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가네라고 혹시 들어보셨는지? 마포에 있는. 아, 최대포는 아신다구요. 네. 사실 마포는 최대포라는 고깃집이 제일 유명하죠. 그런데 오늘은 최대포 말고 박가네라는 집 얘기 좀 하려구요. 제가 두 번째로 다니던 광고회사가 MBC애드컴이라는 곳이었는데요, 정동MBC빌딩에 있던 그 회사가 어느날 갑자기 마포 태영빌딩이란 곳으로 이사를 간 겁니다. 정동MBC빌딩은 덕수궁과 광화문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서 나름 정취가 있었고 또 당시만 해도 경향신문과 MBC라디오방송국이 남아 있어서 가끔 ‘별밤' 공개방송 같은 녹화방송 프로그램이 열리는 날엔 여중생들이나 여고생들이 건물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인기 연예인이 나타나면 광화문이 떠나갈 정도로 비명을 지르는 소소한 재미가 있던 곳이었죠. 아, 박근혜 대통령이 대표를 지낸 정수장학회도 그 건물에 있었습니다. 박 전 대통령의 ‘정' 자와 육영수 여사의 ‘수' 자를 따서 이름이 그랬다죠. 그런데 회사가 마포로 옮겨가면서 그런 분위기나 재미들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겁니다.
그래도 우리는 마포라는 새로운 공간에 재빨리 적응을 했습니다. 일단 제일 먼저 찾은 곳은 밥집. 마침 회사 바로 앞에 공덕시장이라는 오래된 재래시장이 있어서 우리의 점심과 저녁은 그곳에서 손쉽게 해결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저희 팀은 곧바로 시장 안에 있는 ‘명재네’라는 분식집과 단골을 텄습니다. 오후 네다섯 시쯤 되면 두세 명씩 가서 간식으로 떡볶이도 먹고 라면도 먹고 하던 집이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초등학생인 명재네집 아들 명재가 우리 팀장님인 국동이 형을 보면 저쪽에서부터 달려오며 “아저씨,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할 정도로 막역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공덕시장은 이후에 두 번 크게 신문에 난 적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전국에서 가장 붕괴위험이 큰 건물'이라는 불명예스러운 기사였고 또 한 번은 ‘IMF를 맞아 저렴한 시장 전집이 뜬다, 5천 원이면 배부른 안주에 막걸리까지...’라는 내용의 조금 서글픈 기사였습니다) 바로 근처에 건물이 있던 한겨레 기자들도 많이 오고 그랬지만 어쨌든 공덕시장은 너무 오래된 건물이긴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된 관심사는 예나 지금이나 밥보다는 술이었죠. 눈만 뜨면 회사에 와서 허구헌날 부대껴가며 회의하고 야근하고 툭하면 주말에도 나와 일하고…정말 어이 없게도 가족들보다 오래 시간을 같이 보내는 사이였고 또 쓸데없이 체력은 넘쳐나던 신입사원 시절, 절대적으로 우리를 위로해 주는 건 업무 중간 틈틈이 마시는 술밖에 없었습니다. 마침 우리 회사 뒤에는 제일빌딩이라는 적당한 크기의 베이지색 건물이 하나 있었는데 일층의 맥주집부터 2,3층의 ‘파발마’ 같은 단란주점, 그리고 지하에 ‘언니들’이 T/C 없이 자유롭게 근무하는 야릇한 술집들까지 즐비해서 우리는 매일 밤 선택의 폭을 넓혀가며 그 빌딩에 출근부 도장을 찍을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오죽하면 '밤에 MBC애드컴 직원들을 만나고 싶으면 제일빌딩으로 가라' 는 말이 생겨났고 실제로 밤이면 그 빌딩 화장실에서 술에 취한 동료들과 자주 마주치곤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빌딩은 어느새 우리들 사이에서도 ‘환락빌딩’이라는 직관적인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마포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가게는 최대포였죠. 우리도 당연히 처음엔 최대포를 갔었습니다. 그러나 곧 시들해지고 만 것이, 소문과 달리 고기 질이 그리 좋지 못했고 서비스도 그저그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결정적인 이유는 고기를 굽는 연료가 숯불이 아니라 ‘브루스타’ 라 불리는 이동식 가스렌지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건 회사에서 가까운 '그냥 최대포'든 마포 굴다리 밑에 있는 '원조 최대포'든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수십 년 이름 높은 최대포가 가스렌지로 고기를 구워주다니. 우린 마포라는 지역의 문화적 자존심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 같이 숯불로 고기를 구워주는 집이 하나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회사앞 제일빌딩 맞은편 ‘박가네'였습니다.
