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호산 

내가 아직 광고 프로덕션에 다니던 때였다. 화재 예방 공익광고 아이디어로 가져온 카피라이터 박수의 안이 좋았다. 담배꽁초 버리기, 비상구 짐으로 막기, 소방도로에 주차하기 등 대형 화재를 유발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진 <화재>라는 영화가 곧 개봉한다는 '가짜 예고편'이 광고의 테마였는데 마지막에 "영화에는 예고편이 있지만  화재에는 예고편이 없습니다"라는 카피로 뒤통수를 치는 아이디어였다. 우리는 회의실에서 영화 예고편이니까 진짜 영화배우가 출연하면 당선 확률이 더 높아질 것 같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러다 누군가 "실장님, 박호산하고 친하다면서요? 한 번 부탁해 봐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동네 선후배 사이라는 다소 싱거운 인연으로 친하게 된 배우 박호산에게 카톡 메시지를 넣었다. 화재예방 공익광고 아이디어를 냈는데 너를 모델로 해도 되겠냐고. 혹시 우리 시안이 당선되어 광고를 찍게 되면 모델비도 좀 싸게 해 줄 수 있겠냐고. 곧 호산에게서 좋다는 답장이 왔다. 공익광고의 취지에 동감한다는 것이었다. 고마운 일이었다. [슬기로운 감빵생활]이라는 드라마로 한창 잘 나가던 시절인데도 선뜻 내 부탁을 들어주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일이 잘 되려고 그랬는지 내가 프리젠터로 나서 설명한 시안은 그 어느 때보다 코바코 심사위원들에게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고 결국 당선작으로 결정이 되어버렸다. 나는 퇴근을 하는 길에 기쁜 마음으로 호산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호산은 너무 잘됐다고 하면서 방금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에 캐스팅되었다는 소식이 왔다는 말을 했다. 경사가 겹친 것이다. 그런데 호산은 "오늘은 너무 좋은 날이지만 너무 미안한 날이기도 해서 마음 놓고 기뻐할 수가 없어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호산이 맡은 역은 원래 다른 배우가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촬영 직전에 '미투 논란'이 터지는 바람에 캐스팅이 전격 취소된 것이었다. 선배에게 생긴 불미스러운 일을 딛고 들어가게 된 자리라 너무 면목이 없다는 호산의 말에 나도 더 이상 흥분할 수는 없었다.  

[나의 아저씨]에서 이선균과 송새벽의 형으로 나온 박호산은 어리숙하면서도 인간적인 면을 가진 '박상훈' 역에 딱 맞는 배우였다. 박호산은 정말 '후계동'에서 조기축구를 할 것처럼 생겼고 사업 실패로 이혼을 당하고 '형제청소방'을 운영할 것 같은 표정의 남자가 되었고 저녁이면 동네 술집 '정희네'에 가서 앉아 있을 것만 같았다. 박호산은 주인공이 아니면서도 드라마 안에서 펄펄 날았다. 촬영 초기에 아이유와 악수를 했다고 인스타그램에 자랑을 하던 박호산은 드라마가 끝난 뒤엔 어느덧 같은 같은 연예인들이 악수를 하고 싶어 하는 배우가 되었다. 

박호산은 주인공이 아니면서도 드라마 안에서 펄펄 날았다.

아이유 

평론가 신형철은 자신의 책 [느낌의 공동체] 서문에 “삶의 어느 법정에서든 김민정 시인을 위해 증언할 것이다”라는 글을 썼다. 자신의 책을 만들어준 편집자이자 문학적 동료 김민정에게 할 수 있는 최상의 찬사가 아닐까 한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 나오는 가수 아이유, 아니 연기자 이지은을 지켜본 사람들도 아마 이와 비슷한 심정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우리 집에서는 오래된 농담이 있다. "아이유가 싸가지가 없다고? 없으면 어때? 저렇게 노래를 잘하는데!" 물론 그 '싸가지 없음'이라는 게 연예인 특유의 방어기제 덕분에 생긴 아주 편파적인 평판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이유의 광팬인 아내는 아마도 이제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아이유가 무슨 잘못을 해도 나는 아이유 편이 될 거야. 저렇게 연기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는데, 어떻게 착한 것까지 바라?" 

비록 정당방위이긴 하지만 살인자였다는 과거를 가지고 있고, 자신에게 남은 것은 병든 할머니와 부담스러운 사채빚뿐인 스물한 살의 여자 아이 이지안. 그녀는 건설회사 계약직 사원으로 일하며 번 돈을 모두 사채업자에게 바치느라 저녁이면 다른 아르바이트를 또 뛰어야 할 정도로 퍽퍽한 인생을 살아간다. 입사지원서 특기란에 '달리기'라고 쓸 정도로 내세울 것 하나 없는 계약직이기에 다른 직원들과 말을 섞지도 않고 같이 밥을 먹지도 않는다. 그런데 어떤 사건을 계기로 박동훈이 그녀를 알아보고 손을 내민다. 그리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잘해준다. 평생 처음으로 사심 없는 친절과 관심을 받게 된 이지안은 어리둥절하다. 빚 갚을 기회를 잡느라 박동훈에게 도청장치를 심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데도 그에겐 불온한 기운이 감지되지 않는다. 대신 무능한 형제들 틈에서 멀쩡한 척해야 하고 아내에게 배신당하고 학교 후배인 사장 측으로부터 누명을 써 축출당할 위기에 놓인 피곤한 사십 대의 모습이 있을 뿐이다. 

드라마를 보면서 많이 울었는데 대부분 이지안 때문이었다. 그녀가 "밥 좀 사주죠. 배고픈데."라고 박동훈에게 손을 내밀 때, 자신이 한 짓이 들통난 걸 다 알고 미안하다며 울부짖을 때, 인사평가회에 증인으로 나가서 사람 좋아하는 걸 왜 비웃냐고 따질 때 나는 하릴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이유는 열연을 하지 않음으로써 열연을 하는 아이러니를 완성했는데, 이는 그녀가 드라마의 '맥락'을 이해하지 않으면 부라능한 연기를 펼쳤기 때문이었다. 그냥 대사만 달달 외워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인간의 쓸쓸함에 대하여, 따뜻함이 주는 에너지에 대해여, 인생은 결과가 아닌 과정이라는 것을 그녀는 어떻게 한 방에 다 알았을까 궁금했지만 결국 두 손을 들고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녀는 알고 있는 게 분명했으니까. 그렇지 않고는 그런 억양, 눈빛, 몸짓이 나올 수 없으니까. 노래 잘하고 곡도 잘 만들던 가수 아이유는 그렇게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를 통해 연기자가 되었다. 

