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는 왕이 가장 사랑하는 큰아들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애지중지했고 그가 원하는 것은 뭐든 다 해주었으며, 그를 위해 성대한 잔치와 만찬을 베풀곤 했다. 어느날 만찬에서 왕자는 아버지 곁에 선 검은 수염에 얼굴이 어두운 남자를 보았고, 그가 저승사자라는 것을 곧 알아보았다. 둘은 눈이 마주쳤고 서로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왕자는 만찬이 끝난 뒤 아버지에게 초대객들 중에 저승사자가 있었다고 말하며 그의 눈길로 보아 자신의 목숨을 가져갈 작정인 것 같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깜짝 놀라 말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곧장 이란의 타브리즈 궁전으로 가서 숨어 있거라. 타브리즈 왕은 나와 철친한 사이이니 아무에게도 너를 넘겨주지 않을 게다." 그리고는 아들을 곧장 이란으로 보냈다. 

왕은 다시 만찬을 준비하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또다시 얼굴이 어두운 그 저승사자를 초대했다. 저승사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전하, 오늘 저녁엔 아드님이 안 보이네요." 왕이 말했다. "내 아들은 새파랗게 젊은 아이요. 그 애는 아주 오래 살아야 하오. 그런데 왜 내 아들 얘기를 묻는 거요?" 그러자 저승사자가 말했다. "사흘 전 신께서 제게 명하시기를, 이란의 타브리즈 궁전으로 들어가 왕자의 목숨을 앗아오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제 아드님이 이스탄불인 이곳에 있길래 놀라긴 했지만 한편으론 무척 기뻤습니다. 아드님도 내가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는 것을 보았답니다." 저승사자는 이렇게 말한 후 곧장 궁전을 떠났다.  

터키에서 우물을 파러 다니는 사람 마하무트 우스타는 이 소설 [빨강머리 여인]의 주인공인 '나'에게 전날 들었던'오이디프스 이야기'를 듣고 자기도 비슷한 얘기를 알고 있다며 위와 같은 사연을 들려준다. 불행한 운명을 타고 났다는 예언 때문에  강가에 버려졌다가 결국 예언대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한 뒤 두 눈을 찌르고 광야를 헤메다 죽은 오이디프스. 그리고 위험에 빠진 아들을 살리려고 친구의 궁으로 보냈다가 오히려 그 일로 인해 아들을 죽게 만든 비운의 왕. 운명이란 그런 것이다.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나고야 만다. 다만 인간들은 그 일이 벌어진 뒤에야 그걸 깨닫는 거고. 나는 늘 내 운명의 한복판에 서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른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오늘은 금요일이니 내가 좋아하는 말을 하나 소개하기로 한다.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오늘 먹고 마시고 조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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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2018년 12월 말일을 향해 달려가고 있네요. '독하다 토요일' 2기 첫 번째 모임은 서울파이낸스센터 지하 1층에 있는 이스트빌리지에서 열렸습니다. 메르스 사태를 다룬 김탁환의 [살아야겠다]를 읽고 많은 얘기를 나눴는데, 실제 있었던 비극적이고 어처구니 없는 사건을 다룬 사회파 소설이라 많은 회원들이 분노 때문에 책을 읽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는 소감을 털어놓을 정도였습니다. 책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제가 게으름을 피우느라, 또 개인사가 너무 버러이어티하다 보니 후기를 쓸 시간을 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어짜할 바를 모르고 앉아있다 보니 시간은 흘러흘러 두 번째 모임이 다가오더군요. 결국 첫 번째 모임 후기는 쓰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어쨌든 [살아야겠다]는 영화화가 결정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오고 있으니 다행이지요. 

2018년 12월 8일 오후 2시에 '독하다 토요일' 2기 두 번째 모임이 열렸습니다. 이번엔 서소문에 있는 '청춘여가연구소'에서 일곱 명이 모여 이승우의 [가시나무 그늘]을 읽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저희 동네에 '파란대문집'이라는 공간이 생겨서 우연히 들렀는데 거기서 그날 만난 사람들 중 한 분이 청춘여가연구소 소장인 정은빈 대표였던 것입니다. 그런 연유로 서소문 피어선 빌딩에 있는 이 공간을 독하다 토요일의 새 아지트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건축을 전공한 서동현 씨의 설명에 의하면 이 건물은 1971년 미국인 선교사가 지은 아파트였다고 합니다. 당시 최고급 건물이었고 차가 건물을 통과해 현관 앞까지 들어와서 입주민이 비를 맞지 않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독특한 구조라 입구를 찾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정말 건물로 들어가는 메인 출입구는 필로피를 통과해야 그 모습을 드러내더군요. 예전엔 아파트였지만 지금은 개인 사무실이나 NGO들의 메카가 되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11층에 있는 '청춘여가연구소'에 들어서니 널찍한 공간과 커다란 창문이 눈에 띄는 훌륭한 공간이었는데 특히 창밖으로 돈의문 박물관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는 멋진 풍광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저희들은 커피 머신이 제공하는 따뜻한 커피를 한 잔씩 들고 넓다란 공간 아무 데나 마음에 드는 곳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읽은 책 [가시나무 그늘]은 제겐 [생의 이면], [식물들의 사생활], [사랑의 생애]에 이어 이승우 작가 작품으로는 네 번째 소설이었고 나중에 생각해보니 예전에 여행 가면서 헌책으로 사서 한 번 읽었던(읽다가 그치긴 했지만) 소설이기도 했습니다. 성북동으로 이사를 오면서 처리한 책 속에 들어 있었던 것 같은데, 아마도 그만큼 다시 읽기는 힘든 책이라 생각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 책을 읽자고 추천한 사람이 또 저란 걸 생각하면 저는 참 일관성 없는 인사인 것 같습니다. 

제가 헌책을 사서 읽었듯이 이 책은 절판이 되어 청소년판 아니고는 책을 구하기 힘들었습니다. 덕분에 회원들이 삽화가 들어 있는 청소년판을 저마다 들고 나타나는 진풍경이 연출되었습니다. 한 분은 책을 구할 수가 없어 남산도서관에서 빌려왔다고 했습니다. 김하늬 씨는 작가의 심각한 문체 때문에 다자이 오사무의 [금각사]나 [인간실격] 같은 작품들이 떠올랐던 것 같습니다. 다만 일본 작가들이 인간 본연의 부조리에 천착한다면 이승우는 시대상이 배경으로 깔린다는 게 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조지 오웰의 [1984]나 마누엘 푸익의 [거미여인의 키스]도 연상되었다고 했습니다. [가시나무 그늘]이 훨씬 뒤에 나왔으니 아마도 작가가 이 책들을 다 읽어보지 않았을까 하는 개연성 있는 추측도 전해주습니다. 작가가 신학대학을 나와 사유가 깊을 것이라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서른두 살에 이런 작품을 썼다는 것은 놀랍다는 평도 내놓았습니다. 진행이 세련되었고 짜임새도 좋아서 지금 읽어도 전혀 올드하지 않다는 의견에 저도 찬성을 표했습니다. 

개, 가시나무, 몰록으로 이어지는 요소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것들에 대해 때로는 친절하게 때로는 불친절하게 자세를 취하는 작가의 설명도 적절해 읽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김하늬 씨가 다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롯데의 편지를 인용한 것 등은 존 '중2병'스럽게 느껴진다고도 했고 저는 작품 전체의 분위기만 생각하면 코난 도일의 [바스커빌의 개]도 떠오른다는 엉뚱한 소리를 했습니다. 

윤혜자 씨는 청소년판으로 책을 대하니 뭔가 정답을 찾아야 할 것 같은 강박이 생기더라고 하며 웃었습니다. 청소년, 하면 뭔가 시험이 떠오르는데 이 책을 가지고 시험 문제를 내면 내는 것 자체가 무척 힘들 것 같다는 김하늬 씨의 농담에 오히려 정답이 없어야 할 것이라며 자기는 청소년이라는 단어 때문에 책 읽는 새로운 방법을 소환한 느낌이라며 지금까지 독하다 토요일에서 다룬 책 중 가장 흥미로운 독서였다는 말도 했습니다. 책에서 이야기하는 힘, 권력, 집단과 그에 비해 도드라지는 개인의 나약함 등을 생각하면 마음이 굉장히 아프고 씁쓸했고 마지막 희규의 아버지를 암시하는 썬글라스의 사내 대목에서는 이 소설이 격동의 시대를 얘기하고 있지만 결국은 지금의 이야기로 확장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 ㅇ리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이런 저런 사건과 현상들에 대해 얘기하다가 '윤창호법'에 대한 얘기까지 주제가 뻗어나가기도 했습니다. 

