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행복을 간절히 원한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면 행복하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은 없다. 아니, 아직 못 봤다. 남부러울 것 없는 엘리트가 끊임없이 바람을 피우는 것도 보았고 SNS에 시크한 척 멋진 일상을 올리거나 몇 달 간의 해외여행을 거의 실시간으로 중계함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부러움을 사는 엄친아도 알고 보면 그 자랑이 허세로 밝혀지기도 한다. 나는 궁금했다. 행복은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는데. 알고 보면 행복이야말로 소박한 일상에 있다던데. 그래서 파랑새라고 하지 않던가. 실컷 바깥에서 찾아 헤매다 지쳐 들어온 주인공이 집에서 발견한 파랑새. 그런데 그런 동서고금의 이야기들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왜 사람들은 좀처럼 행복해지지 못하는 것일까.

결혼 초기부터 4년 간 살았던 전세 아파트를 떠나 성북동 꼭대기에 있는 아주 작은 집으로 들어오면서 드디어 나는 행복한 삶에 접어들게 되었다...라고 하면 거짓말이고, 적어도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에 대해서는 좀 알게 된 것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 행복해지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사람, 공간, 그리고 시간. 즉, 나를 이해해주고 무조건 응원하는 사람과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공간에서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때 행복은 시작된다. 물론 이건 완성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다.


아내와 나는 아파트를 떠나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하기로 마음먹은 뒤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일단 우리가 가진 돈이 턱없이 부족했고 은행은 아파트가 아닌 단독주택에 대해서는 몇 배나 까다로운 대출조건을 내세웠다. 워낙 주택금융에 대해 잘 모르기도 했지만 요즘 사람들이 대부분 아파트에 살다 보니 아파트 이외의 집 거래는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출발부터 차별이 주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막막해도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이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성북동 언덕 꼭대기 골목 끝에 있는 작은 집을 하나 발견했고 친한 친구들의 금전적 도움으로 며칠 만에 계약을 할 수 있었다. 집주인마저 너그러운 분을 만나 이사 전에 두 달간 낡은 집을 수리해서 들어올 수 있는 특전도 받았다. 대출금을 매우 많이 끼긴 했지만 뒷마당까지 있는 어엿한 단독주택의 소유자가 된 것이었다.

이사를 한지 며칠 지나지 않아 아내는 내게 집 이름을 하나 지어보라고 했다. 광고회사에서 평생 남의 회사 걱정이나 하고 살았으니 이젠 자신을 위해서도 뭔가 아이디어를 내보라는 것이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성북동소행성이라는 이름을 생각해냈다. '작지만 행복한 별'이라는 뜻이었다. 물론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당장 행복해질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삶의 방향성이 좀 분명해지는 것 같아서 기뻤다.

우선 아침이 달라졌다. 전에는 거리를 통과하는 차 소리나 두런거리는 이웃 사람들이 내는 생활소음에 잠을 깼다면 성북동에서는 요란한 새소리와 함께 날이 밝았다. 비록 전철역에서 걸어 올라오려면(아내와 나는 차가 없다) 땀을 뻘뻘 흘려야 하는 언덕 꼭대기에 살지만 그 덕분에 차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 장점을 가지게 되었다. 새소리, 바람소리처럼 자연이 만들어내는 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스트레스가 없었다. 가끔 아내가 "저놈의 새가 미쳤나. 왜 새벽부터 울어대고 난리야?"라고 투덜대는 경우는 있지만 그게 진짜 화를 내는 게 아니라 뿌듯해하는 마음의 굴곡된 표현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회사가 끝나면 대부분은 곧장 집으로 왔다. 집에서 아내와 보내는 시간이 밖에서 직장 동료나 친구들과 놀거나 술 마시는 시간보다 좋았다. 사람들이 보고 싶으면 집으로 초대를 했다. 집은 작지만 옥상에 올라가면 가깝게는 광화문빌딩부터 멀게는 남산타워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야경이 펼쳐졌다. 자주 열지는 못하지만 옥상파티는 어느덧 성북동소행성의 '계절 인기 품목'이 되었다. 그러나 가장 좋은 건 집에서 한적하게 음악을 켜놓고 책을 읽거나 작은 볼륨으로 TV를 틀어놓고 아내와 같이 술을 마시는 시간이었다. 그중에서도 새벽에 혼자 일어나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시간을 갖는 건 내가 가진 행복의 크기를 늘리는 일이었다.

그런 내가 어느 날 오후에 아내에게 전화를 해서 "아무래도 회사를 그만두어야겠어."라고 말했다. 물론 아무런 대책 없이 한 소리였고 그녀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그래. 잘 생각했어. 당신이 오죽하면 이러겠어. 당신 회사 오래 다녔잖아."라고 말해주었다.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았다. 아내와 통화를 끝낸 후 나는 정식으로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밝혔고 사람들은 회사를 그만 두면 당장 뭘 할 거냐고 물었다. 그때마다 나는 "아직 나도 잘 모르겠어.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대답해서 사람들을 허탈하게 만들었다. 아마도 '저 자식, 참 속 편한 소리 하고 있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면 바보라고 생각했거나. 바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떤가. 어차피 그들이 내 인생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닌데.

그리고 다행히 우리 집엔 바보가 또 하나 있다. 혼자서 바보라면 외롭겠지만 같이 사는 집에 바보가 하나 더 있으면 무서운 게 별로 없다. 더구나 그 바보는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이해해주고 내 이야기에 무조건 동의하는 사람이니까.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다. 그래도 뭔가 바보 같지만 신나는 일을 해보고 싶다. 세상에는 아직 사람들이 모르는 두 개의 소행성이 있다. 생떽쥐베리가 발견한 소행성 B612 엔 어린 왕자가 살고 서울에 있는 성북동소행성엔 대책 없이 즐거운 바보 커플이 산다는 점이 조금 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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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에 딱 한 장

혜자 2019. 5. 25. 11:19



매년 결혼기념일마다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행사가 뭐 없을까 하다 생각해 낸 것이 '결혼기념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사진 찍기' 놀이였습니다. 첫 해는 우연히 일찍 눈을 떴으나 일어나기는 싫고 해서 무심코 사진을 찍었는데 전날 먹고 마신 술과 안주에 팅팅 부어터진 얼굴들이 재밌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해도 계속 찍다보니 어느덧 여섯 해가 지났습니다. 저희 부부는 해마다 이맘때면 여행을 하기 때문에 올해는 부산의 한 호텔에서 문제의 베드씬을 찍게 되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그 동안 일 년에 딱 한 장씩 찍어서 올린 사진들을 바라보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올해는 좀 근엄하게 찍어볼까도 생각해 보았으나 결국 또 깔깔깔 웃으면서 찍게 되었습니다. 해마다 5월이면 주책 없는 커플사진을 목도하시느라 괴로워하실 만장하신 친구 여러분, 죄송합니다. 오늘 하루만 너그럽게 봐주세요. 내일부턴 정말 안 이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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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를 만들다보면 신기하게도 똑같은 아이디어가 나올 때가 있습니다. 어제도 외국 자료들을 살펴보다가 그런 TV-CM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는 미켈럽이라는 맥주 브랜드이고 다른 하나는 이탈리아의 아마로 몬테네그로라는 위스키 브랜드인 것 같습니다. 

