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망설였다. 올 연말 최고의 기대작 [마약왕]은 개봉하자마자 평론가들의 악평에 시달리더니 CGV어플을 열어보니 어느새 예매 9위로 떨어져 있었다. 평론가들과 관객의 악평이 일치할 경우 영화의 질이 어땠는지는 그동안 경험해봐서 알지 않는가. 그러나 내게는 송강호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다. 어떤 영화에서든 거의 본능적으로 최고의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연기의 신 송강호. 영화가 아무리 후졌더라도 송강호는 살아남았지 않았을까, 하는 미련이 나를 혼자 토요일 오후에 대학로에 있는 극장으로 향하게 했다. 

토요일 오후 5시 15분 영화인데도 극장은 빈 좌석이 많았다. 관객들의 수준도 별로였다. 내 뒤에 앉은 남자 새끼는 자기 여자친구에게 계속 영화와 역사와 사회에 대한 되먹지 않은 인문학 강의를 하고 있었고 여자는 영화를 보는 도중에 전화를 받아 무려 15초 이상 친구에게 안부를 전하는 뻔뻔함을 보여줬으니까. 그러나 의의로(?) 영화가 좋았다. 우려와 달리 설정이나 만듦새가 나쁘지 않았고 송강호는 물론 김대명, 조우진, 조정석 등 출연진의 연기가 고르게 다 좋았다. 우민호 감독 때문에 연기력을 인정 받아 지금은 한국영화에서 안 나오는 작품이 거의 없어 '제 2의 이경영'으로 불린다는 조우진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더 킹]에서 어설픈 경상도 사투리 검사 역을 맡았던 김소진의 연기조차 여기서는 훌륭했다. 약간 안쓰러울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배두나도 대체로 예쁘게 나왔고 '불구경보다 재밌다는 미친년 구경 다 하셨으면 이제 그만 집에 가세요!"라는 대사를 칠 때는 카리스마도 있었다. 

139분에 달하는 긴 러닝타임과 마약, 폭력, 권력 등 심각한 소재, 1970년대 초반이라는 생경한 시대적 배경 등이 젊은 관객들의 발걸음을 막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흥행을 위해 차라리 조우진이 죽던 사우나 씬을 조금 더 잔인하고 자극적으로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까지 해보았다. 마지막 송강호가 자신의 집에서 총질을 하며 경찰과 대처하는 씬은 알 파치노의 열연이 빛났던 브라이언 드 팔머의 [스카페이스]에서 따온 게 명백한데, 송강호가 연기를 너무 잘 해서 볼 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사실 우민호 감독은 전작 [내부자들]에서도 마틴 스콜세지나 프랜시스 포드 코플라 등의 영화를 베끼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선이 굵은 작품은 그 나름의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단순히 소재에 머물지 않고 그 소재를 통해 어떤 '맥락'을 만들어낼 때 비로소 '작가'가 탄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 당하고 80년대가 시작되는 시대적 배경을 보여줌으로써 이 영화도 단순히 마약 영화가 아니라 욕망과 권력과 편법으로 얼룩진 우리의 현대사를 조명하는 필름으로 그 의미망을 넓히는 데 성공했다. 몰론 마지막 장면에 화면을 가득 메우는 송강호 얼굴 위로 '15년 형을 선고받은 그 때문에 그때부터 검찰에 마약반이 신설되었다'라는 조정석의 나레이션이 흐를 때는 파자마를 입고 현관문 밖으로 조간신문을 주우러 나오던 레이 리오타의 모습으로 마지막을 장식했던 마틴 스콜세지의 [좋은 친구들]이 떠오르긴 했지만, 뭐 어떠랴. 이 작품은 그런 사소한 흠집보다는 선 굵고 거대한 그림을 그리려는 의도가 더 돋보이는 역작인데. 흥행 성적과는 상관없이 영화적으로도 한 번은 볼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세간의 평 때문에 놓치고 후회하지 말자.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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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하호호 2020.07.23 17: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진 좀 가져갑니다. 글 잘보고 가요☺️

  2. 망망디 2020.07.27 14: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네. 이제야 댓글을 답니다.


어제 오후 '독하다 토요일' 첫 시즌을 마감했다. 책을 읽은 회원들과 함께 이차로 '혜화동 칼국수'에 가서 간단하게 식사와 음주를 하고 우리집인 '성북동 소행성'으로 올라와 옥상파티를 단행했다.  미리 준비한 간단한 안주 말고는 다른 음식 없이 캔맥주를 마셨는데 다들 매우 즐거워했고 모든 사람들이 늦은 밤까지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맥주를 정말 많이 마셨다. 아침에 일어나 옆집 총각과 함께 종로에 있는 '이문설농탕'에 가서 해장을 하면서 아내가 영화 [서치]를 예매했다. 

'부재중 전화 세 통만 남기고 사라진 딸을 찾는 아빠의 이야기'라는 것 말고는 아무 정보 없이 보기로 한 영화였다. CGV대학로에 들어서자 아내가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해서 11층 투썸플레이스에 가서 커피를 사가지고 오는데 가족들과 함께 이 영화를 보고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던 50대 아저씨가 자신의 딸에게 "...그러게. 컴퓨터 화면으로만 보여주는데도 어떻게 저렇게 재미 있게 만들었냐."라고 감탄하는 소리를 들었다. 지나가는 말이었지만 이 짧은 촌평만으로 영화를 잘 골랐다는 것을 직감했다. 

굉장한 영화였다. 푸른 잔디밭과 하늘이 보이는 평범한 데스크톱 배경화면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사라진 딸을 찾기 위해 그녀의 SNS를 뒤지기 시작하는 장면부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까지 단 한 번도 배우가 카메라에 그대로 노출되지 않는다는 스스로의 원칙을 지킨다. 대신 맥북, 페이스타임, TV보도화면, CC-TV, 텀블러, 유투브, 유캐스트 등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각종 매체에 비친 모습이으로 등장하고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화나 그들이 찾는 정보도 구글 검색이나 G메일 등을 통해서 전해진다. 언뜻 우리 스스로 가두고 있는 SNS 상황을 비판하려고 이러는 게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지만 영화는 그런 사회적 메시지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스릴러의 문법에 충실한 전개를 착착 선보인다. 

