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없습니다)

영화제 특수'라는 말이 있다. 깐느나 베니스영화제 등지에서 큰 상을 타고나면 국내에서 반짝, 하고 흥행이 되었다가 바로 꺼지는 현상을 일컫는 용어다. 그런데 그런 영화들은 대부분 흥행에 크게 성공하지는 못한다. 상을 탄 영화들은 대부분 심각한 주제의식이나 난해한 미장센을 가지고 있어서 일반 관객들에겐 지루하게 느껴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어제 개봉한 깐느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봉준호의 [기생충]도 그런 영화일까? 결론적으로,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가족 구성원 전원이 백수인 집이 있다. 반지하에 살면서 휴대폰 와이파이마저도 윗집 것을 몰래 따서 쓰는 기택과 기우, 기정(이 집은 이상하게도 아버지와 아들 딸이 다 기 자 돌림이다) 가족은 어떻게 남을 속여서라도 돈을 좀 벌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간절한 생각에 온 가족이 똘똘 뭉쳐 모종의 사기극을 꾸민다. 이 과정에서 아들 딸들은 말끝마다 육두문자를 남발하지만 그걸 듣는 부모들은 태연하다. 자기들도 똑같이 숨쉬듯 쌍욕을 입에 달고 사니까. 그러나 박 사장이 사는 집을 공략하기 위해 캐릭터들을 만들고 거기에 맞는 연극 대사 연습을 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슬며시 웃음이 나오다가 결국은 이 사람들이 거사에 성공했으면 하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관객이 주인공들에게 자연스럽게 동화가 되는 것이다.

스토리 누설은 여기까지다. 이 영화는 등장인물을 소개하는 전반부를 제외하면 가는 곳마다 스포일러가 터지는 부비트랩 같은 영화니까. 대신 배우들 얘기를 해보자. 송강호야 새삼 말하면 입만 아픈 '연기의 신'이지만 조여정이 이렇게 연기를 잘 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감독의 조련에 의해 연기력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나 하는 건 [친절한 금자씨]의 이영애 이후 참 오랜만인 것 같다. 그리고 젊은 박소담이 이렇게 연기를 잘 하는 배우였는지 누가 알았단 말인가. 대사를 구사하는 호흡이나 목소리는 물론 순간을 제압하는 카리스마도 장난이 아니다. 최우식, 이정은의 연기도 시종일관 너무나 뛰어나다. 결국 어느 정도 선의 연기를 해냈음에도 불구하고 박 사장 역의 이선균이 가장 처진다.

첫 장면에 등장하는 반지하 창에서 바라 본 1층 거리 풍경은 이 영화의 주제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내기에 손색이 없다. '기생충'이라는 제목이나 해외에서의 반응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이 영화는 계급 문제를 다룬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감독은 켄 로치가 아니고 봉준호다. 어떤 심각한 얘기를 하더라도 유머와 재미를 놓치지 않는 그가 이번이라고 그 미덕을 포기할 리가 없다. 박 사장과 그의 부인 연교에게 접근하는 기태 가족의 속임수들은 아이디어와 능청이 넘치고 계급 간의 경멸을 표현하는 데는 '반지하'보다도 '냄새'가 가장 치욕적이라는 통찰도 놓치지 않는다. 박 사장의 집으로 들어간 후에도 봉준호는 놀라운 구성과 연출로 관객이 딴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는다. '봉테일'이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 디테일에서도 감탄을 금할 수 없다(단 몇 장면밖에 나오지 않는 체육관 씬의 정교함을 보라!). 카메라, 음악 등등 모두 베테랑의 숨결이 느껴지는데 특히 정재일의 클래식 음악은 영화의 품격을 더욱 높여주기에 모자람이 없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나와 함께 옆자리에서 영화를 본 아내는 영화가 너무 슬프다고 하며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는 박사장 가족과 그의 집에 들러붙어 생활을 영위하려는 기택의 가족 중 진짜 기생충은 누구일까, 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면서 사운드가 좋은 극장에서 한 번 더 봐야겠다고 했다. 물론 나도 한 번 더 보고 싶어졌다. 이렇게 분명한 주제의식을 가지고도 유머와 공포와 비극미를 고르게 가지고 있는 영화는 전체 내용을 다 파악하고 보는 재미 또한 각별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기자는 [기생충]의 황금종려사 수상은 한국 영화 백년의 쾌거라고도 하지만 내 생각에 이건 한국 영화 뿐 아니라 세계 영화의 쾌거다. 이런 걸작은 우리나라는 물론 지구촌 어디에서도 쉽게 나온지 못할 테니까.