두 광고 다 A.I가 등장합니다. 운동이든 게임이든 심지어 악기 연주까지 인간들보다 월등한 능력을 선보이죠. 하지만 일을 끝내고 저녁에 한 잔 하는 즐거움까지 인간을 따라잡을 수는 없다는 통찰을 술 브랜드와 절묘하게 엮었습니다. 

문제는 그 전개가 너무 똑같다는 것입니다. 만듦새나 스케일을 봐서는 누가 누구 것을 베낀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우연의 일치로 그런 것이겠죠. 저도 오래 전에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SK텔레콤 광고를 할 때였는데 저희가 만든 광고에 나온 로봇과 비슷한 로봇이 일본 CM에도 나온 것이었습니다. 시기도 비슷했구요. 그래서 아주 곤욕을 치뤘습니다. 이 광고도 그런 경우라 여겨집니다. 지금쯤 두 회사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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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이 나가고 회의실엔 정적이 감돌았다. 십 년째 국내 점유율 1,2위를 다투는 등산복 브랜드 '에이픽스'의 새로운 광고대행사를 선정하기 위한 경쟁PT가 이주일 반밖에 남지 않았는데 아직 기획 컨셉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3차 회의가 열렸으니 다들 이게 뭐하자는 짓인가 하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사장이었다. 무슨 프로젝트가 시작되든 킥오프 하는 날부터 무조건 이틀에 한 번씩 회의를 하지 않으면 발작 상태가 되어버리는 이 대행사의 사장 현민섭 말이다. 사장이 회의실에 들어오는 이유가 회의를 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회의 시간에 화를 내기 위해서인지 모르겠다는 사원들의 반응은 그래서 오늘도 유효하다. 이번 사태에 대해서는 일차적인 잘못이 AE들에게 있다 하지만 찜찜한 건 고재영CD팀도 마찬가지였다.  고재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장 이 새끼는 변하질 않지. 드디어 대행사를 그만 두어야 하나. 오늘따라 고재영은 자신의 뚱뚱하고 둔한 몸이 더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오늘 나온 얘기 가지고 뭐라도 아이디어를 좀 만들어서 내일 오후에 다시 만나시죠." 

이렇게 말하면서 고재영은 카피라이터 실장 편성준을 바라보았다. 아이구, 저 마음만 여린 병신 같으니라구. 내가 어쩌다가 저런 놈이랑 한 배를 타가지고 이 고생이냐. 역시 지난 달 사장과 싸웠을 때 미련 없이 사표를 쓰는 거였는데. 내가 너무 착했어. 너무 약해졌어. 고재영은 부글부글 끓는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얼음이 다 녹은 아이스커피 텀블러의 빨대를 쭉 빨아들였다. 고 실장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편성준은 고 실장님, 오랜만에 우리 냉면이나 드시러 가실래요? 하고 속편한 소리를 하며 다가왔다. 

**

고재영은 천사다. 흔히 마음씨 착한 사람을 표현할 때 쓰는 메타포로서의 천사가 아니라 말 그대로 진짜 천사다. 영어로는 Angel. 그가 태양계 중 지구라는 별로 파견 근무를 온 건 이만 년이 좀 넘는다. 당연히 지구 위에 인간들이 생겨나는 것을 지켜 보았고 수 많은 종교와 철학, 전쟁 들이 발발하고 유지되고 사라지는 모습을 목격했다. 인간 세상에 어울려 살면서 그들을 연민하지도 억압하지도 않고 지켜보다가 위기의 순간이 오면 일종의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 그것이 천사 고재영에게 부여된 주된 임무였고 그는 대체로 이 어려운 임무를 이만 년이 넘도록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물론 뼈아픈 실수도 있었다. 예수가 태어나기 직전에 한 번, 그리고 십자군 전쟁 때 한 번 잠시 방심했던 고재영이 인간들에게 겉모습을 들켜버린 것이었다. 덕분에 지금까지 인간들이 생각하는 천사는 모두 흰 천으로 된 옷을 입고 하얀 날개가 달린 금발의 꼽슬머라 뚱보라는 천편일률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하긴 그때 내가 좀 많이 먹긴 했지. 고재영은 그때를 생각하며 잠깐 웃었다. 20세기에 물리학자 아이슈타인이라는 작자가  '4차원'이라는  개념을 들고 나왔을 땐 천국 여기저기서 그야말로 난리가 났었다. 당장 신과 인간계 사이의 비밀을 누설한 자가 누구인지 밝히는 대대적인 색출작업에 들어갔으나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고 아인슈타인은 은하계를 통틀어 가장 이례적인 스타가 되어버렸다. 결국 천국에서 열린 긴급회의에서는 아이슈타인이 거절하지 못할 정도의 빅딜을 제시하기로 했고 그는 인간의 시간으로 장장 십오 년을 고민한 끝에 그것을 받아들였다. 우주를 통틀어 사람이  천사가 된 케이스는 아직도 앨버트 아인슈타인이 유일무이한데, 그는 원자폭탄과 인간들이 존재하는 지구가 싫다며 지금은 아주 먼 은하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제가  어제 승찬이, 박수하고 한 잔 하면서 얘기를 해봤는데요. 에이픽스는 절대로 어렵고 복잡한 컨셉으로 가면 안 돼요. 더구나 창업주가 대구에 있는 재래시장에서 등산복 도매로 시작한 사람이잖아요. 밑바닥에서 시작해 메이저가 된 입지적인 인물이라구요. 신문 기사에서 읽었는데 자기 얘기를 소설로 쓰면 열 권도 넘을 거라고 큰소리를 치던데요. 고집이나 카리스마도 장난이 아닐 거구요. 아직도 회의 시간에 커피잔이 날아다닌다던데...이런 사람한테는 정말 직관적인 걸로 그냥 한 방 던지고 빠져야 돼요." 