보통 이런 컨디션이었다면 잠깐 졸거나 연신 하품을 해대겠지만 평소와 달리 영화에 깊이 빠져 좌석에서 등을 떼고 화면을 향해 몰입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너무 촘촘하고 속도감 있는 영화라 숙취까지 날아가버린 것이었다. 존 조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연기는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정확함의 미덕을 가지고 있었고 1991년생인 아니쉬 차간티 감독은  적어도 세 번의 커다란 반전을 가지고 있는 뛰어난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했다. 컴퓨터나 휴대폰을 기반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니까 좀 차갑거나 평면적일 수도 있을 텐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마우스를 조작하는 손의 동작만으로도 주인공들의 마음이 느껴지는 진기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폴더 안에 있던 가족들 동영상을 플레이 해보고 지우려다가 망설이거나 예전에 딸이 찍어놓은 유캐스트 화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은 자신의 딸이지만 그녀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던 아빠의 슬프거나 놀라운 감정들을 섬세하게 전달해준다. 그리고 후반에 밝혀지는 '악역'들도 다 자신만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어서 스토리 전개상 전혀 무리가 없게 느껴진다(늘 느끼는 거지만 악역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능력이 뛰어난 극작의 기본이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아내가 "와, 이 영화 끝내준다. 올해 본 영화 중 최고다!"라고 외쳤다.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정말 100분 남짓의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의 기분 좋은 몰입감이었다. 뒤늦게 숙취가 몰려와서 집에 와서 한잠 자고 일어나 인터넷을 찾아보니 아니쉬 차간디는 직접 제작한 구글 글라스 홍보 영상으로 24시간 만에 100만 뷰를 돌파한 뒤 ‘구글 크리에이티브 랩’에 스카우트된 매우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 감독이었다. 한 마디로 천재라는 소리다. 페이스북에 들어가 영화사에서 제공한 예고편 밑에 달린 댓글을 읽다가 '내가 실종되고 부모님이 내 SNS를 뒤져보는 것만으로도 올해의 호러'라고 쓴 글에서 빵터졌는데 그 밑에 친구들을 소환해놓고 '우리 엄마가 우리들 단톡방을 본다는 건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라는 둥 '자살하기 전에 트위터, 페북 계정부터 폭파시키고 죽어야 합니다. 물론 자살은 무척 안 좋은 겁니다 여러분' 이라는 둥 각종 두려움에 떠는 댓글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압권은 ' 이거 스토리 상 내 이야기면 아빠가 날 찾는 이유가 죽이러 오는 거로 바뀔 것' 라는 댓글이었다. 우리가 SNS에 얼마나 의존하며 사는지 잘 보여주는 예가 아닐 수 없다. 

돈이 별로 안 든 영화임은 분명하지만 노력만큼은 그 어떤 영화보다도 가상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생각해 보라. 그 수 많은 페이스북 화면들과 사진, 동영상, 유캐스트 화면 들을 감독과 스태프들이 일일이 다 밤새워 만들었을 것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자료를 좀 더 찾아보니 '촬영은 13일 간 했는데 후반작업은 2년이 걸렸다'는 제작 에피소드를 읽을 수가 있었다. 천재적 능력에 인내심까지 갖춘 이 젊음이의 앞날이 기대된다. 강추한다. 그런데 [서치]의 원제는 'Searching'이었다. 배급사에서 알아서 한 거겠지만 도대체 서칭보다 서치가 왜 더 나은 건지는 정말 아직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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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은 이런저런 사연을 가지고 모여 사는 유사가족 이야기다. 영화에서 구성원들은 할머니의 연금과 가족들의 좀도둑질, 성인업소 알바 등으로 연명하는데 이는 그리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고레에다 감독은 과연 혈연으로 엮이거나 정식 결혼을 통해 공인받은 가족만이 행복을 담보하는가 묻고 있다. 그래서 친부모에게 폭행을 당하던 유리를 데려다 키운 사람들은 유괴범이 되고 정말 마음으로 아꼈던 할머니가 죽자 신고하지 않고 집 안에 파묻었다는 이유만으로 유기죄를 받게 되는 걸 냉정하게 가감 없이 보여주는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는 각본이나 연출도 좋지만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연기력을 선보이는 배우들을 보는 맛이 각별하다. 그의 영화에 단골로 출연하는 키키 키린이나 릴리 프랭키는 물론이고 [백엔의 사랑]으로 일본 열도를 들었다놨던 명배우 안도 사쿠라의 연기가 그야말로 빛을 발한다.


일요일 조조로 영화를 보고 나왔다. 어린 여동생 유리를 데리고 물건을 훔치던 소년 쇼타에게 '여동생에겐 시키지 마'라며 가게의 물건을 그냥 내주던 문방구 할아버지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 피가 섞이든 아니든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려는 태도는 결국 이런 '어른스러움'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작품은 섣부른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질문을 던지는 경우가 많다. 이 영화도 그렇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중 바로 전 작품인 [세번째 살인]이 유일하게 싫었는데 이 영화는 다시 좋았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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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삶은 '평범하게 사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평범함 속에는 어떤 조건들이 숨어 있는 걸까? 대충 이런 것들 아닐까. 엄청난 연봉은 아니더라도 남들에게 인정받을 만한 직장에 다니고,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아무 때나 이주일 정도 해외여행을 떠나고, 돈과는 상관 없는 나만의 취미생활을 영위하며,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하나 하나 열거하다 보니 헛웃음이 나온다. 이건 평범보다는 차라리 특별한 삶쪽에 가까운 게 아닌가. 적어도 신자유주의 시대의 폭풍을 온몸으로 맞은 뒤 한반도 남한에서 허덕허덕 살아가고 있는 이삼십 대의 젊은이들에게는. 