아이유는 열연을 하지 않음으로써 열연을 하는 아이러니를 완성했다.

3

나 

TV의 예고편은 물론 동네 사는 배우 박호산을 통해서도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가 방영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작가가 [또! 오해영]을 쓴 사람이라 볼 만할 것이라는 얘기도 들었다. 그런데 회사가 너무 바빴다. 허구한 날 야근을 하느라 TV드라마를 챙길 시간이 없었는데도 어쩌다 일찍 들어오는 날이면 아내와 함께 드라마를 지켜보다가 가슴이 철렁하는 대사들이 나올 때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박호산이 청소하다가 무릎 꿇는 장면에서 울었고 정희가 유라에게 '불행 배틀'엔 자신이 있다고 하며 술잔을 높이 들 때도 눈물이 났고 이지안이 박동훈에게 "아저씨가 정말로 행복했으면 했어요."라고 흐느낄 때도 같이 울었다. 그 중에도 아이유의 무미건조한 대사는 백미였다. 지금도 유튜브에서 '나의 아저씨 아이유 사이다 대사들'이라 검색하면 그녀가 얼마나 극의 흐름을 잘 파악하고 연기를 하는지 알 수 있다. 나는 존댓말을 잘 하지 않는 이지안이 마치 혼잣말로 묻듯 "다들 그렇지 않나...?" 식으로 상대방에게 던지는 대사 처리가 너무 좋았다. 이지안이 가진 총기와 비뚤어짐과 두려움이 동시다발로 느껴지는 이 대사 구사 방식은 자신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던 여직원이 "너 짤리고 싶냐?"라고 묻자 회의실 의자에 등을 기대며 "같이 짤리자."고 일갈하고는 여직원의 사내 불륜 사실을 들이미는 장면에서 절정을 이룬다. 

드라마 마지막 회가 방영되는 날 배탈이 나서 저녁도 못 먹고 들어온 나를 보고 아내는 "나의 아저씨 마지막 회는 소주를 한 잔 하며 봐야 하는데 남편이 저 모양이니. 아이고, 내가 못 산다." 라면서 화를 냈다. 그렇게 나의 아저씨가 끝나고 여전힌 나날들이 계속되던 어느 날 나는 대책 없이 퇴직을 했고, 제주도에 내려가서 한 달을 혼자 살아보기도 했고, 느닷없이 한옥집을 사서 고치고 이사하느라 몇 달은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가 되었다. 한옥으로 이사를 와 집안 정리를 하고 있던 때쯤 스트리밍 서비스 넷플릭스에 '나의 아저씨'가 올라와 뒤늦게 정주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가끔 보면서도 가슴이 뭉클뭉클했는데 이걸 처음부터 다시 보면 또 얼마나 울어야 하나, 하고 망설이고 있다가 이사 비용 때문에 잠을 못 이루고 심란해하던 어느 날 밤에 '나의 아저씨 정주행'을 시작했다. 처음엔 시큰둥하던 아내도 나를 따라 밤을 새 가면서 드라마에 몰두했다. 우리는 넋을 읽고 TV를 들여다보며 웃다가 한숨을 쉬다가 눈물을 글썽이다가 서로를 쳐다보고 멋쩍게 웃었다. 

우리가 [나의 아저씨]를 보면서 눈물을 흘린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이 사람을 좋아한다는 당연한 일의 소중함을 너무 오래 잊고 있었는데 박동훈과 이지안이 그걸 일깨워주었기 때문 아닐까. 사랑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사랑은 불꽃처럼 타오르다가도 금방 식을 수도 있지만 좋아하는 것은 누군가를 측은지심으로 바라보고 그 사람의 마음을 가슴속에 묻어둔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묻어둔 사람이나 누군가의 가슴에 묻힌 경험이 잇는 사람은 결코 약하지 않다. 사랑이 지나간 자리엔 황량한 바람과 먼지가 남지만 좋아하는 마음은 흐뭇한 기억으로 남아 남은 시간을 살아가게 하는 에너지가 된다. "인생도 내력과 외력의 싸움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세면 버티는 거야."라는 박동훈의 대사는 이지안이 아니라 자신에게 했던 말인지도 모른다. 인생의 내력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그건 혼자가 아니라 자신을 좋아하는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 이 드라마는 인생의 의미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셸부르의 우산] 이후로 가장 쿨했던 마지막 동훈과 지안의 만남은 이지안 같은 애도 잘 살아가는 세상이 제대로 된 세상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 같아서 또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 드라마는 인생의 의미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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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없습니다)

영화제 특수'라는 말이 있다. 깐느나 베니스영화제 등지에서 큰 상을 타고나면 국내에서 반짝, 하고 흥행이 되었다가 바로 꺼지는 현상을 일컫는 용어다. 그런데 그런 영화들은 대부분 흥행에 크게 성공하지는 못한다. 상을 탄 영화들은 대부분 심각한 주제의식이나 난해한 미장센을 가지고 있어서 일반 관객들에겐 지루하게 느껴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어제 개봉한 깐느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봉준호의 [기생충]도 그런 영화일까? 결론적으로,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가족 구성원 전원이 백수인 집이 있다. 반지하에 살면서 휴대폰 와이파이마저도 윗집 것을 몰래 따서 쓰는 기택과 기우, 기정(이 집은 이상하게도 아버지와 아들 딸이 다 기 자 돌림이다) 가족은 어떻게 남을 속여서라도 돈을 좀 벌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간절한 생각에 온 가족이 똘똘 뭉쳐 모종의 사기극을 꾸민다. 이 과정에서 아들 딸들은 말끝마다 육두문자를 남발하지만 그걸 듣는 부모들은 태연하다. 자기들도 똑같이 숨쉬듯 쌍욕을 입에 달고 사니까. 그러나 박 사장이 사는 집을 공략하기 위해 캐릭터들을 만들고 거기에 맞는 연극 대사 연습을 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슬며시 웃음이 나오다가 결국은 이 사람들이 거사에 성공했으면 하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관객이 주인공들에게 자연스럽게 동화가 되는 것이다.