편성준은 애주가다. 늘 어제 누구랑 몇 차까지 갔었고 술자리에서 어떤 실수가 있었는지 궁금하지도 않은 무용담을 늘어놓는 걸 즐긴다. 인간들은 왜 끊임없이 술을 마시는 걸까. 어젯밤 자신이 한 고민의 총량이나 반성의 질량을 주량과 병치시키길 좋아하는 인간들의 습벽을 마주하면 고재영은 쓴웃음부터 나온다. 자신이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얼마나 술고래에 골초였는지 알면 얘네들이 놀라 자빠질 텐데.  술이나 담배, 마약, 도박, 하다못해 섹스까지, 인간들이 즐기는 기호품이나 습성들 중에서 중독성이 유난히 강한 품목들은 모두 천사들에게서 온 것이었다. 조금 다른 게 있다면 천사들은 아무리 음주와 흡연을 일삼아도 죽지 않지만 인간들은 그럼으로써 원래 얼마 되지도 않는 수명을 더욱 단축시키는 효과가 있다는 점이다. 덕분에 고재영은 수천 년 전부터 지구의 인구 수를 조절하는 데 술과 담배, 설탕을 요긴하게 사용했다. 어쨌든 그는 이만 년 전부터 태양계 안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천사니까. 

그런 고재영이 당장 등산복 PT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은 우주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잠복근무는 천사들의 또다른 숙명이다. 인간세상에 섞여 살려면 어쩔 수 없이 가정과 직업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고재영에게도 가족이 있고 취미가 있다. 이사카 코타로의 소설 [사신의 7일]에 나오는 '사신 치바'는 인간이 만든 모든 것 중에 음악을 가장 마음에 들어해 틈만 나면 음악을 듣는데, 고재영은 그런 면에서는 음악보다 영화가 더 좋았다. 1890년 초반 우연한 기회에 뤼미에르 형제에게 '영화'라는 영감을 주게 되어서만은 아니었다. 인간 세상에 또 하나의 예술 장르를 만들어 내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우게 된 고재영은 그 이후로 수 많은 영화들을 섭렵했는데 그 중에서도 에밀 쿠스트리차와 크지쉬토프 키에슬롭스키, 그리고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들을 좋아했다. 그가 지금 광고 아트디렉터라는 직업을 택한 것도 어쩌면 그런 이유에서였는지도 몰랐다. 

**

 등산복 시장은 급격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고등학생들의 유니폼이라 불리던 **페이스 같은 제품의 판매량이 반토막이 나기 시작하더니 덩달아 어른들의 외출복 노릇을 하던 등산복 바지나 점퍼 등도 판매량이 뚝뚝 떨어졌다. 일본이나 이탈리아에서 들어온 SPA 브랜드들이 시장을 잠식하면서 트렌드가 변한 것이다. 그래서 광고량도 급격하게 줄었는데 이번에 에이픽스의 회장이 '기업의 명운을 걸고' 제품부터 광고까지 전혀 새로운 캠페인을 만들겠다고 해서 광고계의 이슈로 떠오른 것이다. 사람들은 궁금해 했다.  새로운 출구전략이 될 것인가, 아니면 언발에 오줌 누기로 그칠 것인가.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건 일단 경쟁 PT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등산복 광고가 아무리 달라진다 해도 산 나오고 등산복 나오는 거야 당연한 일이니 PT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은 광고전략이요 컨셉이었다. 그 중에서도 메인 카피는 정말 중요했다. 

"박수, 내일 회의 때 내놓을 카피 좀 써봤어?" 
"몇 개 써봤는데, 다 별로예요." 

박수가 경쾌하게 대답했다. 고재영은 박수가 천사가 아닐까 약간 의심하고 있다. 일단 밥을 너무 안 먹는다. 깡마른 체격이긴 하지만 그래도 저토록 밥을 안 먹는 인간은 참으로 드물다. 참고로 천사들은 아무 것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 고재영은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려 연기를 하다 보니 뚱뚱한 몸이 되었지만 갑자기 체형을 바꾸면 의심을 받을까봐 몇십년 째 지금 같은 섭식을 유지하고 있다. 박수가 천사라면 고재영은 긴장해야 한다. 가끔 천국에서는 기존 천사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잠입 천사들을 내려보내기도 한다. 부정을 감시한다, 라기보다는 기존 천사가 너무 인간화되지는 않았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그러나 당장은 박수가 천사인지 아닌지 알 도리가 없다. 모든 천사는 점조직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고 어떤 잠입 천사라고 해도 고재영에게 문제가 생겼을 경우가 아니라면 신분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박수는 원래 이름 '박수연'에서 '박수'로 개명하기 훨씬 전부터 팔뚝에 '337'이라는 문신을 새기기도 했다. '337박수'라는 대한민국에만 있는 풍습으로 몸에 낙서를 한 것이었다. 이는 아무리 너그럽게 봐줘도 천사들이 할 만한 짓은 아니었다. 다만 일부러 그럴 수는 있다. 하긴 수만 년을 넘어 거의 영원히 사는 천사들의 속을 그 누가 알 수 있으랴. 

** 

서울 하늘은 며칠째 쨍하고 시원한 바람이 불었지만 고재영팀이 있는 논현동의 사무실엔 하루 종일 답답한 공기가 감돌았다. 편성준이 카피를 써왔다. 몇 개의 카피 중엔 다행히 에이픽스 회장이 마음에 들어할 만한 게 하나 있었다. 

"사람과 산 사이, 에이픽스가 있다" 

간결하면서도 등산복의 본질과 기능을 한꺼번에 꿰뚫은 펀치라인이었다. 고재영은 이번 PT는 이 슬로건 덕분에 이길 것임을 직감했다. 물론 고재영의 능력이라면 등산복 PT 정도야 얼마든지 이기게 할 수 있지만 그러고 싶진 않았다. 전쟁이나 자연 재해 등 커다란 이슈에는 가끔 개입을 해도 이렇게 자잘한 일상사는 개입하지 않는 게 고재영의 신조였으니까. 문제는 천국에서 받은 메시지였다.  갑작스럽게 고재영의 내근이 결정된 것이었다. 그동안의 임무를 대체로 무리없이 수행한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로 50년 간의 안식년을 보너스로 받으면서 천국 내 인사과로 새로이 발령이 난 것이었다. 남은 시간은 겨우 육 개월. 고재영은 잠깐 망설였다. 이대로 가면 편성준은 이번 PT를 비롯한 몇 건의 프로젝트에서 좋은 결과를 거두어 광고계에서 제법 인정을 받겠지만 술을 좋아한 댓가로  간암에 걸려 일찍 죽을 텐데. 떠나는 마당에 그에게 조금 더 성취감을 주고 수명도 더 연장을 해주는 건 어떨까. 