죽기 전에 진실과 정의에 대한 믿음을 지켜낼 수 있을까 고민하던 주인공이 마지막에 거대한 사건에 그냥 엮여버리는 것을 보면서 하이어라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 본연의 슬픔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고등학교 때 이 작품을 읽었다면 과연 이런 걸 다 이해할 수 있었을까, 라는 의문을 던지자 고등학교 선생님인 임기홍 씨는 그 나이엔 어떤 문제든 이해하는 애들과 못하는 애들이 공존할 수밖에 없다며 웃었고 김하늬 씨가 아마 [어린 왕자]처럼 연령대별로 다 다른 느낌일 것이라는 얘기도 했습니다. 윤혜자 씨는 사람들이 명화라고 하는 그림들을 책이나 다른 매체로 보았을 때 그게 뭐가 좋은데? 라고 생각했다가 막상 루브르 박물관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진품과 마주쳤을 때 느꼈던 경이로움을 이 소설 읽으면서도 비슷하게 느꼈다는 다소 의외의 고백을 했습니다. 이승우가 좋은 소설가라고 불리는 이유를 이번 책에서 깊게 느꼈다는 것이죠. 

책을 읽은 사람들은 모두 희규가 불쌍하다고 아우성을 쳤는데, 그 와중에 서동현 씨는 주문한 책을 어제 택배로 받는 바람에 결국 책을 읽지 못하고 왔다며 아쉬워 했습니다. 그는 독하다 토요일에서 읽은 책 중 제일 재미 있었던 건 [뜨거운 피]였다고 했습니다. 그 책에 '진실은 구리로 된 훈장'이라는 대목이 인상 깊었는데 그건 어떤 가치든 무의미하다는 부정적인 인식이며 그래서 사람들은 안전해지고 싶은 욕구 때문에 교회를 다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제시했습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분리불안'은 종교 뿐 아니라 유행하는 롱패딩, 유명한 맛집, 유행어, 실시간 검색어 등등 우리 삶 전반에 걸쳐 존재함으로써 그것 때문에 사는 것 자체가 점점 더 피곤해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김성희 씨는 책의 서문이 매우 좋았다고 했습니다. 작가가 인용한 에리히 프롬의 글도 인상 깊었구요. 책을 읽다보면 우리는 모두 지배당하는 것에 길들여져 있음을 깨닫게 되어 슬프고 그런 인물의 대표격으로 등장하는 희규가 애처로우면서도 또 한긋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소설에 등장하는 개에 의한 죽음이라는 장치- 명회가 이상해지자 죄책감을 느낀 희규도 그를 모방해 똑같은 방법으로 몸을 던지는 - 가 '길들여진다'는 것의 의미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으며 젊은 나이에 남자들끼리 주고받는 이런 기이한 우정의 구조를 혜진이가 공감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소감도 밝혔습니다. 

임재섭 씨는 단체와 개인의 관계에 대해 다룬 이 소설을 읽으면서 군대 시절을 많이 떠올리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내가 군대니까 이렇게 구는 거지 밖에서 만났으면 나도 좋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식으로 말하는 것인데 결국 그런 말이나 표현들이 집단의 억업된 구조가 만들어내는 부조리가 아닌가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임재섭 씨가 군대 얘기를 하니까 갑자기 불행했던 우리의 현대사가 필름처럼 휘리릭 지나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혜진은 희규의 수첩을 들고 다녔을까, 하는 김하늬 씨의 질문부터 시작해 희규는 왜 찌질하게 혜진에게 '사랑합니까?'라고 두 번이나 물어봤는지에 대한 해답들이 중구난방으로 쏟아졌습니다. 남자는 안 변 하는 것 같다,  젊은 베르테르 때부터 그랬다, 라고 말하는 김하늬 씨. 그냥 내 옆에 있는 여자를 좋아하는 게 남자의 속성인 것 같다, 라고 말하는 임기홍 씨. 후진 소설 같았으면 둘이 여관에서 가서 잤을 텐데 안 그래서 다행이었다, 라고 말하는 윤혜자 씨. 임기홍 씨가 모든 남자의 실존은 '이 여자가 나를 좋아하나?'라는 주제에서 떠나지 못한다고 말해 다들 배꼽을 잡고 웃었습니다. 

그 밖에도 희규를 괴롭히던 40대 사장을 여성으로 선정한 이유에 대한 토론도 있었고 주인공의 캐릭터 변화 때문에 청소년 문학으로 선정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있었습니다. 특이한 것은 삽화에 대한 소감들이었는데 모든 삽화에 등장 인물들의 표정이 없이 텅 비어 있는 게 책의 주제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느낌이라 좋았다는 중평이었습니다. 깨달을 만하면 끝나는 마지막에 대해서는 좋았다, 아쉬웠다, 의견이 엇갈리기도 했고 전체적으로 좀 긴 단편소설 같다는 얘기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올해의 책'으로 꼽을 만하다는 긍정적인 결론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관념적인 면이 많으면서도 작가가 잘 짜여진 블록처럼 소설적 장치들을 많이 마련해 놔서 읽기에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뜨거운 피] 얘기로 다시 돌아가서 만약 이 소설을 영화할 경우 주인공 희수 역으로 누가 가장 잘 어울리냐에 대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영화배우 박신양, 이병헌, 박휘순 등이 물망에 올랐다가 아이고, 다 부질없다, 라는 누군가의 일갈에 모임을 끝내고 이차 장소인  광화문 '안성또순이'집에 가서 먹고 마시고 놀다가 헤어졌습니다. 다음 모임인 2019년 1월 12일엔 구병모의  [네 이웃의 식탁]을 읽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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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한낮, 전철 안에서 어제 산 김민정 시인의 시집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를 읽으며 웃었다. 

첫 페이지 '시인의 말'부터 펴서 읽는데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서른 네 해째 나라는 콩깍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부모님아, 사랑도 다정도 병이라니깐요.'라는 메모에서 앞으로 펼쳐직 유쾌당혹발랄한 시어들이 벌써부터 예상되기 때문이다. 시집으로 본격 돌입하기 전에 제목들이  나열되어 있는 차례를 열어보니 첫 시 제목이 김정미도 아닌데 '시방' 이건 너무 하잖아요,다. 오규원 시인의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라는 시 제목이 광고 카피를 패러디한 것이라 화제가 되었다면 김민정의 시 제목들은 가요, 영화, 욕설, 섹스, 찌질함 등 우리가 주변에서 쉽게 또는 은밀하게 마주치는 그 모든 현상들이 소재요 주제로 종횡무진이다. '젖이라는 이름의 좆'은 워낙 유명하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뛰는 여자 위에 나는 詩'라든가 '陰毛라는 이름의 陰謨'나 '페니스라는 이름의 페이스', '선우일란, 빵의 비밀' 등등 너무 알록달록해서 마치 어렸을 때 동네 사탕가게에 처음 들어온 느낌을 준다. 

그렇다고 김민정의 시가 이런저런 자극적이고 유머러스한 표현으로 웃기기만 하냐하면 그렇지는 않다. 원래 시인이란 인생을 얘기해야 하는데 시냇물을 얘기한다든지 사랑을 얘기하는데 달이나 애기똥풀을 거론한다든지 하는 엉뚱하게 에둘러 말하기의 명수들 아닌가. 김민정도 그렇다. 웃으며 얘기하는 것 같지만 그 유머와 위악 속엔 날카로운 면도칼이나 사금파리가 곳곳에 숨어 있다. 그래서 '고비하는 이름의 고비'라는 시를 읽으며 언어유희가 재밌네 하고 마냥 웃을 수만 없고  '정현종 탁구교실'이라는 시를 읽으면서도 시인이 인터넷으로 검색해 본 너저분한 이름들 앞에서 느닷없이 삶의 비애를 느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인생을 너무 무겁게 대하면 살기 힘들어지는 것처럼 시도 너무 고귀하고 심각하게 대하면 쓰기 어려워진다. 그러나 내 이야기를, 내 주변 사람들의 취미와 버릇과 역사를 가지고 무심하게 만들어 던지는 시는 쉽게 읽힌다. 여기서 쉽게 읽힌다,에 방점을 찍기 바란다. 쉽게 읽힌다고 쉽게 쓰여지지는 않으니까. 자고로 쉽게 읽히는 글일수록 쓰기 어렵고 짧은 글일수록 쓰는 데 더 오래 걸린다. 김민정의 시가 그 적절한 예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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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서울대병원 영안실에 간다고 했다. 5월 말에 <남자요리교실>에서 나에게 '데리야끼 스테이크 요리' 특별강의를 해주셨던 김승용 선생이 너무도 갑자기 돌아가셨기 때문이었다. 나를 만나셨던 게 마지막 수업이었다고 하니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비극적인 부음이었다. 정정하던 분이 그렇게 갑자기 가시다니. 나도 함께 가서 조문을 하고 싶었지만 회사에 급한 프로젝트가 있어서 꼼짝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2015년 당시 우리나라는 메르스가 창궐하는 중이었고 믿었던 삼성병원과 서울대병원이 그 전염병의 주요 확산지라는 게 뒤늦게 밝혀지면서 모두들 분노하고 있을 때였다. 아내 혼자 그런 곳에 보내는 게 썩 내키지는 않았으나 성격상 말린다고 안 갈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갈 때 가더라도 마스크라도 단단히 하라고 당부를 할 뿐이었다. 