스토리 누설은 여기까지다. 이 영화는 등장인물을 소개하는 전반부를 제외하면 가는 곳마다 스포일러가 터지는 부비트랩 같은 영화니까. 대신 배우들 얘기를 해보자. 송강호야 새삼 말하면 입만 아픈 '연기의 신'이지만 조여정이 이렇게 연기를 잘 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감독의 조련에 의해 연기력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나 하는 건 [친절한 금자씨]의 이영애 이후 참 오랜만인 것 같다. 그리고 젊은 박소담이 이렇게 연기를 잘 하는 배우였는지 누가 알았단 말인가. 대사를 구사하는 호흡이나 목소리는 물론 순간을 제압하는 카리스마도 장난이 아니다. 최우식, 이정은의 연기도 시종일관 너무나 뛰어나다. 결국 어느 정도 선의 연기를 해냈음에도 불구하고 박 사장 역의 이선균이 가장 처진다.

첫 장면에 등장하는 반지하 창에서 바라 본 1층 거리 풍경은 이 영화의 주제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내기에 손색이 없다. '기생충'이라는 제목이나 해외에서의 반응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이 영화는 계급 문제를 다룬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감독은 켄 로치가 아니고 봉준호다. 어떤 심각한 얘기를 하더라도 유머와 재미를 놓치지 않는 그가 이번이라고 그 미덕을 포기할 리가 없다. 박 사장과 그의 부인 연교에게 접근하는 기태 가족의 속임수들은 아이디어와 능청이 넘치고 계급 간의 경멸을 표현하는 데는 '반지하'보다도 '냄새'가 가장 치욕적이라는 통찰도 놓치지 않는다. 박 사장의 집으로 들어간 후에도 봉준호는 놀라운 구성과 연출로 관객이 딴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는다. '봉테일'이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 디테일에서도 감탄을 금할 수 없다(단 몇 장면밖에 나오지 않는 체육관 씬의 정교함을 보라!). 카메라, 음악 등등 모두 베테랑의 숨결이 느껴지는데 특히 정재일의 클래식 음악은 영화의 품격을 더욱 높여주기에 모자람이 없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나와 함께 옆자리에서 영화를 본 아내는 영화가 너무 슬프다고 하며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는 박사장 가족과 그의 집에 들러붙어 생활을 영위하려는 기택의 가족 중 진짜 기생충은 누구일까, 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면서 사운드가 좋은 극장에서 한 번 더 봐야겠다고 했다. 물론 나도 한 번 더 보고 싶어졌다. 이렇게 분명한 주제의식을 가지고도 유머와 공포와 비극미를 고르게 가지고 있는 영화는 전체 내용을 다 파악하고 보는 재미 또한 각별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기자는 [기생충]의 황금종려사 수상은 한국 영화 백년의 쾌거라고도 하지만 내 생각에 이건 한국 영화 뿐 아니라 세계 영화의 쾌거다. 이런 걸작은 우리나라는 물론 지구촌 어디에서도 쉽게 나온지 못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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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저녁 갑자기 시간이 애매하게 비어서 혼자 일을 더 할까 하다가 압구정에 있는 극장으로 달려가서 거의 제목만 알고 있던 영화 [가버나움]을 보았다. 사무실에서 예매를 하고 급하게 극장 앞까지 가서 폰을 켜보니 예약이 안 되어 있었다. 휴대폰 결제를 하는 과정에서 승인번호를 넣아야 하는데 깜빡 잊고(다 했다고 생각하고) 그냥 달려온 것이었다. 자동 취소된 예매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보니 상영 시작 5분 전이라 이번엔 취소가 불가능하다는 경고문이 떴다. 취소할 생각이 없으므로 그대로 예매를 진행했다. 사용할 수 있었던 오천 원 할인권도 포기하고 급하게 만이천 원에 예약을 했다.

유럽 어디에선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죄목으로 부모를 고발한 아이가 실제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 영화는 그 이야기에서 착상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레바논 베이루트 빈민가에서 사는 소년의 이야기인데 누군가(소년의 말에 의하면 '개새끼')를 찌른 사건 때문에 열린 재판정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부모들이 지나친 생활고에 시달리느라 아이들 출생신고조차 하지 않은 상태에서 거친 노동과 장사 등에 시달리는 소년. 길거리 캐스팅이었다는 소년의 연기가 너무나 뛰어나고 빈민과 불법체류자들의 비참한 생활상이 거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느낌으로 가슴 미어지게 펼쳐진다.

살인미수 소년범이 되어 수용시설에 있던 소년이 TV생방송에 전화를 해서 자신을 낳은 부모와 세상을 저주하는 장면은 짜릿했다. 그러나 마지막에 소년이 새로 증명서를 얻는 과정에서 짓는 미소나 체포되었던 불법체류자 여성이(그동안 소년이 돌봐주었던) 자신의 아이를 다시 만나는 장면 등은 그동안 켜켜히 쌓아놓은 비극을 너무 가볍게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영화를 다 보고나와 '가버나움'의 뜻에 대해 검색해보니 구약성서에 언급되었던 어떤 도시를 말하는 것 같았으나 현재는 '지옥 같은 곳'이란 의미로도 쓰이고 있었다. 마지막에 이 영화를 계기로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된 소년을 돕는 '가버나움 재단'도 생겼다는 자막이 떴다. 영화가 현실을 바꾸어 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쩌면 이런 건 그야말로 '언 발에 오줌누기'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린 나이에 어른보다 더 뛰어난 연기를 한 소년 배우에 대한 감탄과 아랍지역의 여성 감독이 일구어 낸 묵직한 주제의식이 칸에서 15분간의 기립박수를 이끌어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관객수 십만이 넘었다고 하니 일단 흥행 성공이라 다행이다. 다른 건 몰라도 소년의 리얼한 연기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는 볼 가치가 충분하니까.

