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저 도널드슨 감독의 흥미진진한 스파이 영화 [노웨이 아웃]을 보면 파티에서 처음 만나 서로 뿅간 캐빈 코스트너와 숀 영이 격정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리무진 뒷자리로 달려가 급하게 섹스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짧은 정사가 끝난 다음 비로소 캐빈 코스트너가 던진 첫 마디는 "My name is Tom." 이었습니다. 숀 영도 “I’m Suzan.” 이라고 대답을 하구요. 전 상병 때 중대 외출외박 스케줄이 뒤죽박죽 꼬이는 바람에 부산 사는 병장 대신 졸지에 외박을 나갔다가 중앙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는데 이 장면에서 꽤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세상에. 섹스 먼저 하고 통성명을 나중에 하는 경우도 있구나. 미국은 정말 멋진 나라야…
어제 페이스북을 통해 ‘First Kiss’라는 화제의 동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미국 LA의 렌스튜디오(Wren studio)라는 곳에서 촬영한 이 영상은 서로 모르는 20명의 남녀를 초대해 첫 인사를 시킨 후 다짜고짜 키스를 하도록 요구하는 내용입니다. 이들 중엔 이미 촬영에 익숙한 모델이나 배우, 뮤지션도 있었고 또 스튜디오 측에서 요구하는 사항에 대해 대충 듣고 왔겠지만 막상 처음 만난 사람과 키스를 하려니 되게 쑥스럽고 이상했겠죠. 커플들 중에는 카메라가 돌아가자 어쩔 줄 모르고 조명을 좀 꺼주면 안 되겠냐고 묻는 사람도 있고 아까 들은 상대방의 이름을 다시 물어보거나“당신은 배우니까 전에도 이런 경험이 있었겠죠?”라고 상대방에게 조언을 구하는 남자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모두 ‘첫 키스’를 합니다.
“당신은 방금 처음 본 사람과도 키스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듯한 이 당돌한 영상은 한 의류 메이커가 만든 바이럴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한 일간지 기자는 이런 필름을 만든 의도에 대해 “’낯선 사람들도 마음을 열면 따뜻한 관계를 이룰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했더군요.
그런데 조금 자세히 뜯어보면 여기에는 좀 더 세련되고 구체적인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이 영상을 제작한 ‘Wren studio’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이 회사가 다양한 중저가 의류를 생산하는 일종의 SPA 브랜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옷을 하나 사려면 무척 고심을 하고 큰맘 먹고 사야 했지만 유니클로나 H&M, Zara 같은 중저가 브랜드들이 생긴 뒤부터는 별 큰 고민 없이 누구나 그럭저럭 옷꼴을 갖춘 의상들을 손쉽게 바꿔가면서 연출할 수 있게 되었죠. 그러나 동시에 다양한 개인의 개성과 취향을 나타내던 ‘그 사람만의 옷’이라는 스토리가 사라지는 아쉬움도 생겼습니다.
Wren studio’의 창업자이자 크리이에티브 디렉터인 Melissa Coker는 SPA 브랜드의 이런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킬 방법을 고민하다가‘Kiss’라는 단어를 생각해 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방금 산 옷보다는 자기가 자주 입어 길이 들고 편안한 옷을 더 좋아하게 마련이죠.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금방 만나 사람과는 악수 정도는 해도 키스를 하진 않잖아요. 그런데 방금 본 SPA브랜드 옷을 스스럼 없이 사 입는 건 ‘방금 본 사람과 스스럼 없이 키스하는 것과 닮은 것이 아닐까?’ 라는 데까지 생각이 흘러간 겁니다. 자신이 만든 브랜드는 처음 입더라도 편안함과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죠.
무모한 발상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무모한 발상에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 바로 치밀한 실행력입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Melissa Coker와 감독인 Tatia Pilieva는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으면서 효과적인 바이럴이 될 수 있도록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습니다. 먼저 최대한 ‘리얼’한 상황을 유지할 것, 출연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유롭고 호감 가는 캐릭터로 선정할 것, 나이와 직업 등에 맞게 다양한 의상을 준비할 것(모두 “wren’ 제품들입니다), 게이 커플을 둘 넣어 시각의 유연성을 확보할 것…이상이 그들이 준비한 ‘촬영 컨셉’일 것입니다.
드디어 촬영이 시작됩니다. 정말 처음 만난 사이인 듯 어색한 인사를 나누는 열 쌍의 커플들은 곧 장난스럽게 또는 긴장감을 유지한 채 키스를 시작합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만큼 다양한 반응이 나옵니다. 억지로 키스를 하다가 더는 못하겠다며 고사를 하는 여자도 나오고 그런대로 부드럽게 키스를 이어가는 커플도 나옵니다. 머뭇거리던 짧은 순간이 지나 의외로 열정적인 키스를 나누는 커플도 있습니다. 이 모든 장면들이 정말 설레면서도 자연스럽게 카메라에 담깁니다. 제가 특히 감탄했던 것은 게이 커플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입니다. 남자 커플의 경우 입은 옷도 굉장히 점잖고 키스 행위도 과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를 존중하는 눈빛이나 행동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옵니다. 여성 게이 커플의 경우엔 ‘우리, 키스를 하기 전 잠깐 눈을 맞추는 게 어떠냐?’는 성숙한 제의까지 합니다. 이처럼 ‘리얼함 속에 숨어 있는 디테일’은 수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내기 위한 프로들만의 세심함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렇게 해서 세상에 나온 바이럴은 지난 월요일에 유투브 사이트에 공개되어 단숨에 3,500만 뷰가 넘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흔히 유곽의 여자들도 ‘비록 몸은 허락할지라도 입술은 아무에게나 허락하지 않는다’ 라는 속설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바뀌어도 ‘키스’라고 하는 내밀하고 개인적인 행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늘 뜨겁기 마련인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걸 캐치해서 이처럼 막강한 바이럴로 성공시킨 사람들의 작업 또한 언제 봐도 참 대단합니다. (지금 ‘Wren Studio’ 웹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바이럴에 등장했던 사람들이 입고 있던 그 옷들에 친절하게 가격표가 매겨져 있습니다)
이 영상은 아무 배경도 없는 일명 ‘무지 백’에서 촬영되었습니다. 등장인물들에게 눈과 귀를 집중시키는 흔한 촬영기법입니다. 화면이 흑백으로 처리된 점도 마찬가지 이유겠지요.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배경이 없다는 것’은 어쩌면 현대인들의 도시적이면서도 쓸쓸한 자화상이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 씁쓸합니다. 아무런 맥락 없이도 옷을 사고 아무런 스토리 없이도 첫 키스를 할 수 있는, 우리 현대인들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