"고 실장님, 전근 축하해요. 헤헤." 

그 때 박수가 와서 속삭였다. 역시 짐작대로 그녀는 잠입 천사였던 것이다. 고재영은 약간 짜증이 나서 이십만 볼트짜리 벼락 한 가닥을 품에서 꺼내 박수에게 던졌지만 그녀는 그것을 가볍게 손바닥 안으로 흡수해 버리며 소리 없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러기냐, 진짜? 안 그래도 너 좀 수상했어." 
"하지 마세요. 그런 인간 어디가 이쁘다고 봐줄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설마 걔가 이뻐서 그러겠냐? 인간들 흥망성쇠가 게 하도 빤해서 장난 좀 쳐보려는 거지." 
"하지 마세요. 요즘은 제가 보고 안해도 천국에서 먼저 안다니까요." 

고재영은 이 순간 편성준을 살리려는 자신이 천사일까 악마일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인간들은 천사와 악마는 완전히 다른 존재이고 머무는 곳도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들은 언제라도 천사였다가 금방 악마가 될 수 있다. 인간의 선악 기준이라는 게 그만큼 편협할 뿐이다. 고재영은 편성준이 업계에서 승승장구하는 것은 취소하고 간암으로 사망하는 것만 막아주기로 했다. 술 좋아하면서 오래 살면 그것도 괜찮지 뭐. 딱 그정도가 적정선이라고 생각했다. 고재영은 자기가 전출되고 나면 다음에 어떤 천사가 올까 궁금해졌다. 기왕이면 자신처럼 악마보다는 천사쪽에 가까운 성격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노트북 앞에서 일하는 척하고 있는 박수를 다시 한 번 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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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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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는 왕이 가장 사랑하는 큰아들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애지중지했고 그가 원하는 것은 뭐든 다 해주었으며, 그를 위해 성대한 잔치와 만찬을 베풀곤 했다. 어느날 만찬에서 왕자는 아버지 곁에 선 검은 수염에 얼굴이 어두운 남자를 보았고, 그가 저승사자라는 것을 곧 알아보았다. 둘은 눈이 마주쳤고 서로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왕자는 만찬이 끝난 뒤 아버지에게 초대객들 중에 저승사자가 있었다고 말하며 그의 눈길로 보아 자신의 목숨을 가져갈 작정인 것 같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깜짝 놀라 말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곧장 이란의 타브리즈 궁전으로 가서 숨어 있거라. 타브리즈 왕은 나와 철친한 사이이니 아무에게도 너를 넘겨주지 않을 게다." 그리고는 아들을 곧장 이란으로 보냈다. 

왕은 다시 만찬을 준비하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또다시 얼굴이 어두운 그 저승사자를 초대했다. 저승사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전하, 오늘 저녁엔 아드님이 안 보이네요." 왕이 말했다. "내 아들은 새파랗게 젊은 아이요. 그 애는 아주 오래 살아야 하오. 그런데 왜 내 아들 얘기를 묻는 거요?" 그러자 저승사자가 말했다. "사흘 전 신께서 제게 명하시기를, 이란의 타브리즈 궁전으로 들어가 왕자의 목숨을 앗아오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제 아드님이 이스탄불인 이곳에 있길래 놀라긴 했지만 한편으론 무척 기뻤습니다. 아드님도 내가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는 것을 보았답니다." 저승사자는 이렇게 말한 후 곧장 궁전을 떠났다.  

터키에서 우물을 파러 다니는 사람 마하무트 우스타는 이 소설 [빨강머리 여인]의 주인공인 '나'에게 전날 들었던'오이디프스 이야기'를 듣고 자기도 비슷한 얘기를 알고 있다며 위와 같은 사연을 들려준다. 불행한 운명을 타고 났다는 예언 때문에  강가에 버려졌다가 결국 예언대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한 뒤 두 눈을 찌르고 광야를 헤메다 죽은 오이디프스. 그리고 위험에 빠진 아들을 살리려고 친구의 궁으로 보냈다가 오히려 그 일로 인해 아들을 죽게 만든 비운의 왕. 운명이란 그런 것이다.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나고야 만다. 다만 인간들은 그 일이 벌어진 뒤에야 그걸 깨닫는 거고. 나는 늘 내 운명의 한복판에 서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른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오늘은 금요일이니 내가 좋아하는 말을 하나 소개하기로 한다.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오늘 먹고 마시고 조져라."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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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

길위의 생각들 2019. 1. 6. 13:22


서양 사람들이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도 쉽게 미소를 짓고 악수를 나누는 것은 누구와 마주치더라도 내가 당신을 해칠 의도가 없고 내 손엔 아무런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공생욕구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지금은 이 인사법이 서양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통용되는 상식임은 물론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밴드 등 가상의 세계에 들어가서 누군가의 게시물에 '좋아요'로 그 선의를 표시하고 산다. 페이스북을 처음 만들 때 주커버그가 '싫어요'도 같이 만들지 않는 바람에 우리는 좋아요 하나만 가지고 감정을 표해야 하는 약간 복잡한 상황에 직면했다. 그래서 오늘도 할 수 없이 '좋아요'를 누르고 다닌다. 이렇게 멋진 사진을 올렸는데 좋아요를 안 누르면 안 되지. 저렇게 좋은 글을 써서 올렸는데 좋아요를 안 누르면 섭섭해 할거야. 그렇게 얼굴이 예쁜데 좋아요를 안 누르면 질투해서 건너뛴다고 생각할거야....졸지에 좋아요를 안 누르면 그것은 곧 '싫어요'라는 표시로 둔갑한다. 괜히 좋아요 한 번 안 눌러서 내가 자기를 싫어한다는 오해를 받으면 손해니까 누르자. 뭐, 돈 드는 일도 아닌데.  