어린 나이에 어른보다 더 뛰어난 연기를 한 소년 배우에 대한 감탄과 아랍지역의 여성 감독이 일구어 낸 묵직한 주제의식이 칸에서 15분간의 기립박수를 이끌어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관객수 십만이 넘었다고 하니 일단 흥행 성공이라 다행이다. 다른 건 몰라도 소년의 리얼한 연기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는 볼 가치가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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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쪽을 닮아 길쭉길쭉한 몸매와 금발의 잘 생긴 얼굴을 물려 받은 사내로 태어나 학교는 물론 뉴어크 전 지역을 대표하는 스포츠 스타였다가 해병대 제대 후엔 장갑 비즈니스계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또 미스 뉴저지 출신 미녀의 남편으로 모범적인 삶을 살아 온 유태계 미국인 스위드 레보브. 거의 완벽에 가까운 스위드의 스펙을 보면서 우리는 '저런 놈에게 무슨 걱정거리가 있겠나'라고 투덜대고 싶어진다. 하지만 하나뿐인 외동딸 메리가 월남전에 반대한다면서 엉뚱하게 마을 우체국이 딸린 작은 점방에 사제폭탄을 설치해 사람을 죽임으로써 도망자 신세가 된 사건을 시작으로 그의 인생도 함께 작살이 난다. 예쁘고 영특하지만 말을 심하게 더듬는 게 유일한 걱정거리였던 십대 소녀가 어쩌다가 그런 괴물이 되어 버렸을까. 

어려서부터 밝고 곧은 길만 걸어왔던 스위드 레보브의 참모습은 고등학교 졸업 50주년 기념파티에서 만난 후배이자 작가인 네이선 주커먼에 의해 서서히 그 모습이 포착되기 시작한다. 딸 때문에 흔들렸던 그의 정체성은 아버지와 옛 친구들, 그리고 이웃에 사는 오컷 부부까지 함께 모인 올드림록 홈파티 날 저녁에 아내와 건축가 오컷이 자기집 부엌에서 남몰래 섹스를 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결정타를 맞는다. 나는 이 장면을 읽으며 '이제 스위드도 갈 데까지 갔군'이라 생각하고 그가 오컷이나 아내인 돈이나 둘 중 하나를  총으로 쏴 죽이며 소설이 끝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작가는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이 '시모어 스위드 레보브'라는 멋진 사내의 비극을 강조한다. 이후 계속된 만찬 자리에서는 당시 미국 사회를 흔들었던 린다 러브레이스 주연의 '목구멍 깊숙히(Deep throat)'라는 포르노 영화에 대한 지루한 세대 토론이 있을 뿐이고, 결국 스위드 대신 술주정뱅이이자 오컷의 부인인 제시가 칼로 스위드의 아버지를 죽일 뻔한 에피소드로 허무하게 끝을 맺는다. 

[미국의 목가]는 가장 완벽할 뻔했던 사내가 가장 불행한 남자로 전락하는 비극적인 이야기다. 그런데 그가 불행한 이유는 유태인으로 태어나서도 아니고 미국인이어서도 아니다. 원래 인간이란 다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이 작품의 확장성은 시대와 국경의 경계를 가볍게 지워버린다. 필립 로스는 이 도저한 비관주의를 수다스럽고 신랄하고 야멸차고 유머러스한 문체로 두 권의 책 속에 마음껏 풀어놓는다. 힘과 품격이 대단한 작품이다. 더불어 퓰리처상을 탄 주류 문학작품 속에서 씹, 좆, 보지 같은 비속어를 심심치 않게 접하는 것은 당혹스러우면서 즐거운 일이다. 그건 역설적으로 그 어떤 비속어를 쓰더라도 그 쓰임새가 정확하기만 하면 얼마나 멋진 효과를 가져오는지 보여주는 통쾌한 증거가 되니까. 

아름다운 자연이 펼쳐진 뉴어크 올드림록이 배경이지만 내용은 전혀 목가적이라 할 수 없는데도 굳이 제목을 '미국의 목가'라 붙인 이유는 뭘까. 아마도 페데리코 펠리니가 슬프고 비참한 인생 이야기에 '달콤한 인생'이라는 이름을 지은 것이나 김지운이 그걸 따라한 것이나 아니면 로베르토 베니니가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슬픈 영화를 만든 것처럼 필립 로스도 제목의 패러독스를 통해 독자들에게 잔인한 쾌감을 선사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그리고 이 작품은 제목만 멋진 게 아니다. 소설 곳곳에 격렬하면서도 참신하게 멋진 문장들이 산재해 있다.  

2부 첫머리에 말썽쟁이 딸 메리 때문에 장갑 공장을 찾아온 비키라는 여자에게 스위드가 장갑 생산 공정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은 특히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무두질하는 방법부터 시작해서 가죽 무역 이야기, 그리고 장갑 사업의 역사를 거쳐 재단•재봉 작업에 대한 아주 세세한 공정과 일화까지 장장 18페이지에 걸쳐 숨가쁘게 펼쳐지는 이 스펙터클한 묘사는 소설가가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한 하나의 표본이나 다름없다. 필립 로스는 이 한 장면을 쓰기 위해 가죽과 장갑 생산에 대한 지식을 얼마나 많이 섭렵했을까? 제시가 알콜중독자가 되는 과정을 짧게 묘사한 문장이나 오컷이 전시한 어설픈 추상화를 비평하는 스위드와 그의 아버지 루 레보브의 신랄한 대사들을 읽어보라. 이런 단락 하나만으로 시작해도 당장 훌륭한 단편소설이 하나씩 후딱 튀어나올 것 같다고 당신이 느낀다,에 나는 거액을 걸 용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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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미 감독의 [잘돼가? 무엇이든]을 어제 오늘 휘리릭 다 읽었다. 이 에세이는 문화웹진 <채널예스>에 연재했던 글과 <씨네21>에 기고했던 글, 그리고 10여 년 전부터 현재까지 썼던 짤막한 일기 등을 발췌해서 꾸민 책이다.

제목인 '잘돼가? 무엇이든'은 이경미 감독이 처음 만든 단편영화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경미 감독이 졸업을 하고 '성공 신화를 이룬 거대 중소기업'에 다니던 시절의 얘기를 각색해서 만든 단편인데 각종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는 등 대단한 히트를 기록했었다. 아마 이 작품 때문에 박찬욱 감독과 공동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영화 감독이니까 당연히 영화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첫 챕터의 제목이 '실연당하는 게 끔찍할까, 시나리오 쓰는 게 더 끔찍할까?'일 정도로 영화 만드는 고충은 사사건건 크다.  그런데 이경미 감독 글의 미덕은 자신의 이야기를 재료로 자조적인 유머를 잘 만들어 낸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소심하거나 이기적인 성격이 많이 드러나고 연애나 사회생활, 영화, 친구 관계 등 각종 분야에서 발생했던 다양한 실패담들이 자주 등장한다.

