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감독은 촬영 전 자기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들에게 평소 입던 옷을 몇 벌 가져오게 한다고 한다. 그리고 조감독이나 스텝들을 몰래 집으로 보내 그 배우의 옷장에서 영화에 어울릴만한 헌옷들도 더 골라오게 한다고 한다. 과연 꾸며진 이야기나 전형적인 연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홍상수 감독이 할 만한 짓이다. 그가 천착하는 ‘자연스러움’은 그런 세심한 과정을 거쳐서 탄생하는 것이다. 덕분에 홍상수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연기에서도 자의식에서도 새로운 배우로 다시 태어나는 느낌을 준다.
홍상수 영화에 자주 출연하는 배우 김태우와 예지원이 함께 나오는 영화를 보았다. 영화 제목은 [내가 고백을 하면]. 일요일 밤에 [SBS스페셜] ‘가면 뒤의 눈물’을 보고 나니 기분이 너무 꿀꿀해져서 견딜 수가 없어서 혜자를 꼬셔 IPTV로 보게 된 영환데, 둘 다 차츰 영화 속으로 빠져들어가 아주 흐뭇한 마음이 되어 잠자리에 들었던 작품이다. (사실은 비비아나킴 님의 페이스북 담벼락에 처음 갔을 때 이 영화에 대한 칭찬을 마구마구 해놓은 걸 보고 ‘언젠가 한 번 꼭 찾아봐야지’, 하고 있긴 했던 영화다)
광화문에 있는 스폰지하우스의 극장주이며 영화제작에도 손을 대는 바쁜 몸이지만 주말이면 번잡한 도시를 벗어나 강릉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커피도 마시며 혼자 멍때리는 시간이 즐거운 영화감독 인성. 그리고 강릉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쭉 그곳에서 일해 왔지만 주말이면 어김없이 서울로 올라가 영화나 뮤지컬을 보며 문화생활을 만끽하는 게 유일한 낙인 간호사 유정.
두 사람에게 해결해야 할 거의 유일한 문제는 '주말 잠자리'인데, 인성은 매번 모텔 옆방에서 모르는 남녀가 질러대는 교성을 들으며 자는 것도 지겹고 호텔이 깨끗하긴 하지만 경제적으로 좀 부담이 된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유정은 올라갈 때마다 머물던 서울 친구에게 남자친구가 생기는 바람에 졸지에 찜질방에서 자야 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서로 엮일 게 별로 없을 것처럼 보이던 두 사람은 둘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강릉의 단골 카페 주인의 주선에 의해 주말마다 서로의 집을 바꿔 쓰기로 합의한다. 얼핏 도입부만 따져보면 잭 블랙과 케이트 윈슬렛이 주연한 [로맨틱 할리데이]가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렇게 술렁술렁 얘기가 진행되는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다.
유정은 집을 바꿔 써도 괜찮을 거 같다고 하는 지성의 제안을 번번히 거절을 한다. 누군가가 자신의 생활에 침범하는 것이 귀찮은 것이다. 그러나 지성도 유정에게 딴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냥 요즘 떠오르고 있는 '카우치 서핑'이나 '에어 비앤비'처럼 서로의 편의를 위해 합리적인 선택을 하자는 것뿐인 것이다. 둘은 오랜 망설임을 거쳐 '서로의 물건을 건드리지 않는다', '냉장고 안의 음식은 먹지 않는다', ‘이성 친구는 데려오지 않는다’ 등등의 조건을 합의한 후 집 바꾸기에 돌입한다.
주인이 없는 남의 집에서 자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물건에는 그 사람의 삶이 녹아있다. 서로 같은 공간을 사용하지만 동시에 머물지는 않는 ‘이상한 동거’를 시작한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서로의 물건을 살펴본다. 처음엔 냉장고 안. 책꽂이. 그리고 TV옆의 CD와 DVD들. 조심스럽게 열어본 책갈피에서 내가 좋아하는 구절이나 공감 가는 메모를 발견할 때면 시공간을 초월한 친밀감이 느껴지기 않겠는가.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순간을 매개로 둘을 갑자기 확 묶어버리거나 하지 않는다. 인성에게는 투자자의 입맛에 맞게 시나리오를 고치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말썽쟁이 감독이 있고, 자신이라도 시나리오를 고쳐서 보여줘야 할 투자자가 있다. 피곤한 일상이다. 그러나 주말이면 어김없이 강릉으로 간다. 유정은 병원에서 근무하는 동시에 출장 간호사도 겸임하고 있는데 암 말기 환자 부부를 돌보느라 다른 데 정신을 쏟을 여유가 없다. 자신과 불륜 관계였던 ‘김박’과의 정리도 아직 깔끔하게 끝내지 못한 상태다. 그러나 주말이면 여전히 서울로 올라간다.
조성규 감독의 [내가 고백을 하면]은 반드시 극적인 사건을 등장시키거나 인물들이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좋은 영화가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서울의 달동네를 찾아 다니며 카메라에 담는 유정의 시선과 강릉의 바다를 바라보는 지성의 시선이 교차편집된 장면들은 아름다우면서도 선량하다.
그렇다.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저절로 [오늘의 사건사고]나 [카모메 식당],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등이 떠오르게 된다. 실제로 감독이 운영한다는 커피숍도 나오는데 이름이 ‘조제’다. 그리고 비슷한 느낌의 영화로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도 있다. 그러나 [해가 서쪽에서…]가 어떤 감동을 위한 촘촘한 준비로 가득 찬 영화였다면 이 작품은 결론을 정하지 않고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입장을 취해서 더 자유롭고 좋다.
그래서 등장인물들도 참 자연스럽고 멋진 연기를 펼치는 모양이다. 잘생기고 지적인 역할에 잘 어울리는 김태우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생활연기를 보여준다. 너그러움과 조심스러움, 자유로움을 함께 갖고 있는 조인성 감독은 딱 배우 김태우 그대로인 것처럼 느껴진다. 요즘 코믹한 역할을 많이 맡았던 예지원은 초반에 너무 웃음기 없는 캐릭터라 좀 부자연스러운가 하더니 중간부터 완전 몰입해서 진짜 간호사 유정이 되어버린다. 노래방에서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를 부르는 장면에선 가슴이 짠해진다. 그리고 안영미는 개그맨이 영화에 나와 희극 연기를 안 할 때 더 멋있게 보인다는 사실을 몸소 증명해 준다.
인성의 집에서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읽을 때 우리는 유정의 마음이 어느덧 인성에게 가 닿고 있음을 느낀다. 새로 준비하는 영화의 시나리오를 고치느라 고심하던 인성은 자신이 언제부턴가 유정에게 하고싶은 말과 행동들을 시나리오에 넣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늦은 밤 강릉으로 달려간다. 유정의 집앞까지 가서는 잠깐 숨을 고르고 전화를 건다. 술이나 한 잔 하자고. 어서 내려오라고. 유정도 반가워 한다. 한달음에 내려온다. 그런데 이상하다. 막상 만나서는 술 대신 커피를 마시러 간다. 이런 싱거운 사람들. 하지만 이건 그런 영화다. 천천히, 사려깊게,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영화는 끝나가지만 두 사람은 이제 막 시작이다. 급할 거 없다. 그래서 둘은 술 대신 커피를 마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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