 이우혁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얘기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기발함에 대한 칭찬이 이어졌는데 <안녕, 인공존재!>에 등장하는 발명품들은 만약 실제로 존재하기만 한다면 당장 구입하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고 했고 특히 <얼굴이 커졌어>를 읽고 많이 웃었다고 했습니다. 

김성희 씨는 다른 사람처럼 별다른 의심이나 고민 없이 그냥 읽었는데 <변신합체 리바이어던>이 제일 재미 없었고 기중기의 신이 등장하는 <크레인 크레인>의 상상력이 돋보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리오의 침대>는 동화 같았다고 소감을 피력했습니다. 그러면서 '안녕, 인공존재?'의 안녕이라는 말이 만나서 하는 인사일까 아니면 헤어질 때 하는 인사일까도 궁금하다고 했습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존재는 아름답다'라는 것에 대한 얘기가 아닐까 하는 의견도 내놓았습니다. 

외교학과를 나온 작가의 이력 때문에 '요즘은 뭐 할까?'라며 혹시 외교관으로 일하고 있는 건 아닐까, 라는 궁금함도 등장했습니다. 솔직히 글만 써서 먹고 살기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이기도 했고 글 쓰는 스타일로 봐서 다작을 하거나 전업작가로 생활 할 것 같지는 않아서 나온 궁금증이었겠죠. 윤혜자 씨는 자기 혼자는 절대로 읽지 않을 작가인데 이런 모임 덕분에 억지로라고 읽에 되어 좋다고 하며 웃었습니다. 정아름 씨는 세 번이나 이 책을 읽었다는 말로 소감 발표를 시작했습니다. 이해가 안 돼서 되풀이 읽기 시작했다는데 그러다가 어느 순간 마음이 뻥 뚫리는 느낌도 받았다고 했습니다. <얼굴이 커졌다>는 너무 웃겼는데 좀 유치하다고도 했습니다. 그리고 <매뉴얼>은 지금도 이해가 안 되는 게, 연대기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1500년 전 얘기가 갑자기 나와버려서 어리둥정 했다는 것이었는데 저는 그 작품 내용이 생각나지 않아 더 의견을 보탤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네요. 

정아름 씨는 <누군가를 만났어>에 나오는 '고고심령학자'라는 직업이 실제로 있는지 알았다며 웃었는데 얼마 전 같은 제목으로 장편소설이 또 나온 걸 보면 배명훈은 이 가상의 직업에 대한 애착이 매우 큰 것 같습니다. 진주 씨는 그동안 시간이 없어서 계속 참석을 못하다가 이날 처음 책책에 와서 이 책을 읽게 되었는데 <안녕, 인공존재!>에 나오는 신우정 박사의 유서의 내용과 비슷하게 최근에 4년 전 남자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은 이야기를 재미있게 펼쳐주었습니다. 소설에 나온 존재론적 이야기에 자신의 이야기를 쿨하게 엮어 얘기하는 모습이 멋져보였습니다. 

임기홍 씨는 이 소설집을 읽고 자신이 고리타분한 사람이 아닌가 의심하게 되었다는데, 예를 들면 건축에 있어서도 자신은 벽의 마감은 물론 조명 벽지색깔까지 모두 맞아야 집이 완성되었다고 보는 입장인 반면 이 소설들은 어딘가 미완성 같다고(마치 당인리에 있는 커피숍 '엔트러싸이트'처럼 벽마감이 안 되어 있고) 느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재미있는 게 신기하다고 했습니다. 자신은 과학을 좋아하는 편인데 이 작가의 경우는 여러가지 매력에도 불구하고 과학을 자기 필요한 대로 써먹는 느낌이라 그게 못마땅하다고도 했습니다. 마치 착한 친구를 자신의 목적에 맞게 이용해먹는 느낌이라는 것이죠. 독특한 견해였습니다. 