Posted by 망망디
,



금요일 저녁 갑자기 시간이 애매하게 비어서 혼자 일을 더 할까 하다가 압구정에 있는 극장으로 달려가서 거의 제목만 알고 있던 영화 [가버나움]을 보았다. 사무실에서 예매를 하고 급하게 극장 앞까지 가서 폰을 켜보니 예약이 안 되어 있었다. 휴대폰 결제를 하는 과정에서 승인번호를 넣아야 하는데 깜빡 잊고(다 했다고 생각하고) 그냥 달려온 것이었다. 자동 취소된 예매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보니 상영 시작 5분 전이라 이번엔 취소가 불가능하다는 경고문이 떴다. 취소할 생각이 없으므로 그대로 예매를 진행했다. 사용할 수 있었던 오천 원 할인권도 포기하고 급하게 만이천 원에 예약을 했다.

유럽 어디에선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죄목으로 부모를 고발한 아이가 실제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 영화는 그 이야기에서 착상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레바논 베이루트 빈민가에서 사는 소년의 이야기인데 누군가(소년의 말에 의하면 '개새끼')를 찌른 사건 때문에 열린 재판정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부모들이 지나친 생활고에 시달리느라 아이들 출생신고조차 하지 않은 상태에서 거친 노동과 장사 등에 시달리는 소년. 길거리 캐스팅이었다는 소년의 연기가 너무나 뛰어나고 빈민과 불법체류자들의 비참한 생활상이 거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느낌으로 가슴 미어지게 펼쳐진다.

살인미수 소년범이 되어 수용시설에 있던 소년이 TV생방송에 전화를 해서 자신을 낳은 부모와 세상을 저주하는 장면은 짜릿했다. 그러나 마지막에 소년이 새로 증명서를 얻는 과정에서 짓는 미소나 체포되었던 불법체류자 여성이(그동안 소년이 돌봐주었던) 자신의 아이를 다시 만나는 장면 등은 그동안 켜켜히 쌓아놓은 비극을 너무 가볍게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영화를 다 보고나와 '가버나움'의 뜻에 대해 검색해보니 구약성서에 언급되었던 어떤 도시를 말하는 것 같았으나 현재는 '지옥 같은 곳'이란 의미로도 쓰이고 있었다. 마지막에 이 영화를 계기로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된 소년을 돕는 '가버나움 재단'도 생겼다는 자막이 떴다. 영화가 현실을 바꾸어 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쩌면 이런 건 그야말로 '언 발에 오줌누기'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린 나이에 어른보다 더 뛰어난 연기를 한 소년 배우에 대한 감탄과 아랍지역의 여성 감독이 일구어 낸 묵직한 주제의식이 칸에서 15분간의 기립박수를 이끌어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관객수 십만이 넘었다고 하니 일단 흥행 성공이라 다행이다. 다른 건 몰라도 소년의 리얼한 연기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는 볼 가치가 충분하니까.

어린 나이에 어른보다 더 뛰어난 연기를 한 소년 배우에 대한 감탄과 아랍지역의 여성 감독이 일구어 낸 묵직한 주제의식이 칸에서 15분간의 기립박수를 이끌어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관객수 십만이 넘었다고 하니 일단 흥행 성공이라 다행이다. 다른 건 몰라도 소년의 리얼한 연기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는 볼 가치가 충분하니까.

