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룡의 유작 [사망유희]는 악당들의 인질극 덕분에 주인공 이소룡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대한민국에 있는(!) 파고다탑에 가서 보물을 탈취해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탑엔 각 층마다 세계의 무술 고수들이 지키고 있는 거죠. 이소룡은 첫 칸부터 압둘 자바가 기다리고 있는 맨 윗층까지 올라가 차례차례 고수들을 제압해 나갑니다. 전 그 영화를 볼 때 어린 마음에도 “쟤네들은 도대체 이소룡이 오기 전까지는 저기서 뭘 하고 기다릴까? 먹을 것도 놀 것도 없는 텅 빈 방에서…그리고 왜 이소룡이 괴조음을 내지르고 싸울 때 밑으로 내려와 동료 고수들과 같이 싸우지 않을까?”하는 걱정을 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건 등장인물들에 대한 ‘개연성’에 대한 목마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봉준호의 [설국열차]를 보면서도 비슷한 마음이 일었습니다. 설국열차라는 설정 자체가 ‘노아의 방주’ 같은 세기말적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는 거야 짐작 못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꼬릿칸의 사람들은 저토록 현실적이고 삶에 대해 확고한 신념과 욕구, 기대치가 있는데 반해 다른 칸 사람들은 왜 저렇게 비현실적이며 도대체 ‘인격체’처럼 느껴지지 않는 걸까 하고 의아했습니다. 물론 꼬릿칸 사람들이 최하층민 계층이니까 반란의 욕구가 매우 강하고 다른 사람들은 지배층에 속하거나 그 사람들에게 동조하는 계층이라서 그렇다고 할 순 있겠으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반란군들이 달려오는데도 자신의 열차칸을 벗어나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가(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문이 열리면 비로소 총을 쏘거나 도끼질을 한다는 게 얼른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런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칸’이라는 이유만으로 한가하게 앉아 초밥을 만들어 먹거나 어린이들과 수업을 하거나 계속 마약을 하고 춤을 추고 사우나를 한다는 건 지나치게 관념적이라고 느껴졌습니다. 한마디로 불편한 거죠. 그런데 제 아내는 이 장면이 너무도 당연하고 잘 된 설정으로 느껴졌다고 합니다. 저와 삐딱선을 탄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여기였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봉준호의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박찬욱의 냄새가 너무 많이 나는 것도 관람의 즐거움을 떨어뜨리는 요인이었습니다. 열차가 터널을 통과할 때 서로 망치 살육전을 벌이던 적들끼리 “해피 뉴 이어!”를 외치며 잠깐 멈추는 유머코드는 [올드보이]에서 자기 생니를 뽑으며 고문하던 악당에게 “우린 친구잖아”라고 말하는 오달수를 떠올리게 합니다. 박찬욱은 이런 잰체하는 유머코드를 좋아합니다. 연기력은 뛰어나지만 필요 이상으로 과장된 틸다 스윈튼의 연기도 거북했습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요? 결정적으로 삶은 계란을 나눠주다가 그 트레이 속에서 기관총을 꺼내 쏘는 장면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명백한 오마주라고 해야겠죠. 



이 영화는 첫 장면부터 마지막 시퀸스에 이르기까지 ‘팔’에 대한 고찰이 많이 나옵니다. 앤드류의팔은 열차 밖으로 내밀어졌다가 박살이 나고 꼬리칸의 선지자 길리엄은 팔이 없는 반면 반란군의 우두머리인 커티스는 아직도 자기가 팔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미안함을 느끼죠. 그런데 이 모든 게 나중에 ‘달마대사’의 메타포임이 밝혀집니다. 전 이게 좀 싱겁습니다. 


그리고 열차의 엔진을 소유하고 있는 맨 앞칸의 윌포드가 작은 아이를 납치해 가는 이유도 “이 작은 곡사포 안을 어린아이 손 아니면 어떻게 닦아낸다 말입니까?”라는 거짓말로 나치들로부터 어린 생명을 구했던 쉰들러의 대사를 거꾸로 변용한 것 같아서 좀 낯간지러웠습니다. 



얘길 하다 보니 온갖 불만을 늘어놓으며 남이 공들여 만들어 놓은 영화를 일방적으로 폄훼하고 있는 꼴이 되어버렸군요. 그런데 평소에 안 그러던 정말 제가 정말 왜 이럴까 생각해 봤더니 가장 결정적인 건 ‘감동’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짜릿함이나 감동 부분의 트리거 역할을 해야 할 요나와 남궁민수의 ‘캐릭터’가 너무 평면적이라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그 연기 잘 하는 송강호와 동서양 어디서도 통할 거 같은 매력적인 포스를 뿜어내는 고아성은 영화 내내 심드렁하게 겉돕니다. 캐릭터 구축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죠. 이 열차의 보안 책임자였던 남궁민수와 다음 칸에 뭐가 있는지 볼 수 있는 요나는 원할 때마다 열차칸의 문을 척척 열 수 있을 정도로 능력이 뛰어나지만 정작 자신이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성취동기’가 부족합니다. 하다 못해 윌포드에게 철천지 원수 진 일이 있어 그걸 꼭 갚아야 한다든지, 아니면 그게 인류를 구할 수 있는 진실과 통한다든지 하는 확실한 동기가 그들에게 주어졌으면 어땠을까요. 그런데 그들이 원하는 건 고작 1년에 한 번씩 세계를 뱅뱅 도는 ‘윤회’ 같은 이 지겨운 열차를 멈추고 밖으로 나가 새로운 세상에서 생존 가능성을 찾는 것뿐입니다. 이건 좀 맥이 빠지는 결론이며 안일한 통찰이죠. 



이상이, 엄청난 스케일과 비주얼, 쟁쟁한 스타들의 뛰어난 연기가 등장하는 만듦새 훌륭한 일급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설국열차]를 재미 없게 본 이유입니다. 물론 이 메모는 순전히 ‘개인적’인 의견임을 밝혀야 뒷탈이 없겠으나… 따지고 보면 개인적이지 않은 의견이 어디 있습니까. 게다가 저는 유명한 평론가나 기자도 아닌 일반 관객인데요 뭐. 그런 의미에서 매우 성급하고 편협한 영화 일기인지 알면서도 그냥 올립니다. 이건 그저 제 개인적인 블로그이고, 개인적인 페이스북 담벼락일 뿐이니까. ^^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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