영화 [버닝]은 무라키미 하루키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1990년대에 이 작품을 읽은 나는 아침에 조깅을 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큰 피해는 주지 않고 오로지 헛간만 조심스럽게 골라 태우는 등장 인물의 무용한 행위가 영화에서 어떤 의미로 작용했을지 몹시 궁금했다(후에 전쟁영화의 레퍼런스급으로 등극한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보기 전 읽은 시놉도 '2차대전 중 참전용사로 네 명의 아들을 잃은 집의 마지막 아들 라이언 일병을 구하기 위한 군인들의 노력'이 전부였는데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영화의 분위기를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감독이 이창동이라는 말에 꽤 독한 영화가 나오겠구나, 예상을 했고 그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유통회사에서 '알바'를 뛰고 있는 소설가 지망생 종수는 일을 하다 행사장에서 춤을 추고 있던 어렸을 적 동네 친구이자 동창인 해미를 만나 가까워진다. 그녀는 취미로 팬터마임을 하기도 하고 고양이 '보일'이를 기르기도 하는데 어느날 종수에게 고양이를 맡기고 아프리카 여행을 훌쩍 떠났다가 벤이라는 돈 많은 남자와 함께 돌아온다. 벤은 특별히 열심히 일을 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스포츠카를 몰고 방배동의 고급 빌라에서 살고 있는 잘 생긴 싱글이다. 종수는 벤이 마치 피츠제럴드의 소설 속 주인공 개츠비 같다는 생각을 하고 벤은 그런 종수와 대마초를 나눠 피우며 자기는 가끔 들판에 널려 있는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습성이 있다고 고백한다. 불이 나도 대부분 아쉬워하지도 않고 큰 범죄가 되지도 않는 비닐하우스 태우기. 종수는 혹시 자기가 비닐하우스 같은 하찮은 존재는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본능적으로 몸을 떤다. 이들은 모두 저녁 노을보다는 아침 햇살이 더 어울리는 나이지만 그들이 모이는 곳엔 늘 석양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단어는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일 것이다. 해미가 아프라카에 가서 들었다는 얘기. 그냥 배가 고픈 사람은 리틀 헝거이고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사람은 그레이트 헝거라는 그럴듯한 메타포. 그레이트 헝거는커녕 리틀 헝거라도 한 번 폼나게 해보고 싶지만 매 순간 가진 것 없이 뜨겁기만 한 젊은 육체를 버거워 해야하는 해미는 아프리카에서 시시각각 색깔이 변해 가는 노을을 바라보면서 "죽을 용기는 없고 그냥 저것들처럼 훌쩍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다며 술집에서 운다. 

평생 아쉽거나 슬픈 일이라고는 당해본 적이 없어서 눈물을 흘려보지도 못한 벤은 그런 청승을 떠는 종수와 해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모든 일에 심드렁하다. 여자든 돈이든 원하기만 하면 바로 생기는 데다가 종수처럼 분노조절이 안 돼서 폭력혐의로 재판을 받는 아버지가 있거나 해미처럼 카드빚 다 갚기 전에 집에 들어올 생각 말라 야멸차게 내치는 가족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 비닐하우스를 태우는데, 아다시피 그것도 그리 큰 재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그는 '재밌네'라는 말을 남발한다.  파주에 사는 종수 집으로 갔을 때 마을에 울려퍼지는 소음이 대남방송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도 그는 무심코"재밌네요"라고 말한다. 사실은 뭐든 게 재미 없어서 자신의 여자들이 파티장 친구들 앞에서 신나게 떠들 때도 하품을 하다가 매번 종수에게 들키면서도. 

종수 역을 맡은 유아인은 영민하지만 '세상이 거대한 수수께기 같아서' 소설을 쓰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청년 역할을 너무나 잘 소화해 내고 있다. 판토마임으로 없는 귤을 까먹고 노을 앞에서 옷을 훌훌 벗은 채 반나로 춤을 추는 전종서도 해미 역에 딱이다. 그러나 이 영화 최고의 캐스팅은 모든 것을 다 가졌으나 권태롭고 그러면서도 끝까지 침착함을 잃지 않은 벤을 연기한 스티브 연 아니었을까. 이창동 감독의 연출력은 어느 하나 뛰어나지 않은 점이 없지만 그 중에서도 벤을 악역으로 설정하지 않은 점이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분명 종수에게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인데 정작 본인은 늘 침착하다못해 천진하기끼지 하다. 도대체 싸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적보다 더 무서운 적은 아마 이처럼 무심한 존재일 것이다. 마지막에 종수가 벤을 칼로 찔렀을 때도 그는 아마 "재밌네"라고 중얼거리며 죽어갔을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를 보고 그래도 희망은 있다, 거나 어떻게든 살아야 하지 않겠니? 같은 가짜 위로의 말은 당분간 삼가해 주시기 바란다. 비극의 주인공을 꾸며내려고 해도 '과잉 설정'이라는 소릴 듣게 되는 상황이 바로 하루에 햇빛이 딱 한 번 드는(그것도 남산 타워에 반사된) 해미의 방일 것인데 어쩌면 그 또래들에게 이 영화의 배경은 2018년 대한민국 전체로 확장되어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예전에 에스컬레이터에서 에티켓을 무시하고 걷거나 뛰어다니는 승객들 대부분이 젊은이들이라는 어른들의 질책에 '나도 언젠가 에스컬레이터에서 뛰지 않고 그냥 서서 가는 입장이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한 대학생 알바생의 가슴 시린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다. 이창동 감독은 이 영화에서 바로 그 젊은이의 분노를 담아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시나리오 작가 오정미 각본가에 의하면 이 영화는 시나리오 작업 단계에서 지금의 제목 대신 '분노 프로젝트'라고 불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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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만나 보는 나이 든 홍상수 - [클레어의 카메라] 


영화제 때문에 깐느에 왔던 영화감독 소가 술에 취해 영화사 직원인 만희와 하룻밤 자는 실수를 저지른다. 그런데 같이 온 영화사 사장이 그걸 알고 만희를 현지에서 전격 해고한다. 이유는 정직하지 않아서, 라고 하지만 사실은 질투심 때문이다(사장과 소 감독은 오랜 연인 사이다). 만희는 자기가 왜 잘렸는지도 명확하게 알지도 못한 채(비행기표가 워낙 싼 거라 일정 변경이 불가능해서) 깐느 해변을 배회하다가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다니는 클레어라는 프랑스 여자를 알게된다. 그 여자는 우연히 소 감독도 만나게 된다. 소 감독과 영화사 사장이 있는 자리에 합석하게 된 클레어는 자신이 며칠 동안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들을 보여주다가 이 사람들이 만희와 아는 사이임을 알게 된다. 만희는 김민희이고 소 감독은 정진영, 영화사 사장은 장미희이다. 