그러다 보니 오늘도 페이스북에 들어가서 내 게시물의 좋아요 숫자를 확인한 뒤 그 좋아요를 눌러 준 사람들의 담벼락에 들어가서 인사 삼아 그의 게시물에도 좋아요 몇 개를 누르고 나온다. 친구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확인차 밴드에 들어갔다가 내가 전부터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놈의 게시물에조차 좋아요를 누르려다가 멈칫한 나는 순간 아연실색한다. 아, 이렇게 살아도 되는걸까. 늘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 입에 발린 소리나 하면서 가면처럼 사는 인생이라니. 어제 대학 써클 모임에서 선배 형에게 내가 의외로 사회 생활을 잘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예전부터 나약하고 빈 구석이 많은 나를 잘 아는 형이 전혀 비꼬는 의미 없이 해준 칭찬이었지만 왠지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내가 재미 없게 느껴졌다. 그리고 오늘 숙취에 시달리면서 과연 잘 산다는 건 무엇일까 다시 생각해 보았다. 물론 그런 엄청난 인문학적 질문에 쉽게 답이 나올 리가 없다. 다만 바라건대 올해는 예전보다 좋아요를 좀 덜 누르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필요할 땐 싫어요! 라고 소리도 지르며 살았으면 좋겠다. 어느새 싫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취향이 아닌 권력의 문제가 되고 말았으니까. 성공한 대기업의 회장님이나 CEO들 중엔 성격이 급한 사람들이 유독 많은데 생각해 보면 그건 그가 급한 성격 그대로 살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위치에 있지 못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위치보다는 마음이 더 문제다. 내가 좋아요를 누른 횟수 만큼은 아니더라도 가끔은 싫어요를 말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살자 결심해 본다. 그러니 아내여, 친구들이여, 부디 새해부터 나와 함께 단체로 삐뚤어져 보지 않겠는가. 착하고 올바르게만 살면 재미 없으니까. 그리고 난 그대들이 그렇게 착해빠지거나 올바른 성향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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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망설였다. 올 연말 최고의 기대작 [마약왕]은 개봉하자마자 평론가들의 악평에 시달리더니 CGV어플을 열어보니 어느새 예매 9위로 떨어져 있었다. 평론가들과 관객의 악평이 일치할 경우 영화의 질이 어땠는지는 그동안 경험해봐서 알지 않는가. 그러나 내게는 송강호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다. 어떤 영화에서든 거의 본능적으로 최고의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연기의 신 송강호. 영화가 아무리 후졌더라도 송강호는 살아남았지 않았을까, 하는 미련이 나를 혼자 토요일 오후에 대학로에 있는 극장으로 향하게 했다. 

토요일 오후 5시 15분 영화인데도 극장은 빈 좌석이 많았다. 관객들의 수준도 별로였다. 내 뒤에 앉은 남자 새끼는 자기 여자친구에게 계속 영화와 역사와 사회에 대한 되먹지 않은 인문학 강의를 하고 있었고 여자는 영화를 보는 도중에 전화를 받아 무려 15초 이상 친구에게 안부를 전하는 뻔뻔함을 보여줬으니까. 그러나 의의로(?) 영화가 좋았다. 우려와 달리 설정이나 만듦새가 나쁘지 않았고 송강호는 물론 김대명, 조우진, 조정석 등 출연진의 연기가 고르게 다 좋았다. 우민호 감독 때문에 연기력을 인정 받아 지금은 한국영화에서 안 나오는 작품이 거의 없어 '제 2의 이경영'으로 불린다는 조우진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더 킹]에서 어설픈 경상도 사투리 검사 역을 맡았던 김소진의 연기조차 여기서는 훌륭했다. 약간 안쓰러울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배두나도 대체로 예쁘게 나왔고 '불구경보다 재밌다는 미친년 구경 다 하셨으면 이제 그만 집에 가세요!"라는 대사를 칠 때는 카리스마도 있었다. 

139분에 달하는 긴 러닝타임과 마약, 폭력, 권력 등 심각한 소재, 1970년대 초반이라는 생경한 시대적 배경 등이 젊은 관객들의 발걸음을 막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흥행을 위해 차라리 조우진이 죽던 사우나 씬을 조금 더 잔인하고 자극적으로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까지 해보았다. 마지막 송강호가 자신의 집에서 총질을 하며 경찰과 대처하는 씬은 알 파치노의 열연이 빛났던 브라이언 드 팔머의 [스카페이스]에서 따온 게 명백한데, 송강호가 연기를 너무 잘 해서 볼 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사실 우민호 감독은 전작 [내부자들]에서도 마틴 스콜세지나 프랜시스 포드 코플라 등의 영화를 베끼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선이 굵은 작품은 그 나름의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단순히 소재에 머물지 않고 그 소재를 통해 어떤 '맥락'을 만들어낼 때 비로소 '작가'가 탄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 당하고 80년대가 시작되는 시대적 배경을 보여줌으로써 이 영화도 단순히 마약 영화가 아니라 욕망과 권력과 편법으로 얼룩진 우리의 현대사를 조명하는 필름으로 그 의미망을 넓히는 데 성공했다. 몰론 마지막 장면에 화면을 가득 메우는 송강호 얼굴 위로 '15년 형을 선고받은 그 때문에 그때부터 검찰에 마약반이 신설되었다'라는 조정석의 나레이션이 흐를 때는 파자마를 입고 현관문 밖으로 조간신문을 주우러 나오던 레이 리오타의 모습으로 마지막을 장식했던 마틴 스콜세지의 [좋은 친구들]이 떠오르긴 했지만, 뭐 어떠랴. 이 작품은 그런 사소한 흠집보다는 선 굵고 거대한 그림을 그리려는 의도가 더 돋보이는 역작인데. 흥행 성적과는 상관없이 영화적으로도 한 번은 볼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세간의 평 때문에 놓치고 후회하지 말자.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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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2018년 12월 말일을 향해 달려가고 있네요. '독하다 토요일' 2기 첫 번째 모임은 서울파이낸스센터 지하 1층에 있는 이스트빌리지에서 열렸습니다. 메르스 사태를 다룬 김탁환의 [살아야겠다]를 읽고 많은 얘기를 나눴는데, 실제 있었던 비극적이고 어처구니 없는 사건을 다룬 사회파 소설이라 많은 회원들이 분노 때문에 책을 읽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는 소감을 털어놓을 정도였습니다. 책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제가 게으름을 피우느라, 또 개인사가 너무 버러이어티하다 보니 후기를 쓸 시간을 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어짜할 바를 모르고 앉아있다 보니 시간은 흘러흘러 두 번째 모임이 다가오더군요. 결국 첫 번째 모임 후기는 쓰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어쨌든 [살아야겠다]는 영화화가 결정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오고 있으니 다행이지요. 