회사 회의실에서 메르스 관련 뉴스를 보다가 서울대병원이 스쳐 지나가길래 "어, 아내도 지금 저기 문상 가 있는데..."라고 했더니 같이 일하던 고재영 실장님이 "진짜요? 지금 당장 나오라고 하세요. 큰일 나요! 당장이요!"라고 외치는 게 아닌가. 늘 천하태평이던 고 실장님이 그렇게 심각한 얼굴로 소리를 지르는 건 처음 보았다. 뒤늦게 정신이 번쩍 든 나는 얼른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 얼른 거기서 나와. 응, 글쎄 빨리 나오라니까!" 

나하고는 상관 없다고 생각했던 중동호흡기증후군, 즉 메르스가 구체적으로 내 삶에 개입을 시도한 날이었다. 남자든 여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부자든 착한 사람이거나 나쁜 사람이거나 가리지 않고 아무에게나 덤비는 무서운 전염병 메르스. 마스크도 하지 않고 병원을 활보하던 아내는 다행히 무사히 돌아왔다. 그리고 우리는 곧 메르스를 잊었다. 정부 당국에서 이제 다 완치 되었다고 했으니까. 우리나라는  메르스 안전국가라고 했으니까. 그러다가 2018년 가을 김탁환의 소설 [살아야겠다]를 통해 메르스와 다시 만났다. 이번엔 메르스가 아니라 '메르스의 진실'과 만났다. 

"2015년 여름, 한반도를 휩쓸었던 메르스는 186명의 확진 환자와 38명의 사망자를 냈다" 

이런 간단한 기사문이나 뉴스 한 꼭지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숫자로만 표시된 환자와 피해자들에게선 아무런 고통이나 애환이 느껴지지 않는다. 메르스라는 전염병도 관념으로만 존재할 뿐 실제 그게 어떤 형태로 다가오는지 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고통을 주었는지 알 길이 없다. 일단 질병이란 게 그렇다. 걸렸거나 안 걸렸거나 딱 두 가지 뿐이다. 걸린 사람은 왜 하필 나한테 이런 불행이 온 걸꺼 억울해 하고 안 걸린 사람은 어휴, 다행이다 하고는 곧장 외면하는 비정한 세계. 그 중간에 서서 피해자는 물론 피해자가 아닌 사람들에게까지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공감과 의심을 불러 일으켜주는 존재가 바로 소설가다. 글을 쓰는 사람은 그래서 필요한 것이고 그게 바로 작가의 효용 중 하나라고 김탁환은 믿고있는 듯하다. 

[살아야겠다]는 관념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2년 동안 메르스 완치자와 유가족을 인터뷰하고 당시 벌어진 일을 촘촘하게 취재한 뒤 에두르지 않고 메르스가 창궐하고 있는 병원과 병실 한가운데로 돌진한다. 그리고 김석주와 길동화, 이첫꽃송이처럼 피와 살을 가진, 방금 전까지 펄펄 살아있던 사람들의 얘기 속으로 들어간다. '번호'가 아닌 '사람'을 찾고자 했던 작가 김탁환이 르포 형식을 포기하고 '피해자들의 서사'가 있는 소설로 구성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이첫꽃송이의 직장 상사인 선우 기자의 입을 통해 이렇게 밝힌다. 

"전쟁이든 참사든 전염병이든, 생사를 넘나드는 사건의 기록일수록 어떤 그룹의 서사인지가 명확해야 해. 이대로 간다면 메르스 피해자들은 인간이 아니라 숫자로만 남을 거야. 통계 자료로만 호출될 거고. 피해자 각자가 어떤  개성을 지녔고 어떤 꿈을 꾸었고 어떤 상처를 입었고 어떤 고민을 했는지 그 사람 됨됨이를 기록해야 해. 그리고 피해자들의 서사는 지구 전체로 확산해야 해."  

선우 기자의 말대로 그들은 어떤 개성을 지녔고 어떤 꿈을 꾸던 사람들이었나. 치과의사였던 김석주는 인간의 고통을 줄이거나 없애고 싶어서 뒤늦게 의사가 되었지만 어느날 림프종 환자가 되었고 결국 그걸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왔다가 메르스에 감염되었다. 출판사 물류창고에서 일하는 베테랑 직원 길동화는 책을 좋아하고 운동을 좋아하는 중년 여성인데 여동생의 치료를 위해 병원에 왔다가 메르스  환자가 되었다. 방송국 수습기자인 이첫꽃송이는 병원에 와서 죽음에 이른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다가 메르스의 마수에 걸려들었다. 유난히 우애가 깊었던 그녀의 친척들도 그 장례식에 조문을 오는 바람에 단체로 메르스에 걸려 목숨을 읽거나 큰 봉변을 당했다. 세 사람 모두 같은 시간대에 같은 장소에 머물렀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공통점이 없었다. 그런데 왜 하필 이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첫 번째는 운이 없어서다. 전염병은 사람을 가리지 않으니까. 그리고 두 번째는 사회 시스템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거나 작동되지 않아서다. 사실 우리는 두 번째에 더 분노해야 한다. 평소엔 놀다가도 위기가 오면 우리를 보호하라고 나라에 세금도 내고 국민의 의무를 다하는 거니까. 그런데 어이없게도 사람들은 두 번째보다 첫 번째에 더 쉽게 기댄다. 그래, 운이 안 좋았던 거지. 다행히 나나 우리 가족은 괜찮았지만. 안타까워... 사람이 운에 인생을 맡기고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인데. 적어도 문명화나 민주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고 하는 사회에서는. 그런데 정부나 관계 당국에선 메르스를 어떻게 대처했던가. 초동 대처도 늦었고 제대로 된 콘트롤타워도 없었다. 감염된 사람은 이름 대신 번호로 호칭되었고 사람이라기보다는 '병균덩어리'로 취급되었다. 그리고 감염자가 다른 사람에게 병을 전염시킨다는 것 때문에 '피해자이자 가해자'라는 인식이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새로운 환자들은 이미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로부터 감염되니까 언뜻 들으면 옳은 소리처럼 들리지만 이건 정말 비인간적인 의견이다. 이런 생각들이 많은 메르스 환자들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만든 것이다. 

정부나 기관이 피해자를 돕기는커녕 오히려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하는 이 기가 막힌 상황에 대해 이첫꽃송이는 '피해자이자 가해자'라는 말은 잘못된 인식이며 '몇 명을 감염시켰든 메르스 환자는 모두 피해자'라고 울부짖는다. 바로 그런 잘못된 인식 때문에 김석주는 격리변동에서 림프종 환자가 아니라 마지막 남은 메르스 발병자로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전염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도 보호장구로 중무장을 하고 집으로 찾아온 병원 직원을 보고 누구냐 묻는 다섯 살 우람이의 질문에 "아빠 친구 중에 안드로메다 우주인이 있는데..."라고 거짓말을 하는 남영아의 모습은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살아야겠다'라는 김석주의 간절한 희망과 '살려내겠다'라는 남영아의 처절한 저항이 우주복보다 더 두텁고 단단한 이 사회의 무관심과 두려움에 의해 사그러지고 마는 장면이다. 그래서 이 책의 표지에 우주복을 입은 사람이 등장하게 된 것이라고 북스피어 김홍민 대표는 말한다. 

