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숙, 이정재와 함께 [정사]를 찍을 때 이재용 감독은 어디선가의 인터뷰에서 “10년 후에 봐도 촌스럽지 않은 화면을 만들고 싶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그 이후 이재용의 영화들은 좀 들쭉날쭉한 면이 없지 않지만 적어도 그 영화만큼은 기름기가 다 빠진 무채색의 배경들이 많이 등장하고 또 배우들의 절제된 연기와 대사들도 어느 정도 텍스트의 품격을 높여놓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미셸 아자나비시우스의 [아티스트]를 보면서 드는 생각도 ‘역시 기본은 힘이 세다’ 라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화려하고 변화무쌍한 컬러 사진도 흑백 사진의 깊이 앞에서는 무릎을 꿇듯이 흑백 영화가 주는 묘한 향수와 클래식함은 3D영화 시대에도 여전히 그 빛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전에 허우 샤오시엔이 [쓰리 타임즈]의 첫 번째 에피소드를 무성영화 형식으로 처리했을 때도 참 신선하고 고급스럽다고 느꼈었는데 이 영화는 아예 러닝타임 내내 흑백 무성 영화의 관습을 그대로 재현한다.


때는 1937년. 무성영화의 전성기다. 당대 헐리우드 최고의 인기 배우인 조지, 그리고 그와의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정을 키워가는 한편 차세대 스타로도 발돋움하고 있는 여배우 페피. 그러나 그 때는 무성 영화가 가고 토키 영화가 상승세를 타는 변곡점의 시기였다. 토키 영화를 혐오하던 조지는 자신이 만든 무성 영화가 연이어 흥행에 실패하자 실의에 빠지고 조지를 흠모하는 페피는 그런 그를 도우려 한다…


애잔하고 단순한 스토리 라인은 흑백 영화의 단호함 덕분에 더 크게 탄력을 받는다. 대사가 들리지 않는 주인공들의 마음도 더 애절하게 전달된다. 거기다가 인자하고 따뜻하게 미소를 지을 줄 아는 배우 쟝 뒤자르뎅과 손가락을 입에 넣어 휘파람을 불며 손바닥 키스를 날리는 베레니스 베조의 과장된 연기들은 마침내 들리지 않는 않던 것을 들리게 하고 무채색의 화면 위로 풍부한 색감을 상상하게 한다.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조금 더 위대한 이유는 결핍을 상상력으로 채울 줄 아는 능력 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굳이 영화관까지 찾아가서 흑백 영화를 찾아보는 것도 이러한 ‘결핍의 위대함’을 무의식적으로 체득하고 있기 때문임은 물론일 것이다.

화려한 음악과 춤이 있고, 영화사의 계단 장면 같은 멋진 미장센도 있고, 존 굿맨이나 제임스 크롬웰 같은 든든한 조연들의 명연기도 있다. 그리고 인간보다 더 연기를 잘 하는 개도 한 마리 나온다. 다 보고 밖으로 나오면 잠깐 세상이 행복해지는 영화다. 



 

Posted by 망망디
,