Posted by 망망디
,



예를 들어, 몇 년 간 죽어라 땅굴을 파서 겨우 탈옥을 하게 된 죄수들이 알고 보니 얼마 후 있을 광복절 특사로 풀려나게 되어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다시 반대편으로 땅굴을 파서 감옥으로 돌아가야 한다. 탈옥이 아니라 '귀옥'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아이러니가 시작되는 것이다. 거의 이십 년 전 김상진 감독이 설경구 차승원 등과 함께 만든 작품 [광복절 특사]가 바로 그런 얘기였다. 이렇게 설정이 독특하거나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스토리 라인이 선명한 영화를 '하이 컨셉 영화'라고 부른다.  이병헌 감독의 흥행작 [극한직업]은 잠복근무를 위해 마약반 형사들이 치킨집을 인수했는데 예상 밖으로 치킨 장사가 너무 잘 되는 바람에  곤란에 빠지는 상황을 컨셉으로 한 작품이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상황이 자연스러운 웃음의 포인트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군더더기 없이 찰진 속사포 대사들이 류승룡이나 이하늬, 진선규처럼 요즘 펄펄 나는 배우들의 입을 통해 관객들을 들었다 놨다 한다. 특히 류승룡은 [내 아내의 모든 것]이나 [7급 공무원]에서 보여줬던 기가 막힌 대사 타이밍 감각을 다시 한 번 유감없이 보여줬고 [범죄도시] 이후 명품 조연으로 떠오른 진선규의 연기는 이제 명불허전이 되었다. 물론 중간에 '수원왕갈비통닭' 프랜차이즈를 둘러 싼 씬에서 등장하는 익숙하면서도 무리한 설정들은 갑지기 영화를 지루하게 만들기도 하고 전체적으로 너무 긴 러닝타임 때문에 감독의 뚝심 부족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어쨌든 끝까지 딴 욕심 부리지 않고 코미디로 끌고 간 점만은 높이 평가하고 싶다. 마지막 류승룡 신하균의 보트 결투씬에서 치킨집 사장이 왜 범죄현장에서 설치냐는 악당의 힐난에 "니가 소상공인들을 몰라서 그러나 본데, 우린 다 목숨 걸고 해!" 같은 류승룡의 대사는 이 영화 시나리오 작가인 문충일의 내공이 엄청나다는 걸 다시금 보여준다. 내 취향의 영화는 아니지만 어쨌든 당대에 흥행하는 영화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인데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몇 겹의 흥행요소를 다 가지고 있는 셈이다.  

아내와 나는 이 영화를 종로3가 피카디리극장에서 보았는데 극장은 넓고 쾌적했으나 날이 추운 관계로 평소 파고다공원 등에 계실 법한 노인분들이 거의 다 로비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게 좀 안쓰러웠고 특히 우리 옆자리에 앉은 초로의 불륜커플(대화내용이 전혀 부부의 그것이 아니었음)은 오십대 후반의 여자분이 영화를 보면서 어찌나 크게 떠드시는지 거의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결국은 우리 부부가 비어있는 앞자리로 옮겼는데도 여자분의 감탄사와 코멘터리가 러닝타임 내내 끊임없이 들려왔다. 여자분은 영화 장면장면마다 감탄사를 넣고 깜짝 놀라고 하는 걸로 남자분에게 어필하려는 것 같았고 남자분의 리액션도 그에 못지 않았다. 만장하신 전국의 불륜남녀 여러분, 그런 거 하시려거든 다음부터는 제발 극장으로 오시지 말고 가까운 비디오방이나 모텔방에 가시길 바란다.  

  




Posted by 망망디
,



영화 [알리타 : 배틀엔젤]을 개봉일에 보았다. 제임스 카메론과 로버트 로드리게즈가 제작과 감독을 맡았고 일본 작가 기시로 유키토의 만화 ‘총몽’이 원작이라는 것 정도만 알고 극장에 들어갔는데, 결론적으로 이 영화 죽인다.   

일단 발전된 CG기술에 입이 쩍 벌어진다. 커다란 눈과 뾰족한 턱을 가진 알리타의 얼굴은 애니인지 사람인지 모호한데 반해 너무나 사실적인 바디가 이상한 불균형을 선사하며 관객을 새로운 시각적 경험으로 초대한다. 사춘기 인간의 뇌를 가진 사이보그 전사 알리타. 제임스 카메론은 이 세계관에 매료되어 영화의 판권을 이십 년 전에 사놓았지만 당시 기술로는 그것을 만족스럽게 재현할 수 없어서 지금까지 기다렸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기다린 보람이 있었고 사이버 펑크 매니아인 로버트 로드리게즈에게 감독을 맡긴 것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이런 영화에서 가장 쾌감이 높은 순간은 주인공이 자신의 능력을 처음으로 깨닫는 순간이다. 이 영화에서도 알리타가 처음으로 길거리 모터볼 시합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때가 가장 멋있고 신난다. 물론 그 이후에 나오는 수많은 액션신도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하지만. 