이것은 홍상수 감독이 내놓은 69분짜리 짤막한 장편 영화 [클레어의 카메라]다. 영화라기보다는 차라리 한 편의 단편소설 같다. 그것도 1,2,3 챕터로 구성된 단편소설 중에서 두 번째 챕터만 떼어내 영화로 만든 것처럼 보인다. 몇 명 나오지 않는 등장 인물로 봐도도 그렇고 백 분이 채 안 되는 길이로 봐도 그렇다. 제목에 등장하는 클레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거의 정보도 없고 인간적인 고뇌도 없어 보인다. 아마도 클레어 역을 맡은 이자벨 위페르에 대해 알고 싶으면 1이나 3챕터를 따로 찾와봐야 할 것이다. 

아다시피 홍상수는 몇 줄의 시놉으로 구성된 아주 사소한 얘기만으로도 뚝딱뚝딱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다. 그는 관객이 흥미를 불러 일으킬 만한 영화적 소재를 찾는 것엔 관심이 없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라고 오해받을 수 있는 소재나 배우를 쓰는 데도 거리낌이 없다. 그럼 내가 이런 얘기 말고 무슨 다른 얘기를 하란 말인가, 라고 매번 묻는 듯하다. 이번에도 프랑스라는 곳에서 벌어지는 몇날 며칠 간의 소소한 사건들이 앙상한 배경의 전부다. 그런 미시적인 세계 속에서 '정직, '판단', '변화' 같은 중요하지만 너무 빛이 바래 이젠 우스워진 단어들을 배우들의 입에 담게 한다. 그러다 보면 또 한 번 홍상수만 가능한 영화가 완성된다. 찌질한 연애나 삼각관계, 허영심에 휘둘리는 남자들 등 아주 시시한 세계 속에서 보편적 인간의 속성을 발견하는 것. 아마도 홍상수를 세계적인 영화감독으로 만든 것은 이런 통찰 때문일 것이다. 

이번에도 홍상수는 변함이 없다. 일상의 미세한 반복을 포착하고 누구나 가지고 있는 유치찬란한 면을 천재적인 방법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점점 나이가 들어가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던 술자리나 섹스 장면이 점점 적어진다. 그게 나쁜 건 아니라고 본다. 굳이 술이나 섹스 장면이 나오지 않아도 얘기가 충분히 전달된다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이번엔 그 생략의 빈도가 더 잦아지다 보니 러닝타임도 짧아지고 카타르시스도 적어졌다. 언젠가 홍상수는 영화를 찍을 수 없을 정도로 나이가 들면 그땐 아주 짧은 단편소설 같은 걸 쓰고 있지 않을까, 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어쩌면 이 영화는 그런 그의 예언을 미리 엿본 거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나이가 든다고 홍상수가 힘이 빠지거나 너그러워지지야 않겠지만, 적어도 덜 수다스럽고 덜 그악스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고 또 당연한 일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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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스포일러 주의) 

내가 광화문에 있던 MBC애드컴이라는 광고대행사에  신입사원으로 일할 때 얘기다. 어느날 아침 출근을 했더니 사람들이 조간신문을 앞에 두고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었다. 이유는 어떤 남자가 조간신문 1면에 5단통광고 지면을 사서 홀딱 벗고 찍은 돌사진을 싣고 그 밑에 'oo야, 나랑 결혼해 줄래?' 라는 청혼광고를 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관련 기사를 읽어보니 둘이 같이 명동 거리를 걷다가 TV 방송 프로그램 중 전광판에 뜬 다른 커플의 청혼 이벤트를 보고 여자친구가 너무나 부러워했단다. 그래서 남자친구가 자기 아버지에게 가서 "예쁜 며느리 얻으시려면 돈을 써야 해요"라고 설득해 이백만 원인가를 빌려 그 광고를 집행했다는 것이었다. 정작 광고회사를 다니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던 우리들은 그 기발함과 실천력에 감탄했다. 물론 다  좋아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대체로 여직원들은 어머, 좋겠다. 너무 로맨틱해! 하고 부러워했고 남직원들은 아유, 미친새끼...하고 담배를 뻑뻑 피우며 화를 내기도 했으니까. 

어떤 일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는 모양이다. 미국 남부 깡촌 미주리주에 사는, 딸이 강간살해로 죽은 뒤에도 경찰이 범인은커녕 단서조차 잡지 못해 울화가 치민 상태로 지내던 밀드레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새벽에 한적한 마을 도로를 운전하고 지나가다가 아무도 쓰지 않는 망가진 광고판(빌보드) 세 개가 나란히 서 있는 것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는다. 세 개의 광고판에 경찰을 자극하는 카피를 한 줄씩 실어 수사를 촉구하기로 한 것이다. 그녀는 경찰서 바로 건너편에 있는 광고판 업자를 만나 광고 금액을 묻고 광고판에 써넣을 문구를 의논한다. "법적으로 쓰면 안 되는 글자가 뭐야? F*ck이나 C*nt 같은 단어는 물론 안 되겠지." 여기서부터 마틴 맥도나 감독의 유머 감각이 빛을 발한다. 빌보드를 붙이는 과정에서 백인 경찰과 흑인 인부들이 나누는 대화 속엔 미국 남부지방에 깊게 뿌리내린 차별과 불합리에 대한 야유들이 숨어 있다. 그러나 그 대사들이 너무 신랄하고 웃겨서 얼굴이 찌푸려지기보다는 오히려 즐거워진다. 그녀가 세 개의 빌보드에 나눠 써넣은 문장은 '어떻게 됐어 윌러비 서장, 아직도 체포 못했어? 우리 딸은 강간당하면서 죽어갔는데.'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에둘러 경찰이라고 하지 않고 직접 서장의 이름을 거론했고 딸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도 분명히 적었다. 당연히 경찰들은 질색을 하고 주민들도 도를 넘은 그녀의 행동에 우려를 표명한다. 윌러비 서장은 인품이 좋아서 지역사회에서 명망도 높은 데다가 얼마 전에 췌장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불쌍한 인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녀를 만난 윌러비 서장이 "내가 암에 걸린 걸 알고도 그 광고판을 썼어요?"는 질문에 태연하게 '그렇다'고 대답한다. 다소 멍청해 보이고 버릇도 없는 경찰 딕슨에게 '고문 경찰'이라고 계속 놀리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쯤되면 영화는 딸을 죽인 범인을 찾아 나서는 방향으로 곧장 흘러가야 할 것 같지만 감독은 이런 관객들의 예상을 뒤엎는다. 대신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다 젊은 여자와 바람이 나 이혼을 한 밀드레드의 전남편을 불러 오기도 하고 어린 두 딸과 아내를 두고 가야 하는 윌러비 서장의 눈물 어린 마지막 섹스와 자살 과정을 정감 넘치게 보여주기도 한다. 그리고 흑인들을 괴롭히던 폭력 경찰에서 정의로운 히어로로 거듭나는 딕슨의 변화를 보여주며 이 영화가 단순히 살인사건을 다루는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의 인생 자체를 태피스트리처럼 엮은 쫀쫀한 휴먼드라마임을 깨닫게 해준다.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좋은 시나리오를 가진 대부분의 영화들이 그렇듯이 이 영화에도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많이 나온다. 새벽 도로에서 손톱을 깨물며 광고판을 이용해 사건을 해결할 생각을 하는 밀드레드부터 아내와 딸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자살을 기획하는 윌러비, 그리고 술집에서 일부러 폭행을 유도해 범인의 DNA를 확보하는 딕슨과 불타버린 광고판을 다시 세우게 만들어주는 인부들의 마법 같은 도움까지. 그리고 이런 아이디어들을 빛내주는 프란시스 맥도먼드와 우디 해럴슨, 샘 록웰 등 일급 배우들의 연기가 있다. 