김탁환은 이 소설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몇 번이나 포기할 뻔 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큰 시각이 존재하지 않아서였다고 한다. 정부는 정부대로 우왕좌왕, 뒤늦게 형식적인 백서나 내놓을 게 뻔했고 감염자나 그가족들도 매우 개별적이고 비전문가적인 입장에서 이 재난의 사회적 맥락을 파악하지 못한채 속수무책으로 당하기에 바빴던 것이다. 다행히 의사이자 피해자였던 김석주와 간호사 출신의 보호자 남영아 부부가 나타나 그들의 기록과 일기를 사용해도 좋다고 허락함으로써 소설의 중심을 잡을 수 있었던 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여러 번 눈물을 흘렸다. 소설을 잘 써서라기보다는 소설 속에 나열된 팩트들이 너무 답답하고 슬프고 화가 나서 나오는 눈물이었다(라고 하긴 하지만 이건 결국 소설가가 소설을 잘 써서,라는 도돌이표가 된다). 김석주는 억울하게 죽었고 길동화는 잘 다니던 직장에서 쫓겨나 반쪽난 폐를 움켜쥔채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있다. 이첫꽃송이 같은 경우에만 겨우 정상적인 기자 생활을 하고 있다. 메르스 환자였던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이차 피해를 두려워하며 신분을 숨긴채 살아가고 있는데 국가는 아직까지 아무 것도 책임지지 않고 있다. 작가는 책 뒷쪽에 실린 '감사의 글'에서 메르스 관련 재판이 아직도 진행중이라고 썼다. 그 재판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이것 한 가지는 분명하다. 우리가 메르스에 걸리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또는 그 배에 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안주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한 앞으로도 달라지는 건 없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해결책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메르스에 대한 소설을 넘어 우리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묻는 질의서나 다름없다. 사람들로 하여금 메르스가 내 문제이기도 했음을 인식하게 하고 뭔가 변화를 원하게 만드는 것, '나는 메르스에 걸리지 않았으니까'라는 허망한 안심이 얼마나 부질 없는것인지를 일깨우는 것, 그걸 소설만큼 잘 할 수 있는 장르가 또 있을까? 그제 전철 안에서 이 소설을 다 읽고 눈물을 삼키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여기 탄 사람들 모두 메르스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냥 한 때 있었던 전염병이고 이미 다 끝난 거라고만 생각하겠지. 나도 [살아야겠다]를 읽기 전엔 그렇게 생각했었으니까.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쓰는 작가가 필요한 거다. 김탁환 작가는 그래서 고마운 사람이다. 고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김탁환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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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잖은 사람도 운전대만 잡으면 욕쟁이로 변하는 경우가 있다. 운전은 생명과 직결되는 행위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누구든 좀처럼 다른 운전자의 입장에 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저기서 왜 깜빡이를 안 켜?
저 아저씨 왜 안 가고 저기서 뭉기적거리는데?

나도 그런 운전자 중 하나였다(이제 운전 안 한지 십 년도 넘었지만). 어느 늦은 밤 아내와 택시를 타고 집에 오다가 우리가 들어가야 할 진입로 입구를 막은 채 오도가도 못하는 차 한 대를 만났다. 아, 뭐하는 거야...? 라고 작게 중얼거리는 내게 택시운전사가 하신 말씀은 정말 뜻밖이었다.

"다 이유가 있어요."
"네?"
"서있는 차는 다 이유가 있는 거예요."

과연 그 차도 조금 있다가 뭔가 사소한 문제를 해결한 모양인지 위잉,하고 가려던 길로 가버렸다. 어안이 벙벙했다. 그렇구나. 우리는 "아저씨 말씀이 명언이네요!'라고 외치며 택시비에 팁 이천 원을 더 얹어 드렸다.

사람은 누구나 외롭고, 누구나 아프다. 시인 이성복은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라고 썼다. 사실은 아프지 않은 게 아니라 아픈데도 서로 이유를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유를 알고자 하는 대신 누군가의 마음에 '우울증'이라는 이름을 붙인 뒤 어서 정신과 의사를 만나보라고 충고한다. 나는 의사나 심리치료사가 아니니까, 미안하지만 다른 데 가서 잘 치료하고 오라고.

'정혜신의 정적심리학 [당신이 옳다]'는 마음이 아파서 숨이 넘어가는 사람은 큰 병원이나 전문가에게 보내지 말고 심폐소생술(CPR) 하듯 지금 당장 여기서 섬세한 시선과 지지를 통해 보살펴줘야 한다고 말하는 책이다. '적정기술'이란 무엇인가? 간단하지만 본질을 건드려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책에 나온 것처럼 아프리카 아이들이 힘겹게 이고 다니는 물동이 대신 큰 공 모양의 물통을 만들어 굴리고 다닐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언젠가 보았던, 오염된 물에 꽂고 빨아도 순식간에 정수 작용을 해 오지의 아이들도 맑은 물을 마실 수 있게 해주는 빨대 같은 것이다.  

정혜신은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요즘 마음이 어떠세요?"라고 묻는 것만으로 엄청난 비밀을 털어놓게 하거나 삶이 달라지게 하는 경험을 여러 번 했다고 한다. 사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다가가 그렇게 묻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 질문 전후로 털어놓는 이야기의 질이 너무나 달라지는 걸 계속 경험했기 때문에 그렇게 묻는 것이라고 했다. 다만 건성으로 묻지 않고 정말 호기심을 가지고 사소한 부분까지 마음으로 느끼면서 세세하게 물어야 한다는 말을 빼놓지 않는다.  

어떤 이유로 집을 뛰쳐나와 울다가 밤늦게 전화를 걸어온 친구에게 "야, 달밤에 체조하지 말고 빨리 집으로 들어가."라고 충고하는 건 당사자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정혜신은 바로 이 지점에서 한 사람의 운명이 결정될 수도 있다고 단언한다. 자신의 자의적 판단과 논리에 입각해 '빨리 들어가라'고 다그치는 대신 "니가 이 시간에 집 밖을 배회하고 있다면 그건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야"라고 섬세하게 공감해주는 순간 '천애고아' 같았던 마음이 순식간에 풀리고 가슴엔 따스한 체온이 돌아온다는 것이다.

책을 읽어볼수록 심리적 CPR의 핵심은 '행동'이 아니라 '태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월호 사건이 터졌을 때 많은 자원봉사자들은 진도에 내려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고 울면서도 무슨 일이든 했다고 한다. 같이 손 붙잡고 울고 같이 밥 먹고 같이 자는 것만으로도 유족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일인지는 정작 그들도 몰랐던 것이다. 이는 심리적 CPR이 이해하는 게 아니라 느끼는 것이고, 논리의 영역이 아니라 감정의 영역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해주는 사례다. 그리고 그 기술의 핵심 키워드는 언제나 '사람'과 '공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달리 '한'이 많은 민족이다. 스트레스가 그만큼 많다. 그런데 그걸 어디 가서 털어놓을 곳이 없어 못된 시어머니가 되고 태극기 부대가 되고 가출 청소년이 되는 것이다. 그럴 때 나의 감정에 집중해주고 내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가 뒤늦게 결혼하고서 가장 좋았던 것은 우주 최강의 '내 편'이 하나 생겼다는 사실이었다. 언제나 내 이야기에 먼저 귀를 기울여주고 내 기분이 어떤지 제일 먼저 헤아려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눈보라 치고 성난 파도가 넘실대는 바깥에서의 삶을 견디게 해주는 철갑옷을 얻은 것과 같았다. 

정신과 의사 정혜신과 심리 기획자 이명수 부부. 그들은 책상머리가 아니라 국가폭력 피해자,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세월호 참사 피해자들이 생과 사를 넘나드는 심리적 참전의 현장에서 그들이 개발한 '심리적 CPR'로 사람들의 목숨을 살리는 전사들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는 엄격한 잣대나 의학 지식이 아니라 공감이다. 묻고 또 물어 마침내 같은 입장에 서고 또 공감함으로써 벼랑끝에 선 사람들을 살린다. 그래서 이 책에 나온 수 많은 경험담과 사례는 한 번 읽고 머리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늘 곁에 두고 도움이 필요한 타인을 만나는 경우마다 적용시켜야 할 보석 같은 이야기들이다. 

