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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9.21 멋진 하루(2008년에 쓴 리뷰)




어떤 분이랑 얘기를 하다가 [멋진 하루]라는 영화를 둘 다 좋아한다는 걸 알았습니다.하정우와 전도연이 주연한 영화죠. 당시 짤막한 리뷰를 쓴 기억이 나는데 어디 있나 한참을 찾다가 예전 싸이월드 미니홈피 '편성준의 음주일기'에서 찾았습니다. 그 분께 한 번 보여주겠다고 약속을 했으니 여기로 옮겨 봅니다. 날짜를 보니 2008년 10월 쓴 글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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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여자가 한 남자를 만난다. 그런데 이 남자, 수단이 보통이 아니다. 음식점이든 술집이든 어딜 가나 주인들이랑 다 친하고 어딜가나 덤으로 뭔가를 더 받아 먹는다. 인간관계가 좋은 것이다. 여자는 생각한다. 그래, 이런 남자라면 인생을 맡겨도 무방하겠어.한참을 밀고 당기다 드디어 함께 여관으로 간다. 그런데 여관 주인 아줌마가 그 남자에게 반색을 하며 말한다. “오랜만이네? 근데 아가씬 왜 달고 왔어. 방값만 내면 내가 덤으로 하나 넣어줄 텐데.”

 


<멋진 하루>의 남자 주인공 조병운이 바로 이런 놈 아닐까. 허황되고 느물느물하고 말발 세고 그러면서도 또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만은 없는 페이소스를 가진 캐릭터. 이 영화는 어느 토요일 오전부터 밤까지 한나절 동안 일어나는 - 꿔준 돈 받으러 옛 애인 찾아 간 쩨쩨한 여자와 그 350만 원을 치사한 방법으로 갚으려 하는 남자의 -이야기다.

 

 

토요일 아침. 과천 경마장 로비에서 동창생들에게 경마에 대한 조언을 해주고 있는 조병운에게 느닷없이 김희수가 나타난다. 일년 전에 헤어진 애인이다. 다짜고짜 “돈 갚어. 350만 원 꿔간 거.” 라고 앙칼지게 소리치는 그녀. 현금이 없다고 발뺌하는 병운에게 그녀는 오늘 어떤 일이 있어도 그 돈을 받아가겠다고 버틴다.

 


그래서 ‘하룻동안 돌아다니며 350만 원 마련하기 투어’라는 짧은 로드무비가 시작된다. 병운은 희수를 데리고 아는 사람들을 차례차례 찾아 다니거나 길에서 만난 사람들에게까지 거의 삥을 뜯는수준으로 돈을 마련한다.

 

 

하정우는 정말 연기를 잘한다. 대사를 외운게 아니라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인식하고 자기 대사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투와 속도, 몸짓들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밀양>에서 전도연의 열연 덕분에 송각호가 상대적으로 가려진 느낌이 든 것처럼 이 영화에서는 전도연의 훌륭한 연기가 하정우의 포스에 의해 좀 밋밋하게 느껴질 정도다.

 

 

사업하는 사모님을 찾아가 골프 자세에 대한 정확한 조언을 하고(어머, 내 골프 강사도 그런 얘기 하던데!) 돈 백만 원을 받자마자 차용증을 내밀며(사모님, 제가 혈서를 쓰려고 했는데 빈혈이라…)너스레도 떤다. 술집 나가는 동생, 대학 서클 후배와 그 남편, 스키강사 시절의 후배들, 그리고 할리 데이비슨 타는 사촌 형. 이혼하고 혼자 사는 여자 동창생까지 만나는 사람들마다 많든 적든 돈을 얻어낸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모두 병운의 부탁을 듣고 선뜻 돈을 꿔준다. 돈을 뜯어내려고 특별히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희수는 어이가 없다. 왜 이러구 사냐. “너 그 아줌마랑 잤지?”  아니란다. 우연히 길에서 만나 함께 술을 마시게 된 서클 후배의 남편도 묻는다. “전에 우리 집사람하고 잤어요?” 아내가 술에 취해 병운이를 찾은 적이 있다고 한다. 이상하다. 분명히 병운이는 믿을 수 없는날건달이 틀림없는데 아무도 그를 미워하지 않는다.