윤혜자 씨는 최근에 읽은 두 권의 책, 즉 김탁환의 [이토록 고고한 연예]와 배명훈의 [안녕, 인공존재!]를 비교해본 느낌을 전했는데 [이토록 고고한 연예]가 물흐르듯 이어지는 스토리텔링의 전형을 보여준다면 [안녕, 인공존재!]는 SF이면서도 문학의 완결성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게 오히려 '문청'이 쓴 소설 느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누군가 조금 더 자유로워도 되지 않을까, 하는 얘기를 했더니 이 책이 나온 곳이 '북하우스 퍼블리셔스'라는 곳이라 어느 정도는 전형성을 갖추게 되었을 것이라는 얘기도 했습니다. 공식적 루트로 등단한 작가들이게는 뭔가 '공식'이 있다는 것이죠. 물론 이건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습니다. 그동안 우린 모여서 등단한 작가의 작품만 읽었는데 만약 그렇지 않은(이를테면 웹작가라든지) 작가들의 작품을 읽는다면 고른 문장력이나 작품성을 보증받기 힘들다는 점도 있다는 것이었죠. 그런데 서동현 씨의 지적대로 정통 SF도 아닌 소설에 제목도 SF 팬들이 좋아할 만한 것이 아니라 잘 안 팔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솔직히 배명훈은 장편보다는 단편이 좋다고 하며 특히 감동스러웠던 작품 중 사막에 불시착한 조종사를 인터넷 이용자들이 집단으로 구해내는 이야기가 있다고 했더니 누군가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해 <타클라마칸 배달사고>라고 제꺼덕 알려주었습니다. 그밖에도 배명훈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은경'이라는 이름에 얽힌 이야기, 예전에 인기 높았다가 이제는 존재감이 없어진 웹작가 '귀여니'에 대한 이야기, 우리나라에만 남아 있다는 신춘문예 이야기 등등이 중구난방으로 이어지다가 다음엔 정세랑의 연작소설집 [피프티 피플]을 읽자고 합의하며 2차를 가기로 했습니다. 원래 윤혜자 씨와 손영연 씨는 광화문 월향에서 이여영 대표가 번개를 쳤던 '브라쟈 풀고 마십시다' 라는 여성들만의 행사에 참여하기로 했었으나  시간이 애매해서 포기하고 같이 2차에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대학로에 있는 삼겹살집에서 이어진 이차에서 매우 많은 양의 고기와 술을 먹고 마셨고 3차로 대학로 '나무요일'에 가서 또 맥주를 마시다 헤어졌습니다. 사실은 위에 쓴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갔는데 제가 회사 일이 바빠서 - 사실은 다음날 즉시 써야하는데 숙취와 게으름 때문에 - 후기를 너무 늦게 쓰는 바람에 빼먹은 내용들이 많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음 모임은 더 즐거운 시간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끝으로 제가 쓴 세 줄 평과 함께 이번에 참석하지 못했던 김하늬 씨가 카톡으로 보내온 작품평을 첨부합니다. 

편성준의 세줄평 : SF이면서도 서사가 능숙한 소설을 읽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안녕, 인공존재!]는 반짝이는 아이디어 뒤에 존재론적 성찰까지 깔려 있어서 읽는 맛이 남다른 단편들이었다. [팔란티어] 이후 종적이 묘연한 김영민과 달리 배명훈은 계속해서 새로운 작품활동을 계속 해줄 것으로 묻는다. 


김하늬 씨가 카톡으로 보내 온 평들 : 헉... 보낸다는게 시간을 못봤습니다ㅠㅜ 뒤풀이중이실거 같지만 첨부합니다.

안녕, 인공존재! / 배명훈

■ 총평
데우스엑스마키나를 사랑하나보다. 뭘 말하려는지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구성이 흔들리지 않아서 제목만 봐도 내용이 기억난다. 재미있다! 각 단편 별로 화자에 따라 분위기가 다르다. 인물의 특성을 잘 살린 것 같다. 그간 읽은 단편작가들(김애란, 레이먼드 카버 등)은 그들의 특징이 글에 많이 묻어났다. 배명훈의 소설 연결고리는 발랄함과 SF라는 점 정도만 있고 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하다. 본받을 점이 보이는 소설집.

■ 크레인 크레인
크레인을 신적 존재로 보는 것 까지 참신하고 좋았는데 신이 등장하며 참신함을 부셔버렸다.

■ 누군가를 만났어
세 국가를 모은 이유는 외교상황을 빗대고 비꼬려고 하는 것이었을까? 역시 데우스엑스마키나...

■ 안녕, 인공존재!
누군가의 인정을 받고 교류를 해야 존재를 증명하는 사람과, 스스로를 증명해 폭발함으로써 존재를 증명한 자갈의 대비가 인상적이다. 글의 전개 내용도 안정적이다.

■ 매뉴얼
참신하다. 매뉴얼을 마로하, 신적 존재와 연결한게 인상적이지만, 끝이 너무 허무하고 끝나지 않은 느낌이 아쉽다.

■ 얼굴이 커졌다
알레고리 소설이었다. 얼굴이 커짐을 프로로 의미했으나 가정, 즉 행복을 찾은 나는 얼굴이 원상태로 돌아왔다. 행복을 얼굴의 크기로 비유한 것 같다. 가장 좋다.