방탄소년단은 얼마 전 유엔에서 "오늘의 저는 과거의 실수들이 모여서 만들어졌습니다. 내일, 저는 지금보다 조금 더 현명할지도 모릅니다. 이 또한 저입니다. 그 실수들은 제가 누구인지를 얘기해주며, 제 인생의 우주를 가장 밝게 빛내는 별자리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누구였는지, 내가 누구이고 싶은지를 모두 포함해 나를 사랑하세요."라는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싶어도 혼자서는 할 수 없다. 옆에서 "미안해. 니가 그렇게 힘든지 몰랐어."라며 진심으로 나를 위로해주는 사람이 있을 때 비로소 나는 나를 사랑하고 존중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람이다. 그리고 당신이 옳다, 라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공감의 말 한 마디가 사람을 살린다. 그게 정혜신이 이 책에서 얘기하고 있는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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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미루고 미루다 이제야 쓰게 되었네요. 독하다 토요일에서 정한 책의 마지막권은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이었습니다. 지난 9월 8일 오후 2시 대학로 서점 '책책'에서 사람들이 모여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날은 모임이 끝나고 저희집 '성북동 소행성'에 가기로 했었고 옥상에서 맥주도 한 잔씩 하기로 했었습니다. 그래서 미리 김하늬 씨에게 우쿠렐레 연주를 부탁하기도 했었구요. 약속대로 김하니 씨가 우쿠렐레를 가져와서 더 즐거웠던 토요일이었습니다. (아깝게도 김인혜 씨는 집안일 때문에, 손영연 씨는 회사일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정아름 씨도 집안 사정으로 참석을 못했고 김성희 씨는 결혼식장 갔다가 전철을 반대로 타는 바람에 고생고생하며 늦게 도착했습니다. 왜 그런 날 있잖아요. 평소에는 안 그러는데 그날만 이상하게 헷갈리는 날. 임기홍 씨는 여전히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원서를 들고 나타났구요. 독하다 토요일 때만 읽는 책이 틀림 없는데, 다 읽으면 자신이 정리한 영어단어장을 회원들에게 보내주기로 했습니다)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은 5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단편소설들이 모여 장편을 이룬 작품입니다. 좀 특이한 시도라고 할 수 있죠.  저는 이 작가 역시 '판타스틱'이라는 SF잡지에서 발견했는데요, 데뷔작이 <드림,드림,드림>이라는 단편이었습니다. 아쿠다가와라는 소설가를 알게 해주신 친할아버지에게 감사한다는 얘기를 어딘가 인터뷰에서 읽었는데 그런 언급 자체부터 좀 특이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보건교사 안은영]이라는 소설을 읽고 혹딱 반했죠. 평범한 교사가 학교에서 근무하면서 이사장의 손자인 한문선생과 손을 잡고 귀신을 퇴치하는 내용인데 매우 재미 있습니다. 

아무튼 저는 이렇게 좋아하는 작가지만 윤혜자 씨는 자기 취향이 아니라는 부정적인 태도로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어린 티가 팍팍 나는 글이라는 평가였죠. 그런데 김하늬 씨는 대체로 재미 있게 읽었다고 했습니다. 요즘 들어 온기를 품고 있는 글들이 좋아졌는데 이 작가의 글이 그렇다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주인공 중 칼에 오십몇 번이나 찔려 죽는 사람도 나오지만. 그러면서 등장인물 중 양혜경과 윤창민 등을 거론했는데, 자세한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짧은 글들임에도 완결성이 느껴지고 연결도 잘 되어 있어 좋다는 소감도 얘기했습니다. 

임기홍 씨는 병원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정말 큰 병원에서는 이런 일들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고 했습니다. 통속적인 남녀 역할이 바뀌어진 것들도 재미 있다고 했습니다. 제가 외과수술을 잘 하는 천재소녀 얘기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하면서 갑자기 '언어학 개론' 얘기를 꺼내며 'Me Tazan, You Jane' 얘기를 했고 퍼포먼스(실제 실행)와 컨피던스(내재적 능력)의 차이 등을 매우 심도 있게 설명해서 사람들의 기를 죽였습니다(자세한 내용은 물론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천재들은 감성적인 면에서 무딘 편인데 여기 나오는 천재는 너무 쿨하다고도 했습니다. 그는 소설 쓰는 사람들이 궁금하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이런얘기를 쓸 수 있을까 늘 감탄한다는 것입니다. 이 소설은 중간 이후로 좀 루즈해졌다가 마지막에 화들짝 놀라게 하는 면이 있어서 좋았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김하늬 씨는 자기는 원래 '숲보다 나무를 보는 성향'인데 모든 인물이나 사건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면에서 이 책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쓴 [올리브 키터리즈]와 매우 비슷한 책이라고 느꼈다고 했습니다. 모여서 하나의 책을 읽으면서 각자 예전에 읽었던 책을 떠올리는 것도 독서모임의 즐거움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정아름 씨는 한 번 통독을 하고 다시 읽었는데도 재미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두번째 읽을 때는 어디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를 살피면서 읽었는데 진선미 아줌마 부분을 가장 웃으면서 읽었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정세랑이 긍정적인 부분을 잘 다루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잠깐 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뭔가 세어보았다고 했는데( 열다섯 개라고 했는데) 뭔지는 생각이 안 납니다. 너무 늦게 정리를 하다 보니 이렇군요. 거듭 죄송합니다. 

김하늬 씨가 중간에 [죽고싶지만 떡볶이는 먹고싶어] 얘기를 했는데 아마 제목 때문에 그런 얘기를 한 것 같습니다. 

윤혜자 씨는 작가가 '머리 좋은 편집자'로 느껴졌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나이든 사람들은 잘 그리지 못했지만 상대적으로 젊은 20대 30대들에게는 각광을 받을 만큼 잘 썼다는 얘기를 했고, 그것만으로도 베스트셀러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출판기획자의 입장에서 얘기를 해보면 무슨 책이든 연령층에 따라 독자층이 확연히 구분되기 마련인데 자신이 처음 기획을 했던 [마흔의 심리학]이라는 책도 중년들에겐 공감을 얻었지만 20대들에겐 외면을 받았던 경험을 떠올린 것 같았습니다. 

정아름 씨가 입사 10년차의 고민은 무엇일까 얘기를 시작했더니 김하늬 씨가 '회사 생활보다는 그 나이에 찾아오는 우울증 등 개인적인 심리가 더 큰 일'이라고 했고 이어 정아름 씨가 책 안에서 싱크홀에 빠졌던 여자의 슬럼프 부분이 마음에 와 닿았다고 하며 자신도 정신과 의사나 전문가의 상담을 한 번 받고 싶다고 했더니  윤혜자 씨가 상담은 자기가 해줄 테니 어서 돈을 내라고 농담을 해서 다들 웃었습니다. 

어쩌다가 대학교 얘기가 나왔고 '통페합'에 대한 비판이 중구난방으로 쏟아졌었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윤혜자 씨는 '출판사의 기획'에 의해 쓰여진 책인 거 같은데 너무 많은 등장인물이 나오다 보니  중간중간 기복이 느껴져 작가가 겨우겨우 썼을 것 같은 안쓰러운 느낌도 받았다고 했고 정아름 씨가 차라리 장편소설이라는 얘기를 안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의견도 조심스럽게 내놓았습니다. 그래도 젊은 사람들을 따뜻하게 다루는 시선이 좋았고 특히 장유라 편에서 화물연대에게 빵을 주는 장면을 읽으며서 이 작가가 사회적인 문제도 잘 다루는 것 같다고 윤혜자 씨가 잠깐 칭찬을 했습니다. 

그후 관장합시다, 10년 후 영점 조정, 문용림 교조적이더라, 진선미 아줌마의 딸...등등 아무말 대잔치 같은 순간이 있었는데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김성희 씨도 통폐합 얘기를 오래 했고 소설에서 귀에 벌 들어간 사람이나 컬에 찔린 사람 얘기는 너무 '잘 기획된 느낌'이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임기홍 씨가 대학 얘기에 나도 공감한다고 하면서 9월이 수시입학이 절정인데 교사로서 입시를 대하는 부모들을 보면 마치 자녀의 배우자를 고르는 느낌이라는 얘기도 했습니다. 

서동현 씨는 여기 모인 사람 중 자기만 공대 출신(건축과)이라고 얘기를 꺼내면서 이번 책은 많이 읽지 못하고 왔지만 일단 문체가 매우 좋았고 눈에 띄는 표현들도 많았다고 했습니다. '통속적이고 적나라한 일상을 잘게 다져서 계속 카메라로 비추는 느낌'이었다고 간단한 총평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건축가들도 다 스타일이 달라서 어떤 사람은 전체부터 구상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 작가처럼 장면장면을 그려서 나중에 한덩이로 만드는 경우도 있다고 했습니다. 소설을 건축에 비교하니 또다른 재미가 있었습니다. 

김성희 씨가 자신은 '병원 드라마 성애자'라는 고백을 하며 그래서 이 책을 더 각별하게 읽었다는 얘기를 했고 그러다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예전에 학교 다닐 때 싫었던 기억들에 대해 얘기를 하자 거의 모든 사람들이 참여해 그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그러다가 임기홍 씨가 또 유발 하라리의 [사피에스] 얘길 꺼내며 '우리는 개체가 사라지기 전에도 진화를 하는 놀라운 일을 한다. 그래서 인간 세상은 그냥 쫓아가기에도 정신이 없다'는 내용의 얘기를 해서 모임의 종말을 재촉했습니다. 