우선 아름답고 총명한 여성 감독이 쓴 글답지 않게 똥이나 변비 같은 더러운 얘기가 많이 나오고 고학력 지식인의 처지에 어울리지 않게 점이나 운세를 보는 장면도 자주 나온다. '인생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가 이 책의 주제인 모양인데 [미쓰 홍당무]와 [비밀은 없다]를 만들면서 있었던 여러 가지 얘기들과 [비밀은 없다]를 개봉하고 나서 그 영화 때문에 만난 백인 남성과 결혼을 하게 되는('백인 포비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까지 읽고 나면 '인생은 알 수가 없다' 쪽으로 조금 괘도를 수정하는 듯도 하다.

아무튼 찌질한 듯하면서도 공감대를 자아내는 글들은 매우 경쾌하면서도 솔직한 면이 있어 어느덧 이경미 감독이라는 캐릭터와 동질감을 느끼게 되는데, 특히 창작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계속해서 꾼 꿈들을 일기로 기록한다든지 대작가의 글을 읽고 절망하는 대목 등이 특히 공감감다.

창작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자산은,
습작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왔는가 하는 작가의 삶아다. (박완서)

아이 씨, 어떡하지.

2005. 05.12


뒷부분엔 평소 기도를 열심히 하면서 틈만 나면 딸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엄마 얘기, KBS <동물의 세계>에서 "짝짓기를 합니다" 같은 나레이션을 했던 유명한 성우인 아빠 얘기, 언니와 심하게 싸우지만 결국 이 책의 일러스트를 맡아주었던 여동생 얘기 등도 재미있게 펼쳐진다. 

책이 많이 팔렸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무도 솔직하고 유머러스한 글솜씨에 잘난 척하지 않는 마이너한 감성이 독자들을 끌어들였으리라. 책도 예쁘게 나왔다. 추천한다. 서점 가판대에 누워서 '괜찮아, 그냥 너 생긴 대로 살아' 라거나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 했는데 안 그래서 차암 다행이야'라고 외치는 설탕물 같은 에세이들보다 열 배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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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얼마 전에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보고싶다는 얘기를 한 게 기억나서 광복절 낮에 명동CGV 씨네라이브러리에 예약을 하고(내가 하려고 했는데 아내가 포인트가 많다고 자신이 한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다) 가서 그 영화를 봤다. 나는 2008년도에 무슨 국가대표전 축구경기가 있던 날 저녁에 청담CGV에 가서 혼자 이 영화를 봤던 기억이 난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단발머리 연쇄 살인마 안톤 쉬거. 거의 십 년만에 극장에서 다시 만나는 작품이라 가슴이 설레었다.  

주인이 안톤 쉬거에게 어디서 왔냐고 무심코 물었다가 졸지에 목숨을 걸고 동전 던지기를 하게 되는 수퍼마켓 장면은 대사, 연기, 호흡까지 지금 봐도 역시 끝내준다. 이건 코맥 맥카시의 원작소설이 있지만(소설도 사서 읽었다) 역시 이건 코엔 형제표 영화라고 말하는 게 어울린다. 이백만 달러가 든 돈가방과 연쇄살인마를 먼지바람 횡횡 부는 텍사스로 불러내 인간사 전체를 차갑게 비틀며 조롱하는 이야기를 이 형제만큼 잘 할 사람이 또 있을까. 원래 조엘 코엔은 형 에단 코엔이 쓴 시나리오를 타이핑 해주다가 자기도 얼떨결에 시나리오를 쓰게 됐다고 겸손을 떨지만 사실은 비트켄슈타인에 대한 논문을 쓴 적이 있을 정도로 철학과 인문학에 조예가 깊다고 한다. 

영화 시작한지 120분쯤 지나면 안톤 쉬거는 교통사고를 당해 기진맥진한 상태로 어디론가 사라지고, 돈가방도 사라지고 화면이 바뀌어 늙은 보안관 토미 리 존스가 아내에게 지난 밤 꿈 얘기를 하다가 영화는 갑자기 맥없이 끝이 난다. 팽팽하던 122분의 러닝타임이 다 지나고 불이 켜졌다. 아, 어려워. 아내가 말했다. 그러게. 나도 어려워. 내가 말했다. 왜 나한테 이 영화 보자고 했어? 하하. 그러게. 근데 되게 재밌지 않아? 도대체 감독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야? 글쎄...인생은 절대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아니면 인생은 누구든 잘 안 풀리게 되어 있으니 희망을 버려라...? 나, 참. 

적어도 두 가지는 분명한데, 첫 번째는 다시 봐도 무척 재미 있고 동시에 어렵다는 것.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매력이 철철 넘치는 작품이라는 것. 하비에르 바르뎀처럼 센 캐릭터가 나와 진지하고 섬뜩하게 굴면서도 가끔 뻔뻔하게 웃기는 것까지 잊지 않는 영화를 본 적이 있는가? 얼마 전 [시카리오2]에서 무시무시한 카리스마를 뿜어냈던 조슈 브롤린은 또 어떤가. 번번히 살인마를 놓치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보안관 토미 리 존스는 또 어떤가. 처음 이 영화를 기획할 때 코엔 형제가 쓴 시나리오를 먼저 읽은 토미 리 존스는 어디서 단발머리를 한 기괴한 사내의 사진을 가져왔다고 한다. 안톤 쉬거의 헤어스타일로는 이게 딱이라고. 사진을 본 하비에르 바르뎀은 '아, 씨발...'이라고 뇌까린 뒤 조용히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고. 그렇게 해서 희대의 살인마 캐릭터인 안톤 쉬거가 탄생했다. 

누구든 돈가방을 보고 그냥 지나갈 순 없다. 르웰린도 마찬가지였다. 황량한 텍사스 사막 한복판에서 마약상들이 자기들끼리 총질을 하다가 죄다 죽어버린 현장을 발견했다. 다 죽었고 언덕에 있는 시체 옆에 놓인 가방엔 이백만 달러가 들어 있다. 안 가질 이유가 없지 않은가. 르웰린은 생각한다. 어떡하든 이 돈을 가져야겠어. 그러나 안 그러는 게 좋았다. 이 돈가방을 추척하는 사람이 다름아닌 안톤 쉬거니까. 아, 그냥 잘 걸. 괜히 죽어가는 놈 물을 떠다 준다고 거길 간 게 잘못이었어. 아니면 우디 해럴슨의 제안처럼 적당히 나눠 가질걸. 그러나 이 또한 소용 없다. 어떤 선택을 했더라도 결과는 별로 달라지진 않았을 테니까. 코엔 형제가 바라보는 세상은 그러하다. 