■ 엄마의 설명력
아이의 세계는 부모라고들 하는데, 그런 걸 보면 주인공은 30대가 되어서도 부모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건 현 세대를 풍자한게 아닐까.

■ 변신합체 리바이어던
홉스의 사회계약론에서 영감받은듯. 로봇의 합체로 국회를 비꼰 것도 참신. 신을 죽이는 행위로 현대 예술을 일컫는 것 같다. 두번째로 좋다.

■ 마리오의 침대
사랑은 돌고 도는 것? 배우자에게 최선을 다하는 점도 재미있고 문제를 몰래 해결하는 것도 사랑스럽다. 세번째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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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 책은 '독하다 토요일'에 어울리지 않는 작품일 수도 있겠다, 는 생각을 약간 했습니다. 그러면서 또 한 편으로는 '독하다 토요일'이 시작된 이래로 가장 흥미진진한 장편소설을 선정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김언수의 [뜨거운 피]는 그런 소설이었습니다. 1990년대 노태우 정부 시절 부산 바닥에서 활동하던 건달 희수의 얘기. 대학로 책책에서 열린 '독하다 토요일' 네 번째 모임은 이 책을 읽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사실은 지난 모임 직후 바로 후기를 써서 올렸어야 했는데 제가 게으름을 피우는 바람에 계속 미루다가 이제라도 써야지 하고 수첩을 뒤적이고 있습니다)  

그날 모임엔 오랜만에 참석한 손영연 씨, 그리고 윤혜자 씨, 김하늬 씨, 임기홍 씨, 서동현 씨, 임재섭 씨 등이 왔습니다. 재미있긴 하지만 소설이 워낙 두껍다 보니 미처 다 읽지 못하고 온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두 시부터 세 시 넘어서까지 묵묵히 책을 마저 읽는 분위기였습니다. 느와르 영화 같은 소설이라 여자분들보다는 남성들이 더 열광하는 눈치였습니다.  임기홍 씨는 학교 선생님이라 정말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비참한 상황에서 사는 학생들을 대할  때가 많은데 막상 그 어떤 것도 해줄 수가 없다는 사실에 무력감을 많이 느꼈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보면 세상이 참 지저분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죠.  

제가 소설을 읽고 건진 교훈 중 하나가 '더러운 걸 참아야 싸움에서 이긴다'라고 했더니 윤혜자 씨가 자기는 평소에 그런 걸 잘 못해서 안 되는 모양이라고 하며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임재섭 씨는 얼마 전 일을 지지부진하게 만들었던 실제 인물 얘기를 하며 그때 후배가 했던 말, '형, 비즈니스는 그게 **전자 안이라고 해도 다 개새끼에요!'를 기억했습니다. 신사적이고 점잖은 사람은 꿈속에서나 존재하는 법인가 봅니다.  

그러자 김하늬 씨가 얼마 전 직업여성이 쓴 책을 읽었는데 그게 소설에 나오는 인숙과 비슷했다는 말을 했습니다. 불행의 모습은 어딘가 비슷하기 마련이니까요. 그러다가 영화 [변산] 얘기가 나와 전라도 사투리 애기를 하다가 잠깐 각자 알고 있는 충청도 사투리에 대한 유머를 털기도 했습니다('너만 안 지치면 되어야~', '출튜?' 등등). 

저는 어쩌면 이 소설이 '이야기의 원형'에 충실한 작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서부영화처럼 왕년에 잘 나갔지만 지금은 쇠락한 주인공이 등장한다든지 탁구 치듯 재기발랄한 대사들을 주고받는 건달들이 나온다든지 하는 모양새가 그랬습니다. 윤혜자 씨는 일단 자기 취향이 아닌 소설을 읽는 게 너무 힘들었다고 하면서도 이런 기회가 아니었다면 언제 자기가 이런 소설을 읽어보겠냐며 '페이지 터너'스러운 이 소설의 흡입력에 감탄했고 만약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게 되면 희수 역을 누가 하면 좋을까를 상상해 보았다고도 했습니다(일단 희수 역은 황정민). 