이날은 '혜화칼국수'로 이차를 가서 전과 칼국수 등을 먹고 약간의 술을 마신 뒤 약속대로 저희집 '성북동소행성'에 올라갔습니다. 각자 마실 맥주를 사가지고 옥상에 올라가 노을을 바라보며 놀있습니다. 커다란 다라이에 얼음물을 채우고 맥주를 담가놓았더니 뭔가 피크닉을 온 것 같았습니다. 김하늬 씨가 우크렐레를 꺼내 연주를 하며 노래를 불렀고 저도 답례삼아 기타를 가져와 노래를 불렀습니다. 같은 뚜라미 출신이지만 저와 다르게 기타를 매우 잘 치는 임기홍 씨가 반주를 해줘서 사람들이 이런저런 노래를 많이 부르고 놀았습니다. 원래는 노을 지고 달 뜨면 헤어질 생각이었는데 너무 재미 있어서 열한 시 넘어서까지 놀았습니다. 

'독하다 토요일'을 시작할 때 함께 읽기로 했던 책들(권여선의 [안녕, 주정뱅이]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 한강의 [흰] 김언수의 [뜨거운 피] 배명훈의 [안녕, 인공존재]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이 모두 끝났습니다. 다음엔 번외편인 김탁환의 소설 [이토록 고고한 연예]를 읽을 때 만나기로 하고 그때 다음 책들은 뭘로 정할까도 얘기해 보기로 했습니다. 

끝으로 제가 써 본 세줄평을 첨부해 봅니다: 

50여 명의 등장인물들이 희미한 끈으로  이어진 이 연작소설은 로버트 알트만의 [숏컷]을 생각나게 한다. 병원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는 많다. 생과 사를 다루기에 적합해서 그럴 것이다.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도 병원을 중심으로 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태피스트리처럼 엮여지는데 마지막엔 가네시로 가즈키의 소설 [영화처럼]이 그랬듯이 극장에서 감동적인 결말을 맺는다. 가볍고 따뜻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살인이나 불륜, 연애, 섹스 등을 아무렇지도 않게 섞어도 차가워지지 않는 건 정세랑이라는 작가만의 능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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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빼어난 산문집 [자전거 여행]이 100쇄를 넘긴 것은 작가가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마추쳤던 만경평야나 문경새재 등 한반도의 아름다운 풍경들과 거기에 스민 깊은 사유 뿐만이 아니라 언덕길에서 자전거 페달을 밟듯 온몸으로 밀고나가는 단호하고도 치밀한 문장들이 큰 몫을 했을 것이다. 그는 아직도 컴퓨터 대신 종이 위에 연필로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쓰는 방식을 고집하고 있는 '아닐로그형 작가'인데 이는 우연히도 이반 일리치가 설파하는 자전거의 효용과 꼭 닮았다. 

(작가의 이름을 대하면 왠지 솔제니친이 쓴 소설의 주인공 '이반 데니소비치'가 생각나지만 전혀 상관 없고)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신학과 철학, 역사학 등을 공부하고 한때 사제이기도 했었던 이반 일리치는 다른 무엇보다도 인간이 발명한 교통수단들의 속도를 통해 우리 삶이 어떻게 왜곡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인간적인지를 통찰한다. 

인간의 자아성은 생활공간 및 생활시간을 덧붙일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인간이 이동하는 보폭에 의해 통합된다. 만일 이 관계가 인간 자신의 이동능력이 아니라 수송수단의 속도에 의해 결정되면, 인간은 공간의 설계자로서의 지위를 잃고 단순한 통근자의 위치로 전락하고 만다.

근대 이후 도시인들은 늘 시간이 없고 바쁘다고 아우성을 치며 살고 있다. 문명과 기술이 발달할수록 생활은 편리해지는데도 삶의 여유는 더 없어지는 아이러니는 왜 일어나는걸까. 그는 교통수단의 속도가 어떤 임계점을 넘어서면 그 절약된 시간을 누군가 독차지하게 되는 '시간 횡령'이 일어난다고 간파한다. 즉, 인간의 이동 속도가 자전거를 넘어서면서부터 불공정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원제도 'Energy and equity(시간과 공정성)'이다. 우리가 매일 타는 승용차, 지하철, 버스 등은 우리를 멀리 있는 회사나 일터로 실어나른다. 필요하다면 누군가는 비행기를 타고서라도 멀리 간다. 그런데 이러다 보니 기차나 버스를 타는 사람보다 비행기를 타는 사람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생겨난다. 속도의 차이가 결국 시간의 가치에서도 차별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당신이 어떤 속도로 움직이는지 말해달라. 그러면 당신이 누구인지 가르쳐주겠다."

우리는 지금 만 원 정도면 점심 한끼를 가쁜히 해결할 수 있지만 조지 소로스와 점심을 먹으려면 백만 달러를 내야 한다. 물론 이건 호사가들의 '돈지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지만 어쨌든 우리의 시간보다 그의 시간이 훨씬 가치 있고 소중하다는 뜻이 되겠다. 이반 일리치는 자전거를 탄 사람은 보행자보다 3~4배 더 빨리 갈 수 있는데 그 과정에서 사용하는 에너지는 5분의 1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는 왜 이렇게 자꾸 자전거 얘기를 꺼내는 걸까. 설마 그가 우리에게 자전거를 팔아먹으려고 이런 소리를 하는 건 아닐 텐데. 

자전거는 인간을 더 빠른 속도로 이동시키면서도 공간이나 에너지나 시간을 특별히 더 많이 빼앗지도 않는다. 자전거 이용자는 거리 당 이동시간을 적게 쓰면서도 연간 이동거리를 늘릴 수 있다. 타인의 일정이나 에너지 또는 공간을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기술 도약이 주는 혜택을 누릴 수 있다. 동료들의 이동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원하는 대로 자기 이동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스티브 잡스 이후 인문학 바람이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데 우리가 뒤늦게라도 인문학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하는 것은 인문학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인생의 본질이 무엇인지 깨닫고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서이다. 마찬가지로  이반 일리치가 자전거를 예찬하는 것도 전 세계인이 다 자동차를 버리고 자전거에 올인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라는 책 제목은 칠레 아옌데 정부 법무부차관보의 말 '사회주의는 자전거를 타고서만 올 수 있다'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에게 자전거는 'ideal'한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상징일 뿐이다. 자전거를 이용한다는 것은  기계 문명에 몸을 던진 현대인들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제어를 시도한다는 뜻이니까. 그런 대안을 생각해본 사람과 안 해본 사람의 태도는 분명 다를 것이라고 이반 일리치는 믿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전거로 인문학하기'라고나 할까. 이는 책 맨 뒤에 '<이반 일리치 전집>을 펴내며'라는 글에 있는(안희곤 대표가 쓴 것으로 짐작되는) "이성으로는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라'는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대로"라는 대목에서도 알 수 있다. 해설 빼고 본문만 치면 100페이지 정도밖에 안 되는 이 책이 말하려는 건 우리 모두 자전거를 타자는 게 아니라 보다 바람직한 대안을 가슴에 품고 살자는 얘기로 읽힌다. 1974년도에 이런 인사이트풀한 생각을 발표했다는 게 얼른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하룻밤 사이에 읽을 수 있는 아름다운 이상주의자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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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소에 사람들이
페이스북에 글을 쓰면서
내가 지금 쓰는 것처럼
문장이 맨 오른쪽까지 가서 
허공에 부딪혀 다음 줄로 가기 전에 
아무 때나 서둘러 행을 바꾸는 것은 

(또는 이렇게 맥락 없이 행을 띄는 것은) 
자기가 쓴 글이 마치 시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꼼수라는, 얼토당토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니, 그게 아니라 
글을 읽는 독자의 시선이 
매번 맨 오른쪽까지 가느라
혹시 피곤하거니 주의력을 읽을까봐
노심초사한 나머지 알아서 적당히 
행을 바꿔주는 글쓴이의 노력이나 
배려가 아니었을까 하는
기특한 생각도 하게 되었는데.   

이런 쓸 데 없는 생각을 하던 찰라,  
문학동네 시인선 084 김민정 시집
[아름답고 쓸모없기를]을 읽게 되었다. 

거기엔 글을 읽는 독자의 시선이
매번 오른쪽 끝까지 가느라
혹시 피곤하거니 주의력을 읽을까봐
노심초사한 나머지 알아서 적당히 
행을 바꿔주지 않는, 요 며칠 유행하는 말로
'시건방진' 시가 하나 있었으니 

이제까지 산문시를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위와 같은 얼토당토한 생각을 
하던 찰라에 마침 읽은 참신하고 재미있는 시라 
한 번 소개를 해볼까 하는 생각인데. 