2018년 12월 8일 오후 2시에 '독하다 토요일' 2기 두 번째 모임이 열렸습니다. 이번엔 서소문에 있는 '청춘여가연구소'에서 일곱 명이 모여 이승우의 [가시나무 그늘]을 읽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저희 동네에 '파란대문집'이라는 공간이 생겨서 우연히 들렀는데 거기서 그날 만난 사람들 중 한 분이 청춘여가연구소 소장인 정은빈 대표였던 것입니다. 그런 연유로 서소문 피어선 빌딩에 있는 이 공간을 독하다 토요일의 새 아지트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건축을 전공한 서동현 씨의 설명에 의하면 이 건물은 1971년 미국인 선교사가 지은 아파트였다고 합니다. 당시 최고급 건물이었고 차가 건물을 통과해 현관 앞까지 들어와서 입주민이 비를 맞지 않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독특한 구조라 입구를 찾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정말 건물로 들어가는 메인 출입구는 필로피를 통과해야 그 모습을 드러내더군요. 예전엔 아파트였지만 지금은 개인 사무실이나 NGO들의 메카가 되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11층에 있는 '청춘여가연구소'에 들어서니 널찍한 공간과 커다란 창문이 눈에 띄는 훌륭한 공간이었는데 특히 창밖으로 돈의문 박물관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는 멋진 풍광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저희들은 커피 머신이 제공하는 따뜻한 커피를 한 잔씩 들고 넓다란 공간 아무 데나 마음에 드는 곳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읽은 책 [가시나무 그늘]은 제겐 [생의 이면], [식물들의 사생활], [사랑의 생애]에 이어 이승우 작가 작품으로는 네 번째 소설이었고 나중에 생각해보니 예전에 여행 가면서 헌책으로 사서 한 번 읽었던(읽다가 그치긴 했지만) 소설이기도 했습니다. 성북동으로 이사를 오면서 처리한 책 속에 들어 있었던 것 같은데, 아마도 그만큼 다시 읽기는 힘든 책이라 생각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 책을 읽자고 추천한 사람이 또 저란 걸 생각하면 저는 참 일관성 없는 인사인 것 같습니다. 

제가 헌책을 사서 읽었듯이 이 책은 절판이 되어 청소년판 아니고는 책을 구하기 힘들었습니다. 덕분에 회원들이 삽화가 들어 있는 청소년판을 저마다 들고 나타나는 진풍경이 연출되었습니다. 한 분은 책을 구할 수가 없어 남산도서관에서 빌려왔다고 했습니다. 김하늬 씨는 작가의 심각한 문체 때문에 다자이 오사무의 [금각사]나 [인간실격] 같은 작품들이 떠올랐던 것 같습니다. 다만 일본 작가들이 인간 본연의 부조리에 천착한다면 이승우는 시대상이 배경으로 깔린다는 게 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조지 오웰의 [1984]나 마누엘 푸익의 [거미여인의 키스]도 연상되었다고 했습니다. [가시나무 그늘]이 훨씬 뒤에 나왔으니 아마도 작가가 이 책들을 다 읽어보지 않았을까 하는 개연성 있는 추측도 전해주습니다. 작가가 신학대학을 나와 사유가 깊을 것이라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서른두 살에 이런 작품을 썼다는 것은 놀랍다는 평도 내놓았습니다. 진행이 세련되었고 짜임새도 좋아서 지금 읽어도 전혀 올드하지 않다는 의견에 저도 찬성을 표했습니다. 

개, 가시나무, 몰록으로 이어지는 요소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것들에 대해 때로는 친절하게 때로는 불친절하게 자세를 취하는 작가의 설명도 적절해 읽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김하늬 씨가 다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롯데의 편지를 인용한 것 등은 존 '중2병'스럽게 느껴진다고도 했고 저는 작품 전체의 분위기만 생각하면 코난 도일의 [바스커빌의 개]도 떠오른다는 엉뚱한 소리를 했습니다. 

윤혜자 씨는 청소년판으로 책을 대하니 뭔가 정답을 찾아야 할 것 같은 강박이 생기더라고 하며 웃었습니다. 청소년, 하면 뭔가 시험이 떠오르는데 이 책을 가지고 시험 문제를 내면 내는 것 자체가 무척 힘들 것 같다는 김하늬 씨의 농담에 오히려 정답이 없어야 할 것이라며 자기는 청소년이라는 단어 때문에 책 읽는 새로운 방법을 소환한 느낌이라며 지금까지 독하다 토요일에서 다룬 책 중 가장 흥미로운 독서였다는 말도 했습니다. 책에서 이야기하는 힘, 권력, 집단과 그에 비해 도드라지는 개인의 나약함 등을 생각하면 마음이 굉장히 아프고 씁쓸했고 마지막 희규의 아버지를 암시하는 썬글라스의 사내 대목에서는 이 소설이 격동의 시대를 얘기하고 있지만 결국은 지금의 이야기로 확장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 ㅇ리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이런 저런 사건과 현상들에 대해 얘기하다가 '윤창호법'에 대한 얘기까지 주제가 뻗어나가기도 했습니다. 

죽기 전에 진실과 정의에 대한 믿음을 지켜낼 수 있을까 고민하던 주인공이 마지막에 거대한 사건에 그냥 엮여버리는 것을 보면서 하이어라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 본연의 슬픔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고등학교 때 이 작품을 읽었다면 과연 이런 걸 다 이해할 수 있었을까, 라는 의문을 던지자 고등학교 선생님인 임기홍 씨는 그 나이엔 어떤 문제든 이해하는 애들과 못하는 애들이 공존할 수밖에 없다며 웃었고 김하늬 씨가 아마 [어린 왕자]처럼 연령대별로 다 다른 느낌일 것이라는 얘기도 했습니다. 윤혜자 씨는 사람들이 명화라고 하는 그림들을 책이나 다른 매체로 보았을 때 그게 뭐가 좋은데? 라고 생각했다가 막상 루브르 박물관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진품과 마주쳤을 때 느꼈던 경이로움을 이 소설 읽으면서도 비슷하게 느꼈다는 다소 의외의 고백을 했습니다. 이승우가 좋은 소설가라고 불리는 이유를 이번 책에서 깊게 느꼈다는 것이죠. 