손영연 씨는 요즘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실화는 감정이입이 잘 안 되는 편인데 오히려 이 작품은 자신이 사는 세상과는 너무 다른 얘기이기도 하고 완전한 픽션이라 더 재미있게 읽혔다고 했습니다.  물론 앞부분의 길고 오밀조밀한 설정은 좀 버거웠다고 했습니다. 감하늬 씨도 앞부분을 너무 깔아놓는 게 지겹고 힘들었다며 그런 점이 이 소설의 '진입장벽'인 것 같다고 했습니다. 요즘 소설들은 그런 설정 없이 막 치고 들어오는 느낌이라는 것이죠. 그러면서도 친구들과 글 쓰는 얘기를 나누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쓰는 도중에 심각해지고 그렇게 쓴 걸 나중에 읽다보면  '삶도 힘든데 이런 걸 왜 읽어야 해?'라는 자괴감에 빠진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같은 고전은 예전 작품인데도 오히려 처음부터 그냥 막 치고 들어오는 느낌이라 신기하다고도 했습니다. 

아무래도 주인공 희수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김하늬 씨는 빨래공장 관련 에피소드에서 정배와 나누는 대사들과 그 처리 방법 등에 대해 얘기하면서, 사람들이 바라는 이미지 대로 살아가는 희수의 캐릭터가 다지이 오사무의 [인간실격]과 겹치기도 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윤혜자 씨는 도대체 작가가 이 이야기들의 취재를 어떻게 했을까 궁금해 했습니다. 손연영 씨는 90년대 장현수 감독의 영화 [게임의 법칙]이 생각난다고 했습니다. 

서동현 씨도 건달들 얘기를 글로 설명하려다 보니 앞부분이 좀 길어진 것 같다고 하면서도 여러가지 한국 느와르 영화들이 생각나는 이야기라고 했습니다([비열한 거리], [해바라기], [넘버쓰리] 등등). 살면서는 결코 만나기 힘든 인물들이지만 영화나 소설에서는 매력적인 캐릭터들 말입니다. 매번 모임 때마다 질문을 하는 김하늬 씨가 이번에도 사건을 제안하는 친구 양동과 용강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을 했는데 너무 시간이 지나서 질문 내용이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제가 메모를 띄엄띄엄 한 결과겠지요. 죄송합니다. 

저는 [형사 매드독]의 제임스 벨루시나 [분노의 주먹]의 로버트 드 니로 등 보스들이 나중에 나이가 들어 클럽에서 스탠딩 코미디를 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깡패의 미덕은 주먹만큼이나 '구라'에 있다고 말했더니 윤혜자 씨도 '칼로 죽이든 말로 죽이든 상대를 제압해야 하는 게 그 세계'라고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희수 역에 박호산을 쓰면 어떨까 애기를 하는 바람에 다시 장진영, 장신영, 전도연 등 일급 배우들이 인숙 역으로 다시 한 번 물망에 오르기도 했습니다(어차피 돈 안 드는 캐스팅이라 생사여부도 상관이 없는 게 특징). 

임재섭 씨는 '여기서 뒷부분 얘기 하면 안 되냐?'며 스포일러로서의 욕망을 토로했지만 아직 끝까 안 읽은 사람들이 많아서 뜻을 이루진 못했습니다. 이  소설은 뒷부분에 몇번이나 뒤집어지는 '반전'이 읽는 맛을 더해주는 바람에 한 번 잡으면 밤을 새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임기홍 씨는 이 소설조차도 성장소설로 읽혔다고 토로했습니다. 나이 서른에도 마흔에도 쉬흔에도 사람은 자란다는 것이죠. 희수의 인생역정을 보면 확실히 그런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그러면서 '소맥'에 대한 멋진 비유를 했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역시 죄송합니다). 

책에 대한 수다를 마치고 모두 일어나 을지로에 있는 '영락골뱅이'에 가서 골뱅이를 안주로 맥주를 마시며 '아무말 대잔치'를 이어갔습니다. 이차는 '태성골뱅이'였는데 역시 즐거운 자리였습니다. 다음엔 SF소설을 쓰는 배명훈의 소설집 [안녕, 인공존재!]인데 역시 제가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벌써 8월 11일이 기다려집니다. 모두들 무더위에 건강 잘 챙기시기 바랍니다. 

사족으로 제가 쓴 세 줄 평을 첨가합니다 : 

인생의 진리는 고매한 지위나 인격을 가진 사람들 틈에서 나오지 않는다. 시궁창에서 딩굴며 악에 받친 인간들끼리 목숨 걸고 싸우거나 한편이 될 때 기름기 쏙 빠진 금언들이 하나씩 튀어나온다. [뜨거운 피]가 그런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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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어제 '독하다 토요일' 의 첫 모임이 있었습니다. 대학로에 있는 '책책'에서 모두 11명이 모였는데 한 곳에 모여서 똑같은 책을 읽는다는 게 과연 어떨까, 하는 약간의 걱정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생각보다 즐겁고 재미있는 모임이있습니다. 옆집 총각 서동현처럼 자주 보는 사람도 있었고 김인혜 씨나 김성희 씨처럼 처음 뵙는 분도 있었습니다. 특히 김인혜 씨는 멀리 청주에서 KTX를 타고 오셨다고 해서 더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우리가 모여서 한 시간 동안 읽은(각자 묵독) 책은 권여선의 [안녕, 주정뱅이]였습니다. 저는 맨 앞에 있는 단편 <봄밤>과 <이모>를 꼭 읽으라고 추천을 했는데 다들 만족스러워 하셔서 다행이었고 정아름 씨 같은 경우엔 <삼인행>이 가장 좋았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습니다.