커다란 산소통을 들고 다니다가 사람 머리에 공기 구멍을 내서 죽이는 안톤 쉬거. 그도 돈가방을 쫓긴 하지만 돈을 원하는 건 아니다. 그보다는 죽이기로 정한 사람을 꼭 죽이는 게 더 중요하다. 왜?  어차피 죽거나 죽이는 것 말고는 확실한 게 없으니까. 그런데 돈가방은 어디로 간 걸까. 영화가 끝나고 나면 그런 생각이 들 만도 한데, 이 영화는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그 느리고 무시무시한 편집감에 취해 아무 생각도 못하게 된다. 

재미 있는 이야기 하나 더. 폴 토머스 앤더슨이 [데어 윌 비 블러드]를 찍으러 텍사스에 갔다가 아침에 여관에서 나오는데 마침 코엔 형제가 지나가고 있었다고 한다. 여긴 무슨 일이냐 물었더니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영화를 찍는 중이라고 했다나. 그 넓은 텍사스에서 그런 대가들끼리 그렇게 우연히 만나다니 참 신기한 일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보다 더 신기한 일은 그 해에 [데어 윌 비 블러드], [주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같은 걸작들이 다 개봉을 했다는 사실이다. 우리 같은 관객들에게 그건 우연을 넘어 행운에 가까운 일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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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은 이런저런 사연을 가지고 모여 사는 유사가족 이야기다. 영화에서 구성원들은 할머니의 연금과 가족들의 좀도둑질, 성인업소 알바 등으로 연명하는데 이는 그리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고레에다 감독은 과연 혈연으로 엮이거나 정식 결혼을 통해 공인받은 가족만이 행복을 담보하는가 묻고 있다. 그래서 친부모에게 폭행을 당하던 유리를 데려다 키운 사람들은 유괴범이 되고 정말 마음으로 아꼈던 할머니가 죽자 신고하지 않고 집 안에 파묻었다는 이유만으로 유기죄를 받게 되는 걸 냉정하게 가감 없이 보여주는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는 각본이나 연출도 좋지만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연기력을 선보이는 배우들을 보는 맛이 각별하다. 그의 영화에 단골로 출연하는 키키 키린이나 릴리 프랭키는 물론이고 [백엔의 사랑]으로 일본 열도를 들었다놨던 명배우 안도 사쿠라의 연기가 그야말로 빛을 발한다.


일요일 조조로 영화를 보고 나왔다. 어린 여동생 유리를 데리고 물건을 훔치던 소년 쇼타에게 '여동생에겐 시키지 마'라며 가게의 물건을 그냥 내주던 문방구 할아버지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 피가 섞이든 아니든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려는 태도는 결국 이런 '어른스러움'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작품은 섣부른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질문을 던지는 경우가 많다. 이 영화도 그렇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중 바로 전 작품인 [세번째 살인]이 유일하게 싫었는데 이 영화는 다시 좋았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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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이나 우주선, A.I 등 신기한 인물이나 사건이 나오지 않는 SF를 쓰는 방법의 예를 들라고 하면 나는 대뜸 테드 창의 단편들을 얘기했을 것이다. 작가가 창조한 세계의 룰들이 이미 그 작품 속 사회에서 당연하게 돌아가고 있다면 신기한 사건이나 장치가 없더라도 소설은 이미 깊이 있는 SF, 또는 그 이상의 고전으로 완성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그 대답 목록에 다른 작가와 작품을 하나 더 추가해야겠다. 바로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다.
 
이 장편소설은 1990년대 후반의 영국, 어느 시골 마을에 있던 기숙 학교 '헤일셤'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함께 보내는 캐시, 토미, 루스 등의 이야기다. 무대가 되는 학교에는 뭔가 비밀스러운 분위기가 흐르는데 이는 학생들이 모두 다른 인간들에게 장기를 기증하기 위해 유전자 변형으로 태어난 클론들라는 게 밝혀지면서 풀린다. 학교 생활을 하면서, 또 섹스에 대해 알게 되면서 그들은 서서히 자신들이 어떤 운명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 자각하게 되고 그에 맞춰 순응하게 된다(담배를 피우면 절대로 안 된다고 강조하는 루시 선생님에게서 '네 몸은 네 것이 아니야'라는 암시가 강하게 풍겨온다).

[나를 보내지 마]라는 책의 제목은 주인공 캐시가 자신이 아기를 낳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고나서 카세트 테이프로 듣게 된 노래 가사 'Never let me go, baby'에서 'baby'를 '아기'로 생각하고 인형을 흔들었다고 마담에게 오해를 산 장면에서 유래되었다. 아기를 낳지 못하므로 피임을 안 하고 섹스를 해도 된다는 사실에 오히려 좋아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런 이야기 자체를 피하게 된다. 특히 중반에 영화배우로 사는 게 꿈이라는 남학생에게 충고하는 에밀리 선생의 이야기가 가슴 아프다. 너희들은 결코 영화배우 같은 건 될 수 없어. 그저 운전사나 간병인 등으로 살아가야 해.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여러 편의 이야기를 담은 미드 <블랙 미러>처럼 이 소설도 바이오 산업이 발달된 근과거나 가상의 세계를 담고 있는데 막상 장기 기증에 대한 구체적인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대신 클론들이 얼마나 인간처럼 살고 싶은지를 알려주는 장면들이 많다. 자신에게 유전자를 물려준 '근원자'를 찾아 몰래 외출을 한다든지 자신들에게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열심히 그림을 그려 '마담'에게 전한다든지 하는 게 그것들이다. 심지어 어떤 커플이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면 헤일셤 관계자들이 그 진위를 가려주고 사실로 인정되면 두 사람은 몇 년 간 기증을 유예하고 함께 살게 된다는 소문까지 퍼지지만 나중에 그건 사실이 아님이 밝혀진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마치 제인 에어가 그렸던 영국의 시골처럼 조용하고 아날로그적인 배경을 뒷그림으로 깔면서도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클론들의 서글픔을 아주 담담하고 델리케이트하게 묘사한다. 주인공들이 헤일셤을 떠나 코티지에서 만난 선배 중 헤어질 때마다 서로의 팔꿈치를 툭 치며 웃는 커플이 있었는데, 이는 TV 드라마에 나오는 인간들의 행위를 따라한 것이라는 것을 캐시가 알아채고 존재론적 회의에 젖는 식이다. 나중에 캐시는 간병사가 되어 기증자인 토미와 루스를 차례로 돌보게 되는데 어른이 되어 회상하는 그들의 과거에는 분명 성장소설적인 요소와 애증이 교차된 평범한 인간들의 모습이 함께 들어 있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라는 얘기를 알고 있음에 틀림 없다. 정말 인간적인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인간의 입장을 떠나야 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 소설은 그 화두에 닿아 있으니까. 이시구로가 노벨문학상을 탄 직후 그의 오랜 친구인 소설가 살만 루시디는 "이시는 기타도 잘 치고 가사도 잘 써서 밥 딜런 정도는 쉽게 이긴다"라는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문학의 대가들끼리 나눌 수 있는 멋진 축하인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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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스포일러 주의) 