책을 읽은 사람들은 모두 희규가 불쌍하다고 아우성을 쳤는데, 그 와중에 서동현 씨는 주문한 책을 어제 택배로 받는 바람에 결국 책을 읽지 못하고 왔다며 아쉬워 했습니다. 그는 독하다 토요일에서 읽은 책 중 제일 재미 있었던 건 [뜨거운 피]였다고 했습니다. 그 책에 '진실은 구리로 된 훈장'이라는 대목이 인상 깊었는데 그건 어떤 가치든 무의미하다는 부정적인 인식이며 그래서 사람들은 안전해지고 싶은 욕구 때문에 교회를 다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제시했습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분리불안'은 종교 뿐 아니라 유행하는 롱패딩, 유명한 맛집, 유행어, 실시간 검색어 등등 우리 삶 전반에 걸쳐 존재함으로써 그것 때문에 사는 것 자체가 점점 더 피곤해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김성희 씨는 책의 서문이 매우 좋았다고 했습니다. 작가가 인용한 에리히 프롬의 글도 인상 깊었구요. 책을 읽다보면 우리는 모두 지배당하는 것에 길들여져 있음을 깨닫게 되어 슬프고 그런 인물의 대표격으로 등장하는 희규가 애처로우면서도 또 한긋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소설에 등장하는 개에 의한 죽음이라는 장치- 명회가 이상해지자 죄책감을 느낀 희규도 그를 모방해 똑같은 방법으로 몸을 던지는 - 가 '길들여진다'는 것의 의미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으며 젊은 나이에 남자들끼리 주고받는 이런 기이한 우정의 구조를 혜진이가 공감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소감도 밝혔습니다. 

임재섭 씨는 단체와 개인의 관계에 대해 다룬 이 소설을 읽으면서 군대 시절을 많이 떠올리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내가 군대니까 이렇게 구는 거지 밖에서 만났으면 나도 좋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식으로 말하는 것인데 결국 그런 말이나 표현들이 집단의 억업된 구조가 만들어내는 부조리가 아닌가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임재섭 씨가 군대 얘기를 하니까 갑자기 불행했던 우리의 현대사가 필름처럼 휘리릭 지나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혜진은 희규의 수첩을 들고 다녔을까, 하는 김하늬 씨의 질문부터 시작해 희규는 왜 찌질하게 혜진에게 '사랑합니까?'라고 두 번이나 물어봤는지에 대한 해답들이 중구난방으로 쏟아졌습니다. 남자는 안 변 하는 것 같다,  젊은 베르테르 때부터 그랬다, 라고 말하는 김하늬 씨. 그냥 내 옆에 있는 여자를 좋아하는 게 남자의 속성인 것 같다, 라고 말하는 임기홍 씨. 후진 소설 같았으면 둘이 여관에서 가서 잤을 텐데 안 그래서 다행이었다, 라고 말하는 윤혜자 씨. 임기홍 씨가 모든 남자의 실존은 '이 여자가 나를 좋아하나?'라는 주제에서 떠나지 못한다고 말해 다들 배꼽을 잡고 웃었습니다. 

그 밖에도 희규를 괴롭히던 40대 사장을 여성으로 선정한 이유에 대한 토론도 있었고 주인공의 캐릭터 변화 때문에 청소년 문학으로 선정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있었습니다. 특이한 것은 삽화에 대한 소감들이었는데 모든 삽화에 등장 인물들의 표정이 없이 텅 비어 있는 게 책의 주제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느낌이라 좋았다는 중평이었습니다. 깨달을 만하면 끝나는 마지막에 대해서는 좋았다, 아쉬웠다, 의견이 엇갈리기도 했고 전체적으로 좀 긴 단편소설 같다는 얘기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올해의 책'으로 꼽을 만하다는 긍정적인 결론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관념적인 면이 많으면서도 작가가 잘 짜여진 블록처럼 소설적 장치들을 많이 마련해 놔서 읽기에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뜨거운 피] 얘기로 다시 돌아가서 만약 이 소설을 영화할 경우 주인공 희수 역으로 누가 가장 잘 어울리냐에 대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영화배우 박신양, 이병헌, 박휘순 등이 물망에 올랐다가 아이고, 다 부질없다, 라는 누군가의 일갈에 모임을 끝내고 이차 장소인  광화문 '안성또순이'집에 가서 먹고 마시고 놀다가 헤어졌습니다. 다음 모임인 2019년 1월 12일엔 구병모의  [네 이웃의 식탁]을 읽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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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한낮, 전철 안에서 어제 산 김민정 시인의 시집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를 읽으며 웃었다. 

첫 페이지 '시인의 말'부터 펴서 읽는데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서른 네 해째 나라는 콩깍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부모님아, 사랑도 다정도 병이라니깐요.'라는 메모에서 앞으로 펼쳐직 유쾌당혹발랄한 시어들이 벌써부터 예상되기 때문이다. 시집으로 본격 돌입하기 전에 제목들이  나열되어 있는 차례를 열어보니 첫 시 제목이 김정미도 아닌데 '시방' 이건 너무 하잖아요,다. 오규원 시인의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라는 시 제목이 광고 카피를 패러디한 것이라 화제가 되었다면 김민정의 시 제목들은 가요, 영화, 욕설, 섹스, 찌질함 등 우리가 주변에서 쉽게 또는 은밀하게 마주치는 그 모든 현상들이 소재요 주제로 종횡무진이다. '젖이라는 이름의 좆'은 워낙 유명하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뛰는 여자 위에 나는 詩'라든가 '陰毛라는 이름의 陰謨'나 '페니스라는 이름의 페이스', '선우일란, 빵의 비밀' 등등 너무 알록달록해서 마치 어렸을 때 동네 사탕가게에 처음 들어온 느낌을 준다. 