환락빌딩 바로 맞은편에 있던 박가네였으니 우리들의 회식장소로는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어쩌다 경쟁PT라도 따는 날이면 당연히 팀 전체가 몰려갔고 그냥 별 이유 없이 저녁에 술 한 잔 걸치고 싶은 날도 우리의 발걸음은 어느새 김유신의 말처럼 박가네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술, 담배, 외박’을 인생 삼대지표로 삼고 살았을 정도로 한창 팔팔했던 저는 바쁘든 한가하든 어떤 경우에도 집에는 일찍 들어가면 안 되는 걸로 알고 살았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툭하면 술이요, 뻑하면 외박이었습니다. 지금도 기억납니다. 부지런한 박가네 사장님은 우리가 갈 때마다 활짝 웃으시며 가게 옆 숯막에서 빨갛게 익은 숯불을 들고 들어오시는 것이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잘 생기고 붙임성도 좋은 우리 선배 김동만 차장은 원래도 사장님과 친했지만 두 사람이 동향이라는 걸 알고 난 다음부터는 즉시 호형호제하는 막역한 사이가 되어 한가한 저녁이면 가게에 가서 함께 숯불을 지피기까지 했습니다. 가게는 부지런한 사장님 사모님 덕분인지 나날이 번창했고 늘 만석에 가까울 정도로 장사가 잘 되었습니다. 우리는 번지르르한 광고대행사에 다니는 MBC애드컴 직원놈들보다 박가네 사장님이 훨씬 더 돈도 많이 벌고 실속 있다고 부러워하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사장님 부부는 에이, 말도 안 된다고 손을 내저으며 웃으셨구요.
매번 관광도시를 ‘강간도시’로 발음하던 바보 같은 김영삼 대통령 시절, 갑작스럽게 IMF가 왔고 많은 사람들이 나이 서른에 ‘명퇴’를 당하며 회사를 떠났습니다. 동료들이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환송회를 하던 곳 역시 대부분은 박가네였던 것 같습니다. 저 또한 IMF시절은 어떻게 버텨냈지만 그 다음 해엔 회사 다니기가 너무 지겨워져 다른 곳으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십대를 넘어 서른 언저리, 아직 마흔이 되기 전 우리들의 모습이 담겨있던 마포 시절은 그렇게 힘없는 산문처럼 한 줄 한 줄 흩어져 추억의 책갈피 속으로 사라져 갔습니다.
이제는 PD프로덕션의 기획실장 일을 하고 있는 저는 작년 어느날 마포의 HS애드라는 광고대행사에 회의를 하러 갔다가 저녁을 먹기 위해 실로 오랜만에 박가네를 갔습니다. 카운터에 앉아서 활짝 웃는 사모님과 여전히 저를 반갑게 맞아주는 사장님을 보고 함께 간 PD들이 “실장님, 여기 단골이었나봐요?”라고 물었습니다. 단골이었지. 그것도 아주 찐한 단골이었지. 고기를 시키고 소주도 시켰습니다. 여전히 사장님이 웃는 낯으로 숯불을 피워 들고 오시더군요.
"아유, 이제 숯불 피우는 건 다른 사람 시키시지...동만이 성은 요즘도 와요?"
“하하, 안 와."
예나 지금이나 그저 하하 웃기만 하는 사장님을 보니 갑자기 화가 났습니다. 아니, 그 동안 번 돈은 다 어쩌고 아직도 이러고 계세요. 사모님은 다리를 다치셨는지 카운터 의자에 앉아 다리 위에 덮은 담요를 한 번도 치우지 않으셨습니다. 반가워 하면서도 저한테 가까이 와 인사도 못하고 그냥 카운터에 앉아 박꽃처럼 하얗게 웃기만 하는 사모님을 보니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가게에 손님은 여전히 넘쳐나는데, 돈은 여전히 많이 버는 거 같은데. 왜 이 분들은 여전히 이러고 살고 있는 거야. 그 돈 다 누가 쓰는 거야. 아, 씨발.
박가네 사장님, 반가웠습니다. 생각해 보니 저희들이라고 뭐 다른 게 있나요. 십여 년쯤 후엔 나도 뭔가 다르게 살아가고 있으리라. 그때쯤이면 내 친구나 동료들도 이런 힘겨운 일들 졸업하고 지금보다는 더 여유 있게 살아가고 있겠지...하지만 막상 오랜만에 만났을 때 우리들의 손에도 저마다의 숯불화로들이 하나씩 들려 있는 거죠. 그게 광고를 굽는 숯불이든 IT를 녹이는 숯불이든 뭐 별 차이가 있겠어요. 어디서 일을 하고 있든 여전히 우리의 얼굴은 그 숯불 때문에 땀으로 번들거리고 있는 걸요. 다만 아직은 사장님처럼 그렇게 웃으면서 빨간 숯불을 솜씨있게 집어낼 자신이 없어서요. 그리고 아직은 그 숯불에 우리들 꿈이 다 타버린 건 아니라고 우겨보고 싶어서요. 여름은 아직 다 지나가지 않았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