 


할리 데이비슨을 타는 사촌 형에게 찾아간 희수는 술에 취한 사촌형의 입을 통해 병운이가 ‘그 많던 조씨네 재산 다 말아먹고, 결국마누라까지 도망간 놈’ 이란 걸 알게 된다. 면전에서 그 정도 모욕을 당하면 화를 낼 만도 한데 병운이는 “뭐, 이미 다들 아는 얘긴데.”라고 싱글거리며 고기를 굽는다.

 

 

병운은 돈을 구하러 다니는 중간 다른 사람의 부탁도 이행해야 한다. 아는 형의 딸년이 학교를 안 가서 정학을 당했는데 학교에 가서 걔를 집까지 좀 데려다 달라는 것이다. 약간의 우여곡절 끝에 여자애를 데리고 나왔더니 그 사이 교문 앞에 세워둔 희수의 차가 견인을 당했다. 화가 치민다. 희수는 병운에게 지랄을 한다. 그러나 병운은 “차량보관소 여기서 안 멀어. 얘부터 데려다 주고 차 찾으러 가자.”라고 태연히 말한다.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문제아 여학생은 “병운이 삼촌처럼 어리광 심한 남자, 좀 곤란하죠. 그래두 전 병운이 삼촌 괜찮던데요?” 라고 제법 어른스러운 소리를 한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 무렵. 지하철을 타고 견인차량 보관소로가는 길은 쓸쓸하고 구질구질하다. 병운이 전철 안에서 효도르 선수얘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을 때 희수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파마끼도 오래 전에 풀리고 단발로서도 어정쩡한 헤어스타일에 과하다싶은 마스카라를 칠한 채 그깟 350만 원을 받아내겠다고 옛 애인에게 하루 종일 끌려 다니는 자신의 옹졸한 모습을 문득 들여다보았기 때문이다.

 

 


“일년 동안 안 갚았다면서요?  그러게 왜 저렇게 헐렁한 놈한테 돈을 꿔줘요?”

 


낮에 만났던 병운의 초등학교 동창생 싱글맘을 다시 만났더니 40만 원이 든 봉투를 내밀며 웃는다. 병운이는 차에 있는 휴대전화를 가지러 주차장에 갔다. 희수는 봉투를 다시 여자에게 내민다. “저 이 돈 못 받겠어요.” 여자와 희수는 서로 괜찮다고 한참을 옥신각신한다. “절대 안 물러나실 거죠? 그럼 이렇게 해요 우리. 20만 원씩 나눠요.” 결국 그렇게 해서 하루 종일 330만 원을 돌려받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엉뚱하게 일본 애니메이션 <그남자 그여자의 사정>이 자꾸 생각났다. 돌담, 신호등, 육교, 골목길 등 둘이 돌아다니는 동안 보여지는 서울 구석구석의 모습 때문이다. 새롭지만 낯설지않게, 서울을 이렇게 이쁘고 정감 있게 찍은 영화를 본 기억이 없다.

 

 

밤에 약속이 있다는 병운이 전철역에서 커다란 가방을 들고 내리자 희수는 작별을 고한다. 병운이가 차를 가리키며 손짓을 한다. 희수가 여자에게서 20만 원을 받는 동안 병운은 고장 났던 희수 차의 와이퍼를 고쳐놓은 것이다. 희수가 희미하게 웃는다. 차를 타고 집으로 가던 그녀는 문득 병운이가 갈 곳이 없다는 걸 깨닿고 다시 전철역으로 간다.

 

할 일 없이 전철역에 들어갔다가 나온 병운은 역앞에서 판촉을 하고있는 건강음료 데스크에서 한가롭게 시음을 하고 있다. 그러나 다시 내려서 뭘 할 것인가. 희수는 그냥 시동을 걸고 출발을 한다. 맨 처음 병운을 만났던 때가 자꾸 생각난다. 다시 한 번 작게 미소를 짓는다.

 

 

강파른 마음으로 찾아가서 빚을 받겠다고 온종일 끌려 다녔지만 마지막엔 따뜻한 마음을 지닌 채 돌아가게 된 희수. 쓸쓸한 위로랄까.일본 영화 <바이브레이터>의 마지막 장면처럼 뭔가 알싸하고 조금 더 착해진 느낌이 드는, 그런 엔딩이다. 집에 돌아와 영화일기를 쓰는 동안 캔맥주 하나를 따서 마셨다. 나에게도 오늘은 조금 괜찮은 하루였다고 중얼거리면서.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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