뛰어난 점만 먼저 얘기하느라 그렇지 이 영화는 CG나 액션만 훌륭한 게 아니다. 전체적인 구성도 쉽고 재미있으며 개연성도 충분하다. 알리타 역을 맡은 로사 살라자르는 물론 크리스토프 월츠, 마허샬라 알리 등 배우들의 연기도 좋다. 반드시 극장에 가서 보시기 바란다. 이런 영화를 극장에서 안 보면 도대체 무슨 영화를 극장에서 본단 말인가. 이번엔 2D로 봤으니 다음엔 아이맥스로 한 번 더 볼 생각이다.  



Posted by 망망디
,



나보다 먼저 이 영화 [일일시호일]을본 아내는 '영화가 슬프지는 않지만 눈물이 날 수 있으니 주의하라'면서 손수건을 챙겨가라고 했다. 그러나 막상 영화를 보는 내겐 눈물보다는 씁쓸한 미소와 엷은 한숨이 더 자주 나왔다. 아내가 어느 지점에서 눈물을 흘렸는지 거의 다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딱히 하고 싶은 게 없는 스무 살의 노리코는 무엇 하나 특별하지도 않고 잘 풀리는 인생도 아니다. 사실 그 나이 때는 대부분이 다 그렇지만 노리코의 마음은 답답하기만 하다. 같이 다도 수업을 듣는 사촌동생 미치코만 해도 취업이든 결혼이든 뭔가 적극적이고 매번 자기보다 앞서 나가는 것만 같은데 그녀는 맨날 제자리 걸음 같다. 그렇다고 매주 가는 다도에 엄청난 애착이나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학창 시절은 쏜살 같이 지나가 버리고 인생은 무엇 하나 깔끔하게 떨어지는 게 없다. 글을 쓰며 살고 싶지만 출판사 취직 시험에 떨어져 프리랜스 작가가 되어야 했고 결혼을 앞둔 남자가 배신한 것을 두 달 전에 알아 파혼을 해야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다도 수업은 꼬박꼬박 참석하는 노리코. 다도를 가르쳐주는 다케다 선생은 계절마다 바뀌는 거실 족자의 글씨들을 읽어주며 그런 노리코의 마음을 조용히 다독여준다. '매일매일이 좋은 날'이라는 뜻의 '日是好日'이 무슨 뜻일까 생각하며 다도를 시작했던 노리코는 여러가지 사건들을 겪으며 어릴 때 부모님과 함께 봤던 페데리코 펠리니의 [길]이라는 영화가 왜 좋은 작품인지 비로소 알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지만 그때는 이미 고마운 아빠를 저세상으로 떠나보낸 후였다. 

다도는 내용보다 형식이 먼저라는데 난  과연 인생의 내용과 형식 중 어느 것을 선택하려고 이러는 것일까. 어느덧 다도를 시작한지 20년이 넘은 노리코는 생각한다. 옛날 사람들이 가장 추운 때를 입춘으로 정한 건 이제 멀지 않아 봄이 온다는 마음을 가지고 싶기 때문 아닐까. 누구는 좀 일찍 도착하고 누구는 조금 늦게 갈 수도 있는 게 인생 아닐까. 다케다 선생도 말한다. 같이 차를 마셔도 다시 이렇게 똑같이 마실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임해주세요. 

그렇다. 자책할 것도 없고 조급해할 것도 없다. 지금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다. 비 오는 날에는 빗소리를 듣고 눈 오는 날엔 내리는 눈을 바라본다. 여름에는 찌는 듯한 삼복더위를, 겨울에는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다도는 그런 삶의 방식을 어려운 이론 없이 '몸으로 익힐 때까지 반복해서' 가르쳐 준다. 그래서 매일매일이 힘든 날이지만 동시에 매일매일이 좋은 날이기도 한 것이다. 비록 느리고 고단해도 지금처럼 날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고마워하고 또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만 있다면 인생은 그럭저럭 살 만하지 않겠는가. 