내가 광화문에 있던 MBC애드컴이라는 광고대행사에  신입사원으로 일할 때 얘기다. 어느날 아침 출근을 했더니 사람들이 조간신문을 앞에 두고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었다. 이유는 어떤 남자가 조간신문 1면에 5단통광고 지면을 사서 홀딱 벗고 찍은 돌사진을 싣고 그 밑에 'oo야, 나랑 결혼해 줄래?' 라는 청혼광고를 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관련 기사를 읽어보니 둘이 같이 명동 거리를 걷다가 TV 방송 프로그램 중 전광판에 뜬 다른 커플의 청혼 이벤트를 보고 여자친구가 너무나 부러워했단다. 그래서 남자친구가 자기 아버지에게 가서 "예쁜 며느리 얻으시려면 돈을 써야 해요"라고 설득해 이백만 원인가를 빌려 그 광고를 집행했다는 것이었다. 정작 광고회사를 다니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던 우리들은 그 기발함과 실천력에 감탄했다. 물론 다  좋아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대체로 여직원들은 어머, 좋겠다. 너무 로맨틱해! 하고 부러워했고 남직원들은 아유, 미친새끼...하고 담배를 뻑뻑 피우며 화를 내기도 했으니까. 

어떤 일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는 모양이다. 미국 남부 깡촌 미주리주에 사는, 딸이 강간살해로 죽은 뒤에도 경찰이 범인은커녕 단서조차 잡지 못해 울화가 치민 상태로 지내던 밀드레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새벽에 한적한 마을 도로를 운전하고 지나가다가 아무도 쓰지 않는 망가진 광고판(빌보드) 세 개가 나란히 서 있는 것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는다. 세 개의 광고판에 경찰을 자극하는 카피를 한 줄씩 실어 수사를 촉구하기로 한 것이다. 그녀는 경찰서 바로 건너편에 있는 광고판 업자를 만나 광고 금액을 묻고 광고판에 써넣을 문구를 의논한다. "법적으로 쓰면 안 되는 글자가 뭐야? F*ck이나 C*nt 같은 단어는 물론 안 되겠지." 여기서부터 마틴 맥도나 감독의 유머 감각이 빛을 발한다. 빌보드를 붙이는 과정에서 백인 경찰과 흑인 인부들이 나누는 대화 속엔 미국 남부지방에 깊게 뿌리내린 차별과 불합리에 대한 야유들이 숨어 있다. 그러나 그 대사들이 너무 신랄하고 웃겨서 얼굴이 찌푸려지기보다는 오히려 즐거워진다. 그녀가 세 개의 빌보드에 나눠 써넣은 문장은 '어떻게 됐어 윌러비 서장, 아직도 체포 못했어? 우리 딸은 강간당하면서 죽어갔는데.'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에둘러 경찰이라고 하지 않고 직접 서장의 이름을 거론했고 딸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도 분명히 적었다. 당연히 경찰들은 질색을 하고 주민들도 도를 넘은 그녀의 행동에 우려를 표명한다. 윌러비 서장은 인품이 좋아서 지역사회에서 명망도 높은 데다가 얼마 전에 췌장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불쌍한 인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녀를 만난 윌러비 서장이 "내가 암에 걸린 걸 알고도 그 광고판을 썼어요?"는 질문에 태연하게 '그렇다'고 대답한다. 다소 멍청해 보이고 버릇도 없는 경찰 딕슨에게 '고문 경찰'이라고 계속 놀리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쯤되면 영화는 딸을 죽인 범인을 찾아 나서는 방향으로 곧장 흘러가야 할 것 같지만 감독은 이런 관객들의 예상을 뒤엎는다. 대신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다 젊은 여자와 바람이 나 이혼을 한 밀드레드의 전남편을 불러 오기도 하고 어린 두 딸과 아내를 두고 가야 하는 윌러비 서장의 눈물 어린 마지막 섹스와 자살 과정을 정감 넘치게 보여주기도 한다. 그리고 흑인들을 괴롭히던 폭력 경찰에서 정의로운 히어로로 거듭나는 딕슨의 변화를 보여주며 이 영화가 단순히 살인사건을 다루는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의 인생 자체를 태피스트리처럼 엮은 쫀쫀한 휴먼드라마임을 깨닫게 해준다.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좋은 시나리오를 가진 대부분의 영화들이 그렇듯이 이 영화에도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많이 나온다. 새벽 도로에서 손톱을 깨물며 광고판을 이용해 사건을 해결할 생각을 하는 밀드레드부터 아내와 딸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자살을 기획하는 윌러비, 그리고 술집에서 일부러 폭행을 유도해 범인의 DNA를 확보하는 딕슨과 불타버린 광고판을 다시 세우게 만들어주는 인부들의 마법 같은 도움까지. 그리고 이런 아이디어들을 빛내주는 프란시스 맥도먼드와 우디 해럴슨, 샘 록웰 등 일급 배우들의 연기가 있다. 

시종일관 등장인물들과 비꼬거나 받아치는 대사를 주고 받으며 웃음을 선사하던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음주운전을 걱정해 차를 빌려달라던 딸의 부탁을 거절하며 무심코 되받았던 막말(나 걸어가다가 강단 당할지도 몰라  - 그래, 강간이나 당하든지)이 현실이 되어버린 장면을 보여줄 땐 정말로 눈물이 나서 혼났다. 이 영화엔 전형적인 악인이 등장하지 않는다. 과장된 연기를 하는 사람도 없다. 그저 모두 자신의 입장에서 할 만한 행동을 하고 보일 만한 반응을 보여줄 뿐이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에서 '그'와 '그녀'가 범인을 어떻게 처리하든 그런 건 상관하지 않게 된다. 이미 서로의 마음을 충분히 공감하게 된 눈빛만으로도 더 이상 바랄 게 없기 때문이다. 