이 행사를 기획한 윤혜자 씨는 작년에 일본에 연수를 가서 느낀 소회를 얘기하며 일본 사람들이 해외문학을 읽게 하려 노력하는 것을 보고 자기는 오히려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우리 문학을 읽게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 6개월간은 우리 문학만 읽고 그 후에 해외문학을 읽을지 시를 읽을지는 천천히 얘기해 보자고 했습니다. 가능하면 지금 활동하는 작가를 모임에 직접 초청하는 것도 고려해 보겠다는 계획도 귀뜸을 했습니다. 

제가 권여선의 이 작품집을 첫 책으로 선택한 이유를 묻길래 작년에 읽은 책 중 가장 인상 깊었고 전부터 이 작가의 작품을 좋아해서 그랬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술을 좋아하는 저는 알콜중독으로 인생이 망가지는 주인공의 이야기에 깊은 공감을 느꼈고 그 처연함에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더니 김인혜 씨가 자기는 <봄밤>을 읽고 대성통곡을 했다고 하셔서 매우 신기하고 기뻤습니다. 

공무원으로 일하는 김성희 씨는 소설 속 주인공 수환이 영경을 만나기 전에 언제든지 자살할 수 있다는 생각을 단검처럼 지니고 살았다는 문장이 정말 기억에 남았다고 말씀하셨고 고등학교 영어교사인 임기홍 씨는 소설 속 인물들이 너무 치열하게 사는 것 같아 마음이 스산했다고 했습니다. 반면에 회사원 정아름 씨는 아름다운 커플처럼 느껴졌다고 했습니다. 특히 톨스토이의 [부활]에 나오는 분자 분모 이야기가 마음에 와닿았다고 했습니다. 프리랜스 헤드헌터인 손연영 씨는 봄밤으로 시작해서 봄밤으로 끝나는 이 소설이 일상은 소소한 사건과 대화들이 이어져 결국 한 사람의 삶이 된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옆집 총각이자 화장품 회사 부장님인 서동현 씨는 봄밤이라는 제목과 달리 일상이 증발하듯 바짝 말라버린 주인공들의 삶이 너무 서글펐다고 했구요. 글을 쓰는 김하늬 씨는 한계에 부딪힌 사람들이 새로운 한계를 만났을 때 그걸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읽었다고 했습니다.  

<봄밤> 말고도 <이모>에 대해서도 많은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한 시간동안 책을 읽고 이십 분 정도 시간을 내 각자 '세 줄평'을 써보기로 했는데 모두 다른 각도에서 작품들을 접근하는 게 재미있고 신기했습니다. 덕분에 작품을 더 깊이있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책책'에서의 모임이 끝나고 대학로 '문샤인'에 가서 와인과 요리를 조금씩 더 나누고 헤어졌습니다. 와인 두 병은 저희 부부가 냈고 나머지 요리값은 공평하게 N분의 1을 했습니다. 다음 달 두번째 토요일 2시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습니다. 다음에 읽을 책은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입니다. 

우리는 문학청년도 아니고 열렬한 지식인도 아닙니다. 그러나 책을 읽는 즐거움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목적 없이 토요일 오후에 그런 사람들이 선의를 가지고 모인 것만으로도 너무 좋았습니다. 요즘은 책을 읽는 사람이 드물어서 그런지 드러내놓고 자랑하기도 멋쩍은 무슨 비밀 모임 같은 느낌도 들었습니다. 계속해서 가볍고 사소한 모임으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끝으로 오늘 제가 썼던 세줄 평을 덧붙여 봅니다. 

<봄밤 세 줄평> 
영경이 편의점에서 소맥부터 시작해 여관에 들어가 인사불성이 되도록 마시는 장면들 묘사는 정말 압권이다. 슬프고 아픔답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프랑스와즈 사강의 법정 진술은 김영하의 데뷔작이 아니라 권여선의 <봄밤>에 와서야 비로소 육체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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