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베호벤 감독은 대량 살육의 쾌감을 만끽하고 싶어서 [스타쉽 트루퍼스]라는 영화를 만들었노라고 말한 적이 있다. 사람을 죽이는 걸 화면에 담으면 누구에게나 끔찍하고 잔혹하게 보이지만 그 상대가 우주괴물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아무리 지치도록 베고 쏘고 해도 양심의 가책을 느낄 일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중세의 ‘마녀사냥’에서 그런 비뚤어진 심리의 힌트를 얻은 바 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다. 죽이고 싶다. 방법은 간단하다. 마녀라고 밀고를 하면 된다. 본인이 아무리 아니라고 항변을 하더라도 마녀의 변명일 뿐이므로 그건 거짓말이 된다. 그러다 모진 고문에 못이겨 거짓자백을 하면 그때부터는 진짜 마녀가 되는 것이다. 어떤 상황이 와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뿐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비념]은 1948년에 제주에서 정부와 미군들에게 마치 ‘마녀’처럼 몰려 떼죽음을 당했던 4•3항쟁 희생자들과 현재 강정마을에서 정부와 미국의 이해관계에 대항해 해군기지 건설 반대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을 한 줄 위에 놓고 바라보는 다큐멘터리영화다.

우리에게 제주란 무엇인가? 구름•돌•바람이 많아 삼다도라 불리던 섬이었고, 최성원의 노래처럼 ‘신혼부부 몰려와 똑같은 사진 찍’던 관광지였다. 지금은 장선우 감독이나 예전 동아기획 식구들이 ‘이민’을 가서 사는 천혜의 휴양지, 그리고 올레길과 크고 작은 게스트하우스들이 모여있는 이국적인 섬일 뿐이다. 적어도 4•3항쟁의 비극적 진실을 접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임흥순은 제주 사람이 아니다. 그냥 제주에 놀러 오는 흔한 관광객 중 한 명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같이 일하는 프로듀서의 할머니가 4•3때 남편을 잃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걸 영화로 만들면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단다. 굉장히 개인적인 호기심에서 시작되었던 이 작업은 당시의 자료들을 조사하면서 기록자로서의 의무감을 갖게 되었고 아울러 현재 강정마을 구럼비바위 폭파 현장을 지켜보면서 상관 없어 보이는 두 사건이 하나로 연결될 수도 있다는 입체적인 역사의식으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이다.

 

 

1948년 11월 미군정하에 있던 남한정부는 제주해안선 5Km 바깥의 모든 주민들을 폭도로 간주하고 사살하라는 소개령을 내렸다. 미녀사냥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채 폭도로 몰린 도민들은 서울에서 내려온 군인들과 서북청년단들에 의해 어느날 갑자기 학교 운동장으로 끌려가 총살을 당했다. 한라산으로 도망간 사람들은 잡히지 않으면 대부분 굶어죽거나 얼어죽었다고 한다.

 

 

2007년 6월 강정마을 해군기지 조성 공사 후 주민들은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어져 대립과 반목이 계속되고 있다. 여태까지 잘 어울려 살던 이웃들은 물론 가족끼리도 원수가 되고 서로 말을 섞지 않는다고 한다. 정부는 공사방해금지 명목으로 주민과 종교단체 환경단체들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해 놓은 상태다.

 

 


감독은 64년 전 일이 서귀포시 강정마을에서 재현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강정마을의 현재를 보여주는 것은 1948년 당시 제주의 모습을 재현하는 하나의 방법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진, 비디오, 설치미술 등을 전공했던 임흥순 감독은 좀 색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생각을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에서는 보통 다큐멘터리처럼 인터뷰어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카메라가 항상 인터뷰이의 얼굴을 따라가지도 않는다. 4•3사건에 대한 증언이 흘러나올 때 카메라는 제주의 풍경이나 하늘, 감귤나무 같은 고정된 사물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기 일쑤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어둡고 거친 밤길을 헤매기도 한다. 나는 이 영화에서 누군가 맨발로 눈길을 허정허정 걸어가는 장면을 보고 비로소 감독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의 도민들이 어떤 심정이었을까를 조금이라도 짐작하는 방법은 직접 그들처럼 밤길을 헤매보고 눈길을 헤치며 걸어보는 것뿐이라는 다소 무식한(?) 통찰이 가슴에 와닿았던 것이다.

 

 


‘비념’이란 제주에서 행해지는 작은 규모의 굿을 뜻한다. 감독은 타인에 대한 연민이나 애도의 행위야말로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본성이 아닐까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4•3때 희생된 사람들을 애도하는 굿을 하는 마음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영화의 마지막엔 아름다운 제주의 풍경이 펼쳐진다. 그러나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이 아름다운 자연 뒤에는 피로 물든 4•3사건이 숨어있다. 유네스코가 인정한 빼어난 자연경관 뒤에는 해군기지라는 첨예한 이해관계가 숨어있다. [비념]은 이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직접 보여주고 설명하기 보다는 스스로 볼 수 있도록 눈을 열게 해주는 영화다. 알고 보면 더 많이 보이는 영화고 알고 나서 다시 보면 더 깊어지는 영화다. 당신이 올해 블록버스터 영화를 세 편쯤 보았다면 이젠 이런 영화도 한 편 보시는 건 어떨런지.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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