가끔 신기한 일이 일어난다. 이를테면 오래 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데어 윌 비 블러드] 같은 끝내주는 작품이 같은 해에 나란히 개봉하는 기적. [쓰리 빌보드]를 보면서 다시 한 번 그런 생각을 했다. 와, 이런 끝내주는 영화를 몇 주 간격으로 계속 보게 되다니! 폴 토머스 앤더슨의 [펜텀 스레드], 스티븐 스필버그의 [더 포스트], 그리고 마틴 맥도너의 [쓰리 빌보드]까지 올해(사실은 작년) 미국영화들 정말 대박이다. 두 시간 내내 울다 웃다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고 영화가 빨리 끝나버릴까봐 두려워하다가 뛰는 가슴을 진정하며 극장 문을 나섰다. 이 영화는 작년 아카데미에서 작품상과 각본상 등 여러 부문 후보에 올랐고 결국 프랜시스 맥도먼드의 여우 주연상 수상(그녀의 수상 소감도 많은 화제를 모았다)과 샘 록웰의 남우 조연상 수상으로 작품의 위엄을 증명했다. 아이디어도 좋고 연기, 각본, 엔딩 처리까지 너무 좋다. 부디 놓치지 말고 극장에서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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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란한 마음을 달래는 방법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노래방이나 단란주점에 가서 남자답게 술을 마시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두컴텀한 극장에 혼자 들어가 나보다 더 찌질한 인생을 그린 영화나 연극을 관람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 두 번째 방법을 선택했다... 이건 예전 한석규, 김지수 주연의 영화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을 보고 썼던 리뷰의 첫 대목이었다. 오늘 연극 [모럴 패밀리]를 보고 소주를 한 병 마시고 집에 와서 리뷰를 써볼까하고 노트북을 펼쳤더니 십여 년 전 썼던 그 대목이 고스란히 다시 떠올랐다. 

큰 언니는 술집에 나가고 고등학생인 여동생은 인터넷 방송으로 자신이 입었던 팬티를 판다. 공부를 제법 하는 남동생은 성정체성이 게이라서 너무 괴로워 가출을 할까 생각 중이다. 그리고 늘 침대에 누워 지내는 폐인 오빠는 어렸을 때 본드를 너무 많이 해서 몸도 가누질 못해 남들이 시간 날 때마다 똥을 닦아줘야 하는 존재다. 큰 언니가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남자를 데려와 소파에서 오럴 섹스를 하고 있을 때도 동생들은 무심히 들어와 말을 걸거나 훼방을 놓는다. 고등학생 여동생은 인터넷 방송으로 자신의 팬티를 경매에 붙이다가 마침 들어온 언니에게 한 마디 하라고 하고 언니는 픽 웃으며 카메라 앞에 서서 "야, 니네들 이런 거 왜 보냐? 이 병신 새끼들아."라고 욕을 한다. 카메라를 이어받은 동생은 우리 언니, 존나 이뻐서 더 나오면 안 된다. 니네들 언니 보고 딸딸이 쳐서 안 된다, 하는 멘트를 거침없이 날린다.

거실에 놓인 소파의 뒷모습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 심란한 가족의 이야기는 흡사 영국에서 시작해 미드로까지 리메이크 되었던 [셰임리스]와 비슷하다. 실제로 미드에서 에미 로썸이 맡았던 역할은 오늘 본 연극의 큰 언니 연설하 배우와 많이 겹치는 느낌이다. 그런데 이 연극이 [셰임리스]와 가장 다른 점은 아마도 '언어'일 것이다. 물론 영어가 짧은 내가 미국 드라마의 슬랭을 다 알아 들었을 리가 만무하지만 그래도 평소에 잘 쓰지 않는 '씹'이나 '보지', '자지' 같은  날것 그대로의 언어들을 듣고 있다보면 처음엔 재미 있다가도 나중엔 오히려 슬퍼지는 경지에 이른다. 특히 동생 역을 맡은 강선영의 찰진 욕들은 성인 인터넷 방송을 할 때 빛을 발하는데 너무 잘 해서 오히려 마음이 아프다.  

더구나 이 연극은 1회에 들어올 수 있는 관객 수를 딱 50명으로 제한하고 원래 있던 무대를 더욱 축소해 스테이지와 관객이 거의 같은 공간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구성을 했다. 거기에 배우들의 거침 없는 노출 연기, 동성애, 근친상간 암시까지 겹치니 웬만한 사람들은 숨도 쉬기 힘들 지경이다. 그런데 그런 극단적 상황들이 계속 되다 보니 오히려 자학적 쾌감을 지나 기분이 신선해지는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된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고나 할까.

가족은 선택할 수도 없고 마음대로 바꿀 수도 없는 삶의 굴레다. 오죽하면 일본의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는 '가족이란 남들이 안 볼 때 어디론가 갖다 버리고 싶은 존재'라고 했을까. 그만큼 힘든 존재인 가족 얘기 중에서도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을 다루면서 '모럴 패밀리'라는 반어법적인 제목을 붙인 감독의 감성이 믿음직하다. 

우리에게 작품을 권한 연극배우 이승연은 '작품이 너무 세서 일반인들에겐 권하기 꺼려지지만 혜자 언니 부부 정도면 좋아할 것 같아서'라는 말을 덧붙였는데, 결과적으로 너무나 고마운 추천이었다. 이승연 자신은 이 연극을 보고 한 사흘 정도 빙의가 되어 헤어나질 못했다고 한다. 늘 열정적인 연기를 선보이는 그다운 반응이요 리뷰였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연극을 본 날은 3월 4일 일요일인데 4월 1일까지 대학로 드림아트센터에서 공연한다.  '응답하라 1988'에서 호연을 했던 김선영 배우가 대표로 있는 <극단 나베>의 작품이고 김선영 배우의 남편 이승원 감독이 극본과 연출을 모두 맡았다. 이제 막 데이트를 시작한 커플이나 각별히 예의를 지켜야 하는 사돈지간만 아니라면 누구랑 같이 봐도 절대 후회하지 않을 재미있는 연극이라 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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