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아파트 앞엔 [신화마트]라는 수퍼가 하나 있습니다. 다른 가게처럼 일용잡화를 팔고 밤에는 동네 아저씨들이 모여 간단한 안주에 맥주도 한 잔씩 하는 그런 평범한 수퍼죠. 우리 커플도 이사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연히 들어갔다가 뻔데기통조림이나 골뱅이에 한 잔 한 뒤로는 단골이 되었습니다. 우리 말고도 그런 손님들이 꽤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단골들끼리 친해져서 인사도 나누게 되고 가끔은 누군가 집에서 가져온 ‘사제 안주’를 나눠먹으며 작은 파티를 열기도 했습니다. 강남 부자 동네와는 좀 다른 정서죠.

 

 

그런데 이 가게가 얼마 전부터 한쪽 공간을 막더니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된 거냐고 사장님께 물어보니 가게를 반으로 줄이고 새로 생긴 공간에 작은 치킨집을 열 생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녁마다 찾아오던 단골 청년들 중 둘은 벌써 며칠째 공사를 맡아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재미있을 거 같았습니다. 이 가게는 바로 옆 토끼굴을 지나 수십 미터만 나가면 한강변이고 뚝섬유원지역도 걸어서 13분 거리입니다. 뚝섬유원지는 여름이면 치킨배달이 엄청 성행하는 곳이죠. 수퍼마켓만 하는 것보다 훨씬 신나는 일일 거 같았습니다. 우리도 뭔가 도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가게 이름을 지어주기로 했습니다. 사장님 부부도 반색을 하며 좋아하셨습니다.

 


치킨집이라…일단 신화마트가 사업을 확장한 거니까 ‘신화치킨’을 생각하기가 쉽겠죠. 그러나 그건 “아, 신화마트가 치킨집을 냈구나”라는 몇몇 지인들의 반응 말고는 뾰족한 게 없습니다. 별 의미가 없는 네이밍이란 말이죠. 게다가 치킨집 특유의 고소하고 바삭바삭한 유머나 특징이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닭컴'부터 시작해서 코스닭, 후다닭, 쏙닭쏙닭, 토닭토닭까지 차고 넘치는 게 치킨집 이름이었지만 그래도 치킨집 이름은 그래야 하는 거니까요.

 

 

 

“닭터 어때? 닭터 치킨!” 제가 여친에게 물어봤더니 그거 괜찮은데, 라는 반응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사장님 성이 오 씨니까 닭터오 치킨으로 하자. 그리고 닭터라는 상호명은 이미 많을 테니 ‘성수동 닭터오 치킨’으로 하자는 얘기까지 급속도로 발전이 되었습니다. 표기는 ‘닭터5’와 ‘Dr.5’를 병행하면 패러디 아이덴티티도 더 살릴 수 있을 거 같았구요.

 

 

아울러 윤혜자 양은 ‘닭터오 특별 메뉴’까지 즉석에서 제안했습니다. 한 마리가 아니라 닭고기 다섯 조각으로 이루어진 오천 원짜리 특별 상품을 마련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치킨이 생각나도 만사천원이나 만육천 원쯤 하는 치킨 한 마리를 혼자 시켜먹기엔 부담이 있습니다. 이럴 때 오천 원짜리 ‘닭터오 스페셜’이 있으면 좋지 않겠냐는 것이죠. 기분 좋게 결론을 낸 우리는 내일 빨리 이 이름을 알려드려야겠다고 조바심을 내며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오늘 간단한 네이밍 기획서를 써가지고 [신화마트]에 갔더니 일단 아주머니가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옆에서 공사를 하던 청년들에게도 보여줬는데 다들 좋다고 한 마디씩 하더군요. 닭터5스페셜 메뉴도 좋은 아이디어라고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사장님은 며칠 전 다리를 다쳐 네이밍 후보안을 보지 못하셨습니다. 오늘 수술을 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이름이 확정되면 간판과 스티커 디자인도 같이 일하던 친구나 동료들에게 부탁해볼 생각입니다. 같은 이름이라도 디자인이 좋으면 더 효과가 좋아지겠죠.

 


뿌듯한 일입니다. 아주머니가 얼마를 내야 하냐고 물으시길래 “저희 비싼 애들이에요. 정식으로 돈 내시려고 하면 너무 비싸니까, 관두세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럼요. 동네에서 그럴 순 없죠. 근데 이름값을 치킨으로 다 받으면 도대체 몇 마리나 되려나…? ^^

 

 

Posted by 망망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