시의 제목과 내용은 아래와 같다; 

그럼 쓰나 

  만나보라는 남자가 82년생 개띠라고 했다. 나보다 여섯 살이나 어린 핏덩인데요. 이거 왜 이래 영계 좋아하면서. 젖비린 내 딱 질색이거든요. 이래 봬도 걔가 아다라시야. 아다라시. 두툼한 회 한 점을 집어 우물우물 씹는데 어느 대학의 교수씩이나 하는 그가 내게 되물었다. 아나, 아다라시? 무슨 스키다시 같은 건가요? 일본어 잘 몰라서요. 왜 그래 아마추어같이. 그들은 웃었고 그들은 소주잔에 젓가락을 찢어 숯이니 숫이니 히로키에게 써 보였고 얌전한 히로키는 빨개진 얼굴이더니 고개를 푹 숙여버리는 일로 그들과의 대화에서 조용히 빠져나갔다. 동경대에서 교환학생으로 와 공부를 했다는 동갑내기 히로키와는 가끔 만나 커피 마시며 시 얘기를 하는 사이인데 그는 윤동주의 시를 나보다 더 많이 외우고 나보다 더 많이 베껴본 터라 내가 모르는 윤동주의 시를 토론의 주제로 삼곤 하여서 내게 반강제적으로 송우혜 선생의 [윤동주 평전]을 사게도 하였는데 그런 그가 한국에 와 처음 배운 단어는 밤도 아니고 별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고 자지라 했다. 자라고 할 때는 자지, 보라고 할 때는 보지. 그렇지. 그건 맞지. 그래서 우리말 번역이 어렵다는 얘기지. 누가 저 문장을 가르쳤는지는 모르겠으나 웃음기 없이 술자리도 아닌 데서 듣는 아랫도리 사정이다보니 참으로 거시기하여 거시기하구나 하는데 그 거시기가 뭐냐 물으니 그러니까 나는 합치면 자보자라 하여 권유형 자보지가 된다며 뻘쭘하니 한술 더 뜨고 앉아 있을 수밖에 없던 것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얼렁뚱땅 시인의 시를
딱 한 편만 시 같지도 않은 형태로 소개하고 
이 시집엔 이런 유쾌발랄하고
귀엽게 음란하면서도 자기비하적인 시들이 
수두룩하다는 평을 슬쩍 흘림으로써 

(옆에서 내 얘기를 듣던 아내는 시인이 마치
단어들을 두 주먹 안에 넣고 저글링을 하는 것처럼 
자유롭고 통쾌한데 그 산문적  경쾌함이
매우 현대적이고 비주얼라이징하면서도 
시류에 영합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고
써달라 부탁을 하므로 나는 그렇게 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글을 읽고 그 궁금함을 못이겨 당장 
서점으로 달려가 이 [아름답고 쓸모없기를]이라는
시집을 뒤늦게 사게 만들었노라 허튼 자위를 하면서 
나는 에어컨 바람 앞에 앉아 껄껄껄 웃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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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에 한 번, 두 번째 토요일 오후 두 시에 열리는 '독하다 토요일'의 두 번째 모임이 어제 대학로 카페 겸 서점 '책책'에서 있었습니다. 이번에 같이 읽은 책은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이라는 단편집이었습니다. 두 시 이전에 모인 몇몇 분들과 함께 먼저 각자 가져온 책을 묵독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개인적 미팅 때문에 김인혜 씨가 오지 못하게 되었고 정아름 씨도 출장 후유증으로 몸이 안 좋아 참석을 못한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할 수 없으니 다음 달을 기약하자 했습니다. 옆집 총각 서동현 씨는 목요일에 촉발된 숙취에 괴로워하면서도 참석해 묵묵히 책을 읽었습니다.

새로운 멤버가 한 명 있었습니다. 제 후배인 광고인 김휘중 씨였습니다. 제가 몇 주 전 술자리에서 이 모임에 대해 얘기했더니 눈을 반짝이며 자신도 참석하고 싶다고 너무 간절하게 부탁을 해서 초대했습니다. 타고난 길치라 모임 장소를 찾는 데 좀 고생을 했지만 뒤늦게 도착해 책을 읽고 작품에 대한 많은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늦게 도착한 사람도 있고 해서 3시 반까지 책을 읽기로 했고 그 후 십오 분 정도 각자의 독후감과 세줄평 등을 정리하고 얘기를 시작했습니다. 

윤혜자 씨는 <노찬성과 에반>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습니다. 에반이라는 존재는 개를 넘어서 우리가 의지하거나 붙들고 싶어하는 어떤 것처럼 느껴졌다고 했습니다. 옆집총각 서동현 씨는 <건너편>이 너무 슬프고 리얼했다고 했습니다. 적나라했고 정말 있을 법한 사람들의 이야기라 마음이 움직였던 것 같습니다. 수산시장 장면에서는 마치 '사람들이 줄돔 같다'는 생각도 했다고 했구요. <풍경의 쓸모>에서는 무리하게 연결을 원하는 아버지와 노회한 박 교수가 교차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작가의 묘사가 일상을 마구 긁어대는 느낌이고 등장하는 사건 사고들이 '느슨한 시침질처럼 꿰어져' 오히려 거대한 풍경을 이룬 게 아닌가, 하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창단 멤버였지만 지난 달 참석을 못해 이번이 첫 모임이 된 진주 씨는 <노찬성과 에반>을 읽고 자기에게도 에반 같은 존재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했습니다. 다들 <노찬성과 에반>이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같습니다. 김휘중 씨는 자기는 평소 장르소설을 좋아하는데 김애란의 소설을 읽고 홍상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적나라하고 리얼한 느낌을 받았다 했습니다. 그는 <입동>과 <건너편>을 좋아했습니다. 특히 <건너편>에서 연인에게 차이는 이수의 입장이 잘 이해되어 마음 아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입동> 등의 작품들이 현실을 너무 잘 반영해서 '바깥은 여름'이라는 작품집의 제목이 뜻하는 바를 짐작할 수 있었다 했습니다. 아무리 괴로워도 다른 사람들은 그 사정을 모르는 게 세상 일이고 결국 산다는 다 고독하다는 게 핵심이라는 것이죠. 

 영어선생님인 임기홍 씨는 모임에 와서 또 영어책을 읽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위화감을 조성했는데 무슨 작품이 좋았냐고 물었더니 <침묵의 미래>가 흥미로웠다고 털어왔습니다.  다른 소설과 달리 화자가 '언어'라는 게 재밌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노찬성과 에반>에서 왜 찬성이 할머니한테 '목사님이 할머니 싫어한대'라고 얘기했는지 의문을 제기해서 잠시 토론이 있었습니다. 결국은 '목사님이 할머니한테 더 이상 바랄 게 없자 그런 식으로 나온 게 아닐까?'하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목사님이 나쁘다는 것이죠. 저는 읽은지 좀 돼서 기억이 가물가물 했었는데 누군가 의문을 제기하는 바람에 확 걸렸던 대목이었습니다. 

김성희 씨는 <입동>이 좋았는데 '바깥은 여름'이라는 인식 자체가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 김애란의 에센스 같은 느낌이었고 그래서 이 작가의 작품은 다 영화화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눈먼자들의 국가]에서도 이 작가가 상실을 겪은 사람들에 대해 얼마나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 미리 느낄 수 있었다고 하며 지난 번 우리 모임의 작가였던 권여선보다 더 대중성이 있는 것 같다는 소회를 밝혔습니다. 이번 소설도 세월호 사건 때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얘기했는데 다들 그 의견에 공감해서 찾아보니 그때 이 작품을 쓴 게 맞는 것 같았습니다.