시종일관 등장인물들과 비꼬거나 받아치는 대사를 주고 받으며 웃음을 선사하던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음주운전을 걱정해 차를 빌려달라던 딸의 부탁을 거절하며 무심코 되받았던 막말(나 걸어가다가 강단 당할지도 몰라  - 그래, 강간이나 당하든지)이 현실이 되어버린 장면을 보여줄 땐 정말로 눈물이 나서 혼났다. 이 영화엔 전형적인 악인이 등장하지 않는다. 과장된 연기를 하는 사람도 없다. 그저 모두 자신의 입장에서 할 만한 행동을 하고 보일 만한 반응을 보여줄 뿐이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에서 '그'와 '그녀'가 범인을 어떻게 처리하든 그런 건 상관하지 않게 된다. 이미 서로의 마음을 충분히 공감하게 된 눈빛만으로도 더 이상 바랄 게 없기 때문이다. 

가끔 신기한 일이 일어난다. 이를테면 오래 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데어 윌 비 블러드] 같은 끝내주는 작품이 같은 해에 나란히 개봉하는 기적. [쓰리 빌보드]를 보면서 다시 한 번 그런 생각을 했다. 와, 이런 끝내주는 영화를 몇 주 간격으로 계속 보게 되다니! 폴 토머스 앤더슨의 [펜텀 스레드], 스티븐 스필버그의 [더 포스트], 그리고 마틴 맥도너의 [쓰리 빌보드]까지 올해(사실은 작년) 미국영화들 정말 대박이다. 두 시간 내내 울다 웃다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고 영화가 빨리 끝나버릴까봐 두려워하다가 뛰는 가슴을 진정하며 극장 문을 나섰다. 이 영화는 작년 아카데미에서 작품상과 각본상 등 여러 부문 후보에 올랐고 결국 프랜시스 맥도먼드의 여우 주연상 수상(그녀의 수상 소감도 많은 화제를 모았다)과 샘 록웰의 남우 조연상 수상으로 작품의 위엄을 증명했다. 아이디어도 좋고 연기, 각본, 엔딩 처리까지 너무 좋다. 부디 놓치지 말고 극장에서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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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m6bylpWdfFI



[록키]를 다시 극장에서 개봉한다고 하길래 아내에게 이 영화를 꼭 극장에서 봐야겠다고 설레발을 쳤는데 마침 그날은 개봉 전날이었고 그 이후엔 계속 회사 일이 바빠서 예매를 못하고 있다. 다음주엔 꼭 시간을 내서 이 영화를 보고야 말 것이다. 

내가 '록키 시리즈'를 만나 것은 불광극장에서 본 [록키2]부터였다. 고등학교 때였나보다. 그리고 점점 나이가 들고 영화를 좋아하게 되면서 [록키]가 얼마나 대단한 영화인지 알게 되었고 텔레비전에서 성우들의 더빙판으로 이 영화를 한 번 본 후 홀딱 빠지게 되었는데, 거기에 기름을 더 부은 것은 대학생 때 읽었던 어떤 소설에 등장하는 록키였다. [영자의 전성시대]로 유명한 조선작이 예전에 쓴 단편소설 <아메리카>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인 술집 아가씨가 심란한 마음을 달래려고 무슨 제목인지도 모르고 대낮에 변두리 극장에 들어가서 보게 된 영화가 바로 록키였다. 신나게 권투만 하는 영화인줄 알았던 주인공은 마지막에 록키가 경기에서 지고나서 퉁퉁 부은 얼굴로 여자친구인 에드리안을 애타게 찾는 장면을 보면서 대책 없이 울음을 터뜨린다. 에드리안, 아아 록키. 아아 에드리안.  영화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가장 힘들 때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의 이름을 애타게 부른다는 사실만이 그녀의 가슴을 적셨다.  