그렇다고 김민정의 시가 이런저런 자극적이고 유머러스한 표현으로 웃기기만 하냐하면 그렇지는 않다. 원래 시인이란 인생을 얘기해야 하는데 시냇물을 얘기한다든지 사랑을 얘기하는데 달이나 애기똥풀을 거론한다든지 하는 엉뚱하게 에둘러 말하기의 명수들 아닌가. 김민정도 그렇다. 웃으며 얘기하는 것 같지만 그 유머와 위악 속엔 날카로운 면도칼이나 사금파리가 곳곳에 숨어 있다. 그래서 '고비하는 이름의 고비'라는 시를 읽으며 언어유희가 재밌네 하고 마냥 웃을 수만 없고  '정현종 탁구교실'이라는 시를 읽으면서도 시인이 인터넷으로 검색해 본 너저분한 이름들 앞에서 느닷없이 삶의 비애를 느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인생을 너무 무겁게 대하면 살기 힘들어지는 것처럼 시도 너무 고귀하고 심각하게 대하면 쓰기 어려워진다. 그러나 내 이야기를, 내 주변 사람들의 취미와 버릇과 역사를 가지고 무심하게 만들어 던지는 시는 쉽게 읽힌다. 여기서 쉽게 읽힌다,에 방점을 찍기 바란다. 쉽게 읽힌다고 쉽게 쓰여지지는 않으니까. 자고로 쉽게 읽히는 글일수록 쓰기 어렵고 짧은 글일수록 쓰는 데 더 오래 걸린다. 김민정의 시가 그 적절한 예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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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쪽을 닮아 길쭉길쭉한 몸매와 금발의 잘 생긴 얼굴을 물려 받은 사내로 태어나 학교는 물론 뉴어크 전 지역을 대표하는 스포츠 스타였다가 해병대 제대 후엔 장갑 비즈니스계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또 미스 뉴저지 출신 미녀의 남편으로 모범적인 삶을 살아 온 유태계 미국인 스위드 레보브. 거의 완벽에 가까운 스위드의 스펙을 보면서 우리는 '저런 놈에게 무슨 걱정거리가 있겠나'라고 투덜대고 싶어진다. 하지만 하나뿐인 외동딸 메리가 월남전에 반대한다면서 엉뚱하게 마을 우체국이 딸린 작은 점방에 사제폭탄을 설치해 사람을 죽임으로써 도망자 신세가 된 사건을 시작으로 그의 인생도 함께 작살이 난다. 예쁘고 영특하지만 말을 심하게 더듬는 게 유일한 걱정거리였던 십대 소녀가 어쩌다가 그런 괴물이 되어 버렸을까. 

어려서부터 밝고 곧은 길만 걸어왔던 스위드 레보브의 참모습은 고등학교 졸업 50주년 기념파티에서 만난 후배이자 작가인 네이선 주커먼에 의해 서서히 그 모습이 포착되기 시작한다. 딸 때문에 흔들렸던 그의 정체성은 아버지와 옛 친구들, 그리고 이웃에 사는 오컷 부부까지 함께 모인 올드림록 홈파티 날 저녁에 아내와 건축가 오컷이 자기집 부엌에서 남몰래 섹스를 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결정타를 맞는다. 나는 이 장면을 읽으며 '이제 스위드도 갈 데까지 갔군'이라 생각하고 그가 오컷이나 아내인 돈이나 둘 중 하나를  총으로 쏴 죽이며 소설이 끝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작가는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이 '시모어 스위드 레보브'라는 멋진 사내의 비극을 강조한다. 이후 계속된 만찬 자리에서는 당시 미국 사회를 흔들었던 린다 러브레이스 주연의 '목구멍 깊숙히(Deep throat)'라는 포르노 영화에 대한 지루한 세대 토론이 있을 뿐이고, 결국 스위드 대신 술주정뱅이이자 오컷의 부인인 제시가 칼로 스위드의 아버지를 죽일 뻔한 에피소드로 허무하게 끝을 맺는다. 

[미국의 목가]는 가장 완벽할 뻔했던 사내가 가장 불행한 남자로 전락하는 비극적인 이야기다. 그런데 그가 불행한 이유는 유태인으로 태어나서도 아니고 미국인이어서도 아니다. 원래 인간이란 다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이 작품의 확장성은 시대와 국경의 경계를 가볍게 지워버린다. 필립 로스는 이 도저한 비관주의를 수다스럽고 신랄하고 야멸차고 유머러스한 문체로 두 권의 책 속에 마음껏 풀어놓는다. 힘과 품격이 대단한 작품이다. 더불어 퓰리처상을 탄 주류 문학작품 속에서 씹, 좆, 보지 같은 비속어를 심심치 않게 접하는 것은 당혹스러우면서 즐거운 일이다. 그건 역설적으로 그 어떤 비속어를 쓰더라도 그 쓰임새가 정확하기만 하면 얼마나 멋진 효과를 가져오는지 보여주는 통쾌한 증거가 되니까. 

아름다운 자연이 펼쳐진 뉴어크 올드림록이 배경이지만 내용은 전혀 목가적이라 할 수 없는데도 굳이 제목을 '미국의 목가'라 붙인 이유는 뭘까. 아마도 페데리코 펠리니가 슬프고 비참한 인생 이야기에 '달콤한 인생'이라는 이름을 지은 것이나 김지운이 그걸 따라한 것이나 아니면 로베르토 베니니가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슬픈 영화를 만든 것처럼 필립 로스도 제목의 패러독스를 통해 독자들에게 잔인한 쾌감을 선사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그리고 이 작품은 제목만 멋진 게 아니다. 소설 곳곳에 격렬하면서도 참신하게 멋진 문장들이 산재해 있다.  

2부 첫머리에 말썽쟁이 딸 메리 때문에 장갑 공장을 찾아온 비키라는 여자에게 스위드가 장갑 생산 공정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은 특히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무두질하는 방법부터 시작해서 가죽 무역 이야기, 그리고 장갑 사업의 역사를 거쳐 재단•재봉 작업에 대한 아주 세세한 공정과 일화까지 장장 18페이지에 걸쳐 숨가쁘게 펼쳐지는 이 스펙터클한 묘사는 소설가가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한 하나의 표본이나 다름없다. 필립 로스는 이 한 장면을 쓰기 위해 가죽과 장갑 생산에 대한 지식을 얼마나 많이 섭렵했을까? 제시가 알콜중독자가 되는 과정을 짧게 묘사한 문장이나 오컷이 전시한 어설픈 추상화를 비평하는 스위드와 그의 아버지 루 레보브의 신랄한 대사들을 읽어보라. 이런 단락 하나만으로 시작해도 당장 훌륭한 단편소설이 하나씩 후딱 튀어나올 것 같다고 당신이 느낀다,에 나는 거액을 걸 용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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