키키 키린 할머니는 [걸어도 걸어도]나 [만비키 가족] 같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에서부터 워낙 좋아했지만 유작인 이번 영화에서 늘 다도 교실 안에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은 한 장면 한 장면이 욕심 없는 할머니의 유언을 듣는 것만 같았고 그녀의 목소리는 스님의 법문이나 랍비 또는 신부님의 고언을 듣는 것처럼 매번 지혜롭고 다정했다. 

여러 번 우려낸 찻물처럼 따뜻하고 정갈한 영화를 보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전철 안에서 돌아가신 키키 할머니가 내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힘들지요? 괜찮아요. 스님들이 좋은 일에나 나쁜 일에나 '나무관세음보살'을 외우는 것처럼 여러분도 이제 '매일매일이 좋은 날'이라고 외워보세요. 그럼 좀 나아져요."   





Posted by 망망디
,



일요일 저녁에 명동 씨네라이브러리에서 영화 [그린북]을 관람했다. 1960년대 초 피아노 천재 연주자인 '닥터 돈 셜리'가 허풍 세고 주막 센 이탈리아계 백인 '떠벌이' 토니를 운전기사 겸 로드 매니저로 고용해 미국 남부를 돌아다니며 연주 여행을 하면서 티격태격하는 버디 무비다. 지적이고 자존심 강한 흑인과 하층민 백인이라는 듀오는 기존 흑백 관계의 클리셰를 역전시킨다는 점에서 작품의 큰 차별점이지만 그렇다고 메시지 자체가 전복적이거나 문제 의식을 던지는 수준이 그리 높진 않다. 돈 셜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하는 데 비해 점점 셜리에게 교화되는 토니의 모습은 '정치적 올바름'에 따라 시나리오를 정교하게 짜맞춘 혐의조차 느껴진다(실제로 영화 개봉 후 돈 셜리의 가족들이 '거짓말로 가득 찬 영화'라고 비난했다는 기사를 어디선가 읽었다). 탁월하고 유머러스한 연출과 시나리오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흑백 갈등의 역사와 그 해결책을 '선의'라는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찾는 건 너무 순진무구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생각과도 겹친다.  

다만 북미만 돌아도 충분히 존경받을 수 있는 실력과 명성을 갖춘 일급 흑인 연주자 셜리가 굳이 그린북(당시 남부를 여행하는 흑인들이 갈등없이 모텔이나 식당을 이용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정보를 편찬해 놓은 가이드북)을 들고 남부 구석구석을 고집스럽게 다니며 연주 여행을 감행하는 모습은 국회의원, 시장 선거 등에서 번번히 떨어지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았던  '바보 노무현'을 떠올리게 했다. 가끔 이렇게 엉뚱한 지점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나곤 한다. 오늘밤엔 문득 그가 좀 그립다. 

Posted by 망망디
,


사실 망설였다. 올 연말 최고의 기대작 [마약왕]은 개봉하자마자 평론가들의 악평에 시달리더니 CGV어플을 열어보니 어느새 예매 9위로 떨어져 있었다. 평론가들과 관객의 악평이 일치할 경우 영화의 질이 어땠는지는 그동안 경험해봐서 알지 않는가. 그러나 내게는 송강호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다. 어떤 영화에서든 거의 본능적으로 최고의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연기의 신 송강호. 영화가 아무리 후졌더라도 송강호는 살아남았지 않았을까, 하는 미련이 나를 혼자 토요일 오후에 대학로에 있는 극장으로 향하게 했다. 

