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박호산
내가 아직 광고 프로덕션에 다니던 때였다. 화재 예방 공익광고 아이디어로 가져온 카피라이터 박수의 안이 좋았다. 담배꽁초 버리기, 비상구 짐으로 막기, 소방도로에 주차하기 등 대형 화재를 유발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진 <화재>라는 영화가 곧 개봉한다는 '가짜 예고편'이 광고의 테마였는데 마지막에 "영화에는 예고편이 있지만 화재에는 예고편이 없습니다"라는 카피로 뒤통수를 치는 아이디어였다. 우리는 회의실에서 영화 예고편이니까 진짜 영화배우가 출연하면 당선 확률이 더 높아질 것 같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러다 누군가 "실장님, 박호산하고 친하다면서요? 한 번 부탁해 봐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동네 선후배 사이라는 다소 싱거운 인연으로 친하게 된 배우 박호산에게 카톡 메시지를 넣었다. 화재예방 공익광고 아이디어를 냈는데 너를 모델로 해도 되겠냐고. 혹시 우리 시안이 당선되어 광고를 찍게 되면 모델비도 좀 싸게 해 줄 수 있겠냐고. 곧 호산에게서 좋다는 답장이 왔다. 공익광고의 취지에 동감한다는 것이었다. 고마운 일이었다. [슬기로운 감빵생활]이라는 드라마로 한창 잘 나가던 시절인데도 선뜻 내 부탁을 들어주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일이 잘 되려고 그랬는지 내가 프리젠터로 나서 설명한 시안은 그 어느 때보다 코바코 심사위원들에게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고 결국 당선작으로 결정이 되어버렸다. 나는 퇴근을 하는 길에 기쁜 마음으로 호산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호산은 너무 잘됐다고 하면서 방금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에 캐스팅되었다는 소식이 왔다는 말을 했다. 경사가 겹친 것이다. 그런데 호산은 "오늘은 너무 좋은 날이지만 너무 미안한 날이기도 해서 마음 놓고 기뻐할 수가 없어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호산이 맡은 역은 원래 다른 배우가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촬영 직전에 '미투 논란'이 터지는 바람에 캐스팅이 전격 취소된 것이었다. 선배에게 생긴 불미스러운 일을 딛고 들어가게 된 자리라 너무 면목이 없다는 호산의 말에 나도 더 이상 흥분할 수는 없었다.
[나의 아저씨]에서 이선균과 송새벽의 형으로 나온 박호산은 어리숙하면서도 인간적인 면을 가진 '박상훈' 역에 딱 맞는 배우였다. 박호산은 정말 '후계동'에서 조기축구를 할 것처럼 생겼고 사업 실패로 이혼을 당하고 '형제청소방'을 운영할 것 같은 표정의 남자가 되었고 저녁이면 동네 술집 '정희네'에 가서 앉아 있을 것만 같았다. 박호산은 주인공이 아니면서도 드라마 안에서 펄펄 날았다. 촬영 초기에 아이유와 악수를 했다고 인스타그램에 자랑을 하던 박호산은 드라마가 끝난 뒤엔 어느덧 같은 같은 연예인들이 악수를 하고 싶어 하는 배우가 되었다.
2
아이유
평론가 신형철은 자신의 책 [느낌의 공동체] 서문에 “삶의 어느 법정에서든 김민정 시인을 위해 증언할 것이다”라는 글을 썼다. 자신의 책을 만들어준 편집자이자 문학적 동료 김민정에게 할 수 있는 최상의 찬사가 아닐까 한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 나오는 가수 아이유, 아니 연기자 이지은을 지켜본 사람들도 아마 이와 비슷한 심정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우리 집에서는 오래된 농담이 있다. "아이유가 싸가지가 없다고? 없으면 어때? 저렇게 노래를 잘하는데!" 물론 그 '싸가지 없음'이라는 게 연예인 특유의 방어기제 덕분에 생긴 아주 편파적인 평판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이유의 광팬인 아내는 아마도 이제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아이유가 무슨 잘못을 해도 나는 아이유 편이 될 거야. 저렇게 연기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는데, 어떻게 착한 것까지 바라?"
비록 정당방위이긴 하지만 살인자였다는 과거를 가지고 있고, 자신에게 남은 것은 병든 할머니와 부담스러운 사채빚뿐인 스물한 살의 여자 아이 이지안. 그녀는 건설회사 계약직 사원으로 일하며 번 돈을 모두 사채업자에게 바치느라 저녁이면 다른 아르바이트를 또 뛰어야 할 정도로 퍽퍽한 인생을 살아간다. 입사지원서 특기란에 '달리기'라고 쓸 정도로 내세울 것 하나 없는 계약직이기에 다른 직원들과 말을 섞지도 않고 같이 밥을 먹지도 않는다. 그런데 어떤 사건을 계기로 박동훈이 그녀를 알아보고 손을 내민다. 그리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잘해준다. 평생 처음으로 사심 없는 친절과 관심을 받게 된 이지안은 어리둥절하다. 빚 갚을 기회를 잡느라 박동훈에게 도청장치를 심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데도 그에겐 불온한 기운이 감지되지 않는다. 대신 무능한 형제들 틈에서 멀쩡한 척해야 하고 아내에게 배신당하고 학교 후배인 사장 측으로부터 누명을 써 축출당할 위기에 놓인 피곤한 사십 대의 모습이 있을 뿐이다.