손영연 씨는 <건너편>이라는 작품을 읽으면서 마치 누가 글을 양동이로 쏟아붓는 느낌이라 했습니다. 그만큼 강렬했던 것이겠죠. 그리고 <풍경의 쓸모>에서 사진을 찍는 것에 대한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어 좋았다고 했습니다. 시간을 박제해 놓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게 결국은 '전형적으로' 살게 되는 것' 이란 느낌을 받았다 했습니다. 아버지를 돕지도 못하고 결국 교수 임용에 떨어지는 주인공의 삶도 전형적인 것의 대표격이란 생각을 하게 된 것이죠. 김휘중 씨는 그게 바로 살아가면서 나이 먹어간다는 것을 사진을 통해 잘 짚어낸 것이라 말하며 김애란이 글을 너무 잘 써서 좋기도 하지만 막상 그 글을 읽어내는 게 자신과 마주하는 것 같아서 힘들고 기분 나쁘다는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김하늬 씨는 동료 작가와 이 작품집을  올 1월에 이미 읽었는데 그때는 어떻게 쓸 것인지를 얘기를 하느라 조금 다르게 느꼈다고 했습니다. 그때는 <입동>이라는 작품이 별로다,라는 생각이었다는 것이데, 그 이유가 너무 전형적으로 잘 쓴 작품이라 그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독하다 모임에 와 보니 일반 독자들이 이 작품에 대해 반응이 뜨거운 것을 보고 약간 놀랐다는 것이죠.
그녀는 [침묵의 미래]가 좋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청소년들의 문제를 다룬 [가리는 손]이 인상 깊었다고 했습니다. 아는 언니와 나눈 '세월호와 액체괴물' 얘기도 했습니다. 다 얘기하려면 길지만 짧게 말하면 잘 몰라서, 순수해서 오히려 잔인해질 수 있는 아이들에 대한 생각들이었습니다. 그러자 김휘중 씨가 [가리는 손]이 정유정의 [종의 기원]이 생각나는 소설이라 인상 깊었다며 열변을 토했습니다. 
 
정유정에 대한 소설 얘기를 중구난방으로 나누다가 결국 김애란은 잘 쓰는 소설가이며, 너무 잘 쓰다 보니 오히려 역설적으로짜증이 나기도 하다는 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렇지만 장편 <두근두근 내 인생>이나 단편 <입동> 모두 압도적인 소설이라는 상찬을 나누다 모임이 끝이 났습니다.

뒷풀이는 원하는 멤버만 간다는 원칙 하에 광장시장의 '박가네 빈대떡'에 갔었는데 약속이 있다는 김하늬 씨와 손영연 씨만 빼고 모두 달려가 '빈대떡 삼합' 안주에 막걸리와 소주를 마셨습니다. 어쩌다 제가 똥에 얽힌 얘기를 꺼내는 바람에 똥 얘기를 하게 되었는데 김휘중 씨한테 옮겨가면서 또다른 똥얘기로 번져 오랫동안 각종 똥얘기로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끝을 맺게 되었습니다. 다은 달에 한강 작가의 [흰]을 읽기로 하고 다들 무사히 헤어졌습니다. 


다들 세줄평을 발표하지 않아서 제가 쓴 세줄평만 괜히 공유해 봅니다. 

견고한 슬픔들 -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 

김애란의 소설은 사라진 것들이나 도달하지 못한 곳에 대한 애잔한 반추들이 있어 슬프다. 그러면서도 성실한 취재가 소설의 견고함에 힘을 보탠다. 진작에 끝나버린 연인들의 이야기 <건너편>에 등장하는 '하늘을 친구처럼, 국민을 하늘처럼' 같은 기상청의 캐치프레이즈가 그런 대목이다. 남편을 잃고 영국에 다녀온 주인공이 휴대폰 서비스 시리와 대화를 시도하는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도 서글프다. 다른 단편집 [비행운]에 들어있는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를 추천한다. 그 소설을 읽고나면 김태용 감독의 영화 [만추]에서 탕웨이가 하던 대사가 떠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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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화장실에 다녀 오다가 충동적으로 그제 서촌 벼룩시장에서 한 권에 천 원씩 주고 산 책 들 중 정이현의 소설집 [오늘의 거짓말]을 집어 들었다. 예전에 읽은 책이지만 너무 오랜만이라 제목이 제일 낯익은 <삼풍백화점>부터 다시 읽었다. 분명 전에 읽은 소설인데도 다시 읽으니 제목 말고는 기억 나는 게 하나도 없다는 게 신기했다. 아니, 주인공인 여자애가 대학 졸업 후 구직 중이었다는 것은 어슴프레 기억이 났고 그에겐 삼풍백화점에 근무하는 고등학교 때 친구가 있었다는 게 희미하게 떠오르긴 했다. 그러나 주인공 여자가 구직의 일환으로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 건물 삼류 에로영화 사무실에 찾아가서 사장에게 "떡 영화라고 들어봤지?"라는 질문을 받는 장면은 맹세코 전혀 새로운 장면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이 장면만 건너뛰고 이 소설을 읽었단 말인가.

삼품백화점이 무너지던 날을 기억한다. 마포에 있는 광고대행사에서 카피라이터 초년생으로 근무하던 나는 몇 미터 저편에 앉아 있던 선배 아트디렉터(당시엔 디자이너라는 호칭을 더 많이 썼다) 김 차장이 아내의 전화를 받으며 "어? 뭐라구?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고?" 라고 외친 뒤 즉시 켠 TV를 통해 흉측하게 무너진 분홍색 건물을 보았다.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바로 전 해에 성수대교가 끊어져 사람들이 많이 다치고 죽더니 이젠 멀쩡하던 백화점이 무너졌단 말인가. 머리가 멍해졌지만 당장 급한 카피를 쳐내야 했고 회의 준비도 해야 했다. 당장 삼풍백화점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는 내가 한심했다. 다음날 내가 모시고 있던 카피라이터 박 부장님이 사내 카피라이터들을 불러모아 특별 점심을 샀다. 어리둥절해 하는 우리들에게 그는 '무사귀환기념 점심턱'이라고 고백했다. 전날 퇴근시간이 되기 전에 몰래 회사를 빠져나간 박 부장님은 만년필이나 하나 살까 하고 삼풍백화점으로 차를 몰고 가다가 화장실이 급해 다른 곳에 잠깐 멈췄고, 내린 김에 현금인출기에 들어가 돈도 찾으려 했는데 고장이 났는지 작동이 잘 되지 않아서 시간을 좀 지체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백화점 언덕으로 올라가니 차들이 꽉 막혀 있었고 어떻게 된 일이냐고 교통경찰에게 물었더니 백화점이 무너졌으니 어서 차를 돌리라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다. 그때 마침 화장실이 급하지 않았다면, 또는 현금인출기가 말을 잘 들었다면 자신은 지금 여기서 여러분과 함께 점심을 먹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고 부장님은 웃었다. 

소설 속 중주인공에겐 삼풍백화점에 다니던 고등학교 동창 R이 있었다. 힉교 다닐 때 친하진 않았지만 대학 졸업 후 우연히 만나 뒤로 취직을 못했던 주인공에게 작은 위로가 되어주고 하던 순한 친구였다. 주인공이 집으로 돌아가 일기장에 '나는 오늘,'이라고 쓰던 순간 백화점은 무너졌다. 한 층이 무너지는 데 걸린 시간은 1초에 지나지 않았다. 사고가 난 뒤 주인공은 조간신문에 난 사망자와 실종자 명단을 읽지 않았다. 옆면에는 삼풍백화점 사고를 다룬 명사 칼럼이 있었다. 호화롭기로 소문난 강남의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것은 사치와 향락에 젖었던 대한민국에게 하늘이 내리는 경고일지도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주인공은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항의했다. 필자의 연락처를 알려줄 수 없다는 독자부의 담당자에게 소리를 쳤다.

그 여자가 거기 한 번 와본 적이나 있대요? 거기 누가 있는지 안대요? 나는 하아하아 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미안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내 울음이 그칠 때까지 전화를 들고 있어 주었던 그 신문사 직원에 대해서는 아직도 고맙게 생각한다.

소설 속 주인공은  텅 빈자리로 남아있던 백화점 자리에 2004년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에 이사를 갔고 그곳을 떠난 뒤에야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맨 마지막 '글을 쓸 수 있었다'는 말에서 이 소설이 어느 정도 자전적 이야기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몇날 며칠 뉴스만 틀면 삼풍백화점 사고 소식이 들려왔다. 수백 시간 동안 콘크리트 잔해에 깔려 있을 때 노래를 부르며 버티다가 기적적으로 구조된 어느 이십 대 여자가 '콜라가 먹고 싶다'라고 얘기하는 바람에 어느 음료회사가 평생 그녀에게 콜라를 무상으로 제공하기로 했다는 기사가 화제였다. 우리는 마포의 사무실에 모여앉아 "나 같으면 나오면서 콜라 대신 포르셰라고 외쳤을 텐데..."같는 농담을 하면서 키득키득 웃었다. 그때 모여서 웃던 사람들 중 내 곁에 있는 사람은 없다. 다들 어디선가 잘 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 이 소설을 읽었다. 다리가 무너지고 백화점이 무너지고 수학여행 가던 고등학생 삼백 병이 물에 잠겨 죽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잘 살고 있는 우리들. 과연 우리는 잘 살고 있는 건가,라고 소설은 뒤늦게 내게 묻는다. 그러게. 나는 잘 살고 있는가. 우리는 멀쩡한 건가.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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