토요일 오후 5시 15분 영화인데도 극장은 빈 좌석이 많았다. 관객들의 수준도 별로였다. 내 뒤에 앉은 남자 새끼는 자기 여자친구에게 계속 영화와 역사와 사회에 대한 되먹지 않은 인문학 강의를 하고 있었고 여자는 영화를 보는 도중에 전화를 받아 무려 15초 이상 친구에게 안부를 전하는 뻔뻔함을 보여줬으니까. 그러나 의의로(?) 영화가 좋았다. 우려와 달리 설정이나 만듦새가 나쁘지 않았고 송강호는 물론 김대명, 조우진, 조정석 등 출연진의 연기가 고르게 다 좋았다. 우민호 감독 때문에 연기력을 인정 받아 지금은 한국영화에서 안 나오는 작품이 거의 없어 '제 2의 이경영'으로 불린다는 조우진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더 킹]에서 어설픈 경상도 사투리 검사 역을 맡았던 김소진의 연기조차 여기서는 훌륭했다. 약간 안쓰러울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배두나도 대체로 예쁘게 나왔고 '불구경보다 재밌다는 미친년 구경 다 하셨으면 이제 그만 집에 가세요!"라는 대사를 칠 때는 카리스마도 있었다. 

139분에 달하는 긴 러닝타임과 마약, 폭력, 권력 등 심각한 소재, 1970년대 초반이라는 생경한 시대적 배경 등이 젊은 관객들의 발걸음을 막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흥행을 위해 차라리 조우진이 죽던 사우나 씬을 조금 더 잔인하고 자극적으로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까지 해보았다. 마지막 송강호가 자신의 집에서 총질을 하며 경찰과 대처하는 씬은 알 파치노의 열연이 빛났던 브라이언 드 팔머의 [스카페이스]에서 따온 게 명백한데, 송강호가 연기를 너무 잘 해서 볼 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사실 우민호 감독은 전작 [내부자들]에서도 마틴 스콜세지나 프랜시스 포드 코플라 등의 영화를 베끼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선이 굵은 작품은 그 나름의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단순히 소재에 머물지 않고 그 소재를 통해 어떤 '맥락'을 만들어낼 때 비로소 '작가'가 탄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 당하고 80년대가 시작되는 시대적 배경을 보여줌으로써 이 영화도 단순히 마약 영화가 아니라 욕망과 권력과 편법으로 얼룩진 우리의 현대사를 조명하는 필름으로 그 의미망을 넓히는 데 성공했다. 몰론 마지막 장면에 화면을 가득 메우는 송강호 얼굴 위로 '15년 형을 선고받은 그 때문에 그때부터 검찰에 마약반이 신설되었다'라는 조정석의 나레이션이 흐를 때는 파자마를 입고 현관문 밖으로 조간신문을 주우러 나오던 레이 리오타의 모습으로 마지막을 장식했던 마틴 스콜세지의 [좋은 친구들]이 떠오르긴 했지만, 뭐 어떠랴. 이 작품은 그런 사소한 흠집보다는 선 굵고 거대한 그림을 그리려는 의도가 더 돋보이는 역작인데. 흥행 성적과는 상관없이 영화적으로도 한 번은 볼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세간의 평 때문에 놓치고 후회하지 말자. 적극 추천한다.  






Posted by 망망디
,


오늘 [윈드 리버]를 감상함으로써 헐리우드에서 떠오르는 배우 출신의 각본가 테일러 쉐리던의 국경 삼부작을 모두 본 셈이다. [시카리오:암살자들의 도시]와 [로스트 인 더스트] 그리고 [윈드 리버]까지 탁월한 설정과 각본을 보여준 테일러 쉐리던. 오늘 본 영화도 참 좋다. 잔재주 없이 묵직하게 이어지는 진솔한 호흡과 배우들의 무심한 듯한 연기가 조화를 이룬다. 

셋 다 좋은데 굳이 베스트를 꼽으라고 하면 [로스트 인 더스트]다. 농장을 지키기 위해 소량의 은행강도 행각을 연이어 벌이는 형제의 아이디어가 좋았고 황량한 텍사스였지만 라스트 씬이 세 영화 중 그나마 산뜻했다. 피곤해서 나중에 볼까 하다가 꾹 참고 끝까지 봤다. [체실비치에서] 이후 오랜만에 보는 영화였는데 다 보고 나니 뿌듯하다. 캔맥주나 한 잔 마시고 자야겠다.  