드라마를 보면서 많이 울었는데 대부분 이지안 때문이었다. 그녀가 "밥 좀 사주죠. 배고픈데."라고 박동훈에게 손을 내밀 때, 자신이 한 짓이 들통난 걸 다 알고 미안하다며 울부짖을 때, 인사평가회에 증인으로 나가서 사람 좋아하는 걸 왜 비웃냐고 따질 때 나는 하릴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이유는 열연을 하지 않음으로써 열연을 하는 아이러니를 완성했는데, 이는 그녀가 드라마의 '맥락'을 이해하지 않으면 부라능한 연기를 펼쳤기 때문이었다. 그냥 대사만 달달 외워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인간의 쓸쓸함에 대하여, 따뜻함이 주는 에너지에 대해여, 인생은 결과가 아닌 과정이라는 것을 그녀는 어떻게 한 방에 다 알았을까 궁금했지만 결국 두 손을 들고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녀는 알고 있는 게 분명했으니까. 그렇지 않고는 그런 억양, 눈빛, 몸짓이 나올 수 없으니까. 노래 잘하고 곡도 잘 만들던 가수 아이유는 그렇게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를 통해 연기자가 되었다.
3
나
TV의 예고편은 물론 동네 사는 배우 박호산을 통해서도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가 방영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작가가 [또! 오해영]을 쓴 사람이라 볼 만할 것이라는 얘기도 들었다. 그런데 회사가 너무 바빴다. 허구한 날 야근을 하느라 TV드라마를 챙길 시간이 없었는데도 어쩌다 일찍 들어오는 날이면 아내와 함께 드라마를 지켜보다가 가슴이 철렁하는 대사들이 나올 때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박호산이 청소하다가 무릎 꿇는 장면에서 울었고 정희가 유라에게 '불행 배틀'엔 자신이 있다고 하며 술잔을 높이 들 때도 눈물이 났고 이지안이 박동훈에게 "아저씨가 정말로 행복했으면 했어요."라고 흐느낄 때도 같이 울었다. 그 중에도 아이유의 무미건조한 대사는 백미였다. 지금도 유튜브에서 '나의 아저씨 아이유 사이다 대사들'이라 검색하면 그녀가 얼마나 극의 흐름을 잘 파악하고 연기를 하는지 알 수 있다. 나는 존댓말을 잘 하지 않는 이지안이 마치 혼잣말로 묻듯 "다들 그렇지 않나...?" 식으로 상대방에게 던지는 대사 처리가 너무 좋았다. 이지안이 가진 총기와 비뚤어짐과 두려움이 동시다발로 느껴지는 이 대사 구사 방식은 자신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던 여직원이 "너 짤리고 싶냐?"라고 묻자 회의실 의자에 등을 기대며 "같이 짤리자."고 일갈하고는 여직원의 사내 불륜 사실을 들이미는 장면에서 절정을 이룬다.
드라마 마지막 회가 방영되는 날 배탈이 나서 저녁도 못 먹고 들어온 나를 보고 아내는 "나의 아저씨 마지막 회는 소주를 한 잔 하며 봐야 하는데 남편이 저 모양이니. 아이고, 내가 못 산다." 라면서 화를 냈다. 그렇게 나의 아저씨가 끝나고 여전힌 나날들이 계속되던 어느 날 나는 대책 없이 퇴직을 했고, 제주도에 내려가서 한 달을 혼자 살아보기도 했고, 느닷없이 한옥집을 사서 고치고 이사하느라 몇 달은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가 되었다. 한옥으로 이사를 와 집안 정리를 하고 있던 때쯤 스트리밍 서비스 넷플릭스에 '나의 아저씨'가 올라와 뒤늦게 정주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가끔 보면서도 가슴이 뭉클뭉클했는데 이걸 처음부터 다시 보면 또 얼마나 울어야 하나, 하고 망설이고 있다가 이사 비용 때문에 잠을 못 이루고 심란해하던 어느 날 밤에 '나의 아저씨 정주행'을 시작했다. 처음엔 시큰둥하던 아내도 나를 따라 밤을 새 가면서 드라마에 몰두했다. 우리는 넋을 읽고 TV를 들여다보며 웃다가 한숨을 쉬다가 눈물을 글썽이다가 서로를 쳐다보고 멋쩍게 웃었다.
우리가 [나의 아저씨]를 보면서 눈물을 흘린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이 사람을 좋아한다는 당연한 일의 소중함을 너무 오래 잊고 있었는데 박동훈과 이지안이 그걸 일깨워주었기 때문 아닐까. 사랑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사랑은 불꽃처럼 타오르다가도 금방 식을 수도 있지만 좋아하는 것은 누군가를 측은지심으로 바라보고 그 사람의 마음을 가슴속에 묻어둔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묻어둔 사람이나 누군가의 가슴에 묻힌 경험이 잇는 사람은 결코 약하지 않다. 사랑이 지나간 자리엔 황량한 바람과 먼지가 남지만 좋아하는 마음은 흐뭇한 기억으로 남아 남은 시간을 살아가게 하는 에너지가 된다. "인생도 내력과 외력의 싸움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세면 버티는 거야."라는 박동훈의 대사는 이지안이 아니라 자신에게 했던 말인지도 모른다. 인생의 내력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그건 혼자가 아니라 자신을 좋아하는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 이 드라마는 인생의 의미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셸부르의 우산] 이후로 가장 쿨했던 마지막 동훈과 지안의 만남은 이지안 같은 애도 잘 살아가는 세상이 제대로 된 세상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 같아서 또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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