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은 세월호 특별법 서명을 받는 자리에 와서 서명대 집기를 부수었다. '인천-제주'편으로 수학여행을 떠났다가 맹골수도에서 가라앉아 목숨을 잃은 아이들의 부모에게 세금도둑이라고 욕도 했다. 이른바 '태극기 부대'였다. 지나가면서 다들 눈쌀을 찌푸렸지만 감히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노인을 비롯한 시위대는 너무나 기세가 등등해서 누가 건들기만 하면 가스통처럼 펑하고 터질 것만 같았다. 차례 소동이 잦아들 무렵 여인이 나타났다. 정신과 의사이면서 세월호 유족들을 위해 일하는 가냘픈 사람이었다. 물론 태극기 노인은 여인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할아버지."
"?"
"고향이 어디세요?"
"?"
"고향이 어디시냐구요."
"그건 알아서 뭣하게?"
"그냥요."
"저기, 남쪽..."
"할머니는요?"
"할멈? 죽었어."
"그러셨구나... 사이는 좋으셨어요?"
". 좋긴 . 할멈이 나한테 잘했지."
"자식들은 뭐하는 분들이세요?"
"아들놈 하나 있는데...나도 몰라. 도대체 하고 다니는 놈인지." 
노인은 뜻밖에도 선선히 대답을 하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전라북도 익산이 고향이지만 어렸을 마을에서 문제로 싸움을 하다가 사람을 죽게 했던 아버지가 야반도주하다시피 짐을 싸서 논산으로 옮기는 바람에 노인도 고향을 등지고 논산에서 학교도 다니고 청년기까지 보냈다. 아버지는 작고했지만 그때의 희미힌 원한은 그대로 남아 있어서 지금도 익산엔 가지 않는다고 했다. 
"기구한 인생이지.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소설로 쓰면 권으로도 모자랄 거야" 
노인은 세상에 원망스러운 많았다. 요즘 것들은 고생을 해봐서 배부른 소리만 한다는 것이었다. 
"걔들이 인민군을 만나봐야 세상 무서운 알지. 죽는 맛이 뭔지 당해 봐야..." 
터진 말문은 끝이 없었다. 알고보니 구라가 노인이었다. 특히 공산당에게 맞아죽을 뻔했던 육이오 사변 얘기를 많이 했는데 월남전에도 참전했다는 얘기를 하는 거 보면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육이오 때는 아주 어렸거나 태어난지 얼마 상태였을 같았다. 아니면 월남전 얘기가 거짓말이거나. 여인은 쓴웃음을 깨물며 그래요? 그러셨군요, 하고 맞장구를 치고 밴딩머신에서 커피를 뽑아와 노인에게 건냈다. 
" 놈도 어렸을 착했어." 
"아드님이 해주세요?" 
"잘해주긴. 맨날 마누라 눈치나 보는 병신이." 
"며느리가 미우세요?" 
노인은 젊었을 전국을 떠돌아 다니며 돈을 벌었다고 했다. 큰돈을 벌진 못했지만 가족을 굶긴 적은 번도 없었단다. 여인이 노인의 손을 슬쩍 보니 마디마다 거친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고생을 해서 아들을 키워놨는데 살쾡이 같은 년이 들어와서 주인 행세를 한다는 것이었다. 며느리는 음대를 나온 여자였다. 원래 노인이 데면데면한 성격이기도 했지만 성악을 전공한 며느리와 월남전 참전용사 시아버지 사이엔 공감대가 생길 리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이대 나온 년들을 싫어한다니까." 
"며느님이 이대 나오셨어요?" 
"이댄가 숙댄가...아유 몰라." 
입에 침이 마르는지 헛기침을 한바탕 노인의 목소리가 다시 커졌다. 오래 세상을 떠난 아내 얘기을 때는 쓸쓸하던 눈빛이 아들과 며느리 욕을 하면서 뜨겁게 변했다. 결정적으로 손주가 없다는 것이 노인의 화를 키웠다. 아들 커플은 딩크족었던 것이다. 
"아니, 결혼을 했으면 애를 낳아야 아냐? 왜 피임을 하고 지랄이냐구." 
집에 있으면 며느리와 자꾸 부딪혀서 아침 먹고나면 밖으로 나와 떠돈다고 했다. 하지만 일당 오만 때문에 시위에 나오는 아니라고 말하며 담배를 태우는 노인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여인은 슬펐다. 거리에 버려진 부서진 장롱 같은 그의 삶을 듣다가 눈물이 차오르기도 했다. 한참 신세한탄을 하던 노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광화문 이순신 동상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쓸쓸했다. 여인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내가 아까 아이 엄마(세월호 유가족)들한테 욕한 부끄럽지." 
"그런 마음이셨군요. 그러셨군요." 
사과 말씀을 듣자고 시작한 얘기가 아니었는데 노인은 사과를 했다. 미안하다고 하며 한숨을 내쉴 얼핏 눈물까지 비쳤다. 가슴 속에 숨겨놨던 말을 어렵게 꺼낸 사람만이 가질 있는 맑은 눈물이요 눈빛이었다. 
유순한 노인이 그토록 사나운 태극기 부대였다는 믿기지 않았다. 위로 마디에 이렇게 쉽게 무너질 거면서. 여인은 생각했다. 아들이 조금만 일찍 들어와서 아버지와 매일 이야기를 나누기만 했다면. 며느리가 시아버지의 말도 안 되는 허풍이나 투정을 조금만 열린 마음으로 들어주었더라면. 
다음 주에 논산에나 가봐야겠다고 하면서 노인은 힘없이 돌아섰다. 거긴 고향도 아니라면서요. 친구도 없다면서요. 여인은 혼잣말처럼 뒤늦은 대꾸를 했다. 노인의 뒷모습이 쓸쓸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깜짝할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정혜신 쌤의 [당신이 옳다] 읽다가 태극기 노인 대목이 인상 깊어서 이야기를  길게 써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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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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