Posted by 망망디
,


일요일 오후 CGV압구정 안성기관에서 이언 매큐언 원작의 영화 [체실비치에서]를 관람했다. 서로 사랑하지만 첫날밤 섹스가 생각대로 되지 않아 서로 오해하거나 다른 방안을 내놓거나 하다가 결국 결혼 여섯 시간만에 헤어진 성급한 젊은 남녀의 이야기. 배경이 1962년도 영국이긴 하지만 그래도 첫 섹스 때문에 헤어진다는 게(그것도 딱 한 번 시도해보고) 그리 와닿진 않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인생이라는 건 정말 생각지도 않던 부분에서 어긋날 수도 있다는 반증이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섹스 때문에 헤어진다는 다소 마음에 차지 않는 모티브를 이겨내는 것은 이언 매큐언 작가 본인의 훌륭한 각색과 도미닉 쿡의 고급스러운 연출, 그리고 시얼샤 로넌과 빌리 하울의 탁월한 연기다. 특히 시얼샤 로넌의 대사 처리능력과 카리스마는 대단하다. 촬영과 음악은 또 얼마나 기가 막힌지. 영화를 보고 나와 인터넷을 찾아보니 카메라 감독이 [노예 12년]을 찍은 숀 밥빗이란다. 체실비치라는 독특한 공간에서 엇갈리는 남녀를 롱숏으로 잡아낸 마지막 장면은 너무 정답같으면서도 참으로 멋지다. 

수십 년 후까지 두 사람을 이어준 척 배리의 음악 같은 팝송도 등장하지만 시얼샤 로넌이 바아올린 연주자인만큼 대부분 바흐나 모짜르트 등의 현악이 화면 전체를 휘감는다. 45년이 지난 후 시얼샤 로넌의 쿼텟 은퇴공연 장면은 지금보다 좀 덜 신파적으로 처리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작품 역시 히트한 중편소설을 영화화한 케이스다. 훌륭하게 만들었지만 소설에서만 가능한 섬세한 인물의 내면 묘사까지는 따라가지 못했을 것이다. 나중에 원작 소설을 꼭 한 번 찾아 읽어봐야지, 라고 결심하는 이유다. 


Posted by 망망디
,


'만약 내 아내가 바람이 났는데 그 상대가 내가 쫓아다니던 여자였다면 기분이 어떨까?' 이런 도발적이면서도 발랄한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흥미로운 독립영화를 보았다. 김재식 감독의 [이, 기적인 남자]다. 부산의 한 대학 연극영화과 교수가 과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예쁘장한 조교 여자애를 좀 어떻게 해보려고 쫓아다니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그녀가 자기 아내의 새 애인이더라는 얘기다. 예전에 시트콤 [프랜즈]에서 로스의 전부인이 레즈비언이라서 헤어졌다는 히든 에피소드가 있긴 있었지만 그래도 이런 역전적인 성역할 설정은 도발적이고 새롭다.

영화는 바다가 보이는 부산을 배경으로 해서 그런지 마치 닐 사이먼이 쓴 것처럼 경쾌한 실내극을 가져다가 영화로 만든 느낌이었고 시종일관 카메라를 장악하는 주연배우 박호산의 연기가 빛을 발했다. 그는 이 영화로 작년에 부산독립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영화가 끝나고 GV 시간에 감독은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커밍아웃을 한다면 어떻게 반응할까'라는 착상으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래서 원제도 남자 주인공의 마음 상태를 나타내는 '안개'였는데 마주치는 사람마다 다른 해석을 내리고 또 결정적으로 시나리오 대로 첫 장면에 안개를 만들어 넣을 예산도 부족해 고심한 끝에 지금의 제목으로 바꿨다고 했다. 난 안개보다 '이, 기적인 남자'가 백 배 나은 제목이라 생각한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퀴어영화냐'라는 논란까지 있었지만 박호산이 얘기한대로 이 영화는 한 찌질한 남자의 변화를 보여주는 '성장영화'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1억 원도 안 되는 예산으로 제작했다는 하이컨셉의 영화 [이, 기적인 남자]를 추천한다. 극장에서 만나시길 바란다. 블록버스터든 인디영화든 영화는 극장에서 보는 게 제일 재미있으니까.




Posted by 망망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