이 영화는 실패담이다. 나이 든 스파링 파트너 출신의 퇴물 복서가 챔피언의 쇼맨십 덕분에 모처럼의 기회를 얻었지만 처절하게 싸운 뒤 결국은 장렬하게 판정패 한다는 이야기. 물론 사람들은 주인공이 실패하는 이야기보다는 성공담을 좋아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진정성이 있다면 말이다. 모든 진정성 있는 실패담은 여운을 남긴다. 소설가 김탁환은 김관홍 잠수사의 이야기를 쓴 [그래서 그는 바다로 갔다]에서  '이야기를 잘 하는 사람이 이야기꾼이 아니라 간절한 이야기를 많이 가진 사람이 이야기꾼'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건 실베스타 스텔론이라는 이야기꾼이 작두를 탔을 때의 이야기가 맞다. 정말 간절하고 궁핍했던 시절에 그가 직접 쓴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실베스타 스텔론은 무하마드 알리의 권투 경기를 TV로 보다가 뭔가 느낀 게 있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고 단 사흘만에 [록키]의 각본을 완성했다고 한다. [람보] 시리즈의 무식한 근육질이나 최근 [가디언스 오브 갤럭시2]에서 뭉툭한 몸매와 목소리로만 연상되는 실베스타 스텔론도 사실 젊었을 땐 대학까지 나온 날렵한 인텔리였다. 영화를 하고 싶어서 도시로 나와 험한 일을 하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슬라이(그의 애칭)는 '록키'의 각본이 헐리우드를 떠돌며 값이 천정부지로 오를 때도 타협을 하지 않는 뚝심을 보였다. 시나리오에서 흥행의 단초를 예감한 제작자들은 알 파치노 같은 당시 스타나 권투선수 출신의 라이언 오닐 등을 주인공으로 쓰려고 했으나 스텔론이 결사 반대해서 결국 그가 주연까지 맡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적은 예산으로 영화를 찍게 되었고 작품 안에 나오는 낡은 아파트 등도 실제 슬라이가 살던 당시의 모습 그대로였다. 애드리안과의 스케이트장 데이트 장면도 돈이 없어서 야밤에 찍게 되었는데 이건 가난한 록키가 밤 늦게 스케이트장 관리인에게 뒷돈을 찔러주고 링크 전체를 데이트장으로 쓴다는 순애보적 아이디어에 현실성을 더하는 멋진 설정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옳은 선택이었던 것이다. 실제 록키와 비슷한 처지에 있던 슬라이의 삶이 그대로 묻어나온 덕분에 영화는 수 많은 관객들의 가슴을 울릴 수 있었고 실베스타 스텔론은 이 영화 한 편으로 '어메리칸 드림'의 표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실패담이면서 동시에 성공담이기도 하다. [록키]에 비하면 그 뒤 나온 2편 3편 등은 갈수록 기름기가 끼고 거만함이 느껴져 록키라는 복서도 그저 하나의 기름덩어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성공한 밴드의 모든 데뷔앨범이 훌륭했던 것처럼 실베스타 스탤론의 실질적인 데뷔영화 [록키]도 걸작 중의 걸작이다. 이런 전설을 극장 스크린으로 만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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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릴러인줄 알고 갔는데 이중 삼중으로 설계된 교묘한 심리극에 홀딱 속았다가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피해자인 줄 알았던 이자벨 위페르는 알고 보니 칼자루를 쥔 여자였고 가해자는 복수를 당하는 게 아니라 어이 없게도 일종의 '사고사'로 죽는다. 


예상했던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뀐 것을 관객들이 서서히 깨달을 때쯤 맨 마지막 묘지 장면에서 뒷모습을 보이며 걸어가는 여자들은 캐롤 리드의 [제3의 사나이]의 엔딩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당당하고 얄밉다.  폴 버호벤의 연출은  그가 평생을 천착해 왔던 폭력과 욕망 사이에 유머까지 끼워넣는 여유를 부리면서도 전체적인 긴장감을 잃지 않는다. 무엇보다 나이가 느껴지지 않는 경쾌한 카메라 워크 역시 '폴 버호벤'이란 감탄을 하게 만든다. 


음악은 예전 [원초적 본능]을 떠올리게 하는 고전적인 맛이 있고 설정이나 시점이 다소 애매한 부분들이 있는데 그것마저도 폴 버호벤스러운 점으로 느껴진다. 이 영화는 원래 미국에서 만들려고 했으나 니콜 키드만, 줄리안 무어, 샤론 스톤 등이 모두 출연을 고사하는 바람에 유럽으로 건너와 이자벨 위페르와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굳이 분류해 보자면 그의 흥행작들인 [로보캅]이나 [토탈 리콜], [스타쉽 투루퍼스]보다는 버호벤 초기작인 [The 4th Man]과 바로 전작인 [블랙북] 사이에 있는 작품처럼 느껴진다. 씨네21 평론가들 중엔 미카엘 하네케와 비교하면 뭔가 아쉬운 점이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 사람도 있던데,  당치 않은 얘기다. 하네케 감독의 도저한 비관주의에 비하면 버호벤은 훨씬 낙관주의자에 가까우니까. 그는 아카데미 시상식 바로 전날 최악의 영화들을 뽑는 ‘골든 래즈버리’ 식장에 가서 최악의 감독상도 받고 주최자들과 낄낄대고 온 최초의 감독이기도 하다. 모두 보통 사람의 내공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이다. 

#폴버호벤짱 #이자벨위페르짱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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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인 오늘 낮, 뒤늦게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보러 갔다. 극장은 아리랑시네센터. 2000년대 초반 정릉에서 혼자 살 때 갔던 것 말고는 십수 년만에 가보는 극장이다. 구민회관입구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누가"형!" 하고 부르길래 쳐다보니 같은 동네 사는 배우 박호산이다. 작품 연습하러 가는 길이라고 한다. 요즘 좀 뜸했는데 밖에서 우연히 마주치니 반가웠다.


버스를 탔더니 어떤 아저씨가 옆에 앉자마자 내 넓적다리를 꽉 잡는다. 깜짝 놀라 쳐다보니 손짓을 이상하게 하고 소리고 자꾸 지르는 폼이 뭔가 몸이 불편한 분 같았다. 이런 분은 혼자 버스에 타면 안 되는데, 라는 생각을 하며 앉아 있다가 아리랑시네센터 정류장이 가까워져 내리려고 좀 비켜달라고 했더니 얼른 다리를 접어준다. 알고보니 선량한 사람이었다.

극장에서 표를 사고 나와 먹을 걸 파는 집을 찾아 헤매다가 웬 화덕피자집에서 칠천 원짜리 스파게티를 시켰는데, 끔찍했다. 스파게티를 내주고 남자 직원들끼리 점심을 먹고 있길래 혹시 피클은 안 주냐고 물었더니 냉장고에서 포장 피클을 하나 꺼내 주며 '200원인데 그냥 주겠다'고 한다. 돈 드릴게요, 라고 했더니 괜찮단다. 한숨이 나왔다.


극장에 올라가 표를 내보이는데 키가 작고 안경을 쓰고 목소리가 높은 남자 직원이 나를 쳐다보고 웃으며 "어떻게 저 있을 때만 오시나 봐요?!" 라고 인사를 한다. 저 여기 처음 오는데요, 라고 말이 헛나왔는데도 그 남자는 여전히 친한 사람 대하듯 싱글벙글이다.

극장에 들어가니 내 자리 뒤에 앉은 어떤 아저씨가 양말을 벗고 내 왼쪽 팔걸이에 발을 올려놓고 있었다. 발을 내려달라고 정중하게 말하고 자리에 앉았다. 두 줄 앞 좌석엔 할머니 두 분이 앉아 박근혜에 대해 큰 목소리로 얘기를 나누고 계셨다. 홍상수 영화를 보기엔 지나치게 고령이신 것 같아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지자 뒤에 있던 그 남자 직원이 날 보고 또 인사를 했다. 영화를 같이 본 모양이었다. 엇 뜨거라 하고 얼른 밖으로 나왔다. 완전히 밖으로 나가려다가 아냐, 간단하게 영화 리뷰나 써야지 하고 극장 안에 있는 커피숍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사서 계단을 올라갔더니 그 남자 직원이 "뭐 두고 가셨어요?" 라고 반갑게 묻길래 그대로 다시 내려왔다. 이상한 날이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영화 리뷰는 다음에 쓰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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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마끼아또같은 남좌 2017.04.25 03: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루가 느껴지는 글 이네요 ㅎㅎ 잘 읽고 갑니다 ㅎㅎ






저는 영화를 보고 나서 ‘와, 좋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두 가지로 나뉘는데 그 하나는 주제의식이나 플롯이 아주 선명해서 아무런 의심 없이 좋다고 느끼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좋긴 좋은데 도대체 뭐가 좋은지 알다가도 모르겠어서 자고 일어나도 생각이 쉽게 정리되지 않는 경우입니다. 지난 일요일에 본 영화 [노예 12년]은 후자였죠. 영화를 보고 나서 직후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한참을 멍하게 있다가 며칠이 흐른 후에야 이렇게 천천히 리뷰를 써봅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벙찐 표정으로 멀뚱멀뚱 카메라를 쳐다보고 있는 목화농장 노예들의 모습이 아무런 소리도 없이 몇 초간 지속됩니다. 감독이 “자, 이제부터 시작이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보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은 인상 깊은 첫 장면입니다.


1841년 뉴욕의 사라토가에서 바이얼린 연주자로 살아가고 있는 흑인 솔로몬 노섭은 어느날 예술단을 사칭한 사기꾼들에게 속아 폭음을 한 뒤 쇠사슬에 묶여 노예상에게 팔려가게 됩니다. 당시엔 흑인들이 자유롭게 사는 지역과 노예로 사는 지역이 혼재하던 시절이었는데 노섭은 하룻밤의 실수로 졸지에 자유인에서 플랫이라는 이름의 노예로 신분이 달라지게 되어버린 것이죠. 그로부터 12년 간 솔로몬 노섭은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 가까스로 다시 자유인이 되는 데 성공합니다. 이 영화는 얼핏 150여 년 전 한 흑인 남자의 기막힌 삶을 통해 우리가 살던 세상의 야만성을 돌아보고 자유의 소중함을 설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자유를 향한 불굴의 의지로 운명의 비가역성을 이겨낸 안티히어로의 인간승리 이야기’로만 볼 수 없는 게 바로 스티브 맥퀸이라는 감독의 이름 때문이죠. 데뷔작 [헝거]는 못 봤지만 전작인 [셰임]만 보더라도 이 젊은 아티스트가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만한 평범한 인간드라마에 만족할 리가 없다는 선입관이 생깁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선입관에 둘러싸여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사람은 똑똑한 인간이니까 이번에도 허튼 짓은 하지 않을 거야. 또는 저 사람은 업계 평판이 대단하니까 아이디어도 무궁무진하고 통찰력도 뛰어날 거야. 또는 저 여자는 얼굴이 예쁘니까 분명 남자친구가 있을 거야…)



스티브 맥퀸은 놀라운 미술적 재능을 통해 세계적 명성을 획득한 비주얼 아티스트 출신 영화감독입니다. 당연히 그가 만드는 영화는 한 장만 한 장면이 다 당장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도 좋을만큼 때깔이 좋고 구도가 탁월합니다. 이번 영화도 그런 장면들이 차고 넘치게 나옵니다.배가 처음 나타날 때 돌아가는 터빈의 모습과 배 안에서 느닷없이 벌어지는 정사신에서 보여주는 빅클로즈업은 정말 압도적이죠. 그리고 배 안에서 어떤 흑인 여자가 겁탈 당할 위기에 처할 때 노섭의 동료가 그걸 막으려다가 허무하게 칼에 찔려 죽는 장면에서는 너무 놀라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번 드라마는 생각보다 차분하게 진행이 되는 편입니다. 첫 장면 이후의 플래시백 말고는 영화 속 사건들도 그냥 시간 순으로 진행이 됩니다. 말하자면 감독이 자신의 능력을 절제하고 있다는 이상한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어쩌면 감독은 현란한 비주얼적 장치들을 거둬들임으로써 관객들이 보다 더 영화 속의 다른 이야기에 집중하길 바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더 집중적으로 봐줬으면 하는 얘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이 영화는 오래 전 이야기이고 또 솔로몬 노섭이라는 사람이 겪은 특이한 실화이기도 하지만 사람 사는 모습은 언제 어디서나 비슷하듯이 영화에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칠 수 있는 다양한 인간군상들이 등장합니다. 자유롭게 자신의 세상을 유영하다가 갑자기 불의의 덫에 걸려들지만 끝까지 자존감을 포기하지 않고 버티는 노섭, 비교적 인간적이지만 자신의 이해관계와 상충될 때는 그저 허약한 인간일 수밖에 없는 첫 번째 주인 윌리엄 포드, 그리고 자신의 욕망에 휘둘려 바닷물을 마시듯 끊임없는 갈증에 시달리는 두 번째 주인 에드윈 엡스까지.



노예로서의 생활은 끔찍한 것입니다. 우리도 불과 백 년 전만 해도 종이나 하인이라는 노예제도가 있었죠. ‘식모’라는 이름으로 임금과 성을 착취당하기 일쑤이던 반노예도 있었구요. 그런데 이 노예들도 ‘뒤웅박 팔자’라고나할까, 정해진 주인이나 환경에 따라 고생의 차이가 천차만별입니다. 노섭은 첫 번째 주인인 포드 밑에서는 비록 고생스럽더라도 자신의 의견이나 아이디어를 펼치기도 하고 나름대로 중간 관리자와 싸움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포드가 빚에 쫓겨 그를 잔인하고 포악하기로 소문난 엡스에게 팔아버리죠. 그때부터는 더 생지옥입니다. 목화밭에서 하루 종일 아무리 열심히 목화를 따도 저녁에 결산하는 자리에선 목표량에 모자라는 무게만큼 매일 채찍을 맞아야 했습니다. 도망가려고 몇 번이나 시도를 해봤지만 그 때마다 명백하게 깨닫는 건 잡혀서 나무에 목 매달리기 전에는 탈출할 방법이 없다는 절망뿐이었습니다.



이런 지옥 같은 삶을 언제까지 견뎌야 하는 걸까요? 농장에서 목화를 가장 잘 따는 팻시는 노섭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부탁합니다.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육체적 고생은 물론 주인인 엡스에게 당하는 성폭력, 그리고 주인마님의 노골적인 질투까지 더해지니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말이죠. 그러나 노섭은 그 부탁을 거절합니다. 그녀에게 버티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스스로를 돌보기도 벅차기 때문이었습니다.


‘인생은 견디는 것’이라는 메시지는 오히려 화면 밖의 감독이 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 영화의 폭력장면은 매우 사실적입니다. 처음 노섭이 술에서 깨어나 자신은 플랫이 아니라고 말하다가 등을 얻어 맞을 때를 시작으로 수많은 채찍질, 주먹질, 마님이 팻시에게 던지는 술병, 마지막에 나오는 길고 긴 롱테이크 신의 채찍질 등 어느 하나 편안한 장면이 없이 가장 높은 레벨의 압박감을 유지합니다. 덕분에 괴로운 건 영화 속 노예들만이 아닙니다.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도 그 잔혹한 장면들을 참아내는 건 참으로 힘이 듭니다. 


그런데 스티브 맥퀸 감독은 눈 돌리지 말고 그 장면들을 똑바로 보라고 우리에게 강요합니다. 인터뷰를 읽어보니 마지막에 팻시를 채찍질 하는 장면은 그 중요성 때문에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단 한 번의 테이크로 찍어냈다고 하더군요. 밀도가 대단한 장면이었습니다. 그래도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아마도 노섭이 작업반장과 싸우다가 결국 나무에 목이 매달려 선 채 진흙탕에 발을 디디고 간당간당 서 있는 장면일 겁니다. 두 손조차 묶인 채 미끌미끌한 진흙탕 위에 까치발을 하고 서 있는 노섭은 살짝 미끌어지기만 해도 목숨을 잃을 지경이지요. 그런데 카메라는 이 장면을 롱테이크 기법으로 잔인하게 오래오래 잡아냅니다. 감독의 재능이 빛나는 명장면이죠. 처음엔 안타깝게 지켜보던 동료들도 결국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정말 사는 게 이래도 되는 걸까요?


그러다가 문득 깨닫게 됩니다. 아, 인생이라는 건 정말 참는 것의 연속이구나.‘참을 인 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라는 속담도 있지만 결국 인생을 살게 하는 것은 참을 수 있어서 참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어서 참는 경우가 더 많은 거구나, 하는 아픈 깨달음이죠. “제가 가진 선의는 제가 소유한 만큼의 동전 갯수를 넘지 못합니다”라는 노예상의 말처럼 세상의 선의에 기대 산다는 건 헛된 망상일 뿐입니다.노섭도 마지막에 집으로 돌아오는 행운을 잡게 되었을 때 자신을 죽여달라던 팻시를 한 번 꽉 껴안아주고는 그대로 도망치듯 마차로 오릅니다. 혼자 살기도 바쁜데 남의 챙길 여유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사정이 이 정도인데도 우리는 배를 타기 전 노섭이 내뱉었던 말 “I don’t wanna survive, I wanna live!”라는 말을 기억해야 하는 걸까요? 멋진 말이긴 하지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감독은 오스카 작품상을 타고 난 직후 이 대사를 다시 한 번 언급했지만.


아무튼 참 세고 진하고 묵직한 영화였습니다. 요즘 여유가 없어서 이 영화와 함께 등장한 화제의 작품들을 아직 못 보았지만 한동안 이 영화를 쉽게 잊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이 모든 훌륭한 얘기를 이끌어 가는 데는 명배우들의 명연기가 있었습니다. 요즘 ‘셜록’ 시리즈로 인기 절정에 있는 베네딕트 컴버베치와 스티브 맥퀸의 모든 영화에 출연 중인 마이클 패스빈더가 연기 경연을 벌이고, 얄미운 작업 반장 역을 맡은 폴 다노의 연기도 [데어 윌 비 블러드]에 이어 또 한 번 대박이죠. 팻시 역을 맡았던 루피타 니용고는 결국 올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탔군요. 제작자인 브래드 피트도 뒷부분에 잠깐 출연하는데, 너무 천사 같은 역으로 나와서 헛웃음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쟁쟁한 스타들을 조연으로 만들어버린 치웨텔 에지오프의 연기는 정말 발군입니다. 이 친구를 어디서 본 듯 하다구요? 저도 궁금해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러브 액추얼리]에서 키이라 나이틀리의 남편으로 나왔더군요. 그 유명한 ‘스케치북 고백 신’에서 거실 안 소파에 앉아있던 흑인 남자가 바로 그였습니다. 엡스의 부인으로 나왔던 사라 폴슨은 [Studio 60 on the Sunset Strip]이라는 아론 소킨의 드라마에서 매튜 페리의 전 애인이자 돌고래 소리를 잘 내던 코미디언이었구요. 중요한 건 아닙니다. 뭐, 그렇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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